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의미 아닌가. 인간은 기본적으로 그레이트 헝거로 세팅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창동 감독은 하루키 단편에 없는 이야기를 더 추가해 메타포를 더욱 부각했다. 세상의 끝 이를테면 아프리카까지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선 해미는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들을 만나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얘기를 듣는다. 단순히 배가 고픈 자를 리틀 헝거, 삶의 의미에 굶주린 자를 그레이트 헝거라 칭한다. 앞으로 팔을 뻗어 춤추는 리틀 헝거는 무아지경 (삶의) 춤 속에 점점 팔을 위로 쳐드는 그레이트 헝거로 변모한다. 그레이트 헝거가 리틀 헝거가 되는 역방향도 분명 있겠지. 그러나 그것을 참을 수 있을까.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종수의 아버지는 그 역방향의 말로 중 하나다. 아내가 아이들을 두고 도망가게 만들고, 마을 사람들은 물론 가족에게서도 사랑받지 못한다. 급기야 그는 감옥까지 가고 만다. 그에게 늘 의미는 자존심이었고 이제 금고에 꼭꼭 숨겨둔 수집 칼 정도로 남아있다. 
해미가 배우는 팬터마임도 하나의 의미 게임이다. “거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된다고 말하며 그녀는 허공에서 귤을 깐다. 하지만 그 말은 다른 말이 아니다. 우리는 차마 없다고 생각할 수 없기에 거기 무엇이 있다고 지독히 생각한다. 공상허언증자들은 자신의 거짓말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쉽게 믿도록 만든다. 종수는 해미로부터 전혀 모르는 기억들을 전해 듣는다. 학교 다닐 때 그가 해미에게 못생겼다고 한 게 유일한 말이었다는 것, 어렸을 때 해미가 우물에 빠진 걸 발견한 자신이 그녀를 구하는데 일등공신이었다는 소릴 듣고 어느 틈엔가 믿는다. 그녀의 말은 교묘했다. 죄책감을 유발하거나 구원자의 이미지를 씌워 상대를 옭아매는 강력한 언술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언어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자다. 문창과를 나오고도 어떤 소설을 써야 될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음에도 자신이 소설가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거짓이 효과를 발휘하는 이유는 그 속에 조금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해미는 아프리카 사막의 노을을 보며 죽는 건 무섭고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싶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린다. 종수는 그 말과 의미를 깊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의미는 그렇게 쉽게 종결되지 않는다. 성냥불을 긋듯 냉정한 한 마디가 날아온다. 그녀가 아프리카에서 만난 벤은 그녀의 눈물을 보며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벤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위대한 개츠비가 그러했듯 비밀스럽게 살며 다른 사람의 의미를 하품하며 감상하는 자, 요리를 스스로에게 바치는 제물이라고 생각하며 즐기는 자,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2달에 한 번씩 의식처럼 태우는 자.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를 벗어난 그는 있다 와 없다 사이의 의미망과 다른 의미망이 있다. 

 

 

*

“그게 불필요한 건지 어떤지는 자네가 판단하는 거군.”
“저는 판단 같은 거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아시겠어요? 그곳에 있는 것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비와 같은 거죠. 비가 온다. 강이 넘친다. 무언가가 떠내려간다. 비가 판단을 합니까? 보세요. 저는 절대 비도덕적인 것을 지향하는 게 아닙니다. 전 저 나름대로 도덕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도덕은 인간 존재에 무척 중요한 힘이죠. 도덕 없이 인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전 도덕이라는 것은 동시 존재의 균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시 존재?”
“즉 나는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 나는 도쿄에도 있고, 동시에 튀니스에도 있다. 야단치는 것도 저고, 용서하는 것도 접니다. 이를테면 그런 겁니다. 그런 균형이 있는 거죠. 그런 균형 없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물림쇠 같은 겁니다. 그게 없으면 우리는 스르르 풀어져서 말 그대로 조각조각 날 겁니다. 그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동시 존재가 가능해지죠.”

ㅡ 무라카미 하루키 「헛간을 태우다」 중 

 

 

도덕에 대해선 잊어버리고 도덕을 유지하기 위해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벤의 행동은 해미의 귤 까기 팬터마임과 같은 행위다. 벤과 해미의 차이는 벤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는 반면 해미는 극단으로 치우치며 균형을 전혀 잡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종수는?
벤과 해미는 가벼운 나들이 삼아 종수가 소똥을 치우고 있는 파주로 찾아온다. 노을 속에 대마초에 취해 옷을 벗고 그레이트 헝거처럼 팔을 들어 올려 춤을 추던 해미의 맘을 종수는 이해하지 못한다. 창녀나 그렇게 남자들 앞에서 옷을 벗고 춤을 춘다고 그녀 뒤에서 지근거리며 쏘아붙인다. 이후 해미의 행방은 알 수 없다. 해미를 사랑하게 된 종수는 그녀의 실종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 번 생긴 의미는 쉽게 떨쳐 낼 수 없다. 의미의 야누스 같은 의심도 마찬가지다. 종수는 그의 집 근처 비닐하우스를 태웠다는 벤의 말을 의심한다. 그가 매일 새벽 서둘러 동네를 둘러봤기 때문이다. 종수는 벤에 대한 의심이 점점 더 커진다. 그녀 집이 낯설게 정리된 모습, 해미가 아프리카를 갔던 동안 종수가 밥과 화장실 청소를 맡았으나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한 고양이를 벤이 데리고 있는 듯한 느낌, 벤의 집 화장실에 여자들이 남기고 간 소지품 중에 종수가 해미에게 줬던 시계가 있는 것 등등 종수는 그녀의 실종을 벤과 따로 떼어내 생각할 수 없다. 해미의 집에서 자신의 소설을 쓰기 시작한 종수는 이와 다른 '동시 존재'가 되고자 한다. 벤도 사라지게 만드는 것.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에서 무수한 대상 영역들이 의미장 속에 무한히 맞물려 있어 우리가 그것을 동시에 다루지 못하는 혼란 속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의미장 안에 나타난다. 우리의 인식을 현실로 끌어낼 때 그것은 행위로 나타난다. 
최초의 뿌리는 종수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는 벤에 대한 시기와 좌절감이었을 것이다. 다음은 자신은 그녀의 집에서 몰래 수음을 하는 처지인데 벤은 원한다면 해미는 물론 어떤 여자도 유혹할 수 있는 능력과 여유를 가지고 있어 열등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를 응징하는 처벌자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벤을 죽이고 그의 페라리 속에 자신의 모든 옷을 던져 버리고 알몸으로 자신의 트럭으로 걸어간 종수는 다시 태어난 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의미와 의심 속에서 재가 된 자. 스스로 빈 집이 되고 빈 우물에 들어가기를 선택한 자. 거기에 어떤 빛이 어떤 의미가 들어올까.  그 결말이 그가 쓰게 된 소설이나 상상일 뿐이라고 해도 그가 선택한 의미는 남는다.  
해미의 집은 남산 타워를 향해 있는 북향이었으나 낮 한순간 남산 타워 유리창에 반사된 빛이 잠시 들어온다. 그곳에 머무른 사람들 중에 어떤 이는 희망의 빛으로 어떤 이는 너무도 부족한 빛으로 여겼을 것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후자이지 않을까. 그레이트 헝거. 지금 당신은 어떤가. 어떤 빛을 보는가. 어떤 의미를 꿈꾸는가. 당신의 의미가 당신의 삶이며 죽음이다.   

 

 

 

 

 

 

 

 

 

 

 

 

윌리엄 포크너 「헛간 타오르다(Barn Burning)」를 읽고...

짐작대로 이창동 《버닝》의 아버지(분노 조절 장애, 남부의 가난한 소작농, 군인 전력, 폭력적인 남성성)는 포크너에게서 가져온 것이었다. 중요한 건 이 시대 기성세대 한국 남성과 왜 이다지도 비슷한가 하는 점이다. 그 원인을 본성이냐 쉽게 변하지 않는 가부장제 환경이냐 분리해서 보기보다 차라리 그 다일 것이다. 이창동이 포크너의 큰 테두리에서 디테일에서는 하루키를 가져오고 마지막에 자신의 화룡점정을 찍었듯이.

불은 다 타오르면 사라진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혹은 무심히 타오르고 있는가. 그 심지가 우리 욕망이라는 게 가장 어려운 문제겠지. 자신마저 제어할 수 없는 고통. 일그러지며 타오르는 불길. 죽음조차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욕망의 손아귀에서 굴려지는 주사위라는 게 끔찍하긴 하지. 불로불사에 대한 염원, 살인, 사형, 자살의 선택권을 생각해보라. 즉 착각하지 말자. 자연스러운 건 없다. 현상, 현상의 종합은 결론이 아니다. 결론은 우리 머릿속에나 있다. 꿈이나 환상, 이야기로 덮어버릴 수 없는 본질적인 의문이 항상 남는 재 속을 우리는 들여다본다. 우리는 불길이 아니라 재 위를 걷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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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5-22 21: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이야기를 들으니, <요한 복음>에 나오는 내가 주는 물은 생명의 물이라는 구절이 생각나네요. 석가탄신일에 <불경>의 말씀을 떠올렸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불경> 중에는 아는 말씀이 별로 없네요... ^^:)

AgalmA 2018-05-22 22:21   좋아요 1 | URL
성수는 안 먹어 보았고 저는 삼다수가 제일 좋더라는(딴소리쟁이)
어렸을 때는 석가탄신일에 절에 가서 촛농 떨어지는 거 맞으며 공짜밥 먹는 재미도 있었는데 어른되니 그런 재미난 게 없네요(여전히 딴소리)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유종의 미)...

겨울호랑이 2018-05-22 22:29   좋아요 1 | URL
AgalmA님께서는 불자셨군요. 성불하세요!^^:) 참, 수돗물은 역시 아리수지요 ㅋㅋ

2018-05-22 2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5-22 22:20   좋아요 1 | URL
영화 보셨나 봅니다^^...간만에 영화관 나들이였는데 이창동 감독 역시 실망시키지 않더라는^^b
그 놈의 의미로 죽기살기로 사는 거 이제 많이 내려놓았나 싶으면 또 뒤통수 맞고 하는 터라 제가 뭐 대단한 소린 못 하겠습니다ㅎㅎ;;;

2018-05-22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2 2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8-05-23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창동 감독의 전작들에 미치지는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저도 나름 괜찮게 봤어요. 여러가지 다층적이고 확장적인 의미망을 그답게 잘 설계해두신 것 같습니다. 마지막 그것이 환상이라면 종수의 (불완전한) 성장이겠고, 현실이라면 종수의 파멸이겠습니다만..그 마지막의 미장센은..
그레이트 헝거가 되기에는..일단 지금 너무 배가 고프군요. 사무실에서 월급도둑질을 하며 배고픔을 달래야...

잘 지내시지요? AgalmA님이 아무래도 <버닝>리뷰를 쓰실 듯 하여 불쑥 들러봤더니 있네요. 좋은 봄날 되시기를..봄은 이미 많이 갔지만요.

AgalmA 2018-05-23 10:03   좋아요 1 | URL
와와~ 맥거핀님이닷!
역시 예리하신 맥거핀님!
박찬욱 감독처럼 원작에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살리는 걸 눈여겨 봐야겠죠.
마지막 미장센은 종수가 쓰기 시작한 소설의 스토리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다층을 살리는 이창동 감독의 역량을 봐야지 스토리만 좇는 독법으로는 영화가 뻔해지기 쉽죠. 제 리뷰도 다층을 풍부히 살려내지 못했다는 생각이ㅠㅠ....
우리는 동시존재 아닙니까. 배도 고프고 의미도 고프고ㅎㅎ
맥거핀님도 분명 <버닝> 보시고 글을 쓰셨을 거 같은데 안 보여주시고ㅜㅜ....

레삭매냐 2018-05-25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가 <버닝>에서는
어떤 식으로 다루어졌는지 궁금하네요.

우리나라 감독들은 깐느하고는 연이 닿지
않나 싶습니다. 왠지 동양의 대표선수는
일본/듕귁 감독들이 죄다 쓸어간 느낌...

AgalmA 2018-05-25 21:31   좋아요 0 | URL
영화는 여성 캐릭터 스토리를 더 강하게 만들었고요. 결말 처리가 이창동스러웠다고 할까요. 레샥매냐님이 하루키 단편에서 느끼셨던 맥아리없음이 아니거든요. 어찌 보면 결말의 미장센은 김기덕 감독과 유사하기도. <나쁜 남자>나 <피에타>류.

이창동 감독은 상 받고 안 받고가 중요하지 않은 레벨로 이미 오르신~
 

 

"새의 등이 날개 속에 유폐되어 있듯 인간의 영혼은 언어 속에 유폐되어 있습니다"

           

내 그림이랑 딱 맞는 문장! 역시 우리는 통해!

 


샹탈 : 음악이 문학적 창작의 일부분이라는 건가요?

파스칼 : 그건 모르겠습니다. 둘이 나뉘는 게 아니에요. 방금 표현하신 창작자 혹은 창조자는 이 창작이라는 의미를 의식하면 안 돼요. 오히려 허튼소리, 어리석은 말, 스스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 착란 들이라고 말해야 할 겁니다. 그런 창조가 내 눈 밑에 어떤 매개체처럼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으니까요. 창조요? 전 그걸 한 번도 못 봤어요.

샹탈: 『음악의 증오』에서 "음악의 비밀스러운 기능은 소환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음악은 죽음 속으로 끌어들이는 미끼"라고도 하셨어요. 그러나 그건 또 『음악 수업La Leçon de musique』에서 옹호하신 것처럼 일종의 본국 송환, 복구, 수리 같은 거 아닙니까?

파스칼: 맞습니다! 두 책은 은근히 모순적이에요. 음악이 쉴 깊은 침대를 파다 보니 써진 책입니다. 음악과 언어의 상류에서, 그러니까 두 가지가 분화되기 이전에, 운문으로 쓰인 신화에 대한 기억이 탄생하기 이전에, 신들린 상태와 희생제 의식을 구분하는 춤이 탄생하기 이전에 언어는 순수 상태로 유인하는 미끼였죠. 음악-노래-언어는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 무엇을 위한 미끼입니다.

샹탈: 당신에게 음악과 침묵은 어떤 관계인지 더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파스칼: 침묵은 음악보다 앞에 있는 것도 아니고 자연언어보다 앞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침묵은 그것들에 드리워진 그림자입니다. 하나의 음계를 만드는 데 있어 고유한 음이 없듯이, 알파벳을 만드는 데에도 고유한 자음과 모음은 없습니다. 그것들에 선행하는 침묵 없이는요. 이 침묵이 반양립적인, 융합적인 매개물을 침묵하게 만듭니다. 옛 그리스인들은 그것을 카오스라 불렀습니다. 신플라톤주의자와 조르주 바타유는 그것을 연속성이라 불렀습니다. 중세 서양의 기보 음악은 실레테silete를 동시에 고안해냈습니다. 실레테란 '침묵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개시되면서 연속선이 끊어집니다. 홍해가 둘로 갈라집니다. 그러면서 심장 한복판에서 (음악가들이 흔히 빈 마디라고 하는) 엇박자를 내듯 시간이 빠지고, 그러면서 숭고한 아타카를 던집니다. 그다음에야 비로소 숭고한 늘임표 같은 피날레가 옵니다. 죽음이 성의 분화에 거의 맞닿아 있듯이, 침묵은 음악과 맞닿아 있습니다.

 

ㅡ 파스칼 키냐르, 샹탈 라페르데메종 《파스칼 키냐르의 말

 

키냐르의 말은 부유하는 듯하지만 언제나 악기들의 팽팽한 활 같다. 그의 글도 마찬가지로 소환적이고 늘 복귀를 향하며 독자에게 던지는 미끼이다. 나는 환희에 차서 언제나 덥석 문다.
요 며칠 읽고 읽던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에마뉘엘 상데 사고의 본질과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권위와 미국 영어 어법에서 논하던 언어의 속성을 떠올리며 이 불협에 심란해진다.

 

 

"우리의 주장에 따르면 지속적인 범주화 덕분에 인지가 이루어지며, 모든 인지의 토대에는 (모든 것을 고정되고 엄격한 정신적 상자 안에 넣으려는) 분류와 달리 놀라운 유연성으로 사고를 가능케 하는 유추 작용을 통한 범주화라는 현상이 있다.

우리는 유추 작용을 통한 범주화 덕분에 유사성을 포착하고 새롭고 낯선 것에 대응하기 위해 그 유사성을 활용하는 능력을 얻는다. 또한 새롭게 접한 상황을 오래전에 접했으며 부호화되어 있고 기억 속에 저장된 다른 상황에 접목함으로써, 이전 경험을 활용하여 현재 속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유추 작용은 두뇌가 지닌 이런 능력의 초석으로서, 무작위로 예를 들자면 개, 고양이, 기쁨, 체념, 모순처럼 라벨이 붙은 개념뿐만 아니라 그때 나는 뜻하지 않게 문이 꽝 닫히면서 살을 에는 듯한 날씨 속에 집 밖에 남겨지게 되었다처럼 라벨이 붙지 않은 개념까지, 과거에 뿌리를 둔 풍부한 지혜의 창고를 활용할 수 있게 해준다. 구체적이든 추상적이든 간에 이런 개념은 매 순간 선택적으로, 거의 언제나 자각 없이 동원되며, 이 쉼 없는 활동이 우리가 처한 상황의 정신적 표상을 구축하여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고차원적인 사고뿐만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어떤 사고도 과거의 정보 없이 형성되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오직 현재와 과거를 잇는 유추 덕분에 생각할 수 있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에마뉘엘 상데 사고의 본질


호프스태터 & 상데, 월리스는 기본적으로 언어 문법이 생물학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촘스키 보편 문법을 따른다. 그들은 규칙과 질서로 세계를 재구성한다. 키냐르는 좀 다르다. 그가 언어와 음악의 중추라고 생각하고 강조하는 것은 카오스적인 침묵이다. 앞선 이들처럼 논리적으로 말한다면 키냐르가 인터뷰에서  말하는 것은 유추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늘 그렇듯 비밀로 감싼다. 어찌 보면 그가 어릴 때 음식을 거부했듯 극도의 거부 반응처럼 느껴진다.

 


상탈: "우리가 어떤 것을 말할 때, 화가가 어떤 것을 말할 때, 음악가가 어떤 것을 말할 때, 그것을 알지 못한다. 베르크하임 같은 도시가 쾰른이라 불리는 또 다른 도시와 지척임을 알고 나서, 당신의 아이를 키운 여인이 바로 거기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순간 대단히 이례적이게도, 극히 사적인 어떤 영역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 순간은 언어에 선행했던 어떤 것을 말하기 위해 비로소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이며 그때 이뤄져서는 안 될 어떤 것이 내게 이뤄진 것 같아 보인다"라고 당신은 로익 주르댕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를 좀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을까요?

파스칼: 글쎄요, 직접적으로는…… 자기 고유의 광기에 대해서는 기만할 수밖에 없지요.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요…….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이미 살았습니다. 태어나면서 우리는 울부짖습니다. 다른 자들의 입술 위에 있던 국어를 배우기 이전의 외침, 누더기 같은 목소리 조각들이랄까요? 다른 자들의 입술 위에 있던 그 언어에 압도당해 무너지면서 이른바 언어의 습득이 시작됩니다. 서서히 안에서 모음을 발성하게 되고, 그게 군群을 이루면서 말을 하게 됩니다. 간헐적인 메아리 현상처럼요. 우린 그걸 의식이라고 부르지만 타자의 소리가 반향되는 겁니다. 획득 언어, 사회 언어는 우리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이어 그다음은 해선 안 됩니다. 이건 세상에 있는 그 누구와도 상관없습니다. 선행했던 야만성과 세계의 재판정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길들이기는 전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비약, 코나투스conatus, 오렉Orexis 같은 것이 그 자체로 역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명명되어서는 안 됩니다.

 

ㅡ 파스칼 키냐르, 샹탈 라페르데메종 《파스칼 키냐르의 말

 

키냐르의 단호함. “의식은 획득 언어의 메아리 방에 불과하며, “모든 것은 언어적으로 구축된 가공물이자 언어를 통한 재번역에 따라 완전히 변하는 오열이자 징후라고 말하는 그의 말은 감동적인 수사이지만 단순하게 보면 행동주의 심리학처럼 냉정하다. 그래서 그의 사유를 내가 더 좋아한 건지도 모르지만, 종국의 관점에 대해서 지금의 나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거 같다. 나는 계속 언어를 좇는다. 이번 생에서만 하고 두 번 다시 안 하고 싶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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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5-10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어 대한 접근태도를 정하는 문제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문화권마다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는데, 언어의 보편성을 강조하다보면 자칫 언어(또는 문화)의 우생학쪽으로 빠질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AgalmA 2018-05-10 17:58   좋아요 1 | URL
늘 두 가지 이상의 상이한 대립이 있어서 항상 양쪽을 살펴야 해 진짜 골치 아파요. 키냐르는 또 다른 변수로 등장했다고 봐야겠죠. 침묵이라니! 항상 하던 소리라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그래서 촘스키가 생물학적 결정론자라며 우생학적이라고 비난을 듣기도 하잖아요;;
 

 

 

하루키 책을 대부분 팔았기 때문에 다시 샀다.
또 읽어도 역시 좋군!
기분이 안 좋을 때
하루키, 책과 맥주, 피자, 디저트, 구구크러스터 .... 끊을 수가 없어. 왜죠.


이런 날은
레코드를 아무렇게나 정리하는 정신 나간 난쟁이가 나오는 하루키 단편을 보는 것도 좋겠지.

"꿈에 난쟁이가 나타나 춤을 추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것이 꿈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꿈속에서도 몹시 지쳐 있었다."
ㅡ 「춤추는 난쟁이」첫 문장

 

난쟁이와 얘기하며 포도를 먹는 주인공에 맞춰 나는 방울 토마토를 먹었다. 왜 포도야? 꿈이라서?

리처드 브라우티건 《워터멜론 슈가에서》와 연관성을 떼기 어려운 단편이지만 그래도 좋다.
「헛간을 태우다」라는 같은 제목의 포크너 단편을 읽은 적도 없었고 포크너의 단편인 줄도 모르고 제목을 썼다고 말하고 있듯이 「춤추는 난쟁이」와 《워터멜론 슈가에서》 유사함은 단지 내가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나도 아무도 모르게 헛간을 태우고 싶어서 소심하게 쓰레기통을 태우기도 했는데...
삶이 너무도 소모적이고 보잘 것 없이 느껴지니
불안보다 불쾌가 더 많은 인생을 어찌 하란 말인가!
「헛간을 태우다」 단편 참 좋아하는데 이창동 감독 내 취향 저격했어!
《버닝》 꼭 보러 간다! 



「반딧불이」, 「비 오는 날의 여자 #241 · #242」를 제외하고 이전에 읽었던 단편들이었지만 다시 읽어도 다 수작이었다. 짧은 여행용에는 좋지만 긴 여행에는 추천하기 어렵다. 너무 잘 읽혀서! 뭔가 엄청난 걸 말해 줄 건가 기대했는데 작가의 말  「내 작품을 말한다」 너무 짧아 아쉬웠다. 그게 또 하루키 스타일이긴 하지만서도...


「헛간을 태우다」에 나오는 이상한 선곡처럼 마일스 데이비스와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틀어 보았다.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속에 나오는 묘한 버스를 타고 가는 왼쪽 귀가 안 들리는 불안한 소년이 된 기분이 잠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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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8-05-05 0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 너무 하루키 다워요. ^^하루키가 이 사진을 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다시 샀다˝는 대목이 왜 이리 반갑죠?

단발머리 2018-05-05 07:56   좋아요 1 | URL
blanca님 말씀이 딱이네요!!
사진이 너무 하루키다와요~
하루키 읽다가 하루키처럼 되어버린 Agalma님!!

AgalmA 2018-05-06 14:57   좋아요 0 | URL
음...하루키 캐리커처 제가 그린 걸 하루키가 봐 줬으면 싶은데요ㅎㅎ; 봐도 좋아요 같은 건 안 누를 거 같고 ˝음...이게 나? 그렇군˝ 하고 말 거 같은ㅎㅎ;;

그...그런가요. blanca님과 단발머리님이 그렇다고 하시니 그런가보다 싶지 저는 저 사진에서 하루키다운 걸 전혀 모르겠어요^^;;; 땅콩껍질이라도 수북이 있으면 또 모를까ㅎㄱㅎ;;

페크pek0501 2018-05-05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제목에 꽂혀 들어왔어요.
저도 하루키 책은 많이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AgalmA 2018-05-06 15:09   좋아요 0 | URL
하루키에게서 얻는 위안들이 다들 있는 거 같아 훈훈하네요^^

북프리쿠키 2018-05-05 2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특별한 맛은 없지만, 그 점이 특별한.
지치면 다시 찾는 건강식? 하루키 좋아요^^;

AgalmA 2018-05-06 15:11   좋아요 1 | URL
레시피도 잔뜩 주고, 음악 가이드도 잔뜩 주고, 여행 가이드, 체력 관리(마라톤) 조언 .... 뭐 어디든 도움이 되는 선생이랄까요ㅎ

양철나무꾼 2018-05-08 1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님의 그림체는 무궁무진하군요.
하루키 그림체 이뻐요~^^

AgalmA 2018-05-10 16:05   좋아요 0 | URL
애정이 있어서 더 그런 걸까요^^ . 감사요/ 헤헤
 
다동력 -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는 힘
호리에 다카후미 지음, 김정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이것이다.
“‘다동력(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는 힘)’은 대량의 업무를 처리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다. 생명이 다할 때까지 1초도 낭비하지 않고 인생을 즐기기 위한 삶의 방식이다.”(p199)
 
성공하기 위한 마음 자세와 비법을 알려 준다는 자기계발서는 몇 권만 읽어봐도 핵심 줄기는 거의 동일하다. 호기심 천국이 될 것과 시간 관리를 잘 하라는 것. 이 책도 그러한 것을 말하고 있다.
 
흔히 꾸준함성실함을 미덕처럼 생각하지만 그 이면에는 현실 안주창의적인 도전 의식의 결여라는 결점도 있다는 걸 생각해봐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다동력 각기 다른 여러 가지 일에 끊임없이 빠져드는 힘이라고 말하며 균형 따위 생각하지 말고 편향적, 극단적으로한 가지 일에 푹 빠져들라고 조언한다. 한 가지를 깊게 파고들면 그 분야의 진수를 알게 되어 다른 곳에도 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싫증도 두려워할 필요 없다. 어떤 일에 능숙해졌을 때 싫증은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고 다른 도전 거리를 찾는 성장의 신호로 읽을 수 있다.

일견 저자 말이 모순으로 들릴 수도 있다. 좋아하는 거 마음껏 하라고 하면서 깊게 파는 성실성은 소용없다 말하니까. 재미에 빠져 무언가에 심취하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그러다 보면 스스로 터득한 노하우로 다른 것에도 순간적 집중과 요령을 발휘할 수 있다. 다동력은 여러 가지를 되는 대로 얕게 파는 건 아니다. 하나가 또 하나를 끌어들이며 함께 추진되는 과정을 말한다.
 
하지 않을 일’, ‘상대하지 않을 사람을 정해 놓고 하루 24시간 중에서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는 시간을 줄여 나가는 것은 나 자신의 시간을 획득하는 가장 중요한 전제이다. 이 대전제를 바탕으로 모든 일을 더 효율적으로 해나갈 궁리를 하게 된다. 비정할지도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이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없고 완벽할 수도 없다. 호리에 씨의 추진력은 이런 선택과 배제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걸 참고해 각자 능력껏 조율할밖에^^.
 
“‘어떻게 이 사람은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은 모두 원액을 만들고 있다.” 그들의 발언이나 아이디어에 많은 사람이 열광하고 움직이게 된다. 즉 효과가 발생하면 증폭되기 마련이다. ‘원액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원액을 키우기 위한 방법으로는 가지와 잎이 뻗어 나갈 수 있게 교양 지식을 쌓는데 노력을 기해야 한다. 창피를 두려워하지 말고 물어보거나 구글링 등으로 즉각 수정해 나간다. 자신의 내부에서 논점이나 의문을 제대로 정리해 좋은 질문능력을 키워야 한다. “좋은 질문을 하지 못하면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동시에 고속으로 진행할 수 없다.” 논점을 명확히 하며 정보를 모은 것을 수렴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배제하는 습관도 중요하다.

 

HIU 참가자에게 살처분당하는 고양이가 불쌍한데 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해 좀 더 의견을 개진하지 않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질문자는 살처분당하는 고양이가 불쌍하다”, “왜 다들 좀 더 행동하지 않는 것인가라는 말을 반복했지만, 감정론은 영원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ㅡ 「5장 자신의 분신에게 일을 시키는 비법‘18. 회의의 99퍼센트는 필요 없다중에서 

저자는 빠르게 일을 진행하기 위한 방법으로 스마트폰 최대한 활용하기, 속도가 아니라 리듬으로 진행하기(ex-끝나지 않는 업무를 노동 시간 증가로 해결하려 않는 것), 일의 정체가 일어나지 않게 끊임없이 궁리하기 등이다.

 

 

재해나 사고 현장에서는 긴급 파견된 의사가 트리아지라고 부르는, 치료 우선순위를 정하기 위한 부상자 분류 작업을 즉단 즉결로 진행한다. 대량의 부상자와 이재민이 넘쳐나는 현장에서는 즉시 구명 구급 의료를 실시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한 환자를 최우선으로 치료한다. 그런 다음 중상자를 치료하고, 부상이 가벼운 환자는 미안하지만 마지막까지 기다리게 한다. 재해나 사고 현장에서는 냉정하게 트리아지 실시하지 않으면 구할 수 있는 목숨도 구하지 못하게 된다.
이 작업을 다른 업무에서도 실시해야 한다. 일을 못하는 사람, 일처리 속도가 느린 사람은 시작 단계에서 업무 분류 작업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선순위를 정하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시작하기 때문에 중요한 업무와 아무래도 상관없는 업무가 뒤섞여 혼돈 상태가 되는 것이다. ㅡ 「6장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업무술, ‘21. 한가한 사람일수록 답신이 늦고, 바쁜 사람일수록 답신이 빠르다중에서  

충분한 ​수면과 건강 관리는 기본 조건이고, 저자의 조언 중 발상의 순서도 중요하게 체크해 볼 부분이다

 

○○을 하고 싶다. → ○○가 필요하다가 되어야 하는데, ‘○○을 가지고 있다. → ○○을 하지 않으면 아깝다같은 발상을 하면 대체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한다.
ㅡ 「8장 인생에 목적 따위는 필요 없다, ‘29. 자산이 사람을 망친다중에서

저자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사람이다. 목적 따위 두지 않고 새로운 것에 흥미를 잃지 않기 때문에 스트레스 없이 놀이경계 없이 자연스레 하루 24시간을 만끽하며 살고 있다. 현재 생활이 정체되어 있다는 고민에 싸여 있다면 이 책을 읽고 생각을 재점검해보는 것도 좋겠다. 삶이 재미없고 힘든 것은 삶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 생각의 발상이나 비효율적 시간 관리 때문일 수도 있다. 다행히 2시간 이내로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니 당신의 시간을 크게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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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긴 침묵)

  파이 파텔 : “그래서 내 이야기가 마음에 안 드나요?”

  오카모토 : “아니, 마음에 들었습니다. 안 그런가, 아츠로? 당신의 이야기를 오래오래 기억할 거예요.”

  치바 : “그럴 겁니다.”

  (침묵)

  오카모토 : “한데 우리가 조사를 해야 돼서,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요.”

  “진짜 무슨 일이 있었냐구요?”

  “네.”

  “그러니까 다른 이야기를 원하신다?”

  “저…… 그건 아니고. 진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싶군요.”

  “뭔가 말하면, 어쨌건 이야기가 되지 않나요?”

  “저…… 영어에서는 그렇겠지요. 일본어로 이야기라 하면 ‘창작’의 요소가 들어가게 돼요. 우리는 창작을 원하지 않아요. 영어로 ‘직설적인 사실’만 원하죠.”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은―영어든 일본어든 언어를 사용해서―이미 창작의 요소가 들어 있지 않나요?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도 이미 창작의 요소가 있지 않나요?”

  “저…….”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안 그래요?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 붙이지요. 아닌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요?”

  “하! 하! 하! 정말 똑똑하군요, 파텔.”

  치바 :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겁니까?”

  “나도 몰라.”

  파이 파텔 : “현실을 반영하는 언어를 원하나요?”


  “그래요.”

  “현실에 반하지 않는 언어요?”

  “바로 그겁니다.”

  “하지만 호랑이는 현실에 반하지 않아요.”

  “제발 부탁이에요, 이제 호랑이 이야기는 그만해요.”

  “두 분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요. 놀라지 않을 이야기를 기대하겠죠. 이미 아는 바를 확인시켜줄 이야기를 말이에요. 더 높거나 더 멀리, 다르게 보이지 않는 그런 이야기. 당신들은 무덤덤한 이야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붙박이장 같은 이야기. 메마르고 부풀리지 않는 사실적인 이야기.”

  “저…….”

  “동물이 안 나오는 이야기를 기다리죠.”

  “네!”

  “호랑이나 오랑우탄이 안 나오는.”

  “맞아요.”

  “하이에나나 얼룩말이 안 나오는 이야기."

1977년 7월 2일에 침몰한 배에서 탈출해 1978년 2월 14일 멕시코 해안에 도착할 때까지 227일 동안 인도 소년 피신 몰리토 파텔이 살아낸 해양 모험담. 

영화를 보고 한참만에 소설을 읽었다. 스펙터클한 영상이 압도할지라도 영화가 다 담지 못하는 매력이 역시 글에 있었다.

영화에서처럼 날렵한 호랑이도, 좁디좁은 구명보트도, 바다도 눈부시게 거기 있었다. 이 모험을 이야기라고 생각했기에 즐겼고, 오랑우탄과 하이에나와 얼룩말이 어머니와 프랑스 요리사와 선원으로 바뀌는 대목에서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영화가 담지 않은 혹은 못한 명장면도 발견했다. 영양실조에 눈먼 호랑이와 파이가 조난 당해 떠돌던 또 다른 눈먼 자를 잡아먹는 환상적인 이야기. 이 장면은 파이가 요리사를 죽이고 먹는 장면을 우화처럼 나타낸 것처럼 보인다. 공포와 절망감을 극복하지 못할 때 동물적 본능은 우리의 이성보다 종교보다 빠르고 강하다. 본능조차 우리가 가고자 하고 믿고자 하는 방향 아니던가. 파이는 종교가 빛이라고 생각했고 빛을 만끽하듯 모든 종교를 다 받아들였던 아이였다. 채식주의자였지만 거북을 어떻게 먹어야 가장 효과적일지 고심해야 했고 시간을 정해 예배를 올리고 리처드 파커를 보살폈다. 이율배반일까. 마침내 지상에 도착했을 때 혼자가 되고 호랑이가 사라지고 나자 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나는 안간힘을 쓰다가 모래사장에서 쓰려졌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완전히 혼자였다. 가족도 없는데 이제 리처드 파커도 없이 혼자가 되어버렸다. 신마저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신도 없었다. 보드랍고, 단단하고, 드넓은 이 해변은 신의 뺨 같았고, 내가 거기 있자 어디선가 두 눈이 기쁨으로 번득이고 입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몇 시간 후, 나와 같은 종족이 날 발견했다."

살아남은 파이가 동물학자이자 종교학자가 된 건 인간이 양극단 사이에서 평생 살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인간은 권태와 공포를 벗어날 수 없고 이성의 힘 없이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바다에서든 육지에서든 우주에서든 변하지 않는 사실이고 이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보통의 인간 삶이다. 호랑이는 냉혈한 프랑스 요리사이자 무시무시한 생존본능이면서 동시에 파이가 이성을 잃지 않도록 하는 파수꾼이기도 했다. 우리는 타인에게 더없는 맹수이자 지옥일 수도 있고 구원자이자 천국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날씨보다 더 변화무쌍한 게 사람 맘이라 모두가 이리도 힘들다. 궂은 날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게 다소 희망일까. 순수한 아이로서 신을 받아들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불행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참 인간적이고 종교적인 이야기다. 그런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수수께끼로 남기면서.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할수록 사라진 리처드 파커의 뒷모습이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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