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랄프 로렌
손보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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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기와 편지를 구분한다. 시와 소설도 구분한다. 그런데 일기는 나에게 쓰는 편지로 은유되기도 하고, 일기처럼 쓴 시와 소설, 편지의 형식을 빌린 여러 창작물이 나오기도 한다. 작품은 작가의 것이지만 이해는 독자의 몫이기도 하다. 즉 어떤 것도 절대적 위치에 있지 않다. 우리는 한 번만 사는 인생이라 무엇이든 답처럼 명확하길 바란다. 세계가 우리가 정말 명확하긴 한가? 인간의 가정에 지나지 않는 시간까지 포함해 4차원만 볼 수 있는 우리가. 그러나 결정론자들은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소설은 금방 사실로 드러날 것들ㅡ원자 폭탄 이름, 미치오 가쿠 이름, 랄프 로렌을 허구로 변환했다. ? 사실과 정보를 잘 모르는 사람은 그럴듯하다고 여기며 기억으로 저장해가며 읽어 갈 테고, 허구를 파악하며 이야기를 따라가는 사람은 대번에 흥미를 잃든지 진의가 뭔지 궁금해하며 따라갈 것이다. 즉 소설 자체 이야기뿐 아니라 독자가 만든 여러 갈래의 길로 아주 복잡한 소설 읽기가 된다. 그러니까 왜?
 
이 이야기는 종수의 일기이자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소설이 만들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뛰어난 영재였던 그가 타국에서 인생의 실패자가 되었을 때, 인생의 실패자가 될 거라 여겼던 수영이 보낸 청첩장(무려 7년 전)을 발견하는 순간은 묘한 도치를 보여준다.
수영이 종수에게 번역을 요청한 디어 랄프 로렌으로 시작한 편지도, 그들이 편지를 쓰기 위해 함께했던 시간도 이제 없지만 디어 종수로 시작하는 수영의 편지는 미처 사라지지 않은 증거로 남아 있다. 수영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디어의 의미처럼 아련하게. 랄프 로렌 컬렉션을 완성하기 위해 금지된 알바를 하고 수집품에 없는 시계를 가지기 위해 일기 같은 글로 랄프 로렌에게 편지를 보내겠다는 수영을 종수는 한심하게 여겼지만 부모 뜻에 따라 공부만 좇았던 종수의 삶이 더 무력했다는 걸 그는 이제야 깨닫는다. 그들의 편지가 랄프 로렌에게 도착했는지 알지 못한 채 그때로부터 9년 뒤 종수는 랄프 로렌의 생애를 추적한다. 이 세계에서는 살아 있는 랄프 로렌이 죽어 있는 소설의 세계로 더 깊숙이.
 
인터뷰어 중 한 사람이었던 헨리 카터의 말(“나의 말이 나의 기억을 불러오는군요”)처럼 더너웨이의 영화를 반복해서 보며 나의 기억이 나의 기억을 불러온다고 종수가 오열하듯이 이 소설이 불러오는 역사와 기억과 말의 소용돌이가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불러온다. 우리가 열광했던 것들, 우리가 놓쳤던 것들, 우리가 실패했던 것들, 우리가 좇았던 수많은 의미와 무의미들. 우리가 몰두한 건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소설 속 다른 인물들도 다르지 않다. 미래에 전혀 도움이 안 될 걸 알면서도 중요한 학창 시절에 수영은 랄프 로렌에 집착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을 기대할 정도로 대단한 기쿠 박사는 본업만큼 열중했던 피겨스케이팅을 수상 실패를 겪을 때엔 더 몰두했다. 천재적인 시계 수리공이었던 조셉 프랭클은 본업을 키우지 않고 매번 얻어터지는 권투에 일흔이 넘을 때까지 몰두했다. 사업 확장에 도움이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랄프 로렌은 시계 사업을 거부했다. 타인의 삶을 돌보는 입주 간호사 섀넌 헤이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돌보는 환자가 죽어야 다른 환자나 자신을 돌볼 수 있다. 종수는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전혀 몰랐던 사람들을 알게 되고 그들 또한 랄프 로렌에 대해 말하면서 잊었던 다른 기억들을 떠올렸다. 어린 랄프 로렌을 거둬 키웠지만 배신당한 조셉 프랭클의 더 기이한 과거, 무례하고 직설적이기만 한 줄 알았던 섀넌 헤이스의 비밀스러움, 백네 살의 레이첼 잭슨이 끝까지 감추려 한 것들. 인터뷰 때마다 잠드는 잭슨 할머니가 잠이 들면 자신의 내밀함을 고백하던 종수. 이들에게 무엇이 진실이고 소중한 것일까. 그것들은 타인의 눈에 오히려 잘 보이지 않는다. 절대 찢지 말라는 경고가 붙었던 잡지를 찢었던 종수는 섀넌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연극을 하려고 잡지 조각을 돌려주려 했다. 그러나 잡지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햄버거 가게 주인이 종수에게 도둑맞은 고양이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 그에게 고양이가 무엇보다 소중했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말한들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까지고 우리의 바람을 담은 말이다. 그러나 사실이 아닌데도 말을 이야기를 행동을 하다 보면 그냥 시간 낭비가 아닐 때도 있다. 그래서 우린 글을 쓰고 읽는 시간 여행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 중 누군가는 잊고, 누군가는 뒤늦게 찾아 나서고, 누군가는 영영 안녕을 고하더라도.
 
 
 
ps) 뉴욕 배경에 이민자들과 외톨이들의 잃어버린 기억들, 숨겨진 이야기들을 찾는 동선들이 그 지역 소설가들(폴 오스터, 니콜 크라우스, 조너선 사프란 포어)과 많이 닮았다는 걸 빼면 한국에서 보기 드문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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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여름을 이 하루에 레이 브래드버리 소설집 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이주혜 옮김 / 아작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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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 해당하는 멜랑콜리의 묘약이 판타지가 더 강했다면 이 책 온 여름을 이 하루에SF가 더 두드러지는데 그의 감각적 문체와 서정성으로 SF 소설이라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다. 소재가 SF라는 걸 빼면 영락없이 서정문학이다. 최근 출간된 시월의 저택은 공포물 종합이라고 봐야 할 텐데 그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읽으니 레이 브래드버리가 어떤 작가인지 슬슬 그림이 잡혀간다.

 

표제작 온 여름을 이 하루에」는 시작부터 아주 인상적인 단편이다. 비만 내리는 금성에 7년 만에 태양이 딱 한 시간 나타나는 광경을 그리는데 그의 감각적인 문체가 빛을 발한다. 이런 상황은 비를 기다리던 단편 영원히 비가 내린 날(멜랑콜리의 묘약)과 묘하게 겹친다. 이 단편에서는 비가 내리는 풍경을 멋지게 묘사했다. 

 

비슷한 소재의 단편들 비교도 재밌다.

전 세계 아이들이 외계인에 포섭되는 걸 그린 침공놀이(멜랑콜리의 묘약)나의 지하실로 오세요(온 여름을 이 하루에)

기이한 증상의 소년들 이야기. 열병(멜랑콜리의 묘약), 어서 와, 잘 가(온 여름을 이 하루에)

노년의 외로움을 그린 이야기. 길 떠날 시간(멜랑콜리의 묘약), 보이지 않는 소년(온 여름을 이 하루에)

고독한 인간의 모습, 우리가 잃어가는 과거에 대한 연민은 그의 단편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 특징이다. 시간 여행을 해도 어리석어 구원자를 놓치거나(그분) 미래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게 된다(그대의 시간여행). 온 여름을 이 하루에에서 그걸 가장 잘 나타낸 단편은 지구에 마지막으로 남은 시체라고 생각한다. 미래 세계(2349년... 이때까지 지구가 안 망하다니)에 깨어난 좀비가 죽음과 공포를 모르는 지구인들을 죽여 자신의 아군으로 만들려는 상황 설정이 매우 흥미롭다.

 

어둠은 공포야. 그는 작은 집들을 향해 말없이 외쳤다. 어둠은 대조를 위해 존재한다고. 마땅히 두려워해야지! 이 세계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에드거 앨런 포를, 거창한 말을 멋들어지게 써낸 러브크래프트를 파괴하고, 핼러윈 가면을 태워버리고, 호박등을 없애버렸지! 내가 밤을 예전 모습으로 되돌려놓겠어. 사람들이 도시를 등불로 환하게 밝힐 수밖에 없었던 시절의 모습으로. 아이들이 어둠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로.” 

그러나 시민 한 사람이 그렇지 못하듯 시체 한 구(?)도 원대한 계획에 성공하지 못 한다. 화성에 남아 있다는 시체 친구들이라도 만났다면 좋았으련만.

 

브래드버리가 토마토 수프 깡통에 자신의 유해를 담아 화성에 묻어 달라고 할 정도로 화성을 사랑했던 만큼 온 여름을 이 하루에에는 화성 이야기를 많이 볼 수 있다. 지구를 탈출해 정착하는 희망봉처럼 화성을 그리고 있지만 지구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 가면서 모호해지는 게 딱히 자유롭다거나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백만 년 동안의 소풍, 검은 얼굴, 금빛 눈동자). 이 두 단편은 2차 세계대전이 휩쓸고 간 40년대 후반 발표된 작품인 걸 생각할 때 작가는 희망을 올곳이 긍정으로만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으로 모든 게 무너져 예술작품마저 침 세례를 맞는 경멸의 대상이 되는 세상에서 파괴되는 캔버스 조각 하나를 구해내는 소년이 그 조각에서 미소를 발견하게 되는 미소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땅속 여자의 비명을 듣고 하루 종일 구출하려고 동분서주하는 소녀를 그린 비명 지르는 여자같은 단편을 보면 브래드버리는 인간과 세계에 끝끝내 희망을 품으려 한 따뜻한 작가였다고 생각한다. 2053년에는 밤에 산책하는 것조차 정신병자 취급당할(고독한 산책자) 일로 그리고 있지만, 살고 싶은 맘, 지키고 싶은 것들, 나누고 싶은 사랑이 있는 한 인간의 본질적인 삶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 아닐까

 

 

 

 

ps)

여름이 오기 전에 《온 여름을 이 하루에》까지 다 읽어서 속이 좀 시원하다. 이제 약간 으스스할 《시월의 저택》이 남았군~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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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1 1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1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8-04-15 0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죽고 난 뒤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영혼이 자유로워져서 우주로도 갈 수 있다면 괜찮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소설이 있기도 하다고 들었습니다 몸이 아닌 영혼만이 우주로 간다는...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레이 브레드버리가 화성에 갔기를... 여기에도 상상력 가득한 이야기가 담겼군요 좀비가 혼자라는 거 조금 재미있기도 하면서 안됐다는 생각도 듭니다


희선

AgalmA 2018-04-15 09:51   좋아요 0 | URL
영혼이 과연 있는 것일까 저는 점점 의문인데요. 살아 있을 때 어떤 지표로서 도움이 된다면 믿는다고 나쁠 건 없겠죠^^

단발머리 2019-03-04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을 ‘읽고 싶어요’에 넣어 두었는데 북플이 아갈마님 리뷰 읽으라 추천해 주네요. 제가 근 며칠 레이 브래드버리에 감동하고 있거든요. 아갈마님 많이 읽으셨네요. 레이의 소설과 아갈마님 리뷰의 환상 조화~~
기대되는 시간이 제 앞에 펼쳐졌네요 ㅎㅎ

AgalmA 2019-03-08 10:20   좋아요 0 | URL
레이 브래드버리 책 많이 샀는데 안 읽은 것도 꽤 있어요^^; 다른 책들에 늘 치이는 인생이다보니;;
저도 레이 브래드버리 처음 읽었을 때 정말 신선하고 신났죠^^
 
한 문장 문학과지성 시인선 504
김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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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이 우리에게 주는 함의는 크다. 내게 가장 크게 다가온 화두는 우리가 얼마나 독재적인 주체로서 이해하려 드는가였다. 혹은 끌려가고 싶어 하는가에 대해서도.

해설을 한 남승원 평론가가 이 시집을 읽고 당혹했을 독자들에게 풀이를 꽤 잘해 줬다고 생각한다. “보편적 인식 구조의 생성을 저지”(p131) 하려는 문장들에 대해서. 발화자의 권위를 내려놓은(‘서정적 주체의 죽음’(p135)) 시가 질문과 대답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펼쳐놓아 수평적 의미 찾기가 되는 시 읽기에 대해서. 승부가 도저히 날 거 같지 않은 시적 정황 속에서 구조가 아니라 해체로서 의미를 만끽하는 자유에 대해서. 정해진 의미도 의지도 없으므로 이성적 조직화’(p143)가 아니라 감정의 생기’(p143)정념’(p144)을 되살려보는 일에 대해서.

 

그래서 이 시집을 읽으며 계속 유쾌했다. 제목과 내용이 그것에 해당하는 단어들을 가져오는데 다 읽고 나면 그걸 무화 시켜버리는 반전 때문에 흥미가 꺼지지 않았다.

 

결정에서는 ’, ‘’, ‘오래’, ‘자주’, ‘번번이’, ‘한사코’, ‘어서’, ‘깊이같이 우리가 결정을 할 때 주로 쓰는 수식어들이 나오고 있는데, 결정했다거나 결정됐다가 아니라 결정하고 있다는 미완의 혹은 계속 진행 중인 상태로 끝이 난다. 그 끝은 첫 문장 나는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로 되돌아간다.

 

균열에서는 계속해서’, ‘더 가늘고’, ‘희박한’, ‘압박하는’, ‘미루면서 더 미루어 있는’, ‘공활하게 올라가는’, ‘더 가늘면서 퍼지고 있고같은 표현으로 균열을 묘사하고 있지만 발화의 핵심은 안 보이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순간의 속성처럼 균열도 계속될 것이다.

 

그 생각도 아주 재밌는 병치들이 재미를 준다. 생각은 알다시피 불안처럼 막을 수 없다. 이 시에서 육체는 벌벌 떨고 있는 손과 발과 귀', ‘꿈적도 하지 않는 발바닥으로 꼼짝 못하고 있다. 생각이 자유자재로 녹아 이 신체들은 반응하기 바쁘고 어떤 말이 와서 꽝 하고 닫히는것도 감당 못하는 가련한 상태다.

 

김언 시인의 시는 은유와 환유를 넘나들며 상황극을 보여주는 게 정말 재밌다.

 

북방의 말에서는 점점 추워지는 말을 익히고 있다. 익혀서 먹는 말을 배우고 있다처럼 말()이 먹는 대상이자 배우는 대상이 된다. ‘살아남을까?-들려줄까?’, ‘굳어버린-녹여 먹는’, ‘올라가서 싹을 틔울-흩어지듯이 내려오는’, ‘부러지거나 똑바로 서 있는도 유사한 성격과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동강나기 쉬운 무기와 같은 역설처럼 유지하기 어려운 말을 이토록 내뱉고 있음에도 우리는 늘 굶주려 있고 참고 있는 상태다.

 

극도로 배고픈 말이 참고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대표적 예가 나와 이것, 당신과 그것, 그것 없이도」, 나와 저것시들이 될 텐데 이 대명사들이 사물인지 대상인지 상태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들은 시 속에서 살아서 작동하고 있으며 당신이나 모두를 두루 설명해주고 있다.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모르는데 어리둥절한 채 따라가게 된다. 이해할 수 없거나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읽기를 이해하기를 멈추고 나가버릴 수도 있다. 즉 공통의 이해는 없다는 소리다.

 

나와 이것은 둘이지만 그 둘을 각각 지시하는 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나와 이것은 잘 알고 있다. 서로가 나와 이것을 이해하고 있다. 각자가 나와 이것을 용납하지 못한다면 나와 이것은 더 이상 나와 이것이 될 수 없다. 나와 이것은 함께 다닌다.”

ㅡ 「나와 이것중에서

 

1부가 인간의 고질적인 어떤 상태들을 보여준다면, 2부는 그 근원을 추적하는 고찰, 3부는 그것들이 만나는 관계들(고용, 친구, 가족, 자화상같이 그려진 물 한 잔’에 대한 연작시), 4부에서는 불가능-끝없는 지속-불가지(不可知)에 대한 총체를 보여주는 것 같다.   

 

문제가 되는 곳은 문제가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완벽한 천체에 봉사하는 시녀가 되기에 충분했으므로 후대를 위해 그들이 남겨놓은 것은 불필요한 논쟁과 질문뿐이었다. 가령, 강철보다 단단한 밤하늘을 별은 어떻게 운행하는가? 안개를 걷어차면서 전진하는 인간의 발걸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이 원리를 빛이 대답해주는 것도 아니었고 허점과 동격인 먼지투성이 별이 스스로 밝혀주는 것도 아니었다. 이 모든 일들이천국과 지옥의 운행까지 포함하여한 두개골의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누가 대신 밝혀줄 것이 아니었다. 그 또한 한 두개골의 캄캄하고 물렁한 내부에서 밝혀져야 할 사실이었다.”

ㅡ 「강철보다 단단한 밤하늘을 별은 어떻게 운행하는가?중에서

"말하고 싶었다. 나는 말하지 못했다. 말할 틈을 놓쳤거나 말할 자신을 잃었거나 말할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에 하지 않은 그 말을 그는 알까? 그는 내가 어떤 말을 하지 않았는지 모를 것이다. 그는 내가 어떤 말을 하면서 어떤 말을 숨기고 있었는지 모를 것이다. 그는 내가 어떤 말을 밀쳐두고 어떤 말을 대신 하면서 참고 있었는지 몰랐을 것이다. 알았다면 말했겠지. 그게 무어냐고 묻기라도 했겠지. 묻는 것을 참기라도 했겠지. 그는 정말 모른다. 내가 어떤 말을 하지 않고 있었는지를. 나도 모른다. 그가 하지 않고 남겨둔 말을."

ㅡ「하지 못한 말」중에서

 

, 묻고 싶다. 당신이 이해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많은 것들을 끌어와 제시하는 지성들과 천재들이 맞다고 해서 결론낸 답을 따르고 있는 건 아니고? 이것과 저것 중에 맞다고 생각하는 쪽 편을 드는 건 아니고? 당신의 이해를 이해하는 자는 완벽한가? 그 모든 것에 어떤 결함도 없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텐가? 모르긴 몰라도 한 문장으로도 한평생으로도 어려운 일이다. 언어의 기원조차 명확하게 소급하지 못하는데 이 불완전한 언어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이해로 우리는 참 쉽게 이해한다고 으스대거나 웃거나 말한다. 내게 이해는 너무도 광활하고 어둡고 무겁다. 오늘 나는 여전히 물 한 잔을 이해하기도 어려웠던 거 같다. 그저 밤 벚꽃을 보며 조금 서성이다가 막차를 타고 집에 돌아온 것에 감사했다

 

 

  

 1일 1사진 - 간발의, 곧 간밤의 일이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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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4-03 06: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금 핀 꽃들도 곧 내릴 비에 씻겨져 내려가겠군요. 많은 꽃이 지겠지만, 이런 아쉬움 역시 ‘봄의 기쁨‘ 중 일부일 것 같네요^^:)

AgalmA 2018-04-03 06:56   좋아요 2 | URL
저 꽃핀 거 어젯밤 제대로 봤는데 그것도 한밤에 막차 안 놓치려고 급하게 가는 와중에ㅡ,.ㅡ)....이렇게 가면 나 어떡해~나 어떡해~에에♪~~♬ 사람은 슬픈 걸 참 다양하게 표현하지요;;

2018-04-03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4-03 19:30   좋아요 1 | URL
쓰는 이나 읽는 이나 미로에 갇혀 미로를 즐기는 이상한 게임이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 떠나올 때 우리가 원했던 것
정은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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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더 읽었다. 으레 그렇듯이 첫 독서에서와는 다른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놓친 것들, 내 관심을 덜 끌었던 것들이 이것 이었구나 겪게 되는 독서 여행의 또 다른 묘미이다

 

첫 독서에서는 “(19) 불안과 설렘, 그 둘은 늘 함께한다. 불안을 즐기지 못하면 여행도 즐길 수 없다.” 문장이 좋았지만 두 번째 독서에서는 그 위에 있는 먼 곳으로의 여행은 내게 익숙한 모든 것을 무로 만든다.” 문장이 눈길을 끌었다.

 

그는 “(20~22) 선택은 최악의 여건 중에 내가 견딜 수 있는 경우를 고르는 것이라고, “여행도 삶도 결국 선택이 포개진 결과이자, 그것이 옳았다는 것을 정당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증명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중요한 것은 무엇을 선택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기준을 세웠는지와 그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이겠다는 각오라고 비장하게 말했지만, 독서 여행은 좀 다르다. 앎에 대한 희구와 증명에 매달리는 이도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고 발견하는 걸 그저 즐..는 행위일 때도 많다. 그래서 책을 읽는 걸 우리는 여행이라고도 말한다. 또한 다른 사람과 같은 책을 읽어도 우리는 자신만의 특..한 여행이고 싶어 한다. 책은 충분히 그렇게 해주었다.

 

책 초반엔 문장에 힘이 많이 들어가 있다. 뭔가 보여주겠다는 듯이. 꽉 찬 계획과 각오로 여행을 떠나듯이 말이다. 그러나 여행의 우여곡절 속에 지쳐가다 어느 순간 낯선 이국이 문득 친숙하게 느껴지고 마음이 풀어지듯이 그의 글도 점점 그러해진다. 바르셀로나에서 토마토소스를 빵에 바른 판 콘 토마테를 먹으며 글루탐산이 공통으로 들어 있는 토마토와 간장의 유사함을 생각하고 친숙한 기억과 고향을 음미하며 웃는다. “(84) 여행하싶다는 바람도 한 꺼풀 벗겨보면 웃고 싶은 마음에 다름없다고 말했듯 독서 여행도 그렇다. 깊은 밤에도 비바람 치는 날에도.

 

“(31) 여행이란, 예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그러한 장소와 이야기들을 옮기려 애쓴다.

베를린 전봇대에서 켜켜이 쌓여 역사를 이루는 포스터, 한 민족의 영웅이면서도 소박한 거처 연못가에서 담배를 피우며 잉어 밥 주는 게 취미였던 호치민, 호퍼의 그림과는 대조적인 에드워드 호퍼와 조 호퍼의 돈독한 사랑, 러시아의 예르미타시 미술관을 명작으로 가득 채운 예카테리나 여제의 몰두, 고작 1년 머물렀지만 프랑스 어느 도시보다 루르마랭을 사랑한 카뮈가 아내 프랜신 카뮈와 묻힌 공동묘지, 루마니아를 한 번도 방문한 적 없으면서 드라큘라를 써 많은 이들이 브라쇼브 브란 성을 찾게 만든 소설가 브람 스토커, 애거사 크리스티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배경이었지만 지금은 낙후된 이스탄불의 시르케지역, 바르샤바 쇼팽 벤치를 찾아 산보를 하며 에튀드가 흐르는 벤치에서 만든 추억, 어느 나라든 실체적 진실을 품고 있을 거 같아 찾아가는 시장과 골목, “(155) 어떤 가이드북도 알려주지 않는 진짜 삶과 역사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 여행지에서 사는 지도, 바로셀로나에서 그가 사지 않아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가 됐을 만년필에 대한 상상 등등.

 

일상을 특별한 여행처럼 여기려 하지만 그는 부인할 수 없다.

“(181) 가서 보지 못하면 영원히 깰 수 없었을지도 모를 내 안의 틀, 여행은 낯선 것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189) 여행이란 떠나기 전의 설렘부터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렇다면 일상으로 돌아온 후 추억을 떠올리는 일 역시 여행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라고 한 말처럼 이 책을 펼치며 독자들도 설렜을 것이다. 책을 덮고 여운을 즐긴다. 이제 이 책은 퇴근길에 들르는 단골집이나 여행 기념품처럼 남는다. 우리는 각자의 추억을 지닌 채 다른 여행을 꿈꾼다. 그 여행은 모두 다를 것이다. 어디 있든 굿 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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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4-01 0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고 나니 정말 독서와 여행은 공통점이 많네요.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 설레임을 주는 것처럼 새로운 책을 읽는다는 것 또한 기대감을 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다른 한 편으로 항상 여행만 갈 수 없기에 대부분의 삶을 일상에서 보내는 것처럼, 우리 삶에 주도적인 책들은 ‘인생의 책‘이라할 몇몇 권인것 같기도 하구요^^:)

AgalmA 2018-04-01 00:43   좋아요 1 | URL
그래서 제가 이렇게 책욕심이 많고, 1일 1그림, 1일 1사진 등등 온갖 여행을 하고 싶어하는 게지요ㅎㅎ;

2018-04-01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01 05: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프리쿠키 2018-04-01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갈마님의 봄날을 응원합니다^^

AgalmA 2018-04-01 19:1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북프리쿠키님도 화사한 봄날 만끽하는 시간되시길/
 
굴드의 물고기 책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유나영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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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물학자 닐 슈빈은 인간 몸속에 물고기의 일부가 남아 있는 진화 흔적을 찾아냈다. 인체 해부 구조가 물고기와 유사하다는 이야기는 사실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다. RNA로 시작한 단세포 생명체가 DNA가 있는 다세포 생명체로 진화한 장구한 시간의 역사를 우리가 잘 모르면서도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더 놀라운 일이다. 내 눈이, 내 손가락이 처음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모르면서 인간의 권리와 나라는 주체의 고귀함을 의기양양해 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생명은 또 탄생하고 있을 것이다
  
관광객에게 사기나 치며 하루하루를 임시변통으로 살아온 시드 해밋은 그리 멀지 않았던 19세기 초 기결수이자 예술가였던 윌리엄 뷜로 굴드(빌리 굴드)가 남긴 물고기 책을 우연히 발견한다. 해밋은 그 기록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이곳 인간의 역사가 끝없이 환생하고 있는 이상한 기적을 본다. 끔찍할 정도로 뒤죽박죽인 물고기 책은 굴드가 캥거루 피에서 얻어낸 붉은 잉크, 훔친 보석에서 얻어낸 파란 잉크, 성게에서 얻어낸 자주색 잉크로 꿈처럼 악몽처럼 써 내려간 기록이었다. 해밋은 색의 경이가 그가 속한 세계의 참상을 상쇄해주었을까?”생각했지만 우리가 이 소설에서 확인했듯이 그 색은 삶을 닮았고 담았을 뿐 어떤 해결과도 연결되지 못한다. 해밋은 이 책이 도서관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한 권 더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도서관 책은 굴드가 비굴한 부역으로 그렸던 삽화만 담겨 있는 침묵과 가려진 역사의 권위라면, 해밋이 발견한 굴드 책은 죄수에게 금지된 것을 기어코 남기려 한 말과 폭로의 권위의 책이다그런데 해밋은 물고기 책을 잃어버린다. 필연적이게도 그 책은 사라져 버린다. 마치 물고기처럼 잽싸게. 과연 무엇이 기억이고 무엇이 계시이며 무엇이 역사인가. 광기 안에 진실이 있거나 진실 안에 광기가 있듯, 일체의 선도 일체의 악도 똑같이 불가피한 것이라는 듯 풀잎 해룡은 물속에서 우주를 헤엄치고 있는데
  

한 장의 그림, 한 권의 책은 기껏해야 한 채의 빈집으로 여러분을 초대하는 열린 문에 불과할 뿐, 일단 그 안에 들어가면 나머지 부분은 여러분 스스로가 최대한 만들어서 채워넣어야 한다. 내가 조금이라도 확신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곤 여기서 일어난 일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 무슨 이유로, 이런 것은 분 바른 가발과 검은 법모를 쓴 판사들, 엉터리 비평가 부류에게는 그야말로 장황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죄의식, , 동기, 영감, 선악 따위를 누가 알며,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곤, 구타와 만조를 번갈아 겪는 와중에 간수 팝조이가 등기소에서 빼돌린 싸구려 종이 몇 장을 가져다주고는 컨스터블풍의 목가적이고 행복한 풍경화유쾌한 건초 작업, 팝조이 자신과 똑같은 시골 바보들, 햇빛이 아른거리는 잉글랜드 시내를 건너는 우마차 따위가 등장하는, 판매하거나 다른 물건과 교환할 수 있는 회화를 그리라고 시켰다는 것뿐이다.”(p60~61)

당시 비천한 사생아의 삶이 으레 그랬듯 굴드도 이런저런 죄명에 세라섬으로 끌려온다. 떠돌이 생활을 하며 배웠던 미술 재능으로 선장의 애인을 위한 그림을, 세라섬 외과의사의 야심을 채워줄 물고기 삽화를, 섬을 통치하는 사령관의 치하를 꾸미는 여러 작업을 하지만 그가 예술에 대해 처음 느꼈던 것처럼 덧없는 작업이었다.

 

 

늦여름의 지독한 열기 속에서 사암으로 지은 온갖 흉측한 창고와 세관, 쇠사슬로 엮인 죄수들과 군인들이 득시글한 밴디스먼스랜드의 저 추레한 근대 세계에 도착하자, 나는 이 섬 북부의 수도로 취급되는 론서스턴의 마차 제조공 파머 밑에 배속되었다. 거기서 가문의 반짝이는 문장들을 마차에 그렸고, 구세계의 우스꽝스러운 제복을 차려입고 싶어하는 신세계의 사생아들을 위해 휘장을 고안했다. 뒷발로 일어선 사자, 상록 떡갈나무, 피에 젖은 손, 영원히 우뚝 서 있을 검들이 별다른 이유도 없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마차 문짝 위에서 어수선하게 뒤섞였다. 수간으로 복역중인 한 아일랜드인 성직자가 작문해준 우스꽝스러운 라틴어 문구들, 과거에 악덕이었던 것이 지금은 예의다. 호바트를 보고 죽으라, 봄이라고 항상 꽃이 피는 건 아니다 같은 걸 그 아래 달고서 말이다. 이는 내가 최초로 얻은 값진 예술적 교훈이었다. 즉 식민지 예술이란 새것을 낡은 것으로, 미지의 것을 기지旣知의 것으로, 대척지(오스트레일리아)를 유럽으로, 경멸스러운 것을 존경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희극적인 요령이다.”(p84~85) 

처음엔 살기 위해 굴드가 그리던 물고기는 서서히 만물에 대한 귀 기울임, 깨달음을 얻는 대상이 된다. 그의 그림을 보고 취하는 이들이 자기 식대로 감탄하고 취할망정.

내가 그린 것은 훈훈한 것, 행복한 것이 아니라 차가운 것, 추하고 무시무시하고 겁에 질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게 원한 것은 위안이었지만 이 그림은 절망이었다. 나는 잠재된 폭력도, 광기에 찬 환상도 포착해내지 못했다. 그들은 희망과 진보를 원했지만, 두렵게도 내가 본 것은 부루퉁하게 마주 응시하는별바라기(한국에서는 통구멍이라 부르는 어류)였다! 그들은 새로운 신을 원했지만, 나는 엄청난 혼돈 속에서 그들에게 물고기를 주었다!”(p192~193)
 
"그림을 끝내고 이제 탁자 위에 죽은 채로 놓인 불쌍한 쥐치를 보았을 때, 나는 물고기 한 마리가 죽을 때마다 그 피조물이 품은 사랑의 양만큼 세상이 줄어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고기 한 마리가 그물에 끌려올라갈 때마다 세상에 감도는 경이와 아름다움도 그만큼 줄어드는 게 아닐까? 우리가 포획과 약탈과 살해를 계속한다면, 그래서 세상에 사랑과 경이와 아름다움이 점점 더 결핍된다면 결국에는 무엇이 남게 될까?“(p221)
 
"그토록 오랜 시간을 물고기와 함께 보내면서 그들의 차가운 눈과 떨리는 피부의 무언가가 공기 중을 거쳐 내 영혼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란 불가능해 보였다.“(p236) 

이 소설에서 묘사되는 죄수들의 비참한 삶, 터무니없는 철도역 건설이나 마작의 전당건설, 제국주의 시대 야비하고 잔인한 지배자들의 면모, 그 실상을 폭로하고 증언하려 한 이들의 기록, 굴절되어 남는 역사는 역사학을 공부하고 논픽션 집필에 주력했던 플래너건이 12년 뒤 쓴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과 맥이 닿는다.

그것은 그 모든 피물고기 눈깔의 피, 몸이 찢긴 반란 노예들의 피, 모레파의 못 박힌 어깨에서 철철 흐르던 피, 우리가 짚자리를 걷었을 때 기계 파괴범의 눈에 맺혀 있던 피였다. 또 그것은 나와 그들과 모두를 가두어놓은 이 깨진 세상에 대한 나 자신의 공포였다. 우스운 일이었지만, 그때는 이 모두가 잠시 하나로 묶여 죽어가는 한 마리 켈피(비늘돔의 일종)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그리 우습게 느껴지지 않았다.”(p108)  

섬의 모든 기록이 담겨 있다는 비밀 장소 등기소를 우연히 발견한 굴드는 섬에 대한 모든 것이 날조된 것을 확인한다. 사령관이 호러스 대위로 사칭해 신분을 세탁하고 이 섬으로 흘러 들어와 사령관이 되고 토마스 드 퀸시가 사령관의 가족 앤 누나라고 사칭해 그를 농락한 것이 섬을 광기의 장소로 만든 것만큼 어이없었지만 기록으로 남는다면 그것이 사실이고 역사가 되는 걸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서류란 기억에 대한 신의 농담이자, 현재에 대한 해석 가운데 미래에 전해질 유일한 것이니까.“(p409)

“인생이란 역사화에서 관습적으로 묘사되는 식의 진보도 아니고, 적절한 순서에 따라서 열거되고 이해되는 사실의 연속도 아니다. 그것은 변형의 연속이다. 어떤 변형은 즉각적이고 충격적이며, 어떤 변형은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느리지만 너무나 철저하고 무시무시해서, 우리는 삶이 끝날 때쯤 노망든 자아와 어린 시절의 자아가 일치하는 순간을 찾아 기억을 헛되이 더듬게 된다.
세라섬에서 보낸 오랜 시간이 실은 무한히 느린 변형의 과정이었음을 내가 언제 처음 깨달았는지는 말할 수 없다."(p333)

“이야기꾼은 자기 삶의 심지를 이야기 불꽃에 태워버리는 사람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선량한 트리스트럼 샌디처럼 나는 누구의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내 그림 곁에 단어들의 모닥불을 지펴, 초라한 그림에 담긴 진실의 하찮은 순간이라도 비추는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것이다.”(p109)

굴드는 탈옥해 이 잘못됨을 바꿔줄 사람으로 섬의 반란자이자 혁명가로 여겨지는 맷 브레이디를 찾아 나선다. 천신만고 끝에 그가 찾아낸 것은 그것 또한 사람들이 꿈꾼 허상이라는 사실이었다. 다시 잡혀서 감옥으로 온 굴드는 이 세계를 진짜 뒤바꾸는 것은 한낱 인간이 아니라 세계 자체의 힘임을 목도한다. 그의 교수형을 코앞에 두고 불길이 식민지 전체를 덮친다.

“우리는 각자가 사는 다양한 세계의 연장으로만 불을 언급했을 뿐, 그것이 이 세계의 종말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p396)

교수대에서 탈출한 굴드는 풀잎 해룡으로 변신한다.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가 물고기에서 인간으로 진화했다면 왜 그 역은 되지 못하는가. 그것을 막는 것은 지금 우리의 직선적이고 합리만을 추구하는 시간관념뿐일 수도 있지 않을까. '먼먼 옛날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로만 가능한 일일까. 

“그래서 이 두 가지. 이 둘을 나는 도저히 화합시키지 못하고, 그것이 내 몸을 둘로 찢어 놓는다. 세상이 너무나도 끔찍하다는 인식, 삶이 너무나 특별하다는 감각ㅡ이 두 가지 감정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사람이 물고기가 될 수 있을까? 나의 신비를, 이 질문을, 이 고통을, 이 선과 악을, 이 사랑과 증오를, 이 삶을 풀기 위해 이렇게 멀리까지 찾아온 그대 잠수부들이여, 나를 위해서 이것을 해결하고, 내 이야기를 헤아리고, 나를 이 삶과 결합시켜서, 이것이 내 본성의 불가분한 일부가 아니라고 말해달라ㅡ제발……”(p434)

그러나 역사의 서류철은 우주의 카오스만큼이나 이 모든 걸 뒤섞는다.

 

 

 

웬만해서 오타 지적 안 하는데요. 매우 중요한 오타가 있습니다.
p27 "1928년 그는 세라섬 유형지의 외과의사로부터, 아마도 과학 연구가 목적이었을 텐데, 이곳에서 잡히는 모든 어류를 그림으로 묘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ㅡ 그때가 19세기 초라는 설정인데 “1928”말이 안 되죠. 굴드 사망 연도가 1831년이니 1828이 맞습니다.

 

이 환상적 이야기를 책 표지가 충분히 표현해주지 못하는 거 같아 제 그림으로 좀 바꿔 봤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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