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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없음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4
장은진 지음 / 민음사 / 2016년 11월
평점 :
나는 ‘핍진성’이란 문학 용어를 싫어한다. 독자들이 설득될 만한 개연성을 못 만들어냈다고 한국에서는 비난할 때 주로 쓰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서 가장 골치 아픈 요소는 독자다. 어떤 독자는 설득되고 어떤 독자는 설득되지 않는다. 뛰어난 거장의 작품도 어떤 독자에겐 두껍고 길기만 한 시시한 이야기로 남는다. 어떤 작품은 이해하기 어려운데도 걸작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실제로 우리는 핍진성을 잣대로 《오뒷세이아》나 《일리아스》, 《돈키호테》를 평가해 걸작이라 말하는 게 아니다. 이 경우는 공감을 넘어 작가가 구축하는 세계가 독자의 상상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장은진의 장편소설 《날짜 없음》에서 공감되는 상념, 아름다운 문장들은 많았지만 내 상상을 깨주는 것은 얻을 수 없었다.
그로테스크한 디스토피아 세계를 담으려 한 시도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지만 인물들이 그 속에 제대로 어우러져 있지 않았다. ‘그게’ 온다는 흉흉한 세상에서 종말이라는 메타포가 무색하게 그들은 그저 일반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 이상을 상상할 수 없는 작가의 한계가 가장 크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회색인이나 폭도들은 엑스트라로 왔다 갔다 할 뿐 연인이 살고 있는 컨테이너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 작가가 독자에게 느끼게 하려는 위협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그런 식으로 이 연인의 공간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작가는 ‘종말의 순간에 있는 연인’이란 설정을 사랑해 보호만 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심하게 다툰 날은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서운한 문장들을 주고받게 되는지, 연애가 좀 더 깊어질 때는 어떤 놀라운 문장들이 상대방의 몸을 타고 탄생하는지, 갑작스럽게 권태가 찾아오는 순간에는 무슨 문장들로 그 지겨운 시간들을 버텨야 하는지 모르는 순진한 연인”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세계의 무시무시하고 힘겨운 얼개들과 씨름하며 풀어 보려는 의지는 읽히지 않는다. ‘작가의 말’에서 고통과 절망 속에 홀로 백지 위에 서 있다고 말하는 일종의 작가의 폐허 의식이 그대로 반영되기만 했다. 그러나 폐허를 뚫고 나오는 소설들은 얼마나 많았는가.
주인공 해인이 마지막 의식으로 남자의 단추를 달아주고 그걸 홍 할머니나 옛 여자 친구가 칭찬하듯 바라봐 주는 설정은 습작생들이나 하는 전형적인 클리셰다. 그 단추는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을 때 가장 빛날 수 있다. 독자가 이걸 알아봐야 한다고 강조하는 작가의 노력이 이 소설에는 너무 드러난다. 진수와 반(半)의 죽음도 코스 음식처럼 차례차례 등장한다. 진부하게 말하는 죽음, 진부하게 닥쳐오는 종말. 종말을 잘 모르기 때문에 분위기로만 덮으려는 수많은 묘사들.
종말보다 소설 때문에 나는 괴로웠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핍진성’을 따지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렇게 결론지을 수밖에 없겠다. 지극히 공감하는 독자는 설득될 만한 소설이고, 이 세계에 빠져들지 못하는 독자는 스쳐 지나가게 되는 ‘글로 이뤄진 세계’일 뿐이라고. ‘핍진성’ 문제가 아니다. ‘세계와 정면 승부하려는 노력은 없는 관찰적이고 자기 충족적인 한국문학의 오래된 문제’이다. 물론 세계와 부딪히길 원하지 않는 것도 작가의 자유다. 일개 독자인 내가 이랬어야 했다 저랬어야 했다 어쭙잖은 훈수를 두고 있다는 것도 안다. 미안하면서도 작가가 백지를 이기려면 이걸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자낙스를 씹어 삼키는 심정으로 이 아픈 리뷰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