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뒤르켐 《자살론》에 따르면 19세기(1854~ 1880) 자살 동기로 압도적인 원인은 ‘정신 질환과 종교적 맹신‘이다. 남녀, 직업적 차이도 없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관습이 그 기원을 상실하고 모호해져 새로운 필요에 상응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빛을 찾게 된다. 이것이 바로 종교가 호소력을 잃자마자 지식의 최고 종합적 형태인 철학이 가장 먼저 등장한 이유다. ˝ 뒤르켐은 자연조건이 자살에 영향력 있는 조건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왜 여름에 가장 자살률이 높은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낮이 긴 만큼 사회 활동이 더 많기 때문일 거라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제시했을 뿐이다. 여전히 살인율도 여름에 가장 높은데 이 잣대로 보면 일견 타당할 것이다.
요즘은 범죄자와 범죄에 있어 환경 문제에 더 방점을 두고 있다. 학대받았던 불우한 어린 시절, 좋지 못한 주거 환경이나 주변 인물들, 제대로 받지 못한 교육, 사회 냉대와 무관심 등등. 범죄 예방에 있어서도 cctv, 체계적 시스템 등 환경 조성으로 실질적으로 범죄를 줄이는 효과를 보기도 한다. 그러나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라는 용어의 탄생처럼 사람의 본성적 영향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파괴력을 인간의 본성에서 더 찾는 듯하다.
내가 에밀 뒤르켐을 통해 가져온 내용들은 《죄와 벌》에서 라스꼴리니꼬프의 살인에 대한 설명에도 잘 맞아떨어진다. 그는 살인 전에도 후에도 정신 질환자의 모습이다. 그는 범죄에 관한 논문에서 ˝범죄의 실행은 언제나 병을 동반한다˝고 밝히기까지 했다. 종교적 맹신을 비웃는 라스꼴리니꼬프는 사회 개혁을 위해 나폴레옹처럼 비범인(非凡人)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고 계몽적 사상 실천으로 사회의 해충 ˝이˝같은 존재인 전당포 노파를 살해했다. 이는 ‘모방‘ 자살과 비슷한 ‘모방‘ 살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 7월의 무더위와 궁핍과 더러운 뻬쩨르부르크의 환경도 그의 살인을 부추겼다. 이성을 강조했지만 그의 살인은 충동과 우연적인 불협들로 가득하며 스스로 그 살인은 악마가 시켜서 한 짓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자유 의지에 회의적이다.
라스꼴리니꼬프 이름의 어근 ‘라스꼴raskol‘은 ˝17세기에 러시아 정교회의 개혁에 반발하여 옛 신앙의 전통을 지키고자 기존 교회에서 분열되어 나온 구교도 혹은 분리파 교도를 일컫는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분열성‘을 중심에 두고 이 이야기를 시작한 셈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어렸을 때부터 몽상가였고 꿈과 미신에 열중하는 인물이다. 그와 전당포 노파의 방이 노란 방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라스꼴리니꼬프의 관 같은 노란 방은 고흐의 분열적인 노란 방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전당포 노파를 해충 이로 생각한 그도 시기심 많고 알게 모르게 타인에게 해를 끼치며 고독한 삶을 사는 범인(凡人)에 지나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이 소설의 문제적 인물들도 대개 그렇다. 가족 부양을 저버리고 장녀 소냐가 매춘부가 되어 생활을 책임지게 만들고 알코올 중독자로 인생을 망치다 끝내 술 때문에 숨지게 된 퇴역 관리 마르멜라도프, 자신의 비참을 시종일관 남의 탓으로 돌리며 자존심을 내세우지만 모두에게 폐만 끼친 그의 아내 까쩨리나, 자신의 재력으로 타인을 누르고 존경을 받으려 한 속물 루쥔, 타인을 이용하며 죽이며 욕망만을 좇는 스비드리가일로프 등.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문제적 인물들 양편에 상반된 인물을 배치한다.
이성적으로 영향을 주는 인물 유형에
라주미힌(라스꼴리니꼬프의 친구, 앎을 전파하는 번역 일, 인간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
뽀르피리(예심판사, 라스꼴리니꼬프의 허점을 끊임없이 폭로하며 자수할 것을 설득),
두냐(라스꼴리니꼬프의 여동생, 가난 때문에 타인에게 의지하려고도 했지만 결국엔 주체적인 삶을 사려는 인물, 라스꼴리니꼬프에게 살인의 권리가 없다고 반박, 그녀를 순종적 아내로 만들려고 한 루쥔에겐 망신을, 그녀에게 안락을 줄 수 있는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그가 그토록 두려워 한 자살할 의지 제공) 있다면,
유로비지 인물 유형에
니콜라이(살인 사건 당시 주변 현장에 있었던 우연으로 말미암아 라스꼴리니꼬프의 죄를 덮어쓰게 되는데, 종교적 반성으로 자신의 죄로 받아들임)
소냐(타인에게 절대적 이해와 사랑을 줌으로써 깨닫게 하는 성녀와 같은 존재)가 있다.
유로비지는 상식을 벗어난 기묘한 생활태도를 취하거나 미치광이 짓을 하며 완전한 고독을 얻는 동방 정교의 수행 방법 중 하나이다. 시궁창 인생이면서도 삶을 긍정하는 유로비지를 라스꼴리니꼬프는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무신론에 경도되어 있으면서 기이한 행동과 독단적 이성의 맹신에 빠져있는 그의 모습과 반대되면서도 유사하다. 인간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고 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의도가 명확히 느껴진다. 공산주의식 공동체를 말하면서도 여성 해방, 자유주의를 추종하는 레베쟈뜨니꼬프가 이런저런 사상을 혼란스럽게 받아들인 인물로 묘사된 것에서도 그런 의도가 느껴진다. 유형지에 도착하고도 라스꼴리니꼬프는 자기 이성의 허약함만을 탓하며 자신의 죄를 내면적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마침내 그가 깨닫는 상황은 이성적 판단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는 그날 밤 무엇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생각할 수 없었고, 어떤 것에든 생각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당시에 아무것도 의식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다만 느꼈다.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고, 의식 속에서 무언가 전혀 다른 것이 형성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이성의 상징이라고 할 ˝변증법˝을 넘어선 무언가를 느끼고 그는 소냐에게 달라고 했지만 펴보지는 않았던 복음서를 꺼낸다. 그는 종교가 아니라 소냐의 신념에 더 주목한다. 세계를 온통 분열적으로 보고만 자신을 돌아보며 ˝한 사람이 점차로 소생되어 가는 이야기, 그가 새롭게 태어나는 이야기, 그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 가는 이야기, 이제까지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현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를 꿈꾼다. 이렇게 라스꼴리니꼬프가 삶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난다. 나는 이 결말을 종교적 귀의로 해석하지 않는다. 《죄와 벌》은 이후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속에서 라스꼴리니꼬프와 유사한 여러 인물들(미쉬낀 공작, 스따브로긴, 베르실로프, 이반 까라마조프)을 통해 끝없이 탐색하는 존재론, 자의식의 투쟁, 人神 사상의 포문이다. 유감스럽게도 모든 끝이 비극이라는 결말을 알고 우린 출발한다.
덧)
《악령》에서 보았던 것들을 《죄와 벌》에서도 발견하며 도스토예프스키의 특징, 편집광 면모를 재검토해보다.
1. 밀도가 떨어지는 부주의 - 사고로 다친 마르멜라도프를 옮기느라 피투성이가 된 라스콜리니꼬프를 보고 경찰 서장 니꼬짐 포미치가 놀라며 지적했는데도 이후 그를 만난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를 대해서 개연성이 너무 떨어졌다.
2. 죽음, 인간의 숙명 등을 말할 때 늘 거미가 등장한다. 드니 빌뇌브 영화 《에너미》에 나왔던 거미도 떠올리며 이것은 서양인의 무슨 심리적 원형인가 생각했다.
3. 주인공이 흥미를 가지는 여성은 대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매춘부, 절름발이, 못생김, 가난한 아이.
4. 《악령》에서와 마찬가지로 롤리타 증후군 서술을 여럿 발견했다. 스비드리가일로프의 행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쯤 되면 당시 풍속 반영으로 봐야 하나. 이후 소설에도 계속 이 소재가 나온다면 작가가 인간 본성의 변태성으로 강조하고 있다고 결론을 지을 생각이다.
5. 꿈, 심령, 초현실성이 빠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