밀 뒤르켐 《자살론》에 따르면 19세기(1854~ 1880) 자살 동기로 압도적인 원인은 ‘정신 질환과 종교적 맹신‘이다. 남녀, 직업적 차이도 없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관습이 그 기원을 상실하고 모호해져 새로운 필요에 상응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빛을 찾게 된다. 이것이 바로 종교가 호소력을 잃자마자 지식의 최고 종합적 형태인 철학이 가장 먼저 등장이유다. ˝ 뒤르켐은 자연조건이 자살에 영향력 있는 조건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왜 여름에 가장 자살률이 높은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낮이 긴 만큼 사회 활동이 더 많기 때문일 거라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제시했을 뿐이다. 여전히 살인율도 여름에 가장 높은데 이 잣대로 보면 일견 타당할 것이다. 

 

요즘은 범죄자와 범죄에 있어 환경 문제에 더 방점을 두고 있다. 학대받았던 불우한 어린 시절, 좋지 못한 주거 환경이나 주변 인물들, 제대로 받지 못한 교육, 사회 냉대와 무관심 등등. 범죄 예방에 있어서도 cctv, 체계적 시스템 등 환경 조성으로 실질적으로 범죄를 줄이는 효과를 보기도 한다. 그러나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라는 용어의 탄생처럼 사람의 본성적 영향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스토예프스키 인간의 파괴력을 인간의 본성에서 더 찾는 듯하다. 
내가 에밀 뒤르켐을 통해 가져온 내용들은  《죄와 벌》에서 라스꼴리니꼬프의 살인에 대한 설명에도 잘 맞아떨어진다. 그는 살인 전에도 후에도 정신 질환자의 모습이다. 그 범죄에 관한 논문에서 ˝범죄의 실행은 언제나 병을 동반한다˝고 밝히기까지 했다. 종교적 맹신을 비웃는 라스꼴리니꼬프는 사회 개혁을 위해 나폴레옹처럼 비범인(非凡人)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고 계몽적 사상 실천으로 사회의 해충 ˝이˝같은 존재인 전당포 노파를 살해했다. 이는 ‘모방‘ 자살과 비슷한 ‘모방‘ 살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 7월의 무더위와 궁핍과 더러운 뻬쩨르부르크의 환경도 그의 살인을 부추겼다. 이성을 강조했지만 그의 살인은 충동과 우연적인 불협들로 가득하며 스스로 그 살인은 악마가 시켜서 한 짓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자유 의지에 회의적이다.

라스꼴리니꼬프 이름의 어근 ‘라스꼴raskol‘은 ˝17세기에 러시아 정교회의 개혁에 반발하여 옛 신앙의 전통을 지키고자 기존 교회에서 분열되어 나온 구교도 혹은 분리파 교도를 일컫는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분열성‘을 중심에 두고 이 이야기를 시작한 셈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어렸을 때부터 몽상가였고 꿈과 미신에 열중하는 인물이다. 그와 전당포 노파의 방이 노란 방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라스꼴리니꼬프의 관 같은 노란 방은 고흐의 분열적인 노란 방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전당포 노파를 해충 이로 생각한 그도 시기심 많고 알게 모르게 타인에게 해를 끼치며 고독한 삶을 사는 범인(凡人)에 지나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이 소설의 문제적 인물들도 대개 그렇다. 가족 부양을 저버리고 장녀 소냐가 매춘부가 되어 생활을 책임지게 만들고 알코올 중독자로 인생을 망치다 끝내 술 때문에 숨지게 된 퇴역 관리 마르멜라도프, 자신의 비참을 시종일관 남의 탓으로 돌리며 자존심을 내세우지만 모두에게 폐만 끼친 그의 아내 까쩨리나, 자신의 재력으로 타인을 누르고 존경을 받으려 한 속물 루쥔, 타인을 이용하며 죽이며 욕망만을 좇는 스비드리가일로프 등.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문제적 인물들 양편에 상반된 인물을 배치한다.
이성적으로 영향을 주는 인물 유형
라주미힌(라스꼴리니꼬프의 친구, 앎을 전파하는 번역 일, 인간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
뽀르피리(예심판사, 라스꼴리니꼬프의 허점을 끊임없이 폭로하며 자수할 것을 설득),
두냐(라스꼴리니꼬프의 여동생, 가난 때문에 타인에게 의지하려고도 했지만 결국엔 주체적인 삶을 사려는 인물, 라스꼴리니꼬프에게 살인의 권리가 없다고 반박, 그녀를 순종적 아내로 만들려고 한 루쥔에겐 망신을, 그녀에게 안락을 줄 수 있는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그가 그토록 두려워 한 자살할 의지 제공) 있다면,
유로비지 인물 유형
니콜라이(살인 사건 당시 주변 현장에 있었던 우연으로 말미암아 라스꼴리니꼬프의 죄를 덮어쓰게 되는데, 종교적 반성으로 자신의 죄로 받아들임)
소냐(타인에게 절대적 이해와 사랑을 줌으로써 깨닫게 하는 성녀와 같은 존재)가 있다.

유로비지는 상식을 벗어난 기묘한 생활태도를 취하거나 미치광이 짓을 하며 완전한 고독을 얻는 동방 정교의 수행 방법 중 하나이다. 시궁창 인생이면서도 삶을 긍정하는 유로비지를 라스꼴리니꼬프는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무신론에 경도되어 있으면서 기이한 행동과 독단적 이성의 맹신에 빠져있는 그의 모습과 반대되면서도 유사하다. 인간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고 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의도가 명확히 느껴진다. 공산주의식 공동체를 말하면서도 여성 해방, 자유주의를 추종하는 레베쟈뜨니꼬프가 이런저런 사상을 혼란스럽게 받아들인 인물로 묘사된 것에서도 그런 의도가 느껴진다. 유형지에 도착하고도 라스꼴리니꼬프는 자기 이성의 허약함만을 탓하며 자신의 죄를 내면적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마침내 그가 깨닫는 상황은 이성적 판단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는 그날 밤 무엇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생각할 수 없었고, 어떤 것에든 생각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당시에 아무것도 의식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다만 느꼈다.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고, 의식 속에서 무언가 전혀 다른 것이 형성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이성의 상징이라고 할 ˝변증법˝을 넘어선 무언가를 느끼고 그는 소냐에게 달라고 했지만 펴보지는 않았던 복음서를 꺼낸다. 그는 종교가 아니라 소냐의 신념에 더 주목한다. 세계를 온통 분열적으로 보고만 자신을 돌아보며 ˝한 사람이 점차로 소생되어 가는 이야기, 그가 새롭게 태어나는 이야기, 그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 가는 이야기, 이제까지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현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를 꿈꾼다. 이렇게 라스꼴리니꼬프가 삶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난다. 나는 이 결말을 종교적 귀의로 해석하지 않는다. 《죄와 벌》은 이후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속에서 라스꼴리니꼬프와 유사한 여러 인물들(미쉬낀 공작, 스따브로긴, 베르실로프, 이반 까라마조프)을 통해 끝없이 탐색하는 존재론, 자의식의 투쟁, 人神 사상의 포문이다. 유감스럽게도 모든 끝이 비극이라는 결말을 알고 우린 출발한다.


 


덧)
《악령》에서 보았던 것들을 《죄와 벌》에서도 발견하며 도스토예프스키의 특징, 편집광 면모를 재검토해보다.
1. 밀도가 떨어지는 부주의 - 사고로 다친 마르멜라도프를 옮기느라 피투성이가 된 라스콜리니꼬프를 보고 경찰 서장 니꼬짐 포미치가 놀라며 지적했는데도 이후 그를 만난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를 대해서 개연성이 너무 떨어졌다.
2. 죽음, 인간의 숙명 등을 말할 때 늘 거미 등장한다. 드니 빌뇌브 영화 《에너미》에 나왔던 거미도 떠올리며 이것은 서양인의 무슨 심리적 원형인가 생각했다.
3. 주인공이 흥미를 가지는 여성은 대개 콤플렉스 가지고 있다. 매춘부, 절름발이, 못생김, 가난한 아이.
4. 《악령》에서와 마찬가지로 롤리타 증후군 서술을 여럿 발견했다. 스비드리가일로프의 행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쯤 되면 당시 풍속 반영으로 봐야 하나. 이후 소설에도 계속 이 소재가 나온다면 작가가 인간 본성의 변태성으로 강조하고 있다고 결론을 지을 생각이다.
5. 꿈, 심령, 초현실성이 빠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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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05-28 1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럽습니다. 전 <죄와 벌> 몇 번 시도했는데 전부 실패했습니다. ㅠㅠ
역시 종교적 의미의 소설은 저와 맞지 않는 것이라는 나름 결론입니다. ㅠ

AgalmA 2017-05-28 19:40   좋아요 1 | URL
종교적인 문제는 고전 소설에서 빠지지 않는 논쟁점이라^^;
철학이나 역사에서도 종교가 빠지지 않고 나오는데 소설에서는 왜 그렇게 적응이 어려우신지 모르겠네요ㅎ;

북다이제스터 2017-05-28 19:55   좋아요 0 | URL
종교 얘기긴 하지만, 아마도 종교 비판이 아닌 찬향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ㅎ

AgalmA 2017-05-28 19:48   좋아요 1 | URL
문제적으로 접근하면서 결국엔 종교성에 동화되어 간다고 볼 수도 있겠죠. 객관적인 사실로 따지고 들면서 신비주의로 빠지는 많은 과학자들의 예처럼.

2017-05-28 2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5-28 22:27   좋아요 1 | URL
최근 자료는 제가 못 찾아서요. 아마 10년 단위로 조사한다면 2006년부터 해서 지금까지 측정한 자료도 나왔을 만도 한데 말이죠^^

2017-05-28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7-05-28 22: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AglamA님께서 말씀하신 통계 자료가 눈에 들어와 몇 자 적어 보게 되었습니다. 자료 중 여름의 비중이 다소 높은 편은 사실입니다. 다만, 평균 수준이 25%임을 감안해 본다면, 계절적 차이가 있는지는 선뜻 말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래프가 ‘살인 범죄‘를 의미하기에 ‘자살+타살‘을 모두 포함한 경우여서, 자살을 설명하는 내용과 약간 차이가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요.. 개인적인 생각이니 혹 언짢게 생각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죄와 벌>을 어렸을 때 청소년용으로 편집된 책을 읽었는데 많이 어려웠습니다. 벌받는 기분으로 읽었던 생각이 나네요. ㅋ

AgalmA 2017-05-29 02:37   좋아요 2 | URL
말씀하실 만한 걸 하시는 터라 전혀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댓글 오픈하셔도 될 거 같은데요?
뒤르켐도 겨울호랑이님과 비슷한 논지였죠. 자살률이 여름에 가장 많긴 하지만 봄도 오차 범위 내에 있거든요.
자살률과 살인율을 동률로 해서 여름 발생에 주목한 건 제 주관적 견해라는 거 저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 나름의 해석을 하는 것일 뿐^^;

저도 죄와 벌 벌 받는 기분으로 읽었어요ㅎ 하권은 속도감 있고 재밌는데 상권은 배경 설명을 너무 많이 해서 많은 독자들을 초반에 나가 떨어지게ㅋ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05-28 22: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좋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AgalmA님. 저는 문학적 소양이 낮기 때문에 좀 더 쉬운 문학부터 접근해야할 것 같네요. <죄와 벌>을 비롯한 도선생 도전에 서평 대회와 더불어 응원 보냅니다. AgalmA의 위대한 도전 or 무한도전? ㅋ

AgalmA 2017-05-28 22:15   좋아요 2 | URL
AgalmA의 무모한 도전요ㅋㅋㅋ
이상 시와 상대성 이론 비교하시믄서 무슨 겸손을^^

cyrus 2017-05-29 0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도 셰익스피어의 희극, 카프카의 소설처럼 무궁무진한 해석이 가능한 텍스트입니다.

요즘 홈즈 주석판을 읽으면서 ‘주석 달린 도스토예프스키‘, ‘주석 달린 카프카‘가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주석판으로 읽어보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

AgalmA 2017-05-29 14:58   좋아요 0 | URL
예.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워낙 유명한 작가라 외국엔 그런 시도가 이미 있었을 거 같은데 국내엔 안 알려진 건가 싶기도 하네요.

2017-05-30 0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5-30 02:25   좋아요 0 | URL
살인이 압도적으로 많이 일어나는 곳이 대개 더운 나라입니다. 더위 자체보다 사회 환경적 영향이 더 크다는 걸 감안해야 겠죠.
(top 10 소말리아, 시리아, 이라크,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아이티, 베네수엘라, 짐바브웨, 콩고, 콜롬비아)
더운 날씨라 작물이 잘 자랄 수도 없고 척박한 환경에 자원도 없다보니 더 그런 것일테고(자원이 있으면 그로 인해 더 각축), 제국주의 시절부터 강대국의 패권 다툼에 휘말려 더 혼란한 상황을 겪는 것이기도 하고요.

저도 오늘 첫 모기에게 물렸습니다. 여름 생각하니 좀 끔찍하긴 하네요ㅎ;

종이달 2021-10-11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일단 음악 하나 걸어놓고 시작하자.

 

 

 

 

Oddarrang ㅡThe Sage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악령》처럼  머릿속을 가득 휘젓는 책을 만났을 땐 떠오르는 질문부터 풀어나가면 쉽다. 나는 평소 완벽한 형식에 얽매이지 말자는 주의다. 보여주기에 매달리는 형식보다 재미라는 내 만족을 추구하며 형식은 내 필요에 의해서 탄생한다.《죄와 벌》,《악령》도 전면적인 개작을 했고 모든 사람을 다 만족시킨 게 아니라는 걸 유념할 것.

 

서재 친구가 재밌는 책 추천을 바라길래 칼비노와 도선생이 실망시키지 않는 실비 보험 같은 책 아니겠느냐고 추천한 김에 마침 도착한 이 책을 읽었다. 원래 도선생의 후기 5대 장편 《죄와 벌》-《백치》-《악령》-《미성년》-《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순서대로 읽을 계획이었지만 나는 늘 (필요의) 즉흥성에 더 끌리지. 이 선택은 느슨하고 엉성하며 논리적 인과성이 결여된 듯한 구성을 취해 다소 광란적인 글쓰기로 지적받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 독자 다운 자세 중 하나 아니겠는가.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를 읽고 나서 나는 연계되면서 질문을 확장시켜 줄 책을 바랐는데 이 책을 읽게 돼 좋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악령》은 유발 하라리의 두 책《사피엔스》와《호모 데우스》의 주요 논점, 신이라는 허구, 자유의지, 인간이 물리적으로 변화될 가능성에 대해서 앞서 많은 걸 말하고 있었다.

 

 

 

"어떤 민족도……." 그는 줄을 따라 마치 책 읽는 것처럼 말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계속해서 스따브로긴을 위협적으로 바라보았다. "어떤 민족도 아직 과학과 이성을 기반으로 해서 건설된 적은 없었다. 그런 예는, 오직 어리석음 때문에 한순간 그렇게 된 것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없었다. 사회주의는 그 본질상 벌써 무신론이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바로 첫 줄부터 사회주의무신론적인 기반을 갖고 있으며 오직 과학과 이성의 뿌리 위에서 건설될 생각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성과 과학은 민족들의 삶에서 언제나, 지금도, 창세기에도 오로지 부차적이고 보조적인 의무만을 수행해 왔다. 민족들은 명령하고 지배하는 어떤 힘에 의하여 대열을 정비해서 움직이지만, 그것의 기원은 알려지지도, 설명되지도 않았다. 이 힘은 끝에까지 이르려는 채울 길 없는 소망의 힘이며, 동시에 그 끝을 부정하는 힘이다. 그건 자신의 존재를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확신시키려는 힘이고 죽음을 부정하려는 힘이다. 성서에서 말하듯, 삶의 정신은〔살아 있는 물의 강〕이며, 묵시록에서는 그것이 마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철학자들은 미학적 근원을 얘기하면서 그것을 도덕적 근원과 동일시한다. 난 그걸 무엇보다도 더 간단하게신의 추구〕라고 부르고자 한다. 민족의 모든 움직임의 유일한 목표는, 어떤 민족이건, 그 존재의 시기가 언제건, 오직 신의 추구, 틀림없는 자기 민족만의 신의 추구이며, 그리고 그 신을 진실한 유일한 것으로 믿는 것이다. 신은 민족의 시작부터 끝까지 취해진 민족 전체의 종합적인 인격이다. 아직까지 모든 민족, 혹은 많은 민족에게 있어서 하나의 공통 신이 있었던 적은 없었고, 언제나 제각각의 민족마다 개별적인 신이 있어 왔다. 여러 신들이 단일한 공통의 신으로 통합되면 그건 민족성이 파괴된다는 징후이다. 여러 신들이 단일한 공통의 신으로 통합되면 신들과 그들에 대한 믿음은 바로 그 민족과 함께 죽어 간다. 민족이 강할수록 그 민족의 신은 더 특별해진다. 종교를 가지지 못한 민족, 즉 선악의 개념이 없는 민족은 결코 없었다. 모든 민족은 선악에 대한 자신들만의 개념을 갖고 있고, 또 자신들만의 선악을 갖고 있다. 많은 민족들이 선악에 대한 공통의 개념을 갖기 시작하면, 민족들은 죽어 가고 그때는 선과 악 사이의 차이조차도 지워지고 사라지게 된다. 이성은 결코 선악을 정의할 힘이 없고, 근사치로도 그 둘을 구별할 힘조차 없다. 오히려, 언제나 치욕적이고 애처롭게 혼동을 해왔고, 과학은 주먹구구식의 해결책만을 내놓았다. 이것은 특히, 페스트나 기아, 전쟁보다도 더 고약하고 금세기 이전까지는 알려지지도 않는 가장 섬뜩한 채찍인 반(半)과학의 특징이 되어 왔다. 반과학ㅡ 이것은 지금까지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폭군인 것이다. 자신의 사제들과 노예들을 가진 폭군, 그 폭군 앞에 한결같이 지금까지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사랑과 미신으로 경배하고, 심지어 과학조차도 그 앞에서 전율하고 수치스럽게 그를 묵인한다. 이 모든 것이 당신 자신의 말입니다. 스따브로긴, 오직 반과학에 관한 말만 제외하고. 이건 내 말이죠. 나 자신이 반과학이고, 그런 까닭에 내가 그걸 유난히 증오하니까요. 당신의 사상, 당신의 말에서 아무것도, 심지어 단어 하나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글쎄요, 바꾸지 않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요." 스따브로긴이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당신은 열정적으로 받아들였고, 눈치도 못 채면서 열정적으로 바꾸었습니다. 당신이 신이라는 것을 민족성의 가장 단순한 속성으로 끌어내리고 있다는 하나만으로도 벌써……."

그는 갑자기 유난히 강한 주의를 기울여서 샤또프를 예의 주시했는데, 그의 말을 예의 주시한다기보다는 샤또프라는 인간을 예의 주시했다.

"신을 민족성의 속성으로 낮춘다고요?" 샤또프가 소리쳤다.

"오히려, 민족을 신으로까지 끌어올리는 겁니다. 언제건 그렇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요? 민족, 이것은 신의 육신입니다. 모든 민족은 자신의 특수한 신을 갖고 있으면서 어떤 화해도 하지 않고 세계의 다른 모든 신들을 배제하는 동안만, 오직 그때까지만 민족입니다. 즉, 자신의 신으로 승리하고 나머지 모든 신들을 세계에서 쫓아낼 거라고 믿는 그 순간에만. 창세기부터 모든 사람들은 적어도 조금이나마 두드러졌으며, 인류의 선두에 서 있었던 위대한 민족들은 모두 그렇게 믿어 왔습니다. 이 사실에 반박할 수 없죠. 유대인들은 오직 진정한 신을 기다리기 위해서 살아왔고 세계에 진정한 신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자연을 신격화했으며 세계에 자신의 종교를, 다시 말해서 철학과 예술을 남겨 주었습니다. 프랑스는 그 기나긴 역사가 지속되는 동안 내내 로마 신의 관념의 현현이었고 발전에 불과했지만, 그 프랑스가 드디어 자신의 그 로마 신을 심연 속으로 던져 버리고서, 당분간 그들 사이에서 사회주의라고 불리는 무신론으로 몰두하게 되었고, 그건 어쨌거나 오직 무신론이 로마 가톨릭보다는 더 건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위대한 민족이 자기 민족 속에만(그것도 다름아니라 배타적으로, 오직 자기 민족 하나 속에만) 진리가 있다는 걸 믿지 않는다면, 그 민족만이 자신의 진실로써 모든 사람들을 부활시키고 구원할 능력이 있으며 그런 소명을 부여받았다는 걸 믿지 않는다면, 그 민족은 그 즉시 위대한 민족이 되기를 멈추고, 그 즉시 위대한 민족이 아니라 인종 지리학적인 물질로 변해 버립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민족은 결코 인류에서 2차적인 역할을 하는 걸로 타협할 수 없고, 심지어 1차적이 역할만으로도 만족할 수 없으며, 반드시 배타적으로 첫 번째 역할을 수행하는 것만으로 타협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을 잃어버린 민족은 이미 더 이상 민족이 아닙니다. 하지만 진실은 하나고, 따라서 나머지 민족들은 자신만의 특수하고 위대한 신들을 갖겠지만, 민족들 중에서 유일한 민족만이 진실한 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신의 잉태자〕인 유일한 민족, 바로 이 민족이 러시아 민족이고, 그리고…그리고……  그리고 정말, 정말, 당신은 나를 그따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스따브로긴."


범슬라브주의자 샤또프와 무신론자 스따브로긴의 대화

 

 

 

"어쩌겠어요. 모든 사람은 좀 더 좋은 곳을 추구하게 마련인걸요. 물고기는 ……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은 일종의 안락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전부 다 그래요. 굉장히 오래전부터 알려진 일이죠."

"네 놈이 안락이라고 말한 거냐?"

"뭐, 말을 가지고서 논쟁을 해야 하다니."

"아냐, 너 말 한번 잘했다. 안락이라고 해두지. 신은 필수 불가결한 거야. 필수 불가결하기 때문에 존재해야만 하지."

"그래, 멋지군요."

"그러나 난 신이라는 것이 있지도 않으며, 있을 수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

"그쪽이 더 그럴듯하군요."

"정말로 네놈은, 이런 두 사상을 가진 인간이라면 계속 살아갈 수 없다는 걸 모르겠어?"

"자살해야 된다, 이건가요?"

"정말로 네놈은 오직 이것 때문에 자살할 수 있다는 건 모른단 말이야? 수십억이나 되는 네놈 같은 인간들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살기를 원하지도 않고 그걸 참을 수도 없는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네놈은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중략)

 

"난 모든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남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늘 놀라웠어." 끼릴로프에게 그의 지적 따윈 들리지도 않았다.

"음, 뭐 당신 말이 맞을 수도 있겠네요. 관념상으로는 그렇지만…… ."

"이 원숭이야, 네 놈은 나를 복종시키려고 맞장구를 치고 있지. 입 닥쳐. 네놈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신이 없다면, 내가 신이야."

"내가 당신한테서 절대 이해할 수 없었던 게 바로 그 사항이라니까요. 왜 당신이 신이 되는 겁니까?"

"신이 있다면, 모든 것이 그의 의지이고 난 그의 의지에서 벗어날 수 없어. 없다면, 모든 것이 나의 의지이고 난 자의지(自意志)를 천명해야 할 의무가 있어."

"자의지라고요? 그리고 왜 그럴 의무가 있는 거죠?"

"왜냐하면 모든 것이 나의 의지가 되었으니까. 정말이지, 이 지구상에서 신을 끝장내고 자의지에 대한 확신을 갖고서, 가장 완전한 지점에서 자의지를 천명할 용기 있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일까? 이런 가난한 사람이 유산을 받고 깜짝 놀란 나머지, 자기 자신은 이런 걸 소유하기엔 너무 박약하다고 생각하여 감히 자루 곁에 다가가지도 못하는 것과 같아. 난 자의지를 천명하고 싶어. 혼자라도 좋아. 그러나 해낼 거야."


무정부주의자 뾰뜨르와 무신론자 끼릴로프의 대화


 

 

"당신은 아마도 당신 자신을 보고서 판단하시는 거지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빨갛게 달아오르면서 말했다. "사느냐 죽느냐는 것이 아무래도 좋게 되었을 때, 그때야 완전한 자유가 있게 될 겁니다. 바로 그것이 모든 것의 목표지요."

"목표라고요?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아무도 사는 걸 원치 않을 게 아닙니까?"

"그렇죠, 아무도."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인간은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그래요." 내가 말했다. "자연은 그렇게 명령했으니까요."

"그건 비열합니다. 바로 거기에 모든 기만이 있는 겁니다!" 그의 눈이 번득였다. "삶은 고통이고 삶은 공포며 인간은 불행합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고통이고 공포입니다. 지금 인간은 고통과 공포를 사랑하기 때문에 삶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왔지요. 지금 삶은 고통과 공포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며, 바로 여기에 모든 기만이 있는 겁니다. 지금 인간은 아직 그 인간이 아닙니다. 행복하고 오만한 새로운 인간이 나타날 겁니다. 고통과 공포를 극복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신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신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거죠."

"그렇다면, 당신의 생각에 따르면 그 신은 존재하는 겁니까?"

"그 신은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합니다. 돌 자체에는 고통이 없지만 돌에서 비롯된 공포 속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신은 죽음의 공포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고통과 공포를 극복하는 사람, 그 사람이 직접 신이 될 겁니다. 그때는 새로운 삶이, 그때는 새로운 삶이, 그때는 새로운 인간이, 모든 것이 새롭게…… 그때는 역사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게 될 겁니다. 고릴라에서 신의 파괴 이전까지, 신의 파괴에서부터…… ."

"고릴라 이전까지인가요?"

"……지구와 인간의 물리적인 변화 이전까지. 인간은 신이 되면서 물리적으로 변화될 겁니다. 그리고 세계도 변화되고 사건들도 변화되며, 사상과 모든 감정들도 변화될 겁니다. 그때는 인간도 물리적으로 변화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느냐 죽느냐가 아무래도 좋다면 모두들 자살을 할 테고, 바로 그런 것이 어쩌면 변화일 수 있겠죠."

"그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기만을 죽이는 겁니다. 지고의 자유를 원하는 사람은 모두 감히 자살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감히 자살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기만의 비밀을 알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은 자유가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모든 것이 있고, 더 이상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감히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 바로 그가 신입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은 신이 존재하지 않도록,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무도, 단 한 번도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수백만의 자살자들이 있었는데도요."

"하지만 한결같이 그것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한결같이 공포를 안고서 행한 것이지, 그것을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공포를 죽이기 위해서서가 아니었다는 얘기지요. 오직 공포를 죽이기 위해서 자살하는 사람만이 즉각 신이 되는 겁니다."

"잘 안 될 겁니다, 아마도." 내가 말했다.   

 

합리주의자 안톤과 人神 사상의 허무주의자 끼릴로프의 대화

 

 비가 오려 하는군. 음악 하나를 더 걸자.  

 

Thrupence - Conversations (feat. Edward Vanzet)

 

 

등장인물 이름과 조사를 제외하면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헛소리"다. 그에 버금가게 많이 나오는 단어는 "광기", "기만" 등이 있다. 서로에게 헛소리라고 악을 쓰는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대부분 광기와 허위와 기만에 빠져 있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허구라는 헛소리 성격이 있고,《악령》이 1인칭 관찰자 시점과 전지적 시점을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진행하는 형식이며, 위 대화 인용을 봐도 알겠지만 인물들이 도선생의 관념적 캐릭터라는 점에서도 이건 정말이지 헛소리 카니발이다. 지금 내 헛소리는 좋은 뜻에서 썼다-ㅅ-; 

 

러시아 사상가 S. N. 불가꼬프가 작품 평론 속에서 밝힌 통찰처럼 《악령》은 출간 사반세기 후 일어난 러시아 혁명을 예견한 듯한 정치적 혁명의 혼란과 내용이 아니라 정신적인 본질을 다룬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처음 도선생은 '위대한 죄인의 생애'라는 작품 구상 중에 ㅡ 급진적 모임 속에서 사상 전환을 이유로 탈퇴하려던 회원을 네차예프가 살해한ㅡ〔네차예프 사건〕을 접하고 그것을 플롯으로 한 무정부주의자들의 희극적인 한판 소동으로 집필할 계획이었다. 이 줄기는 샤또프 - 뾰뜨르 휘하 5인조 이야기로 전개된다. 그러나 뾰뜨르가 아닌 '위대한 죄인'으로 스따브로긴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소설 구조가 바뀌게 되면서 정치극에서 심리적이고 형이상학적 비극으로 변모했고 19세기 리얼리즘 정통 소설과 다른 특이한 소설이 탄생하게 됐다.

귀엽지만 삶에 무한히 게을러서 학자라고 부르기도 뭐한 스쩨빤 뜨로피모비치의 다음 말은 당시 사회의 정신성을 보여준다. "도대체 이건 뭣 때문인 거요, 내 한마디 하리다. 이 모든 절망적인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동시에, 그토록 대단한 구두쇠이며 치부에 눈이 어두운 자본주의자인 건 도대체 뭣 때문인가요? 그가 철저한 사회주의자일수록,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철저한 자본가가 되는데 도대체 뭣 때문에 그런 걸까요? 이것도 또한 예민한 감수성 때문이 아닐까요?" 스쩨빤은 스따브로긴의 유년 시절 가정 교사로 그에게 우수(toska, 비애와 슬픔과 고뇌를 포함한 복잡한 감각)의 정신성을 안겨준 인물이다.

 

이 소설의 모든 인물, 모든 사건들은 스따브로긴과 (위치적으로나 오염 정도로나) 방사선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대부분 스따브로긴의 외모와 재력, 귀족적 분위기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 악행에서도 오스카 와일드의 미남 악마 도리언 그레이보다 한수 위다. 이를 간파한 뾰뜨르가 스따브로긴을 조직에 이용하고 싶어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다. 내가 《악령》에서 본 가장 대비되는 기둥은 악-욕망에 대한 열광(스따브로긴, 뾰뜨르)과 신-관념에 대한 열광(끼릴로프, 샤또프)이다.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강동원이 악령이 든 돼지를 들고 한강으로 달려가던 장면으로 재현되기도 한 '루가의 복음서'는 이 소설에서 중요한 상징이다. 특히 허무주의와 무신론이라는 관념-악령에 먹혀버린 돼지로 묘사된 스따브로긴과 끼릴로프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롭고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로 눈길을 끈다. 끼릴로프는 신을 부정한다기보다 '부재' 자로 판단해 신의 자리에 인간을 둬 결과적으로 신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힌 채 광인으로 종말을 맞는다. 끼릴로프가 순수한 허무로써 극복하려 했다면 스따브로긴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음에도 악행의 허무 속에서 파멸한다.

 

광신을 대표하는 샤또프와 무신을 대표하는 끼릴로프가 관념과 애증이 뒤섞인 불가분의 관계로 옴짝달싹 못하고 현실에 못 박힌 존재라면(이들은 함께 아메리카 모험을 했고 뾰뜨르의 조직에 가담해 음모에 빠졌으며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면서도 한집에 살며 같은 날 죽음을 맞는다), 사회를 파괴하는 악인 뾰뜨르와 타인을 파괴하는 악인 스따브로긴도 상반되는 성격임에도 현실을 돌아다니며 들쑤시는 존재라는 점에서 쌍을 이룬다. 모두 도선생의 특징들을 가진 분열적인 캐릭터들이다. 이 이야기에서 아무런 해도 벌도 받지 않고 살아남는 건 뾰뜨르가 유일하다. 뾰뜨르가 사회악, 스따브로긴이 개인악을 상징한다고 볼 때 뾰뜨르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고 않을 것이란 상징성으로 짐작된다.

 

여기서 잠깐, 라디미르 나보코프《악령》을 반복해서 읽어도 재밌다고 말했다.

일전에 나는 도선생과 나보코프의 관련성을 분석한 바 있다.(http://blog.aladin.co.kr/durepos/8815151)

 

 

 

 

 

《악령》을 읽으며 10살 소녀 마뜨료샤와 스따브로긴의 일화에서 나보코프가 《롤리타》의 모티프를 얻었을 거란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그리고 도선생 작품 속 악행 연대기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으리라. 도선생 《악령》에서 뚜르게녜프, 셰익스피어 등의 영향을 느낄 수 있듯이. 스따브로긴의 여성 버전이라 할 수 있는 리자가 스따브로긴에게 희롱당하고 군중 폭력 속에 진흙탕에 처박혀 죽음에 이르게 되는 광경에서 오필리아가 햄릿에게 버림받고 연못 속에 빠져 죽는 장면이 스쳐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읽어보면 알겠지만《악령》은 셰익스피어 비극과도 견줄 만하다. 강렬하고 다양한 캐릭터들과 비극적인 스토리 때문에 읽는 내내 연극을 보는 기분이다. 

 

 상트 페떼르부르크 말리 극장 로비, 《악령》연극을 형상화한 작품

[출처: http://press.sac.or.kr/_press/000-2004/2004%20gull/200306%20mally%20theatre.htm]

 

 

 

 

 

 

 도선생은 뚜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을 염두에 두고 《악령》을 구상했다고 한다. 이상주의자인 스쩨빤과 무정부주의자 뾰뜨르는 부자지간인데 어수룩한 광대와 교활한 마귀로 대조적이다. 아들을 버렸던 구세대 스쩨빤의 시련은 당연할 수밖에 없고 아버지와 결별한 세대인 뾰뜨르의 거침없음도 일견 이해된다.

그러나 뾰뜨르와 스따브로긴의 문제점은 타인과의 불화라든지 어떤 갈등에 있지 않고 보다 본질적인 데 있다. 그들을 통해 자유의지와 마찬가지로 강조되는 인간의 큰 특징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들에겐 반성적 사고’가 없다. 뾰뜨르는 아예 없고, 스따브로긴은 그것을 계속 기만하고 부정한다. 뾰뜨르와 함께 사회 위협과 샤또프 살해에 참여한 5인조(럄신, 비르긴스끼, 리뿌찐, 똘까첸코, 쉬갈료프)가 체포되고 각각 반성적 사고를 거치는 인간적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 이해 불가능한 인간의 상태를 도선생은 최종적인 "악령"으로 본 게 아닌가 싶다.

 

 

 

 

The Acid - Red (Official Audio)

 

 

 

 

 

 

좀 더 쓸까.... 뭔가 떠오르면 또.

 

 

 

 


덧)

열린책 도선생 전집 중 《악령》 번역은 김연경 씨가 했는데, 번역과 특히 해설이 좋았다. 《죄와 벌》,《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김연경 씨 번역은 민음사에서 나왔기 때문에 민음사 판으로도 꼭 읽어야 될 것으로 사료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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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7-05-23 1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이상태로도 충분히 좋고,
게속 수정을 하셔도 좋을 것을 장담하면서어~‘좋아요‘ 빵~!

AgalmA 2017-05-24 01:51   좋아요 0 | URL
나혼자 골머리 분석 아닌가 몰라요ㅎㅎ 응원 감사요^--^

페크pek0501 2017-05-23 2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아요를 이미 빵 했어요.

저도 덧붙이면서 계속 쓰는 페이퍼를 구상한 바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길어지는 페이퍼를요.ㅋ
이 방법, 신선해 좋습니다.

오래전, 두꺼운 책으로 ‘죄와 벌‘을 읽고 도선생이 천재라고 생각했죠.
‘지하생활자의 수기‘(이건 그리 두껍지 않음)를 읽고 역시 경이로운 작가라는 데 한 표 던졌죠. 몇 번이고 반복해 읽었던
몇 군데가 지금도 생각납니다.

이젠 세 권짜리 작품은 읽을 엄두를 못 냅니다.

AgalmA 2017-05-24 11:34   좋아요 1 | URL
해설 보니 도선생 소설에 있어서《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중요한 분수령이더군요. 이 저작 이후에 씌어진 모든 장편소설은 否定과 부정적 인물들을 그려내는데 집중하게 되었다고요. 일명 ‘지하인‘들이라고 할. 《악령》은 후기 소설 중에서 그 부정성의 밀도는 좀 떨어지지만 스따브로긴은 부정의 극단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라고. 이 인물 정말 매력적.

도선생 후기 장편소설은 다 2권 이상이라 부담스럽긴 하죠ㅎ; 열린책은 자간도 촘촘해서 더 압박되는 느낌입니다;;;
《악령》 읽었으니 3권짜리는 이제《카라마조프 형제들》만 남았네요. 저번에 1권만 읽고 끝나서ㅎ;; 저도 이번에 재도전이요.ㅎㅎ

북다이제스터 2017-05-23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극과극은 통한다고 하던데요.
유발 하라리와 토스토옙스키는 상극 아닌가요?^^

AgalmA 2017-05-24 02:27   좋아요 1 | URL
아까 뉴스보니 E.H. 카 《역사란 무엇인가》˝우연이라고 취급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말을 인용하더군요.
˝필연은 우연의 옷을 입고 온다˝고도. 상극이라 생각하는 건 우리 각자 판단 범주이고, 그 연결들-필연을 보는 것은 역사가나 소설가나 일반 대중이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레삭매냐 2017-05-24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끼 선생 책들은 예전 열린책들 도끼 전집
으로 하나둘씩 컬렉션하고 있지만 정작
읽은 건 <죄와 벌> 하나 뿐인 것 같아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읽다 말고...

AgalmA 2017-05-24 12:02   좋아요 0 | URL
레삭매냐님은 도끼선생으로 부르시는군요^^
도선생 책은 처음에서 한 100 페이지까지 진입장벽이 힘들어서 그렇지 어느 정도 읽다 보면 폭 빠져 읽게 되는 거 같아요^^ 인물도 많은데 생소한데다 길고 헷갈리는 이름ㅡ 따로 부르는 애칭, 약칭도 넘 많고; ㅡ때문에 매번 괴롭습니다ㅎㅎ;;


저도 2권 이상 넘어가는 장편은 피해서 읽다가 이래선 안 되겠다 싶더군요; 배울 게 많은 작가라 힘들어도 5대 장편은 반드시 다 읽으려고요^^

겨울호랑이 2017-05-26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서양문화에 있어 ‘신 god ‘문제는 빼놓을 수가 없군요. 수학과 철학에서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심지어는 문학의 주요 소재가... 신의 존재가 모든 서양문화의 주제가 될 정도로 중요한지는 모르겠네요...

AgalmA 2017-05-27 02:29   좋아요 2 | URL
니체는 도선생을 자신이 무언가 배울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의 심리학자라고 했죠. 도선생이 작품에서 꾸준히 논의하는 무신론, 인신사상, 허무주의는 니체에게 대단히 고무적이었을 겁니다.
프로이트에게도 도선생은 인간의 심리에 대해 많은 자료가 되었죠. 문학은 인간 정신의 보고니까요.
그리스 신화부터 해서 가톨릭, 기독교 등 서양 문화는 신을 중심으로 움직여왔죠. 바흐부터 해서 서양 대부분의 음악, 건축, 예술도 종교가 주요 소재죠.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들의 종교가 어떻게 세상을 움직여 왔는지 겨울호랑이님도 느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종교 전쟁 뿐 아니라 선교를 목적으로 타국에 들어가는 흐름을 봐도. 초창기 미국 이민자들도 종교 때문에 그리 넘어간 거 아닙니까.
시오니즘, 슬라브주의, 이슬람... 그들의 선민사상은 신없음 애초에 말이 안 되죠.
서양의 언어 발달도 종교 영향이 매우 컸죠. 인쇄술의 발달로 가장 널리 퍼져 나간 출판물은 성서입니다. 현재까지 가장 많이 팔린 책도 성서입니다.
종교는 모든 생산-소비에 대단한 주재료였죠.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신-종교적인 걸 다루죠. 영웅담쯤으로 알고 있는「돈키호테」조차 결말은 돈키호테가 그간의 모험을 인간의 어리석음이었다고 고해성사하고 신에게 귀의하는 걸로 끝나요. 이 결말이 제게 얼마나 큰 충격을 줬는지...
근대 이후 자아, 인권이 크게 대두되면서 신과 인간의 대결로 확대되긴 했지만,
이성의 산물처럼 여겨지는 진화론, 과학조차 여전히 가장 큰 적은 신, 종교적 믿음 아니던가요? 아인슈타인조차 신을 믿었잖아요.
알면 알수록 인간은 나약합니다. 자신을 지탱해 줄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찾죠. 신 없는 허무를 우리는 너무도 극복하기 어려워 합니다. 돈으로는 현실적 만족밖에 얻지 못하니까요. 오죽하면 위안을 얻기 위해 면죄부를 살 생각까지 했겠어요. 종교의 세속화라는 걸 알면서도 십일조로 여전히 남아있죠.
이 모든 우울한 상황은 우리 관념이 원흉이죠. 수학과 철학, 예술이 거기서 나왔다고 해도.
이렇게 말하는 저야말로 참으로 허무주의자인지도요.

겨울호랑이 2017-05-26 10:49   좋아요 1 | URL
^^: AgalmA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에 동의합니다. 한편으로, 세계에 있는 여러 문명 중에서 인도-유럽문명에서 나타나는 신중심(神中心) 문화는 여러 가지를 생각나게 합니다. 하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는가와 하늘의 존재를 의심하는가의 차이로 나타나는 ‘신 존재‘ 문제는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한 문제라는 생각이 드네요.^^:

북다이제스터 2017-05-26 20:52   좋아요 0 | URL
AgalmA 님, 십일조가 면죄부라니 좀 쎈 표현 아니세요?^^
 
날짜 없음 오늘의 젊은 작가 14
장은진 지음 / 민음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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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핍진성이란 문학 용어를 싫어한다. 독자들이 설득될 만한 개연성을 못 만들어냈다고 한국에서는 비난할 때 주로 쓰기 때문이다이 문제에서 가장 골치 아픈 요소는 독자. 어떤 독자는 설득되고 어떤 독자는 설득되지 않는다. 뛰어난 거장의 작품도 어떤 독자에겐 두껍고 길기만 한 시시한 이야기로 남는다. 어떤 작품은 이해하기 어려운데도 걸작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실제로 우리는 핍진성을 잣대로 오뒷세이아일리아스, 돈키호테를 평가해 걸작이라 말하는 게 아니다. 이 경우는 공감을 넘어 작가가 구축하는 세계가 독자의 상상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은진의 장편소설 날짜 없음에서 공감되는 상념, 아름다운 문장들은 많았지만 내 상상을 깨주는 것은 얻을 수 없었다.

그로테스크한 디스토피아 세계를 담으려 한 시도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지만 인물들이 그 속에 제대로 어우러져 있지 않았다. ‘그게온다는 흉흉한 세상에서 종말이라는 메타포가 무색하게 그들은 그저 일반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 이상을 상상할 수 없는 작가의 한계가 가장 크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회색인이나 폭도들은 엑스트라로 왔다 갔다 할 뿐 연인이 살고 있는 컨테이너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 작가가 독자에게 느끼게 하려는 위협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그런 식으로 이 연인의 공간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작가는 종말의 순간에 있는 연인이란 설정을 사랑해 보호만 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심하게 다툰 날은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서운한 문장들을 주고받게 되는지, 연애가 좀 더 깊어질 때는 어떤 놀라운 문장들이 상대방의 몸을 타고 탄생하는지, 갑작스럽게 권태가 찾아오는 순간에는 무슨 문장들로 그 지겨운 시간들을 버텨야 하는지 모르는 순진한 연인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세계의 무시무시하고 힘겨운 얼개들과 씨름하며 풀어 보려는 의지는 읽히지 않는다.작가의 말에서 고통과 절망 속에 홀로 백지 위에 서 있다고 말하는 일종의 작가의 폐허 의식이 그대로 반영되기만 했다. 그러나 폐허를 뚫고 나오는 소설들은 얼마나 많았는가.

주인공 해인이 마지막 의식으로 남자의 단추를 달아주고 그걸 홍 할머니나 옛 여자 친구가 칭찬하듯 바라봐 주는 설정은 습작생들이나 하는 전형적인 클리셰다. 그 단추는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을 때 가장 빛날 수 있다. 독자가 이걸 알아봐야 한다고 강조하는 작가의 노력이 이 소설에는 너무 드러난다. 진수와 반(半)의 죽음도 코스 음식처럼 차례차례 등장한다. 진부하게 말하는 죽음, 진부하게 닥쳐오는 종말. 종말을 잘 모르기 때문에 분위기로만 덮으려는 수많은 묘사들.

 

종말보다 소설 때문에 나는 괴로웠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핍진성을 따지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렇게 결론지을 수밖에 없겠다. 지극히 공감하는 독자는 설득될 만한 소설이고, 이 세계에 빠져들지 못하는 독자는 스쳐 지나가게 되는 글로 이뤄진 세계’일 뿐이라고.핍진성 문제가 아니다. ‘세계와 정면 승부하려는 노력은 없는 관찰적이고 자기 충족적인 한국문학의 오래된 문제이다. 물론 세계와 부딪히길 원하지 않는 것도 작가의 자유다. 일개 독자인 내가 이랬어야 했다 저랬어야 했다 어쭙잖은 훈수를 두고 있다는 것도 안다. 미안하면서도 작가가 백지를 이기려면 이걸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자낙스를 씹어 삼키는 심정으로 이 아픈 리뷰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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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5-12 19: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핍진성이라는게 설득력 또는 개연성의 정도 쯤으로 이해하는데요. 뭔가 피박받는 느낌이 드는 어감나서 별로 선호하지 않더라구요....그러고 보니 핍진성으로 따지만 판타지 문학은 형편없게 되나 봅니다....

AgalmA 2017-05-12 19:34   좋아요 1 | URL
말씀하신 게 맞습니다.
판타지 문학은 작품 내부의 구조가 설득력있게 돌아가면 현실보다 더 강력하죠.
불특정 독자를 얼마나 납득시키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부 구조가 얼마나 탄탄하게 지어졌는가 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문학동네 시인선 86
김상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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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기대치를 가지고 책을 펼친다. 시집을 고를 때 내 기준은 이렇다. “한 번 떠오른 뒤엔 돌이킬 수 없는 생각”(구애)을 시인이 잡아내 “소리치며 멀어지는 슬픔과 기쁨에 무능한 너 그를 죽도록 기다리는 능력”(그렇다고 치자」)으로 내 눈길을 사로잡길 바란다. 그들이 기네스북 기록 경신을 하는 기인도 아닌데 너무 높은 기대치일까. 귓불을 긁는 정도로 하향할 의향 없다. 책이란 형식 특히 시집은 글쓴이의 일방적 연설이다. 내가 놀라거나 감동하거나 욕하거나 시집을 던져버리거나 하는 그 모든 건 시인에게 달려 있다. 내 의사 표현은 시집에 대한 평가로 한정된다. 더 노력한다면 맘에 드는 시를 외워 낭송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누구를 위해, 어디에서…… 오늘은 노력해서 다만 리뷰를 쓰기로 한다.

작품이 작가에게 귀속되지 않고 다양한 담론을 양산한다는 상호텍스트성은 시에 적용되기 어렵다. 시집의 큰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시인의 목소리가 시를 압도하며 탄생해야 이 세계에 겨우 존재할 자리를 얻기 때문이다. 하나 마나 한 대화나 한탄과 수다 같은 시를 집중해 읽을 사람은 없다. 시와 시인은 우리의 기대를 통과해야 한다. 상호텍스트성을 체감하며 소설을 읽는 독자 또한 얼마나 되겠나. 비평가가 여러분 이 메커니즘은 사실 이렇습니다!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지.

 

교묘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다/시체에는 없는 그것”(영혼)이라 말하는 김상혁 시인의 은밀한 포부가 맘에 든다. 이 시집을 해설한 조강석 평론가는 그의 자세를 이렇게 평가한다. 감정의 자발적 유출(정조情調)을 독자에게 인계하는 대신 정황과 사건을 창조하고 판단하는 것을 인계하고 있다고. 이 시집 제목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라는 상징적 의미처럼 그것은 어떤 세계로의 초대이다. 즉 이야기이다.

 

전통적으로 서정시의 세계가 서정적 자아나 시적 화자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정서의 질료로 온전히 환원될 수 있다고 여겨져왔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듣는 눈과 말하는 귀에는 환원의 기능이 없다. 그리고 환원이 없으면 축소나 과장이 없다. 듣고 말하는 것 자체가 규모와 전말이 일정한 스스로의 목적에 부합하는 행위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이 시집에서 이런 사정을 가장 잘 형용하는 것은 아마도 이야기라는 말일 것이다. …… 세계가 감정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 속에서 독립한다. 모든 사물과 사건과 사태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제 그것은 정서적으로 매개될 필요가 없다.” 조강석

 

 

정서를 이야기 형태로 환전한 김상혁의 시들은 교묘하게 건조하다. 그래서 지겹다말하고 있어도 그 지겨움의 감정은 독자에게 덕지덕지 스며들지 않는다. 이야기의 다른 곡조인 휘파람처럼 도착한 지겨움이라 오히려 귀 기울이게 된다. “지겨움을 지긋지긋하게 겪고 있는 시인과 독자인 나는 모종의 공모 상태에 빠진다.

 

 

나의 여름 속을 걷는 사람에게

 

 

여름으로 오는 길에 너는 죽은 새, 봄의 검은 웅덩이, 깨진 울타리의 조각들, 다음해 봄까지 잠들어 있으려는 자의 조용한 손을 밟으며 왔다. 그렇지만 지겹다! 새든, 봄이든, 울타리 속 꿈이든 다…… 그런 너의 마음은 나만 안다

 

여름에서 도망치는 길에 너는 죽은 새를 더욱 뭉갠 일, 깨진 웅덩이와 울타리를 다시 깨뜨린 일, 꿈속의 비명을 꿈 바깥으로 꺼낸 일을 괴로워한다.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 유령이 있다면 너는 삶과 유령 사이에 있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에 넌 웃음이 많다……

 

너무 사랑이 많다. 그렇지만 지겹다! 여름이 풀을 키우고, 풀이 끝없이 퍼지다가 너의 생각을 뒤덮고, 그러다 불붙은 생각이 기쁨이 되었다가 결국 우리의 꿈을 걷잡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우리 그릇에 똑같이 밥을 채우는 것이 다……그런 너의 마음은 나만 안다.

 

그렇지만 네가 밟은 것, 밟아서 더 깨뜨린 것, 더 깨뜨려 흩어진 것, 그런 지겨운 것이 죽은 새, 웅덩이, 부서진 울타리, 뒹구는 손을 덮어준다. 풀과 꿈을 키워준다. 다가올 여름과 지나간 여름 사이 슬픔이 있다면 너는 오늘과 슬픔 사이에 있고 싶다.

하지만 넌 너무 기쁨이 많다. 그런 너의 마음은 나만 안다. 

 

    

 

 

그런 너의 마음은 나만 안다.”는 저 문장처럼 나는 시인의 마음을 내가 공감하게 만들지 말고 내 마음을 시인이 점성술사처럼 읽어내라는 요청의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이기적인가. 문학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대개 이렇지 않나. 교묘하게 객관적인 거리를 둔 김상혁의 이야기 방식은 그래서 퍽 성공적이다. 시인과 내가 풍경을 같이 보고 있는 기분이다. “슬픔도 구질구질하게 값싼 공감을 요구하지도 않고 남루하지 않게 거기 있다.

 

    

 십일월

 

 

자네의 그림에는 풍경과 생각이 섞여 있어 언덕을 그리고 나면 떠오르는 소리를 거기에 색으로 입히지 어제의 붉은 언덕을 오르던 사람이 오늘의 검은 언덕을 내려가는 식이라네 왜 석양을 바라보는 일은 눈을 감는 일보다는 항상 덜 슬픈가

 

십일월에 내리는 눈에는 비가 섞여 있어 잠을 자고 나면 꿈의 차디찬 들판을 달리던 가슴에 식은땀이 흐른다네 오늘 우산도 없이 현관문을 두드리던 사람이 내일도 꼼짝없이 눈속에 서서 벌벌 떨어야 하는 식이지 누구나 화가 앞에서 발가벗을 용기를 가진 건 아니라네

 

시도 때도 없이 달아오르는 얼굴을 도저히 그림에 담을 수 없어 자네가 그린 초상은 끝내 엉망으로 칠해지곤 하지 하지만 무슨 차이가 있겠나 눈뜨지 않으면 사람의 고백이란 한낱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눈발 같은 것을

 

나는 자네 그림이 감춘 것에 대해서라면 정말 모르는 게 없었지 붉은 내 얼굴 뒤에서 비가 온다거나 검은 풀밭 속에 눈이 휘몰아치는 식이었다네 왜 세계의 윤곽을 그리는 일은 색으로 세계를 뭉개는 일보다는 항상 덜 슬픈가

 

요즘 다른 화가 앞에서 옷을 벗으며 나는 십일월만을 그리던 자네가 실은 그 누구보다 더 십일월에 몸서리쳤다는 사실을 깨닫네 하지만 무슨 차이가 있겠나 마음이 붉은색이든 검은색이든 사람이 떠나면 한낱 꿈속의 달리기 같은 것을

 

 

 

 

우리가 힘겹게 살아낸 삶은 대개 익명으로 사라질 뿐이지만, 세계가 윤곽 속에 뚜렷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윤곽은 우리의 시선 속 편린 같은 것이고 우리 모두는 뭉개짐의 연속 속에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시는 그걸 언어로 잘 그려낸 그림 같아 한참 머무르며 바라봤다. 시인도 나도 이런 풍경, 이야기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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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05-05 02: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괜찮아서 한번 보고 싶다 생각한 시집입니다 언젠가 보겠죠 쓰는 건 재미없는 제 이야기일 듯... 시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언제나 감상문을 쓴다 생각하기에...

시를 봤을 때 어떤 그림이 떠오르는 거 좋아해요 여기 담긴 시가 그렇게 보이는가봅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도 사람마다 다르겠습니다 책을 보고 떠올리는 그림도 사람마다 다르듯이... 어쩐지 그건 꿈같기도 해요


희선

AgalmA 2017-05-05 14:41   좋아요 3 | URL
저는 오히려 제목이 그닥 끌리지 않았어요^^; 시들 제목 보고 읽어봐야겠다 싶었죠. 큰 기대하지 않고 읽어서 그런지 의외로 좋은 시집이었습니다.
성장 가능성이 많아 보이는데, 한국 시단에 워낙 성추문 사건이 많아 이 시인도 그런 일로 연루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시는 언어 중에서도 단연 회화적이죠. 회화의 사조들처럼 다양한 표현의 차이가 있지만요.

yureka01 2017-05-05 07: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확 달아오르는 시집 리뷰....읽고 그 지겨움에 빠져들고 싶네요.뻔하지 않는 낯선 은유의 시계로.^^.
오랜만에 시집 리뷰 만나는 이 아침에 삶의 윤곽을 뭉개고 싶은 시간.ㅎㅎㅎ 이런 리뷰는 이달의 리뷰 당선작으로 추천...^^.

AgalmA 2017-05-05 14:17   좋아요 2 | URL
요즘 어수선한 분위기라 시집에 손이 잘 안 가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시를 읽고 싶기도 합니다.
삶의 윤곽을 뭉개고 싶은 시간ㅎㅎ yureka01님 댓글도 시적이십니다^^

yureka01님이 시를 아끼시는 맘 잘 알죠^^

겨울호랑이 2017-05-05 09: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게 십일월은 ‘무채색의 시간‘으로 생각됩니다만, 시인은 십일월을 붉은 색, 검은 색의 강렬한 시간으로 생각하는 것 같네요. 아마 경험의 차이겠지요... 제가 갖지 못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시(詩)의 매력이라 생각되네요.^^:

AgalmA 2017-05-05 14:43   좋아요 3 | URL
제가 생일이 11월로 넘어가기 바로 전이라 제 나름의 이미지가 있는데요. 그 때의 붉은색은 말라버린 붉은 단풍이 사라지기 직전의 모습 같다고나 할까요.
시는 글로 읽는 그림 같아서 휴식처럼 물처럼 찾게 됩니다^^
 
오규원 시전집 2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의 감옥》(1991),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 소리》(1995),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1999), 동시집 나무 속의 자동차》(1995)로 묶여 있다. 시 외엔 편집 의도라든지 해설 등 어떤 부연 자료도 없는 부실한 전집 구성이다. 한국 시단의 큰 시인이라 섣불리 종합평을 넣기 어려워서 였을 수도 있지만 이건 좀.

시집 4권을 다 구비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가격면에서 구매하기 괜찮은 시집이겠으나 시 해설 등으로 시의 이해를 원하는 독자들은 각각의 시집을 사는 것을 권한다. 오규원《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2005) 시집에서는 정과리 평론가가 무려 58페이지에 달하는 해설을 썼다-_-; 

 


전집 구성이 한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오며 발전상을 보는 의미도 있겠고 그 정서에 공감하는 독자에겐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나는 좀 짚고 싶은 게 있다.
80~90년대 한국 시집에서 흔히 느끼게 되는 단점들을 이 시집에서도 역시 발견한다. 그 시대 특유의 자의식이라든지 '월남치마, 비디오 가게, 롯데 목캔디, 둘코락스, 옥경이...' 같은 시대성 묻어나는 단어들과 표현들이 그때를 넘어 지금까지 유효하게 작동하는가 하면 내겐 그것들이 낡아 보인다. 당시의 핍진성은 담았을지 몰라도 현대성 혹은 보편성으로 살아 숨 쉬는가에 대해서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런 단점 때문에 요즘은 시든 소설이든 의도가 아니라면 특정한 시대나 경향을 드러내는 고유명사나 명칭을 잘 쓰지 않는다. 표현이 좀 객쩍은데 베스트셀러 시인;인 기형도 시만 봐도 그걸 최대한 배제한 걸 볼 수 있다. 기형도 시의 인기 비결 중 하나다.
또 오규원 시인의 다른 단점으로 '여자', '아랫도리' 같은 성적 표현과 연결도 전형적인 남성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최근의 성폭력 사건 아니더라도 '대상화된 여성'은 요즘 남성 시인들 시에서도 여전하다.


오규원 시인은 도시성으로 시를 쓸 때보다 자연 속에서의 관찰이 더 돋보이는 시인이다. 자연에 대한 흔한 관조가 아니라 회화적인 구조와 언어 속에서 의미를 톺아보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오규원 시인의 독특한 인식적 세계관이 극명히 드러난다.

이를테면 이런 표현.

 

여자의 치마 속에서 무슨 일인지
공기가 몇 번 몸을 부풀린다
이 길에서는 소리가
고요의 한구석이다
길에 고인 물속에서 새 그림자 하나
다시 길 위로 급히 오른다
새는 어느 허공에 묻혔는지 보이지 않고

- <처음 혹은 되풀이>



바람이 불어도 절은 뒤에 있는
하늘에 붙어
흔들리지 않는다

- <절과 나무>


비가 온다, 대문은 바깥에서 젖고 울타리는 위서부터 젖고 벽은 아래서부터 젖는다
비가 온다, 나무는 잎이 먼저 젖고 새는 발이 먼저 젖고 빗줄기가 가득해도 허공은 젖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시도 젖지 않는다

- <비> 전문



사루비아를 땅에 심었다 꼿꼿하게
선 그 위에 둥근 해가 달라붙었다
사루비아 옆은 여전히 비어 있다
모두 길이다

- <사루비아와 길> 전문

 

 

 

 

대개 시를 감상적으로 음미하거나 해석하기 쉬운데, 오규원 시인의 눈은 카메라만큼 즉각적이고 냉철하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상처란 무시무시한 내면성이다‘를 빗대어 보면, 인식이 뼈대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오규원 시인의 시는 무시무시한 세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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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7-03-26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규원 저, <현대시작법>을 재밌게 읽었던 때가 있었어요.

1) ‘월남치마, 비디오 가게, 같은 말들을 장점으로 생각하면 그 시절의 시대상을 알 수 있다는 점이겠고(저는 비디오 가게, 라는 말이 반갑네요.)
단점으로 생각하면 시대에 뒤떨어져 잘 와닿지 않음이 되겠네요. - 공감 부족.

지인 중 수필집을 낸 분이 말하기를, 수필도 바로바로 발표해야지 묵혔다가 책으로 내면 이 시대와 맞지 않는 글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분은 수필마다 글 끝에 그 글을 쓴 해를 기록해 놓잖아요.

2) 그러니까 시대(현재와 과거)와 세계(동양과 서양)를 초월한 보편적인 느낌이나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글을 써야겠군요.

유익한 것 얻어 갑니다.

AgalmA 2017-03-26 20:40   좋아요 0 | URL
<현대시작법> 공부 많이 되는 책이죠^^

시대상은 시가 아니어도 다른 분야에서도 많은 작업이 있죠. 시에서 특히 그걸 다룰 땐 재료의 나열 이상이 되어야 문학적 성취를 낳을 수 있을 겁니다. 상당히 피곤한 일이지만 그런 철저한 의식없는 취사선택이 느껴질 때 글에 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때라는 것도 중요하지만요. 그러한 때를 잘 포착한 작품들이 인기받기도 했죠. 기성사회의 것들을 적극 가져온 유하시인 시집도 그랬다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그 시집이 지금도 시효성이 여전한가에 대해선...

하루키가 감성팔이라고 깎아내리지만 그가 만드는 공간, 감정의 영역들 보면 보편성을 끌어내는데는 참 실력자라는^^

희선 2017-03-28 0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를 많이 보거나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여성 시인은 남성을 나타내는 시가 덜한 것 같은데 남성 시인은 그런 걸 자주 쓰는 듯해요 시도 쓰는 사람 자유니 그럴 수도 있지, 해야겠군요 그걸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기도 하겠습니다 그때를 사는 사람은 알아듣는다 해도 그때가 지나면 오래된 것이 되는 게 있죠 쓸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한데... 아니 아주 하지 않는 건 아니겠네요 책을 읽고 쓰는 것도 시간이 지났을 때 보면 그때와 맞지 않는 것도 있어요 그 시간이 길지도 않은데 그렇군요


희선

AgalmA 2017-03-28 00:59   좋아요 1 | URL
김수영 시인은 ‘시인은 자기 시의 장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모든 작가도 자신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 100% 알 수 없습니다. 다 쓰고 나서 확인은 할 수 있겠지만 그때 그는 독자 입장이죠. 이미 달라지는 겁니다. 또한 그것을 읽는 2차 독자도 있습니다.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을 읽어낼 수도 있고 완전히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죠. 그렇다고 독자가 결정자냐? 누구도 그렇다고 말할 순 없을 겁니다.
시인도 시대를 사는 인간이기에 시대성을 피할 순 없을 겁니다. 100년이 지나도 독자에게 다가오는 시는 그래서 희귀한 거죠.

21세기컴맹 2017-03-30 14: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잎의 여자
늘 그리운 😗😳

AgalmA 2017-03-30 16:19   좋아요 1 | URL
그 시 김승옥 <겨울여자> 스러운 데가 있어요ㅎ. 1989년 변진섭 ˝희망사항˝도 비슷한 맥락으로 흐르는가 싶지만 작사가가 노영심 씨였다는 게 다른 변주를 가능하게 했죠. 엔딩에 여성의 목소리를 끼워 넣었으니까요. ˝여보세요 날 좀 잠깐 보세요 희망사항이 정말 거창하군요
그런 여자한테 너무 잘 어울리는
난 그런 남자가 좋더라˝
누구나 상대를 일정 부분 대상화해서 보는 걸 피하긴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얼마나 직시해보려 노력하는지는 글을 통해 드러나죠. 너무 늦지 않게 제 부족함도 깨닫길 바라죠.

21세기컴맹 2017-03-30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리 늘 성실히 써주심 미안해서 댓글 쉬이 못 남겨요
모두가 추억거리가 되었습니다.
해바라기 모두가 사랑이예요,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