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규원 시전집 2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의 감옥》(1991),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 소리》(1995),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1999), 동시집 나무 속의 자동차》(1995)로 묶여 있다. 시 외엔 편집 의도라든지 해설 등 어떤 부연 자료도 없는 부실한 전집 구성이다. 한국 시단의 큰 시인이라 섣불리 종합평을 넣기 어려워서 였을 수도 있지만 이건 좀.

시집 4권을 다 구비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가격면에서 구매하기 괜찮은 시집이겠으나 시 해설 등으로 시의 이해를 원하는 독자들은 각각의 시집을 사는 것을 권한다. 오규원《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2005) 시집에서는 정과리 평론가가 무려 58페이지에 달하는 해설을 썼다-_-; 

 


전집 구성이 한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오며 발전상을 보는 의미도 있겠고 그 정서에 공감하는 독자에겐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나는 좀 짚고 싶은 게 있다.
80~90년대 한국 시집에서 흔히 느끼게 되는 단점들을 이 시집에서도 역시 발견한다. 그 시대 특유의 자의식이라든지 '월남치마, 비디오 가게, 롯데 목캔디, 둘코락스, 옥경이...' 같은 시대성 묻어나는 단어들과 표현들이 그때를 넘어 지금까지 유효하게 작동하는가 하면 내겐 그것들이 낡아 보인다. 당시의 핍진성은 담았을지 몰라도 현대성 혹은 보편성으로 살아 숨 쉬는가에 대해서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런 단점 때문에 요즘은 시든 소설이든 의도가 아니라면 특정한 시대나 경향을 드러내는 고유명사나 명칭을 잘 쓰지 않는다. 표현이 좀 객쩍은데 베스트셀러 시인;인 기형도 시만 봐도 그걸 최대한 배제한 걸 볼 수 있다. 기형도 시의 인기 비결 중 하나다.
또 오규원 시인의 다른 단점으로 '여자', '아랫도리' 같은 성적 표현과 연결도 전형적인 남성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최근의 성폭력 사건 아니더라도 '대상화된 여성'은 요즘 남성 시인들 시에서도 여전하다.


오규원 시인은 도시성으로 시를 쓸 때보다 자연 속에서의 관찰이 더 돋보이는 시인이다. 자연에 대한 흔한 관조가 아니라 회화적인 구조와 언어 속에서 의미를 톺아보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오규원 시인의 독특한 인식적 세계관이 극명히 드러난다.

이를테면 이런 표현.

 

여자의 치마 속에서 무슨 일인지
공기가 몇 번 몸을 부풀린다
이 길에서는 소리가
고요의 한구석이다
길에 고인 물속에서 새 그림자 하나
다시 길 위로 급히 오른다
새는 어느 허공에 묻혔는지 보이지 않고

- <처음 혹은 되풀이>



바람이 불어도 절은 뒤에 있는
하늘에 붙어
흔들리지 않는다

- <절과 나무>


비가 온다, 대문은 바깥에서 젖고 울타리는 위서부터 젖고 벽은 아래서부터 젖는다
비가 온다, 나무는 잎이 먼저 젖고 새는 발이 먼저 젖고 빗줄기가 가득해도 허공은 젖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시도 젖지 않는다

- <비> 전문



사루비아를 땅에 심었다 꼿꼿하게
선 그 위에 둥근 해가 달라붙었다
사루비아 옆은 여전히 비어 있다
모두 길이다

- <사루비아와 길> 전문

 

 

 

 

대개 시를 감상적으로 음미하거나 해석하기 쉬운데, 오규원 시인의 눈은 카메라만큼 즉각적이고 냉철하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상처란 무시무시한 내면성이다‘를 빗대어 보면, 인식이 뼈대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오규원 시인의 시는 무시무시한 세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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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7-03-26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규원 저, <현대시작법>을 재밌게 읽었던 때가 있었어요.

1) ‘월남치마, 비디오 가게, 같은 말들을 장점으로 생각하면 그 시절의 시대상을 알 수 있다는 점이겠고(저는 비디오 가게, 라는 말이 반갑네요.)
단점으로 생각하면 시대에 뒤떨어져 잘 와닿지 않음이 되겠네요. - 공감 부족.

지인 중 수필집을 낸 분이 말하기를, 수필도 바로바로 발표해야지 묵혔다가 책으로 내면 이 시대와 맞지 않는 글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분은 수필마다 글 끝에 그 글을 쓴 해를 기록해 놓잖아요.

2) 그러니까 시대(현재와 과거)와 세계(동양과 서양)를 초월한 보편적인 느낌이나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글을 써야겠군요.

유익한 것 얻어 갑니다.

AgalmA 2017-03-26 20:40   좋아요 0 | URL
<현대시작법> 공부 많이 되는 책이죠^^

시대상은 시가 아니어도 다른 분야에서도 많은 작업이 있죠. 시에서 특히 그걸 다룰 땐 재료의 나열 이상이 되어야 문학적 성취를 낳을 수 있을 겁니다. 상당히 피곤한 일이지만 그런 철저한 의식없는 취사선택이 느껴질 때 글에 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때라는 것도 중요하지만요. 그러한 때를 잘 포착한 작품들이 인기받기도 했죠. 기성사회의 것들을 적극 가져온 유하시인 시집도 그랬다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그 시집이 지금도 시효성이 여전한가에 대해선...

하루키가 감성팔이라고 깎아내리지만 그가 만드는 공간, 감정의 영역들 보면 보편성을 끌어내는데는 참 실력자라는^^

희선 2017-03-28 0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를 많이 보거나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여성 시인은 남성을 나타내는 시가 덜한 것 같은데 남성 시인은 그런 걸 자주 쓰는 듯해요 시도 쓰는 사람 자유니 그럴 수도 있지, 해야겠군요 그걸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기도 하겠습니다 그때를 사는 사람은 알아듣는다 해도 그때가 지나면 오래된 것이 되는 게 있죠 쓸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한데... 아니 아주 하지 않는 건 아니겠네요 책을 읽고 쓰는 것도 시간이 지났을 때 보면 그때와 맞지 않는 것도 있어요 그 시간이 길지도 않은데 그렇군요


희선

AgalmA 2017-03-28 00:59   좋아요 1 | URL
김수영 시인은 ‘시인은 자기 시의 장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모든 작가도 자신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 100% 알 수 없습니다. 다 쓰고 나서 확인은 할 수 있겠지만 그때 그는 독자 입장이죠. 이미 달라지는 겁니다. 또한 그것을 읽는 2차 독자도 있습니다.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을 읽어낼 수도 있고 완전히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죠. 그렇다고 독자가 결정자냐? 누구도 그렇다고 말할 순 없을 겁니다.
시인도 시대를 사는 인간이기에 시대성을 피할 순 없을 겁니다. 100년이 지나도 독자에게 다가오는 시는 그래서 희귀한 거죠.

21세기컴맹 2017-03-30 14: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잎의 여자
늘 그리운 😗😳

AgalmA 2017-03-30 16:19   좋아요 1 | URL
그 시 김승옥 <겨울여자> 스러운 데가 있어요ㅎ. 1989년 변진섭 ˝희망사항˝도 비슷한 맥락으로 흐르는가 싶지만 작사가가 노영심 씨였다는 게 다른 변주를 가능하게 했죠. 엔딩에 여성의 목소리를 끼워 넣었으니까요. ˝여보세요 날 좀 잠깐 보세요 희망사항이 정말 거창하군요
그런 여자한테 너무 잘 어울리는
난 그런 남자가 좋더라˝
누구나 상대를 일정 부분 대상화해서 보는 걸 피하긴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얼마나 직시해보려 노력하는지는 글을 통해 드러나죠. 너무 늦지 않게 제 부족함도 깨닫길 바라죠.

21세기컴맹 2017-03-30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리 늘 성실히 써주심 미안해서 댓글 쉬이 못 남겨요
모두가 추억거리가 되었습니다.
해바라기 모두가 사랑이예요,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