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 눈이 내 얼굴을 - 제35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228
안태운 지음 / 민음사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근본적인 모순으로 존재한다. 결코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으면서 내 얼굴을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표상에 기대어 말하고 있다. 태운 감은 눈이 내 얼굴을시집은 제목부터 그걸 말하고 있다. 증명사진처럼 내 얼굴이 나를 설명할 수 있다면 감은 내 눈이 내 얼굴을 설명하는 것이 이상할 게 무언가. ‘뒷모습과 뒤를 돌아보는 모습 사이에서 걷고있다 말하는 그의 자서(自序)가 이상할 게 무언가. 그래서 그의 시집엔 얼굴들이 새처럼 떠다니고 물처럼 흘러 다닌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것들은 하나만을 설명하는 독립체도 복속체도 아니다. 모두가 모두를 설명하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 ? 모든 언어는 모든 언어에 속하며 서로를 표현하기 때문에애석하게도 기다리는 것은 가능이다. 그런데 그게 참 멋지게 도착해 있다.

<자재로>를 살펴보자.

운반은 반복되고 있다”, “필요는 망각되지 않는다”, “노동력이 이동하고 있다. 강이 가능하지 않게 된다. 자재로 자재의 원천을 깨뜨린다. 묘사할 수 없게 되었다라는 표현을 만나게 되면 대개 사람들은 불편한 심기가 될 것이다. 상태가 상태를 설명하는 이상한 증식을 보여주는 문장들이다. 묘사하면서도 더 이상 묘사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꿈 얘기를 하고 꿈 속에서 현실처럼 살 듯, 있는 것들이 없는 것들을 설명하고 없는 것들이 있는 것들을 설명하는, 이분법적 도식이 아니라 설명이 설명을 전복하는 사태가 이 시집에는 가득하다.

어딘지 분실한 적이 있던 거리”, “꿈 속에서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안 건 나뿐이었다”(<미열>), “감지되는 나와 지향하는 나는 한 몸에서 서로를 시늉하고 있습니다”(<동공>),

불러도 오지 않는 개가 있다. 개는 물 위에 엎드려 있었지. 엎드려서 흐르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지”(<기르는 얼굴>),

그사이 그림자 안으로 밝은 새가 어두운 새를 떨어뜨린다”(<그림자의 사람처럼>),

"그리고 하나를 골랐다. 눕고 있다. 어떤 것들은 변질된다. 어떤 것들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어떤 순간은 서서히 침윤되어 갑니다. 그늘은 두터워지고 있다."<<모습의 흐름>

 

꿈과 현실을 나누는 우리의 체계를 이렇게 허문다면, 나와 너라는 경계는 종횡무진 시점과 시제 전환으로 허물고 있다. 서술어들을 주시해 볼 것.

우리의 귀는 기둥의 양쪽 귀가 되는 것 같습니다. 기둥이 우리를 듣는다. 우리는 들리고 있다. 서로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흐르는 자세를 지닌다”(<우리는 흐르는 자세를>)

가자, 그러면 그는 곧 그녀를 볼 수 있을 있을 것이다. 그녀는 문과 문의 중간쯤에 있었다. 거기서 소를 치고 있다, 여러 마리의 소를. 이 소는 참 예쁩니다. 그는 그녀의 소를 가리킨다. 웃는다. 한담을 주고받으면서 그것의 귀를 만진다. 만지고 있다. 제가 이 소를 타고 가도 되겠습니까. (<예식>)

그녀는 좋다고 했다. 네게 했다. 너는 말을 한다.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웃어 보인다. 거울은 깨져 가고 있습니다. 너는 깨져 가는 것들을 보지 않는다.” (<모색하는 사람>)

무사합니다. 하지만 그건 제가 원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책을 덮는다. 나는 쓰던 공책을 덮고 있다. 그는 낙엽을 도로 줍는다.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다른 곳에 풀어 놓을 겁니다. 그는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낙엽을 밟고 있었다.”(<원어>)

우리는 이제 정상에 다다르고 있다. 정상에 도착한다. 그러니 기념으로 불러보자. 그러자 우리는 불렀다. 계속 부르는 것 같았다. 부르고 나니 메아리가 울린다. 그러고 나니 고요합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짐승들이 자고 있을 것이다. 더 올라갈 겁니까. 나는 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동면>)

현재 시제와 과거 시제, 1인칭에서 3인칭 시점, 가정법·평서법·의문법·청유법, 반말과 존댓말 등 모든 어법이 총동원되고 있다. 모든 가능성을 실험해보는 언어 과학자처럼. 실험이 어떤 사실의 지위를 획득하는 순간을 향해.

바야흐로 다른 시 세계가 오고 있다. 일기가 책이 된다고 개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당신이 읽거나 읽지 않는 사이 이 독특한 계절들은 계속 오고 가고 있다고 나는 말할 수밖에 없겠다.

   

가을은 점점 공고해지고 있었다. 오히려 안개 속에서 너는 너를 더 잘 볼 수 있습니까. 우리는 있었고 얼마 후 너는 사라진다. 그러나 언제부터 너는 사라졌나. 너는 사라진다. 사라짐으로써 유명해진다 (중략) 나는 일기를 쓰고 있다. 쓴다. 여름을 적지 않는다.”(<나는 일기를 쓰고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1-17 0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8 0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요하네의 우산
김살로메 지음 / 문학의문학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순간 사라진 걸 알았다. 십 년 넘게 걸고 있던 피어싱이. 단편 <라요하네의 우산>에서 샌드리가 귀걸이 한 짝만 걸고 있는 지미를 견딜 수 없어하며 시메트리 증후군에 대해 말할 때였다. 한 짝 뿐인 내 피어싱은 파괴와 재건을 상징하는 시바 신이 세상의 독을 삼켜 파란 몸을 지녔듯 푸른 불꽃이 담겨 있었다. x-ray를 찍을 때 외에는 뺀 일이 없었다. 그것을 구입한 뭄바이의 허름한 거리를 아직 기억한다. 다시 찾아가도 같은 건 없을 것이다. 이런 완벽한 사라짐을 바라면서 그것이 내가 아니라는 걸 늘 목도하는 게 삶이다. 만약 내가 시메트리 증후군인 사람을 만난다면 오랜 시간 애정이 담긴 귀걸이 한 짝을 기꺼이 뺄 수 있을까. 자신은 좋은 여행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지미는 귀걸이를 빼 가방 안에 넣는다. 그의 귀걸이에 특별한 무게가 있었다면 귀걸이와 시메트리 증후군은 재밌는 갈등 구조를 만들었을 것이다. 김살로메의 소설에서 자신을 합리화하는 소시민적인 지미 같은 초점 화자를 자주 발견했다. 작법적이 아니라 현실이 반영된 거라 말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한 발 물러서 보려는 작가의 의도가 강하게 느껴지는 인물들이기도 한데 그것은 성공적이었나.  
  
나는 소설가의 유형을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한다. 인물 중심형, 이야기 중심형, 이미지 중심형, 실험형. 한국 소설의 전통적인 특징은 인물에 아주 공을 들인다는 점이다. 이것은 신기하게도 한국 문화계 전반의 특징이라고도 생각한다. 스타, 아이돌 중심으로 판이 돌아가는 것처럼.
이 소설집에서 언급되는 작품들을 보며 작가가 인물 중심형이란 생각을 했다. <라요하네의 우산>에서 언급되는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알비노의 항아리>에서 언급되는 앙리 바르뷔스 지옥, <강 건너 데이지>에서 언급되는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왼손엔 달강꽃>에서 언급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등도 개성적인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들이다. 김살로메 소설에서도 이야기를 끌어가는 개성적인 인물을 찾는 노력이 많이 엿보였다. 알비노증 약사, 노년에도 밤살이에 집착하는 시어머니, 성욕과 식욕에서 각각 변태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영세기업 사장과 여직원, 독립영화 지망생, 시메트리 증후군 인물, 무기수의 딸, 한지 인형 제작자, 모성보다 연애에 집착하는 엄마, 매춘을 하는 텔레마케터, 촌철살인 같은 속담으로 말하길 즐기는 새터민 사람들, 시아버지를 살인한 누명을 쓰게 될 며느리, 삼류 시인 등. 이들은 몇몇만 빼면 대개 초점 화자가 관찰하는 대상들이다. 앞서 언급한 에밀 아자르부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들은 개성적 인물들과 초점 화자의 콜라보가 성공한 작품들이다. 김살로메 작가의 이 소설집을 읽는 독자들은 이런 점을 내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 소설집에서 돋보이는 작품은 <피의 일요일><누가 빈지를 잠갔나> 였다. 도덕적이고 반성적 글보다 서늘한 긴장감과 추리적 재미를 추구하는 작가의 지향을 읽을 수 있었다. <피의 일요일>은 시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은 임산부인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시체를 발견하고 용의자가 되지 않으려 머리를 굴리지만 용이치 않게 되는 서사이고, <누가 빈지를 잠갔나>는 오해하게 되는 사건들과 시간들 속에 진실 혹은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만 남는 과정을 잘 포착했다. 한국에서 장르 소설이 점점 부상하고 있는 만큼 이런 이야기를 풀어가는 재능은 향후 발전을 더 기대하게 한다.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간호사들의 디테일한 이야기와 의학 용어들을 보며 정유정 작가 경우를 떠올리기도 했다
  
가장 마음에 든 대목은 <누가 빈지를 잠갔나>에서 꽃잎이 삼백여 장이 넘는 라넌큘러스와 수많은 기억들이 꽃잎처럼 모여 만들어지는 현실을 연결한 대목이었다. 이 소설집을 읽은 분들이 많이 언급할 거 같아 구체적인 인용은 생략했다.
가장 재밌던 요소는 <아폴로를 씹었어>에서 새터민 사람들의 대화 특징였. “소 잡은 흔적은 없어도 밤 껍질 벗긴 자리는 있다고 했거든요”, “별 따려다가 발 아래 채송화 밟아 죽인다는 말도 있다”, “숲 속 열 도둑 잡기 쉽지 맘 속 한 명 도둑 못 잡잖아요.” 같은 것들. 경험과 취재를 잘 녹여내야 잡아낼 수 있는 부분이기에 작가의 노력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한국 문단에서 주목하는 후장 사실주의 같은 실험형 소설들이 독자들에게 뭇매를 맞는 광경을 자주 본다. 김살로메 작가가 그보다는 안전하지만 만만찮은 장르 소설 쪽을 가는 걸 바라보며, 소설가의 의무보다 소설가의 재미를 더 많이 찾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다음엔 잃어버린 제 피어싱에 대한 걸 소재로 써 보심은^^?
  
   
   
  
김살로메 소설집에 대한 내 평점이 박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 봐 노파심에서 알리자면, 나는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 앙리 바르뷔스 지옥》 ★★★★,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의 별점을 줬다.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ureka01 2017-01-14 0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유저겸 작가분중에 소설가는 처음 뵙습니다.ㅎㅎㅎ

AgalmA 2017-01-14 10:35   좋아요 1 | URL
많이 계신 걸로 아는데 이렇게 직접 책을 받기는 여기서 처음이라 부담이 많이 되더군요. 리뷰 부담 때문에 일전에 yureka01님 시집 나눔하실 때 손 안들었어요. 혹여 섭섭치 마시길^^; 받고 싶은 분이 많아 너 줄 거 없어! 상황인 듯 해서 다행ㅎㅎ

yureka01 2017-01-14 0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전 책주고 받는 것에서 부담은 배제입니다. 리뷰나 페이퍼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이라서요. 저도 책 많이 받았지만 리뷰도 몇개 안했습니다.흐.자유롭게 하시면 될거예요.부담가지라고 보내는게 아닐거니까요.^^.편하게..하셔도 되요.

2017-01-14 0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1-14 08:15   좋아요 0 | URL
인심은 잃겠지만 작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요^^
이런 점 때문에 욕도 많이 들었지만 고맙다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ㅎ;

그래서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와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에게도 같은 별점을 줬다는 방어막을 굳이 넣었잖아요ㅜㅜ

2017-01-14 0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4 0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1-14 10:37   좋아요 0 | URL
후장사실주의 소설은 노이즈 마케팅이 된 사례가 되겠죠. 도대체 어떻길래 궁금해서 읽게 되는ㅎㅎ;

모든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소설이 되긴 어렵죠. 많은 고전들도 환호와 질타의 검증 과정을 거쳤고요.

주례사 평이 지금 당장은 작가에게 힘이 될 지 모르지만 독자가 어떤 걸 좋아하고 아쉬워하는지 정확히 아는 게 작가에게 향후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 취향이 섞일 수밖에 없지만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려 한 제 진심과 응원을 작가가 알아봐주길 바랄 뿐^^;

2017-01-14 0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4 1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4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4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4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4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4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죽음에 대하여 - 철학자 장켈레비치와의 대화 철학자의 돌 4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지음, 변진경 옮김, 이경신 해제 / 돌베개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글은 죽음과 불안을 조금씩 다 담고 있다. 아니 결코 떨칠 수 없다는 게 더 정확하다. 현실에서는 노화 방지 시술이나 체력 단련, 노후 대책 등으로 긍정적으로 보이려 애쓰지만 본질로 말하자면 미루고 싶은 몸부림이다. 마음의 상황은 더 난국인데 도망자에 가깝기 때문이다. 연기(延期)와 회피. 이 시점에서 주사, 시술.. 누가 많이 생각난다.

켈레비치 : 우리는 죽음이라는 문제를 깊이 파고들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문제를 막연하게 만들어보려는 일종의 방어 기제가 작동하는데, 죽음을 다른 사람의 문제로 국한하려는 경향이 그것입니다.


다음 대화는 인간의 의미 부여에 대한 장켈레비치의 불가지론(경험을 벗어난 사물의 본질은 인식할 수 없다는 철학적 관점) 면모를 볼 수 있다.

다니엘 디네 : 삶은 죽음에 의해 감염되어 있고 죽음이 삶을 물리친다면, 인간의 미래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장켈레비치 : 그것이 인간 실존의 비애입니다. 실존의 문제들은 삶 안에서, 삶과의 관계 속에서 합목적성을 갖습니다. 그것을 삶에 내재하는 합목적성이라 부를 수 있겠지요. 나의 일과나 내가 구상하는 계획들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개개의 것의 총체는 의미가 없습니다. 나의 삶은 다른 사람에게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의 삶 전체는 나 자신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너무 깊이 사색에 빠지거나 인간 실존의 일반적 의미나 나의 실존이 나 자신에게 갖는 의미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는 그 의미를 찾을 수 없을 테니까요.
아니면 실존에 의미를 되찾아주는 종교적 희망 속에 피신해야 할 겁니다. 분명히 종교적 희망은 우리에게 안도감을 주지만, 문제는 그것이 진실인가 아닌가가 되겠지요.


다니엘 디네와의 대담에서는 죽음을 둘러싼 우리의 인식 여건들을 살펴보았고, 이어지는 조르주 반 우트와의 대담에서는 죽음과 신앙의 관계가 주요 쟁점이다. 신앙의 내세관 속에서 실존적 가치를 얻으려는 인간의 갈망, 죽음과 내세의 지복을 동일시하는 순진한 믿음.
파스칼 뒤퐁과의 대담에서는 안락사가 주요 주제였다. ˝삶에 대한 인간의 바람은 인간의 능력에 따라 자연스럽게 증가했˝다고 장켈레비치는 말했다. 즉 생명연장이든 안락사든 그것은 우리가 죽음을 더 주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영역에 들어왔다는 걸 시사한다. 변함없는 건 ˝죽는다는 사실의 확실함과 죽는 날짜의 불확실함 사이에서 불명확한 희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장켈레비치는 현재의 안락사에 대한 논의가 너무 추상적이거나 너무 단순하다고 말하며 세심한 조건들을 거론했다. 치료 가능성을 따져볼 특정한 시기의 의학, 의사의 선택, 질병의 문제, 환자의 역사적 상황 등.
『어떤 육체?』에 실린 대담에서는 다음 문장이 핵심이었다.
˝시체를 다루는 다양한 방식들은 아마도 문명과 종교에 따라 육체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된다는 점을 의미할 겁니다.˝
우리는 죽음을 안심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가시화하려고 애써왔다. 잘 처리되지 못하면 금기로 닫아버린다. 오귀스트 콩트가 만든 실증주의력이나 그리스도교에서 죽은 자의 얼굴을 본떠 데스마스크를 만드는 관습, 축제와 같은 장례 풍습 등은 산 자의 유희에 가깝다.
(*실증주의력: 오귀스트 콩트가 1849년에 만든 달력. 1월부터 13월에 각각 역사적 인물인 모세, 호머, 아리스토텔레스, 아르키메데스, 카이사르, 성 바울, 샤를마뉴, 단테, 구텐베르크, 셰익스피어, 데카르트, 프레데릭, 비샤가 지정되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묘사한 플라톤 《파이돈》을 홀로 맞는 죽음의 두려움을 철학적 수다로 푼 죽음이라 말하는 장켈레비치의 표현은 위트가 넘쳤다.
고령의 자연사도 우리의 편의적인 표현일 수 있다. ˝죽음에는 항상 추가적인 원인이 존재하는데 때로 그 원인이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
육체의 긍정성을 강조하는 스포츠. 평소 내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던 스포츠의 폭력성도 아주 적절하게 잘 지적해 주었다. 정치적 이용에 대해서도.
˝텔레비전 뉴스에서 볼 수 있듯이 조금이라도 난처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 그럼, 스포츠 소식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심각한 현안들이 가득한데 갑자기 스포츠 소식으로 바뀔 때 나는 얼마나 분노했던가! 생각해보니 JTBC 뉴스는 그런 게 덜하다.

삶의 희망이 죽음의 불안과 거리를 둘 수 있다 말하는 실존주의 철학자 장켈레비치(1903~1985)의 사상은 종교적 믿음을 철저히 배제하면서 ‘신비‘에 대해 끝없이 사유하는 모습이 독특하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중에는 죽음이 으뜸일 것이다. 대담들을 엮은 이 책을 통해 접할 수 있는 라디미르 켈레비치 《죽음》 (1966) 저서는 비체계적인 사상을 금언으로 풀어내는아포리즘으로 가득하다.
˝죽음이 필연적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들은 충분하지만, 결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신이 존재한다고 단정할 근거는 전혀 없다....... 구조자는 조난자와 전혀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죽음》, p 394)

그의 이러한 경향은 반유대 철학자들(칸트, 피히테, 헤겔, 하이데거)과 독일 철학 체계를 교조적으로 따르던 당시 프랑스 철학을 거부하고 베르그송 등의 비주류 철학에 몰두함과 동시에 러시아 작가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데 기인하는 것 같다, 그는 "나는 환생한 체호프였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국내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그의 《죽음》 저서를 언제 접하게 될지 모르지만, 죽음에 대한 수많은 철학적 · 종교적 기만들을 걷어내고 이성적으로 현실화해 보려고 한 장켈레비치의 사유는 두려움 속에 죽음을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충실과 행동을 생각하게 하는 좋은 표지(標識)였다.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1-13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1-13 13:48   좋아요 1 | URL
맞는 말씀. 우리는 늘 현실을 매장하면서 의미를 부여하며 일희일비하는 광대들이란 심정의 연속입니다.

2017-01-13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1-13 13:47   좋아요 1 | URL
이 책 오늘은 반드시 다 읽고 정리할 테다! !해서 저도 늑장 출근ㅜㅜ; 아아, 저도 매일 이놈의 노예생활~ 노래를 부릅니다ㅜㅜ

겨울호랑이 2017-01-13 14: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Memento mori」가 ˝죽음을 기억하라˝인데 ‘잊으라‘ 고 한다면 ‘죽음‘만 남게 되겠네요^^:

AgalmA 2017-01-13 14:22   좋아요 1 | URL
죽으면 나도 사라지니 죽음만 남아서 다른 삶을 받겠지요...^^;
장켈레비치도 말했다시피 우리는 죽음을 살아서는 경험 못 하는데 애초에 모르는 걸 기억한다는 건 부조리하죠.

벤투의스케치북 2017-01-13 15: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죽을(mortal) 삶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말이 아닌가 싶은데요...

AgalmA 2017-01-13 15:38   좋아요 1 | URL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규정된다는 점에서 메멘토 모리는 말씀하신 뜻이 담겨 있죠. 그러나 종교적 영향이 서구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 퍼진 상황에서 그것은 성찰보다 위협조로 많이 변질되었죠. 우리의 불안이 그것을 더 가중했을 테고요

벤투의스케치북 2017-01-13 1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기독교는 죽음 후의 심판을 너무 강조하기에 복음이 아니라 화음(禍音)이라 할 수 있습니다.

AgalmA 2017-01-13 15:39   좋아요 1 | URL
장켈레비치도 이 책에서 그런 점을 내내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회유할 뿐이라고.

벤투의스케치북 2017-01-13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러면 쓰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세상은 왜 만들어 심판이니 천국이니 난리를 피우느냐고 말합니다. 무엇을 원하느냐는 로마 병사의 질문에 햇볕을 쬐게 비켜달라 했던 디오게네스처럼 삶이 아닌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을 원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싶습니다.

AgalmA 2017-01-13 16:14   좋아요 1 | URL
그들은 모든 게 신의 뜻이라는 간편한 말도 만들어 뒀잖습니까. 인간은 집단과 체계를 원하는 시스템적인 동물이죠. 어떻게든 최소한의 집단을 만들려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내부 규율은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고.
우리 DNA에 생존요건으로 작동한다고 하니 어쩝니까.

디오게네스 - 알렉산더 대왕 일화는 시원한 구석이 있죠^^
다시 태어나지 않는 열반에 든 이는 부처 말고도 많겠지요. 우리가 모를 뿐.

벤투의스케치북 2017-01-13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동의합니다. 기독교의 득세는 이해가 되지 않는 면이 강합니다.

AgalmA 2017-01-13 16:31   좋아요 1 | URL
어디까지나 제 짧은 생각입니다만 플라톤부터 이어져오는 이러한 지식 계보를 봐도 그렇고 체계화의 문제 아닐까 싶어요. 체계화되지 못한 이전 사상들은 계보화되지 못했죠. 기독교는 공동체로 묶는 규율 체계가 아주 잘 되어 있죠. 해외 어디를 가든 그런 안전한 공동체 속에 묶일 수 있죠. 동양의 믿거나 말거나 식의 개인적인 자율 세계가 아니란 말이죠. 정치 체계가 모두 와해되어도 인간에게 종교 세계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장담합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1-13 17: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정치도 종교, 신앙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을 보면 공감할 수 있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미술비평가, 사진이론가, 화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 등 수많은 타이틀은 존 버거(1926.11.5~2017.1.2, 런던 태생)에게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태어나 누군가 붙인 이름으로 불리워졌던 것처럼. 내가 삶에 그렇듯 자신이 표현하고자 한 방식이 중요했을 뿐.
결국 그는 방식에 대해 무엇을 수긍했을까. 단지 임할 뿐?



  

˝내가 상상력을 발휘해 이 소설을 써보기로 마음먹은 것도, 이 소설이 그렇게 만져 볼 수 있을 뿐 정확히 알 수는 없는 시간의 특징에 대해 암시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의 소설 <G>를 내려다보며...
존 버거, 파스칼 키냐르, 미셸 우엘벡, 필립 로스, 존 파울즈, 곰브로비치 (더더 많겠지) ... 그들은 ‘ 존재가 겪는 섹스(욕망)와 시간과 죽음‘ 사이의 궤적과 밀도를 측정한 작가군일 것이다. 문학의 오래된 주제이지만 그 연결들은 현대에 와서 면밀히 검토되고 있다고 본다. 개인화된 현대를 살고 있는 작가들이 피할 수 없이 닿게 되는 지점 아닐까 싶다.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걷고 있던 그들. 존 버거가 소설 <G>를 부르주아 문화가 와해되어 가며 개인의 욕망이 커지던 1886~1915년 사이로 설정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한숨이 나왔다. 아무리 내뱉어도 사라지지 않는 이 암흑. 그리고 각자 발견했던 빛. 다시 어둠.

 

 

 

˝그의 생각에, 미친 사람들은 전부 아니면 무를 요구했다.˝

˝세상의 일 분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있는 그대로 묘사하라.˝(세잔의 말)

˝모든 역사는 동시대의 역사다.˝(R. G. Collingwood)



 

 



모든 것이 내게 전면적인 재검토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존 버거 에세이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밑줄긋기

 

인간을 뺀 모든 신중한 동물,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내보이려 하지 않는다.

마을은 근년 들어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겨울햇빛 아래 멀리서 보면, 마을은 이 세기가 시작되던 때의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 마을은 신비한 약속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상과 닮게 그리는 것이 인물화의 조건이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는다. 닮을 수도 닮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여하튼 그것은 신비로 남는다. 이를테면 사진의 경우 ‘닮음‘이란 없다. 사진에서 그건 질문조차 되지 않는다. 닮음이란 생김새나 비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두 손가락 끝이 만나는 것같이 두 방향에서의 겨냥이 그림에 포착된 것이리라.


벙어리 털실장갑을 끼고 바흐를 연주하는 글렌 굴드


기하학이란,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것을 보려는 태도를 갖춘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앙리 까르띠에는 말했다.


산 위에 조금만 있어 보면 외롭다는 생각은 사라진다. 발가벗고 살기 때문에.
발가벗은 사람은 또 다른 차원의 동반자가 함께 있음을 알게 된다.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물론 마르셀이 옷을 벗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밤에 옷을 입고 잔다. 그럼에도 알파주에서 혼자 한 주 두 주 지내다 보면, 영혼은 윗도리를 벗기 시작하고 이윽고 알몸이 되면서,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의 눈에서 그것이 읽힌다.
영혼은 그렇다 쳐도, 가축들이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은 늘 있었다.
두 마리의 개가 소들의 이름을 죄다 알고 있을 정도지만, 그럼에도 소가 길을 잃거나 다리가 부러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곳 산에서는 개연성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어떤 때는 소나무 숲이 지금 막 걸음을 멈춘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은하수가 마치 모기장처럼 가깝게 보일 때도 있다.
어느 8월 아침에는, 우유 짜는 헛간에서 똥 치울 때 쓰는 외바퀴차의 손잡이가 얼어버리기도 한다.


사람들이 너무 빽빽해 걷기가 힘들었다. 사람들은 조약돌 사이의 빈틈을 찾는 작은 물줄기처럼 앞으로 나아간다. 그 물줄기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조약돌이 된다. 인구 통계 그래프야 신문에서 보면 되지만, 이런 군중들 속에서는 손등에서 퍼져 나오는 따뜻함과 연료와 배기가스의 냄새, 시멘트 가루와 생선, 예피, 똥 냄새, 플라스틱 타는 냄새, 요오드팅크, 꿀과 식초 등 이런 모든 것이 어우러진 냄새에 의해 장강의 흐름과도 같은 끈질기고 격렬한 생육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아크로폴리스 바로 아래 아테네의 오모니아 구역에서, 삶은 제 스스로를 강조하고 있다.  


햇빛에 구운 흙과 돌멩이, 풀, 엉겅퀴, 도마뱀, 조개 껍데기 화석, 또 야생 꽃상추, 비가 쏟아지고 천둥이 치고, 그런 후 햇빛에 반짝이는 은빛의 젖은 올리브 잎, 다음날 길을 따라 걸을 때면 발목에 감겨 오는 따가운 이른 오후의 정적, 마치 유년기 그 자체처럼 끝없이 이어지던 이런 일상들, 그것들은 하루와 함께 길 저쪽끝으로 꿈틀거리며 사라진 후 다음날 어김없이 다시 돌아왔는데, 어느 것 하나도 오래 붙잡을 수 없었기에, 길은 늘 경이로 가득 차 있었다.

 

 

 

 

 *마리사와 존(사진: 마리사 카미노)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ureka01 2017-01-04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천했다는 소식 들었습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AgalmA 2017-01-04 10:55   좋아요 2 | URL
˝선생님˝을 또 잃고 시작하는 한 해입니다....

이름 2017-01-04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기사를 보고 당황스러웠어요. 이제 존 버거의 새 글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하더라구요.

AgalmA 2017-01-04 17:28   좋아요 0 | URL
저도 소식듣고 읽지 않았던 그의 책이 퍼뜩 생각나더라고요... 읽을 책이 늘 산더미니 이럴 때 챙겨 보게라도 된 달까.

시이소오 2017-01-04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년부터 존 버거의 부음이라니, 왠지 울컥하네요 ㅠㅠ

AgalmA 2017-01-05 02:26   좋아요 0 | URL
존 버거 소설은 에세이랑 많이 다르더라고요. 몰라도 많이 몰랐다는ㅜㅜ;
 
벌목꾼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 현대미학사 / 1993년 9월
평점 :
품절


『 우리는 적절한 순간에 한 인간을 만나고 이 인간에게서 우리에게 중요한 모든 것을 취한다고 생각했으며 또 적절한 순간에 다시 이 인간을 떠난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아주 적절한 시기에 자니 빌로트를 만났고 또한 적절한 시기에 다시 그녀를 떠났다고 생각했다. 마치 아주 적절한 시기에 모든 사람들을 떠났듯이 떠났다고 나는 이제 생각했다. 우리는 자니와 같은 인간의 정신 상태, 그녀의 감정 상태와 정신 상태를 따르고 한동안 이 정신 상태와 감정 상태만을 받아들이다가는 거기서 충분히 받아들였다고 믿어지면 이 인간과의 관계를 끊는다. 마치 내가 자니와의 관계를 미련 없이 끊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런 인간에게서 수년 동안 모든 것을 빨아먹고는 갑자기 우리가 거의 전부를 먹어버린 이 인간이 우리를 빨아먹었다고 말한다. 그리고서 우리는 평생 이 비열함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는 이제 생각했다.』

ㅡ 마스 베른하르트 <벌목꾼> 中 (현대미학사, 1993, 절판, 재출간 미지수)

 

 

■ 장은수 씨가 쓴 ‘베른하르트의 작품 세계‘ 편집 발췌

‘과장의 대가‘, 세계 종말의 희구자‘, ‘알프스의 베케트‘,‘ 自家모독자‘ 등의 별명이 붙어 있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토마스 베른하르트(Thomas Bernhard, 1931~1989)

그의 작품의 주 경향이기도 한 ‘인간 사회의 치부를 폭로하기 위해 극단적인 욕설과 대담한 조소‘를 서슴지 않았던 그런 정력적 비판가의 이면에, 청년 시절부터 갖가지 폐 질환과 합병증으로 시달려온 병약하고 외로운 삶의 주인공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그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죽음의 고통과 요양원 생활의 무료함을 잊으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한다.

시인으로서는 별로 빛을 보지 못했던 그가 첫 소설 작품인 <서리>(1963)와 그에 뒤따른 <혼란>(1967)의 발표로 주목된 이래 독어권에서 선풍적 인기를 모으며 읽혔고, 60여 권에 이르는 그의 작품 중 상당수가 프랑스, 이태리 서구 각지에도 번역되어 널리 소개되었다. 베른하르트 사망 전후 그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는 그의 작품이 일 년 365일 공연되지 않고 지나는 날이 하루도 없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의 수상 경력도 화려한데, 독일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뷔히너상]을 비롯해 프랑스의 [세귀에 문학상], 이탈리아의 [세계문학상] 등 다수의 상을 받는 한편, 수상기관이나 상의 성격이 맘에 들지 않을 경우는 이를 거절하는 것은 물론 공개서한으로 비판적 공박을 가하곤 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1968 그의 소설 <혼란>으로 오스트리아 문학대상을 받게 되었을 때에도 감격 어린 어조의 수상소감을 기대하고 앉아있던 문화계 인사들은 수줍은 청년작가가 내뱉는 어처구니없는 독설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엔 찬양할 아무것도 없고, 저주할 것도, 고소(告訴)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수꽝스러운 것이 많이 있을 따름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우스꽝스럽기만 합니다˝라는 말로 베른하트트는 수상소감을 대신했다.

이런 세계관의 기본 명제로 시작된 베른하르트의 연설은 곧 오스트리아에 대한 자성적 비판으로 이어졌고, 그의 신랄한 비난을 더 이상 참고 들을 수 없게 된 문화성 장관이 격분해서, ˝그래도 우리는 자랑스러운 오스트리아인이오! ˝라고 소리치며 식장을 나가는 바람에 시상식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덕분에 당시까지만 해도 무명이었던 베른하르트는 급기야 도전적 신예로 부상하는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 등 현대 유럽 소설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처럼, 베른하르트의 작품에도 딱히 줄거리라 할 만한 것이 없고, 있어도 단 몇 마디로 요약될 수 있을 정도로 지극히 단순하다.
줄거리를 대신하는 것은 주인공이 넋두리하듯 주워 섬기는 독백이며 대부분의 작품들에서는 소설의 화자가 이 독백을 듣고 보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소설 <벌목꾼>에서도 관찰하고 보고하는 화자인 ‘나‘가 동시에 주인공이며, 재미있는 것은 화자의 관찰대상이 자신을 비롯해 저녁식사에 초대된 모든 예술가 동료들로 확대되어 있다는 점이다. ‘나‘는 마치 극장의 관객처럼 객석에 앉아 ‘예술적 만찬‘에 초대된 그들이 우아하게 등장하는 것에 대비시켜, 껍데기 속에 가려진 그들의 기회주의적인 태도, 진실을 외면하는 허영과 허위를 시종일관 비판적인 눈으로 관찰하고 고발한다. 그는 그들의 위선적인 행위에 분노하며 초대를 받아들여 그가 증오하는 무리의 일원이 된 것을 후회하지만, 한편으론 그들의 파티에서 벌이고 있는 희극을 호기심 있는 관객의 눈으로 감상하는 재미도 부인하지 못한다.

이 작품은 발표 직후 한동안 오스트리아 전 국민의 토론 주제로 부상했다. 이는 우선 소설의 인물을 통해 명예훼손 당했다고 주장한 작곡가 람페르스베르크의 고소를 필두로 이 소설을 실화소설로 본 비평가와 매스컴이 ‘Who‘s Who?‘ 놀이에 발동을 걸면서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고, 이로 인해 베른하르트는 이제까지의 정치적 성격의 스캔들과는 또 다른 형태의 물의를 일으키는 주인공이 되었다.

베른하르트의 작품을 잘 이해하고 오랫동안 손에 놓지 못하는 이들은 그러나 그의 매력을 또 다른 곳에서 찾고 있다. 그의 모든 희곡의 초연을 거의 도맡다시피한 연출가 클라우스 파이만도 그중 한 사람으로, 베른하르트를 읽는 즐거움을 그의 개성적인 문체에서 찾는다며 ˝모차르트의 음악이 세 박자만 들으면 알아챌 수 있듯이, 베른하르트의 작품도 세 문장만 읽으면 금방 알아챌 수 있지요˝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파이만이 베른하르트 문체의 개성을 강조하기 위해 음악에 비교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무엇을 어떻게 쓰느냐에 앞서 어떻게 쓰느냐에 비중을 둔 문학관을 강조한 베른하르트의 작품은 정선된 언어와 반복을 통해 리듬감을 살린 음악적 구조물이라 볼 수 있다. 그의 희곡들을 전문적으로 공연해 온 연출가와 배우들은 바로 이 점에서 그의 작품의 예술적 강점과 현실적 난점을 동시에 본다.



§
브뉘엘 영화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1972), <욕망의 모호한 대상>(1977)이 떠올려지기도 하는 토마스 베른하르트 《벌목꾼》.
토마스 베른하르트 책을 읽은 지 한참 지나서도 종종 ˝지금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로 끝맺는 그의 문체를 은연중 쓰고 있는 나를 만나곤 한다. 좋아하는 음악의 후렴구를 따라 부르듯.

새해가 되었고 우리는 또 만나고 헤어질 것이다. 적절한 관계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누구에게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영역이다. 인간과 관계에 대한 끝없는 회의감은 토마스 베른하르트 전 작품에 나타나는 기조이다.
넋 놓고 살 수 없게 만드는, 끊임없이 항체를 만들어야 하는 관계들 속에서 나는 그의 글에 매번 깊이 공감했다.(이 책을 빌려 줬다가 못 받은 것도 내 회의감에 +1 더해짐) 니체, 카프카, 카뮈의 책을 읽으며 그랬듯이.(이들 책도 빌려 줬다가 못 받은 게 있다...) 그들의 책을 꺼낼 때면 내 시선은 병든 개모냥 헤집고 다니고 싶어 했지만 긴장감과 무게를 오래 짊어지지 못 했다. 정신은 쉬이 피로해지고 어느 날 필라멘트가 끊기듯 툭 놓아버리고 애써 삶에 임했다.
누구나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부끄럽게 말하지만 글로 적나라하게 말하진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보다 나은 사람처럼 보이게 꾸미면서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누구보다 당당한 작가였고 사람이었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는 나는 그렇게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하루키를 얕잡아 보는 사람들은 하루키 글만의 당당함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내가 환상 속에 사는 것은 당신들 영역의 경쟁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배려이자 무능이며, 내가 이 생에서 꾸리고 선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삶의 모습이다. 그러나 나 또한 누군가의 피해 의식 대상일지 모를 일, 그럴 때면 정말이지 세상의 모든 불을 끄고 싶다.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을 요구하는 시기에 나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밤낮으로. 그리고 이런 생각과 느낌을 소설로 표현해 준 토마스 베른하르트에게 감사한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호랑이 2017-01-03 08: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베른하르트를 잘 모릅니다만, 그가 살던 시기가 2차 세계대전 전후인 것을 보면 오스트리아의 자성적 비판은 전쟁책임에 관한 내용인 것 같네요^^:...Agalma님늘 좋은 작가, 좋은 작품 소개 감사합니다.

AgalmA 2017-01-03 21:09   좋아요 2 | URL

네, 베른하르트의 마지막 소설 <소멸>은 특히 나치에 동조한 오스트리아의 비열함에 대한 조소가 신랄합니다. 문화와 예술의 나라라고 자부하는 그 속엔 허위가 가득하다고 치를 떨며 오스트리아에 자기 작품 출판을 거부하기도 했고요.

겨울호랑이님, 좋은 하루 되세요/

달걀부인 2017-01-03 0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언급하신 개인적 상황 혹은 심경 같은 것들에 살짝 동의하면서(저도 요즘 그러네요) 잘 읽고 갑니다.

AgalmA 2017-01-03 21:00   좋아요 1 | URL
달걀부인님은 어찌하여...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에 대한 고민은 여전한 거 같아요. 앞으로도 내내 그렇겠죠.
거기도 많이 춥지요. 건강 잘 챙기세요. 달걀부인님.

2017-01-03 1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03 2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고기자리 2017-01-03 22: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으면 읽을수록 달콤한 희망보단 더 처절한 고독과 고통을 마주하게 되는데도 계속해서 읽게 되는 이유는 뭘까요. (인간관계에 치이면서도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도요..)

현실의 문제들이 정리되면 읽어야지 했는데,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미 작은 틈을 내어 읽고 있고, 이런저런 고통들이 흘러가면 써야지 했는데, 한 가지가 지나가면 또 다른 것이 오더라고요.

심란한 맘에 일기를 끄적거리다가 문득 체호프의 어느 단편이 떠올랐고, 나의 현실을 책으로 재해석할 지경이라면, 나는 어쩔 수 없는 읽는 인간이며, 쓰는 인간이구나 싶었어요 ㅎ

어떤 작가들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듯 읽다 보니 비슷한 상황에선 특정 작가의 고민이 같이 떠올라요. 그럴 때마다 나에게도 달려갈 오랑의 해변이 있었다면, 제밀라의 바람을 맞을 수 있었으면 좀 더 다른 답을 찾았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기도 해요.

어떤 날은 정말 스위치를 내려버리고 싶기도 한데, 끄고 싶어도 꺼지지 않는 게 고통인지, 축복인지 모르겠어요 ㅎ 어떤 문장들 덕분에, 다른 누군가가 밝혀 놓은 빛을 보며 견디는 거겠죠. 아갈마 님의 빛을 보며 말없이 쉬어가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AgalmA 2017-01-04 10:32   좋아요 2 | URL
라깡의 주이상스라는 표현처럼 고통 속에서도 쾌락을 느끼는 거라 그렇겠죠.

사랑과 열등감이 동률이었던 사람이 있었어요. 제 앞에서 보여준 건 사랑이었지만 헤어질 때는 열등감만 보여 주더군요. 숨겨온 상처를 칼날로 되갚아주더군요. 본문의 인용한 저 문장처럼 정말 그랬어요. 너라서 사랑했고 너라서 증오한다....

저도 모든 연애에서 어느 정도 열등감은 있었던 거 같아요. 누구나 자신만의 뛰어난 장점이 있으니까. 그런데 그걸 견디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걸 속에 품고 있다가 어느 순간 터뜨리죠. 사랑한다 말했던 사람들에게 그걸 몇 번 겪다보니 인간에게 사랑이라는 건 대체 뭘까 싶습니다. 우리는 늘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갈망하는 존재들. 예수에 대한 사랑도, 신에 대한 상처도 그런 성격이 있는 거 같아요. 우리는 늘 어떤 범주 속에 있고 또한 그 범주 속에 안주합니다. 시간, 나이, 성별, 계절, 공간, 여러 관계들 속에서의 경험.... 나라는 범주가 가장 강력할 테고요. 나 라는 범주 없이 삶은 연장되지 않을 거니까요. 작가들이 백치의 삶을 꿈꾸는 건 나 라는 고통의 감옥을 벗어나고 싶다는 뜻이죠. 베른하르트는 그걸 아주 고민한 작가였어요.

문학은 한밤에 불켜진 방 같아요^^ 잘 찾아간다면 아늑한 은신처 같은 곳. 우리들이 쓰는 글은 그런 아지트를 그리는 거 겠죠.

물고기자리 2017-01-04 10:24   좋아요 2 | URL
누군가가 나의 존재를 알아봐 줄 때, 그걸 사랑이라 착각하는 것도 같아요. 사실은 그 상대도 나와 똑같은 착각을 하며 자신의 에고를 충족시키는 것일 뿐인데도 말이죠. 더 이상 에고를 충족시킬 수 없을 때 사랑이란 착각도 끝나는 게 아닐까 싶은요.

하지만 비교적 에고를 내려놓게 되는 그런 사랑도 있는 것 같아요. 나의 정신 속에서 일어나는 (쾌락 같은) 고통이 아닌, 다른 종류의 고통이요. 어떻게 해도 해결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아픔이요..

책(문학)을 읽는 건 결국 삶은 고통이란 걸 알아차리는 과정이고, 계속해서 읽고, 쓰는 과정에서 그 고통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배워가는 것도 같아요. 나라는 좁은 범주에서 벗어나길 바라며 말이죠. 그러는 과정에서 제 자신에게 많이 낙담하는 게 힘들지만 이미 생각하기 시작했다면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엔 없지 않나 싶어요..

새해부터 너무 진지한 댓글로 아갈마 님을 괴롭혀드린 건 아닌지, 잠은 좀 주무시는 지도 걱정이네요;; ㅎ
불빛을 따라 와보니(늘 반짝거리고 있어) 이곳에 도착했더란 말이죠^^

AgalmA 2017-01-04 10:40   좋아요 2 | URL
네. 착각의 연속이죠~_~;

말씀처럼 사랑의 위대함을 말할 때 에고를 내려놓은 융화를 가장 최고라고 말하죠. ‘나‘ 라는 걸 점점 강조하는 어려운 현실 속에 점점 희박해지고 있는 가치가 되고 있죠. 이런 불씨들을 계속 살리려고 글을 쓰고 보는 거 아니겠습니까.
요즘의 글들은 쓰기에 너무 치중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생각은 얕고 말이 더 먼저 나간다고 할까. 저도 반성할 부분이고요...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고기자리님의 이런 말씀이 정말 필요했어요. 감사드려요.

물고기자리 2017-01-04 11:05   좋아요 2 | URL
아놔 ㅋ

제가 감사 받으려고 댓글을 단 건 아닌데;;

아무튼 갑작스레 진지해져도 받아주셔서 감사해요 ㅎ

사담이지만 제 서재에 오셔서 댓글을 달아주시는 모든 분들께 ‘좋아요‘를 눌렀다 안 눌렀다 하는 게 미안해서 일괄적으로 누르지 않는 이상한 공평함을 시전하고 있거든요 ㅋ 이렇게 외출을 할 땐 못 보시겠지만 막 더블클릭을 하며 누르고 있어요^^

AgalmA 2017-01-04 11:14   좋아요 2 | URL
공평하려고 그러신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ㅎㅎ
너무 신경쓰지 않으셔도 돼요^^ 이런저런 거 신경쓰이는 게 많은 공간인 거 저도 잘 알죠ㅎ 생각 많으신 물고기자리님 맘이 더 편하셨으면 합니다. 가끔 이렇게 얘기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쁨이라는. 바라고 바랄수록 욕심만 되는 것도 알고.
머리가 너무 무거운 아침입니다. 사는 게 참 만만치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