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아이의 모습을 일정 부분 가지고 있듯 시인의 시어와 상상력도 계속 변용되어 나타난다. 구력이 꽤 되는 작가의 신작이 나왔을 때 기대보다 걱정이 더 앞선다. 특히 재기 넘치는 상상력을 보여주던 시인 경우 더 그렇다. 만물의 흐름처럼 자신의 독특한 모난 매력을 퇴색 없이 유지하기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어디로 옮겨도 알알이 슬프다는 표제시 박상순「슬픈 감자 200그램」이나 시집 전체에 대한 내 감상은 아쉽게도 슬픈 실망의 200그램이다.

* 시집 전반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상투적이고 진부한 시어의 남발이었다.
(‘초승달 눈썹, 연분홍 입술, 터질 듯 말 듯 커다란 젖가슴, 출렁이는 머릿결, 불룩한 엉덩이‘ - 「여배우 김모모루아는 바르셀로나에 갔다」)
* 긴장감 넘치는 도약 없이 감상적인 전개도 실망스러웠다.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능숙하지 못하다./그래도 몇 절은 아름답다./ 내가 여전히 우울하고/ 내가 여전히 고독하고/ 내가 아직도 꿈꾸기 때문이다.‘ - 「음악은 벽 속에 있다」, ‘바다는/ 이미 오래전에 닥쳐온 나의 고독/ 모래알 같은 고독이 파도에 쓸려/ 밀려가고 밀려오는/ 여름은 아직 살아 있는 나의 죽음‘-「죽은 말의 여름휴가」)
시인의 말을 보면 박상순 시인이 문제를 모르고 있다고 생각되진 않았다 

“내가 처음에 이 길을 선택했던 이유처럼, 나의 도구는 언어이고, 이미지와 소리와 문자이고, 나 자신이고, 문제인, 오래된, 낡은 집이어서 어쩔 수 없이, 차선책인 나 자신만의 미미한 독자성에 기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미한 개인에게도 사실이나 진실을 밝히는 것은 어렵기도 하지만, 가슴에 묻어두고 가야 하는 것 또한 진실일 수밖에 없다. 때로는 참이, 거짓이나 침묵, 헛것들을 만나 진실을 삐껴서는 것이기도 하지만 뒤집고, 버리고, 되돌아서는 작용점으로써 실재적인 곳으로 도구를 끌고 가려는 마음과 같다. 하나의 작품은 발단의 연유나 종결의 의미를 넘어서는 곳에 있다.
그러나 세상은 지각이나 감각 또는 인지의 결과와는 다른 것일 수 있고, 나는 그 한계 안에 있다. 허구처럼 보이는 사건들과 이미지로서의 환영을 교차하면서, 미미한 나의, 문제와, 절박하게, 침통하게, 그러나 따뜻하게 대면하고자 했지만, 더 즉물적으로 그것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어떠한 의미도 배제해야 한다. 문제들은 즉물적인 것들을 통해 마침내 미적으로 환상을 만들며 소멸한다. 따라서 그런 즉물성을 통해 구조에서 구축으로, 시선에서 포착으로의 이동이 필요하지만 나의 도구는 아직, 거리보다는 관계에 놓여 있다. 그래서 아직은 상황과 감정이 햇빛 속의 먼지처럼 떠돈다.
언어. 공간을 여는 길은 경계의 확장이나 출구를 통한 방법이 아니라 공간을 먼저 확정하는 데 있다. 그러나 시선이나 표현을 넘어서는 시적 대상이나 상황을 현재와 같은 고정된 무대에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대상의 동태를 내 안에 옮겨, 다시 바깥과 잇는 과정에서의 호흡과 박동의 차이, 잡음에 관한 것들. 그리고, 매체가 경직된 내용을 생성하기 전에 방향의 역전을 꾀했지만, 의미를 단순하게 확정하는 경향을 가진 구체제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심란하다. 그런 심란함은 자연을 차용하거나 정서적 상황에 머물게 한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의지나 욕망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ㅡ 「시인의 말」 중에서

 

시인이 뭘 답답해 하는지 알겠는데 그 문제는 오직 창작자 자신만이 풀 수 있어 나는 책이 끝나기까지 바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쯤에서 홍상수 감독 이야기를 하고 싶다. 홍상수 영화를 디지털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카메라워크도 컷을 잘게 쪼개는 최신 영화들의 경향과 달리 풀숏이나 클로즈업, 줌 인 아웃의 고전적인(?) 방식을 주로 쓴다. 저예산 조건의 문제보다 홍상수 감독의 독특한 스타일이 되었고 중요한 건 작품의 현장성으로 남지 영화가 낡아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왜?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를 보며 홍상수 감독의 돌발의 미학과 판타지 구성력이 여전히 건재함을 볼 수 있었다. 선배와 한가롭게 공원을 걷다가 다리 앞에서 갑자기 절을 하는 영희(김민희)의 행동은 우스꽝스러움과 쾌감을 동시에 준다. 박홍열 촬영감독이 연기한 무명의 남자 설정은 또 어떤가. 그는 영희가 등장하는 독일 함부르크와 강릉 바닷가에 계속 나타난다 ‘무명의 남자 설정‘은 참 상상력을 자극했는데(참고로 홍상수 감독은 데뷔작 때부터 검은 옷을 입은 의문의 남자를 종종 영화에 넣었다) 함부르크에서는 바닷가로 걸어가던 영희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컷이 바뀌자 무명의 남자가 그녀를 들쳐 업고 그녀의 일행과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납치를 하는 중인지 죽으려던 그녀를 구하게 된 상황인지 어떤 암시도 부연 설명도 없이 감독을 이야기를 끊어버린다. 강릉에서는 영희가 투숙한 호텔 룸에서 무명의 남자가 도무지 어울리지 않게 창문 닦이를 하고 있다ㅎ; ‘무명의 남자‘ 설정답게 모두 그를 투명 인간 취급하는데 불륜과 지질한 관계들의 일상성과 대조를 보이며 영화를 유니크하게 만든다. 또 놀랍고 아름다웠던 장면은 바다를 마주한 영희의 등을 수평으로 잡고 긴 테이크로 가던 클로즈업이었다. 영희의 앞모습을 분명 볼 수 없는데 밀려드는 겨울바다와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우리는 분명 어떤 정서를 받아들게 된다.

 

 

 
감독과 여배우 간의 스캔들 때문에 왜 이 영화 속 여자 인물들이 다 -희자 돌림(영희, 준희, 도희...)인지 슬며시 이해하게 됐고, 홍상수 영화에서 왜 그녀들은 해변에서 그를 기다리는지도 어쩐지 이해할 것도 같지만, 내가 지금 홍상수 감독 영화 얘길 꺼낸 이유로 돌아가야겠다.

이미지 특히 자신만의 이미지를 창조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언어의 이미지성과 메시지성은 사진, TV, 영화 같은 영상 매체의 등극과 함께 그 지위를 많이 잃었다. 그럼에도 창조의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내내  창작의 세계에서 공존하고 있다. 홍상수 감독의 당당함은 공감을 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영감을 날세워 다루는 창작력을 잃지 않고 있어 그의 사생활과 별개로 그의 작품을 응원한다. 얼마 전에 홍상수 《그 후》(2017)가 개봉했는데 출판사 사장과 불륜;; 보기도 전에 공감부터 발동하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상상력 먼저 볼 것이다. 진부함을 낱낱이 쪼개 어떤 알갱이를 드러내는 작업을. 공감을 하게 될지 말지는 그 이후 일이다.

모두를, 모든 것을 칭찬할 수 없는 내 한계도 이해 부탁드린다. 

 

 

 

 

 

 

Yates - virt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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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07-25 2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포메이션과 백석시집 나란히는 뭔가 앙상블 아닌 것 같습니다. ^^ 인포메이션 한달이나 껴잡고 있었는데 통독 실패한 일인으로서 독후 감상 기대합니다. ^^

AgalmA 2017-07-26 00:55   좋아요 0 | URL
제 독서취향이 좀 중구난방틱하긴 하죠ㅎ;; 필 꽂히면 하룻밤에도 다 읽어 치우면서 어떤 건 몇 달을 가도 완결을 못 보기도 하고... 그래서 <인포메이션> 감상기가 언제 나올지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ㅎ;;

2017-07-25 2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7-26 00:21   좋아요 1 | URL
더워서 하루에 한끼는 꼭 면 종류를 먹게 되는데 계속 먹자니 약간씩 변화를 주게 됩니다ㅎ; 향신료나 데코 조미료류 좋아해서 파슬리 가루나 후추, 치즈 가루도 엄청 좋아해요ㅋㅋ
요즘 어쩌다보니 음식 일기를 쓰고 있는 듯ㅎ;;

음... 낼 기대되네요^^ 더위는 안 기대ㅜㅜ

2017-07-25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7-26 00:3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저도 비빔면에 맥주 자주 먹는데 다들 비슷한가 봅니다^^ 반복적인 걸 워낙 싫어하는 성격이라 자주 먹는 음식은 이리저리 다르게 먹는 걸 좋아해요. 어쩔 땐 콩나물도 살짝 넣으면 쫄면처럼 맛있죠^^ 더워서 재료 공급을 소홀히 한 관계로 오늘은 방울 토마토로 조촐히 해서 먹었습니다. 반찬 이것저것 만드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 신경도 안 쓰면 제 자신을 넘 박대하는 거 같아서 조금이나마 신경을 쓰려 합니다.

더운날 칭찬과 격려 얼음물 잔뜩 주고 가셔서 감사합니다^^)__)
건강 잘 챙기시길//

겨울호랑이 2017-07-26 0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어의 이미지성‘이라... 시대가 바뀌어 영상매체가 발달해도 언어만이 가지는 주관성의 세계는 대체불가라 생각됩니다... 로크가 말한 ‘표상적 실재론‘의 내용이 떠오르네요..^^:

AgalmA 2017-07-26 00:31   좋아요 1 | URL
그럼요^^ 여전히 세상의 많은 부분은 언어의 힘으로 굴러가고 있잖아요. 미래엔 언어를 어떤 식으로 대체할 것인지도 궁금한 점이죠.

2017-07-26 0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7-26 23:18   좋아요 0 | URL
홍상수 감독 다작 감독으로도 유명한데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ㅎ 그래서 여인들도 많은 건가;;;;

2017-07-26 2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6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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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위해서라기보다 무엇을 하다 보니 혹은 어쩌다 보니 또 여름을 맞는 건 아닐까. 더 정확히는 여름 카테고리에 온갖 것을 집어넣고 여름을 겪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된다는걸” 배웠다고 나름 자긍하더라도 그건 순간이었고, 그는 아이를 잃어버린 이후의 시간으로 다시 배워야 했다(입동, 바깥은 여름). 사소하고 시시한 삶들을 모아 이야기를 만들고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 약손’(비행운우찬제 해설 중)이 된 김애란은 무엇을 배워나가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단편 소설집 달려라, 아비(2005), 침이 고인다(2007) 인물들이 사춘기에서 청춘에 해당하는 시기의 열기, 실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면, 과도기인 비행운(2012)을 거쳐 바깥은 여름(2017) 인물들은 반지하 자취방과 노량진과 학원과 고시촌과 고시원의 사슬, 서울살이의 미숙함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났다. 그러나 힘든 건 불행이 아니라…… 행복을 기다리는 게 지겨운 거였어.”(호텔 니약 따, 비행운), “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 같아”(건너편, 바깥은 여름)라고 말하며 파국을 곱씹는 시간을 여전히 겪고 있다. 앞의 두 단편집과 확연히 다른 비행운바깥은 여름의 단편들이 여름의 폭염과 장마 풍경인 게 우연은 아닌 거 같다. “아주 먼 데서 형성된 기류가 이곳까지 흘러와 내게 영향을 주던 시간이. 비가 내리고, 계속 내리고, 자꾸 내리던 시절이. 말하자면 세계가 점점 싱거워지던 날”(물속 골리앗, 비행운)이란 표현처럼 악전고투하지만 더위에 더위가 더해지고 비에 비가 더해지듯 대부분의 나날이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들의 연속이라 지리멸렬하고 싱거워지는 인생살이와 닮았기 때문이리라.

 

카뮈의 '여름'이 굴복하지 않는 태양의 결기, 절망하지 않는 문학정신으로서 작품에 반영됐다면 김애란의 '여름'은 물기()-죽음과 눈물의 위치라 아주 대조적이다.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는 거대한 금치산자”(물속 골리앗, 비행운) 같은 게 자연뿐만이 아니라서 이 세계는 더 나아가 차가움을 견디려 누군가를 뜨겁게 미워하는 방식을 택하는 곳”(가리는 손, 바깥은 여름)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애란의 소설 속 인물들은 누군가와 자신의 삶을 구하기 위해 종종 물속으로 뛰어든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 비행운,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바깥은 여름) 계절과 달리 사람은 잘 돌아오지 않는다. 남은 이들은, 떨어지지도 썩지도 못한 채 겨울 은행나무에 매달린 은행처럼 죽은 이가 남긴 테이프 속 목소리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를 대답할 상대도 없이 따라 하거나(「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비행운), 기계장치 Siri와 대화다운 대화를 하며 인간적 편안함을 느끼거나(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바깥은 여름), 기성을 답습하는 것을 넘어 다단계 조직원으로 서로를 악랄하게 착취하며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걸 깨달을 땐 돌이킬 수 없게 되거나(서른, 비행운), “없던 일이 될 수 없고 잊을 수도 없는 일은 나중에 어떻게 되"나 묻기만 하고 자기 욕구에 충실하느라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노찬성과 에반, 《바깥은 여름).

 

바깥은 여름에서 특히 아프게 다가오는 작품은 노찬성과 에반이었다. 이 작품은 달려라, 아비부터 김애란 소설의 큰 줄기인 소통과 유대를 가장 잘 나눌 수 있는 존재 - 부모 세대를 잃은 소년의 최신판이다. 플라이데이터리코더(침이 고인다),물속 골리앗」(비행운) 까지 그 빈자리를 판타지로 채우던 상상력의 실험은 모두 사라지고, 노찬성과 에반에서는 자신의 설자리마저 살얼음판으로 만드는 팍팍한 현실과 소년만 덩그러니 소묘로 묘사해 놨다. 아이를 얻고 기르려는 새로운 부모 세대도 암울하긴 마찬가지다. 아무도 없는 한밤중 철거지역에서 양수가 터지거나(서른, 비행운), 더 좋은 환경에서 아이를 기르려고 이사한 곳에서 어이없이 아이를 잃거나(입동, 바깥은 여름), 아이의 미래를 위해 생이별을 하거나(침묵의 미래, 바깥은 여름), 인종차별과 도덕적 잣대를 걱정하지만 부모 자신이 혼혈아인 자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일쑤다(가리는 손, 바깥은 여름). 소통과 유대를 가장 잘 나눌 수 있는 존재의 부재나 방기나 오해가 부른 부비트랩 상황이다.

 

이광호 평론가는 침이 고인다해설에서 김애란 소설의 문학적 성취는 동시대 젊은 세대의 사회문화적인 궁핍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면서 그 개인성의 균열과 심연을 탐사하고, 그 안에서 실존의 지리학과 우주적 공간을 발견하는 상상적 모험을 펼쳐 보인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우찬제 평론가는 비행운해설에서 김애란의 발전상에 대해 이런 상황을 구성하면서 작가는 단지 사회구조의 모순을 드러낸다거나, 그 안에서 이전투구하는 인간관계의 난맥상을 그린다거나,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나는 가혹한 시대의 피해자일 뿐이다, 나는 어쩔 수 없었다, 같은 그 어떤 부류의 면죄부를 위한 알리바이도 대지 않은 채, 자신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것으로부터 문제의 근원을 전면적으로 재탐사하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종합해 보면 어른이 되는 시간이란 게/결국 실망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겠지만/글이란 게 그걸 꼭 안아주는 것은 아닐지라도/보다 실망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무엇인지도 모르겠어”(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2011))란 작가의 문장이 가장 잘 말해주는 것 같다. 김애란의 초기작은 좋아했지만 최근작에 대해서는 예전만큼 호감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독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갈린다고 생각한다. 연인의 대표적 이벤트 날인 크리스마스가 가난한 연애 해프닝(「성탄 특선」, 침이 고인다)에서 더 이상 참지 못 하는 부부의 이혼 결정(건너편, 바깥은 여름)으로 묵직해졌듯이 김애란의 자연(특히 여름)-환경과 소재들은 반복되는 소용돌이 속에 침묵의 결을 키워가고 있다는 게 지금 내가 주목하는 점이다. 어느 대목에서는 이 침묵이 레이먼드 카버의 그것과 비슷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판타지나 상상력의 실험이 아니라 김애란은 더 많은 실망과 실패의 실험으로 진지하게 접근하리라 짐작한다.

서른을 넘겼던 작가가 쓴 서른의 주인공은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는 거 같다고. 조만간 다시 옛날이 될 오늘이, 이렇게 지금 제 앞에 우두커니 있네요.”라고 말했지만, 작가는 과거나 사실을 보고하는 자가 아니라 사람, 시간, 감정, 인상모두에 공기처럼 배어 있는 것들을 글로 표현하려는 자 아닌가. 바깥의 여름도 스노볼 안의 폭설도 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할 때, 품이 드는 이해가 시차를 좁힐 것이고 한 사람만의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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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0 0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0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17-07-20 10: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문학평론가분의 글인줄 알았어요. 즐겨찾는 서재라 찾았다가, 아름다운 문장에 놀라고 감동받고 갑니다

AgalmA 2017-07-20 16:12   좋아요 1 | URL
어이쿠, 평론가분들의 글을 가져와서 그런 인상이 강해진 걸까요;;;
딱딱한 평론 같은 글이 되고 싶진 않았는데 분석적으로 쓰다 보니 어째 그런 식으로 보이게 된 지도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17-07-20 10: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려고 검색해 보니
모두 6권이 있는데 모두 대출 중이네요.

한참 더 기다려야 할 듯 싶네요.

AgalmA 2017-07-20 16:13   좋아요 1 | URL
<기사단장 이야기>를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 것 보다는 빠를 거 같은데요^^;; 레삭매냐님 부러워요!

cyrus 2017-07-20 12: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애란 소설의 ‘여름‘은 곧 비가 내릴 것만 같은 구름이 잔뜩 낀 계절이었습니다. ‘노찬성과 에반‘의 결말이 안타까워서 작가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 정도였습니다.

AgalmA 2017-07-20 16:14   좋아요 1 | URL
다 비감한 작품들이었죠...<노찬성과 에반>에 대해서 다들 그런 감정이 조금씩은 들 거라 생각해요.

단발머리 2017-07-20 13: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비행운> 중에서도 한 작품만 읽은 것 같아요. 김애란을 잘 몰라요 ㅠㅠ
Agalma님 리뷰 읽다보니까 김애란 다른 작품도 찾아봐야겠다, 뭐 이런 긍정적인 생각이 솔솔 듭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AgalmA 2017-07-20 16:15   좋아요 1 | URL
이 책 때문에 그동안 안 읽고 있었던 김애란 단편집을 다시 읽게 됐는데 역시 전작 읽기가 작품과 작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구나 싶습니다^^
감사요/

서니데이 2017-07-20 14: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바깥은 여름>이라는 제목이 주는 느낌이 좋았어요.
아직 책은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가을이 되어야 읽게 될 것 같아요.

오늘 많이 덥네요. a님 더위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AgalmA 2017-07-20 16:16   좋아요 2 | URL
읽을 책 많으시잖아요. 바깥이 여름이 아닐 때 읽는 맛은 어떨까 궁금하기도 하네요^^

서니데이 2017-07-20 16:34   좋아요 2 | URL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하면서 열심히 사서 모으고 있습니다.;;

[그장소] 2017-07-22 1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 이거 너무 좋다 . 리뷰(?)라고 하기엔 아깝고 평론이라고 해야겠어요 . 넘 멋져요 . 이 책은 아직이지만 몇 몇 작품은 읽었던 것들이라 더 와닿는 것같아요 .
모처럼 집중도 높게 읽은 글이라 기분 좋아요!!^^

AgalmA 2017-07-24 17:22   좋아요 1 | URL
리뷰대회 때문에 부러 쓴 리뷰인데 리뷰같지 않고 평론 같으면 이거 곤란한 거 아닙니까ㅎㅎ; 어쨌거나 당시로선 이렇게 쓰고 싶었고 결과가 어찌 되든 지나간 일이 되었습니다^^;
도서관에 책 반납하러 왔다가 비 잔뜩 쏟아져서 에어컨에 몸을 맡기고 잠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읽고 있자니 잠이 와요-.- 배가 고파서 일까요, 1000페이지 넘는 책이 책베개 같이 느껴져서 일까요. 시원해서 나가기 싫지만 배고파서 가야 겠어요.
그장소님 저녁 메뉴는 뭐예요?
책에서,
˝쓴 맥주 육 파운트요.˝ 포드 프리펙트가 호스 앤드 그룸의 바텐더에게 말했다. ˝빨리 좀 줘요. 세상이 막 끝장나려는 참이니까.˝라고 하네요.

[그장소] 2017-07-24 18:29   좋아요 1 | URL
아, 쓴 맥주 좋네요! 시원하게 쭉 한잔 들이키면 저녁으로 딱일것 같아요 .
리뷰대회 결과는 감히 못 물어보겠잖아요 ~~^^
수상내역에 없으면 그건 평론이라고 말한 제탓입니다 ! 흐헉! ( 매를 벌고 있는 중??)
비가 와서 오후가 견딜 만 해요 . 걸으면 땀은 비오듯 쏟아지지만요!
어여 어여 맥주랑 든든한 저녁 식사 하세요! 맛난 걸로 드시고요 . 저는 아직 고민하는중~~^^

AgalmA 2017-07-24 22:15   좋아요 1 | URL
결과야 알아서 나겠죠ㅎㅎ 제 선을 떠난 것은 과감히 잊는 게 속 편한 거 아닌가요ㅎ
저는 오징어덮밥 해먹었어요. 맥주도 떨어져서 편의점 가서 흑맥주 사다 먹고요ㅎ
비가 와서 후덥지근이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네요. 더워도 전 여름이 좋아요^^

[그장소] 2017-07-24 23:49   좋아요 1 | URL
전 여름은 엉~엉~~;;; 싫어요 ~ 싫어~ ㅎㅎ
가을만 있는 나라가 있음 좋겠다니까요 . ㅋㅎㅎ 매콤달콤 오징어 덮밥 좋았겠어요 .
입맛도 돌고요! 흑맥주도 그렇구!!^^
저는 금욜까진 컨디션 조절을 위해 일단 보류 ^^
지금도 비가 오다말다 그러네요. 여기는~
그래서 꽤 선선해요 . 그쪽 동네도 이 공기 나눠주고 싶네요 .^^
음음~ 어떤 결과든 멋진 리뷰였다는 건 변함없어요 . 제게는요! 히잇~♡ AgalmA님도 굿밤 굿밤 되시길 ~

AgalmA 2017-07-24 23:54   좋아요 1 | URL
오늘 뉴스 보니 여름이 늘어난 만큼 겨울이 제일 줄었다네요. 한 20~30일? 봄이 5일, 가을이 9일 정도 줄고...앞으로 한국에서 살려면 여름 대마왕에 적응해야 할 듯^^;;
그런데 올여름엔 매미 소리를 많이 못 들은 거 같아요. 장마 그치고 기세를 펼치려나^^;
그장소님은 제가 메주로 리뷰 써도 좋다라고 할 양반ㅋㅋ 고마워요^--^♡

[그장소] 2017-07-25 00:39   좋아요 1 | URL
아닛~ 이거 왜 이러세욧^^? 저 , 나름 기호 있는 여잔데~~^^!! ㅎㅎㅎ 호불호가 분명한~!!!
싫어하는 쪽으론 읽지도 않는다는 분명함을 보이잖아요 .푸하하핫~^^ㅋㅋ

아 , 가을 왕국 같은 곳으로 이민을 가야할까요?
난민 신청 같은거요~ ㅠㅠ
더위가 심해지면 에어컨 실외기 가동은 더 극심해 질테고 환경은 더 가파르게 파괴되어 갈테고 ... 우주로 히치하이커라도 ... 진짜 고려를 해야할까봐요 . 겨울이 줄었다는 말은 기쁘면서도 역시 동시에 환경 문제가 ..끄응 ~~
에잇~~~
고맙긴요 . 좋은 글 읽게해준 글쓴이에게 제가 감사를 !( 이러다 감사로 밤새 서로 인사를 주고 받다 날이 샜다는 ... 꼬끼오~)^^
 

 줄리언 반스 《시대의 소음》 p22


"운명"이 아니라 화자의 서술이 거창하거나 거만하지 않나 생각했다. 그러나 "전혀 손쓸 수 없는", 그래서라고 말했을 때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면 이 단어 외에 뭘 쓸 수 있나.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는 쇼스타코비치 자신의 뜻도, 그의 부모 뜻도 아닌 한 신부의 평범한 뜻에 따라 지어졌다. 소설에서 그는 "이름이 뭐가 중요한가?"라고 말했다. 한평생 같이 할, 죽고 나서도 나 대신 떠돌 이름보다 더 중요한 건 뭔가.
누군가는 "운명"이라 글을 썼고 누군가는 음악을 만들었고 모두 죽어갔다.
괜스레 서럽고 억울했는데 내 맘처럼 소낙비가 내렸고 잠이 쏟아졌고 새들이 웃었다.
뭐가 그리 중요한가.


 

 

티는 내지 않았지만, 정은은 늘 남자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직 그들은 희망의 끝을 놓지 않고 있다. 그러는 한 도덕은 지켜질 것이다.”

김영하 오직 두 사람, 신의 장난

 

 

희망의 끝을 놓지 않는다면 도덕이 지켜질 거라는 건 당위이자 진실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그 말은 그저 믿음이자 약속이다. 희망불안이라는 그림자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희망이 부패하지 않을 때 도덕도 지켜지지 않겠나.

 

사람들은 개츠비의 집에서 그가 부패한지 알아내려 했지만 그는 우리 앞에 서서 부패할 수 없는 꿈을 숨기고 있었다.”

바즈 루어만 영화위대한 개츠비》대사

 

 

나는 거기 앉아 오랜 미지의 세계에 대한 생각에 잠기면서, 개츠비가 데이지의 부두 끝에서 처음으로 녹색 불빛을 찾아냈을 때의 그의 경이에 대해상상했다. 그는 이 푸른 잔디밭을 향해 머나먼 길을 걸어왔다. 그의 꿈은 너무 가까워 보인 나머지 그것을 붙잡는 데 실패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 꿈이 이미 그의 뒤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도시 저쪽의 광막하게 어두운 어떤 곳, 공화국의 어두운 벌판이 밤 밑으로 끝없이 이어진 그런 곳으로 흘러가버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개츠비는 그 초록 불빛을, 해가 갈수록 우리들 앞에서 점점 멀어지는, 진탕 마시고 떠드는 주신제 같은 미래를 믿고 있었다. 그것은 그때 우리 손에서 스르륵 빠져나가버렸다. 그러나 그건 문제가 안 된다ㅡ내일은 더 빨리 뛸 것이고, 더 멀리 팔을 뻗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맑은 아침에

그러므로 우리는 흐름을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밀려나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동서문화사 판)

 

 

개츠비의 녹색 불빛. 희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희망의 목표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라면. 믿음이자 약속일뿐이라는 데 나는 오래 멈춰 서 있다. 사람은 아름다운 셔츠 같은 희망을 끝없이 좇아 나아간다. 얼마나 많은 걸 믿어야 가능한 일인지. 끝이 안 보이기에 계속할 수 있는 일일까 아니면 끝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가능한 일일까. 희망도 삶도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하기도 했던 김영하 작가는 1920년 대에 '녹색 불빛'을 보려 한 피츠제럴드와 다르다.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다'와 '견딘다'를 저울에 올려본다. 현실 속에서도 상상 속에서도 볼 수 없다. 각자 예측만 할 뿐이다.

 

 

Gotye - Hearts A M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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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06-29 2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희망 고문‘....

AgalmA 2017-06-29 20:28   좋아요 1 | URL
동의^^
 
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좀 당황했다. 소설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배치된 듣는 자 기억하는 자 그리고 술 마시는 자’ 에피소드는 소설적이면서 매력적이다. 그런데 소설의 몸통은 180도 다르다. 솔로몬 볼코프가 엮은 증언:쇼스타코비티 회상록같은 르포르타주 형식을 취하고 있다. 줄리언 반스는 후기에서 진실과 편견과 망각 속에 집필되는 일기 식으로 보이길 원했다고 말했다.

 

작가와 역자, 많은 이들이 본 대로 쇼스타코비치는 과연 유로지비 or 유로디비(세속에서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금욕하는 수도자, 바보 성자)였을까. 줄리언 반스가 앞뒤에 배치한 듣는 자 기억하는 자 그리고 술 마시는 자는 어쩐지 쇼스타코비치를 유로지비로 보게 만든다. 쇼스타코비치는 20세에 교향곡 1번을 작곡하고 전도 유망한 음악가로 살아왔으나 한 사건으로 시대의 굴레에 꽉 잡힌다. 1936년 그의 첫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당의 의견이 실리는 <프라우다>지에서 형식주의에 치우친 전위성’,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는 혹평을 두 차례나 받으며 인민의 적으로 몰린다. 그즈음 문화예술계에서는 피의 숙청이 이뤄진다. 쇼스타코비치는 NKVD(내부인민위원회) 요원들이 자신을 끌고 갈 것을 대비해 정장을 하고 여행 가방을 준비해 밤마다 집 앞 엘리베이터에 서 있으며 공포에 시달린다. 스탈린에게 밉보였지만 스탈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한 예술가. 그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예술을 위한 유로지비였던 걸까, 겁 많고 걱정 많은 예술가 중 운이 좋았던 걸까. 자살을 가족들에게 알려 만류를 종용하는 소심함, 자유연애를 늘어놓았지만 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결혼했고 바람이나 피우는 정도, 어머니와 아내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가장의 삶, 좋아하던 체호프나 스트라빈스키를 당이 비난하는 것에ㅡ자신의 도덕적 중립성을 남들이 알아줄 거라 예상했지만동조하는 모양새가 된 어리석은 태도. 줄리언 반스가 쇼스타코비치의 당시 사유와 신경과민에 가까운 내면 고통을 세심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그의 외면적 삶은 우유부단하고 기회주의적으로 보일 여지가 많다. 줄리언 반스는 그래서 개인적인 정직성과 예술적인 정직성에 대한 문제를 계속 거론하는 거 같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정직의 문제를 되새기고 있었다. 개인적인 정직성, 예술적인 정직성. 정말로 그것들이 연결되어 있다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미덕을 얼마나 지녔는가. 얼마 동안이나 지니고 있을 수 있는가. 그는 친구에게 자신이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부인한다면 그들은 그가 정직성을 잃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사건 이후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15개의 교향곡 중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교향곡 5(주제:인간성(인격)의 확립)을 완성한다. 그는 5번 교향곡을 포르티시모와 장조로 끝냈다. 그가 피아니시모에 단조로 끝냈다면 어땠을까? 이런 것에 한 생명이여러 생명이좌우될 수도 있다.”

 

 

 

Shostakovich : Symphony No. 5 in D minor Op. 47 


 

쇼스타코비치를 기회주의자로 치부하기 어려운 이유는 권력에 아부해서 소비에트 작곡가 연합을 40년 넘게 이끈 크레니코프, 가족도 버리고 일신의 성공을 위해 망명한 스트라빈스키 같은 음악가, 공산주의 밑에서 살지 않으면서 공산주의를 내세우며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던 피카소, 저작권료를 챙기며 반동 진영을 떠나 진보 진영으로 간다 해도 물질적 보상은 마다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장 폴 사르트르와 분명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장이 바뀔 때마다 그가 아는 것은 그때가 최악의 시기였다는 것뿐이다로 시작하듯이 독재자들의 선전 도구로 이용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땅에 남아 그는 예술가로서 늘 굴욕적인 최악의 시기를 겪는다.

음악이 기분을 처지게 한다고 생각한 레닌, 자기가 음악을 이해하고 감상할 줄 안다고 여겼고 베토벤을 좋아해서 붉은 베토벤을 원했던 스탈린, 음악을 경멸한 흐루쇼프’의 시대를 지나오며 그는 당에서 보낸 개인교사에게 사상교육을 받고 스탈린의 초상화가 서재에 없는 걸 지적 당하며, 자신은 지도자에 비하면 벌레라고 자아비판을 하며, 음악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볼셰비키 이데올로기 교수인 척하고 시험 감독관 역할을 한다. 악보지도 당에서 주는 걸 받아쓰던 그가 이러한 시대의 광기와 소음 속에서 살아낸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음악우리 존재의 음악누군가에 의해 진짜 음악으로 바뀌는 음악, 시대의 소음을 떠내려 보낼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진실하고 순수하다면, 수십 년에 걸쳐 역사의 속삭임으로 바뀌는 그런 음악을 고수하려 했던 믿음때문이었다고 줄리언 반스는 전한다. 그는 싸우는 이상주의자나 순교자가 되기보다 끝내 음악으로 기억하고자 한 사람 같다. 그래서 프롤로그를 다시 반복하는 에필로그는 울림이 크다. 양차 세계대전, 2월 혁명, 10월 혁명을 겪어야 했던 쇼스타코비치는 어느 기찻길에서 음란한 노래를 부르는 거지와 친구와 보드카를 담은 세 개의 잔을 맞부딪힐 때 삼화음을 듣는다. 전쟁은 끝날 테지만 공포, 부당한 죽음, 가난, 더러움은 계속될 것이다. 그 속 내용물이 만나 빚어지는 삼화음은 시대의 소음보다 더 맑게 울리며모든 이들과 모든 것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기억하려고 하는 자, 들으려고 하는 자에게 그것은 주어질 것이고, 지금 우리가 쇼스타코비치를 듣는 것은 듣는 자, 음악 역사의 지속을 말하는 증거이다.

 

  

 

 

Shostakovich : String Quartet No. 15 in E flat minor, Op. 144 (Emerson String Quartet)

​"머릿속에 들리는 마지막 울부짖음은 그의 예술뿐 아니라 그의 삶에 관한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다. 어느 지점에서 비관주의가 적막함이 되었을까? 그의 마지막 실내악 작품은 그 질문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는 바이올리니스트 표도로 드루지닌에게 15번 사중주의 첫 악장은 '파리들이 허공에서 죽어 떨어지고, 청중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홀을 뜰 정도로' 연주해야 한다고 일렀다."

예술은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모든 시대의 것이고 어느 시대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그것을 창조하고 향유하는 이들의 것이다. 예술은 귀족과 후원자의 것이 아니듯, 이제는 인민과 당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시대의 소음 위로 들려오는 역사의 속삭임이다. 예술은 예술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인민이고, 누가 그들을 정의하는가? 그는 항상 자신의 예술이 반귀족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그가 부르주아나 코즈모폴리턴 엘리트 층을 위해 작곡을 했는가? 그렇지 않다. 그를 비난하는 자들이 그에게 바라듯, 교대 근무에 지쳐 마음을 달래주는 위안거리가 필요한 도네츠 광부들을 위해 작곡을 했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는 모든 이들을 위해 작곡을 했고, 누구를 위해서도 작곡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출신과 무관하게 자신이 만든 음악을 가장 잘 즐겨주는 이들을 위해서 작곡을 했다. 들을 수 있는 귀들을 위해 작곡을 했다. 그래서 그는 예술의 참된 정의는 편재하는 것이며, 예술의 거짓된 정의는 어느 한 특정 기능에 부여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떠올리는 기억들을 통제할 수 없듯이, 마음이 끊임없이 던지는 헛된 질문들도 막을 수가 없었다. 한 사람이 생에서 마지막 질문에는 어떤 답도 없다. 그게 그 질문들의 본질이다. 올림 바 음의 공장 사이렌처럼, 머릿속에서 울려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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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속의 모든 빛

 

 

 

세상 속 우아함. 반대로 무정함이나 비속함으로 볼 수도 있다.

 

 

 

Damon Albarn - seven high

 

 

 

 

 

Chris Thile & Brad Mehldau - I Cover the Waterfr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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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6-23 2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우주 안에 대우주가 담긴 것 같은 그림이네요^^:

AgalmA 2017-06-24 12:00   좋아요 1 | URL
소우주는 어디고 대우주는 또 어딜까요~허허
가족과 함께 즐거운 주말 되시길~

겨울호랑이 2017-06-24 12:19   좋아요 1 | URL
^^: 그림 안 물방울안에 세상이 담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ㅋ 다행히 오늘 오후까지는 혼자만의 휴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ㅋㅋ AgalmA님도 즐거운 주말 되세요!

AgalmA 2017-06-24 12:32   좋아요 1 | URL
세상을 담고 싶긴 했는데 제 깜냥만큼 표현된 거겠죠^^
혼자 휴가에 또 무슨 책이랑 씨름을 하실라고ㅎㅎ 즐시간 되세욥^--^

2017-06-24 0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6-24 11:59   좋아요 0 | URL
여의주 문 용은 안 나오는데. 헤헤. 주말 잘 보내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