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스트 Axt 2018.1.2 - no.016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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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서 가장 인상 깊은 문장은 이것이다. 당연하면서도 새삼스러웠다.   

당시 김종삼에게 있어서 시란 릴케가 말한, 언어의 도끼가 들어가본 적이 없는 깊은 숲속에 숨쉬고 있는 순수한 어떤 것이다.”(故 최하림, <김종삼이 있는 풍경 2>)

이 말은 바로 뒤에 이어지는 이승우 <귓속말을 하는 황제와 사신-카프카의 황제의 전갈읽으며> 나오는 대목이자 Axt의 정신을 상징하는 다음 말과 괘를 이룬다.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지 않는다면 무엇을 위해 책을 읽는단 말인가.……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ㅡ 프란츠 카프카

같은 말인 듯하면서도 다르다고 생각한다. 김종삼은 불가능한 접근에, 카프카는 가능한 접근에 더 방점을 찍는 걸로 나는 해석한다. 김종삼과 카프카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들의 작품은 언어의 도끼로 내려친 단면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도끼로 내려쳤는데 그 중심은 이해 불가능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다음 리뷰와도 연결해 볼 수 있겠다. 노태복 필자가 주기율표와 처음 만났던 고등학교 1학년 봄, 화학 수업에서 원자 보셨어요?”라는 질문으로 교사를 당황하게 만들었고 프리모 레비 주기율표리뷰까지 쓰게 된 딜레마를 말이다. 필자는 프리모 레비에 빙의해 이야기한다. 정신은 하나여야 한다고 말하고 하나일 수 없는 불순물을 제거하려는 시기에 물질의 세계와 인간의 삶이 만나는 접촉 지점을 프리모 레비는 원자를 통해 이야기한 거라고. 

다른 원소들과의 관계에서 보자면, 어떤 하나의 절대적으로 순수한 물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불순물인 그런 물질들이 다양성의 터전에서 평등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파시즘에 짓이겨졌던 내 영혼은 원소들의 목록, 주기율표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노태복 <어떤 질문과 대화와 배웅>(프리모 레비 주기율표리뷰)

잠깐, 원자는 또 나뉜다. 원자 중심부에는 원자핵이 있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고, 양성자와 중성자는 쿼크로 이루어져 있다.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 분류는 쿼크 6, 렙톤 6개로 구분된다. 여기에 중력을 제외한 세 종류의 힘을 매개하는 매개입자들(게이지 보손)도 같이 따라다닌다. 게이지 보손은 QED(양자전기역학)의 광자, 약력의 W+, W, Z0(중성 흐름), 쿼크와 쿼크 사이에 작용하는 힘인 강력의 글루온을 칭한다. 쿼크는 세 가지 색도 있고 모든 입자는 각각에 대응하는 반입자 파트너도 갖고 있다(리언 레더먼, 딕 테레시 신의 입자참고). 결국 도끼는 여전히 무언가를 깨고 있는 중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나. 우리는 각자 방법을 찾는 중이고 어떤 결과란 각자가 보는 단편일 수 있다. 더 깊이 깨고 들어가는 것에 대해 이인성 작가는 말한다.

 

감각의 한 모퉁이가 무너짐을 느낀다, 나는. 일어선 바람이 풍경을 흐린다. 급격한 침몰, 내 저항은 쉽사리 무너진다. 무슨 까닭일까, 나는 마지막으로 빠져나가며 여울지는 그 느낌의 뒤 끝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 찰나적인 풍경, 그것은 어딘가 다른 곳임에 틀림없다. 나는 무언가 다른 것을 감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믿을 수 없는 저 너머를 드러냈던 풍경은 단순한 하나의 물리적인 대상으로 환원되어 있다.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낯선 시간 속으로(문학과지성사, 1983, p182)

 

 

이인성 작가는 역사는 반복된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당신 아버지의 생각대로 진화되어가는가?”란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이인성 : “뭔가 조금씩 달라져가는 측면이 분명히 있는데, 그게 발전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단순 반복도 아닌 것 같다. 이건 베케트 희곡에 관한 논문을 쓸 때 떠오른 건데, 그게 반복이라도 평면적인 원형의 반복은 아닌 듯하다. 가령 나사를 생각해보자. 위에서 내려다보면 빙글빙글 원처럼 돌아가는데, 옆에서 보면 깊이가 있잖은가. 나사를 돌면서 아래로 파고들어간다. 어딘가 더 깊은 곳을 향해서. 그 깊은 곳이 어딘지는, 역시 잘 모르겠다. 이상향일까? 종말일까? 지독한 허무주의자였던 베케트는 그것을 종말이라고 본 게 분명하다(중략).” (cover story 이인성+백가흠 <진정으로 있지 않은 있음과 없음>)

 

내가 쓰고 있는 이 리뷰도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지점에 있는 글들을 모은 하나의 앵글이다. 첫 번째 사진과 마지막 사진이 결정적으로 다른 연속 촬영한 사진들이랄까. 하지만 그 이미지들을 포개면 한 몸을 이룬다.
이번 호는 미국에서 시작해 미국으로 끝나는 구성이다

  
손정수 필자는 이민자들의 나라에서도 더 이민자들의 공간인 뉴욕 브루클린을 소설의 주 무대로 하는 손보미 디어 랄프 로렌(2017)미국 콤플렉스로부터 우아하게 벗어나고 있는 옥시덴탈리즘(오리엔탈리즘의 반대 개념)’을 활용하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라고 말한다.
조용호 필자는 소설의 배경지에서 생업에 종사한 작가의 체험이 녹아 있는 양헌석 아메리카 홀리(2016)가 미국 한인 사회를 배경으로 인간의 욕망과 부조리를 말함과 동시에 아메리카를 넘어 거대한 정신병동 같은 작금의 세상을 굽어보는 소설이라고 한다.
이권우 필자는 천승세 황구의 비명-황구의 비명(2007)이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기지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미국이 분단의 원인임에도 전쟁에서 체제를 지켜주었기에 오랫동안 스톡홀름증후군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는 한국 상황을 개탄하는 오늘날의 관점에도 들어맞는 작품이라고 한다.
한설 필자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욕망의 비만 상태에 빠져 있는 김사과 더 나쁜 쪽으로(2017)에서 우리 사고방식에 스며든 미국을 읽었다. 필자는 과학 저술가 게리 토브스 연구를 인용하며 비만율이 가장 높았던 미국의 원인이 기름진 음식이나 비디오게임 같은 생활양식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산술적으로 취급하는 미국적 사고방식에서도 기인한다고 지적한다.
김성중 필자는 미국 유학이라는 허풍선을 남발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손창섭 잉여인간-잉여인간(2005)60년 전 소설이라고 해도 냉담한 관찰을 통해 얻은 인식을 아무 데도 꿰지 못하는 무기력함”, “통속으로도 허위로도 가지 못하고 허무주의에 빠지는 젊은이모습에서 지금을 읽었다. 손창섭, 김승옥, 장용학 등 당대 빼어났던 작가들이 일본어의 번역투로 쓰였다는 점, 그리고 아메리칸드림을 담았던 것들에서 역사와 욕망과 세대와 삶이 침윤되고 범벅이 되는 한국소설 또한 미해결의 장이 아닌가말한다.
함성호 필자는 남정현 남정현 대표 소설선집(2004)에서 북한 노동당 기관지 조국통일 전재돼 용공 탄압 제1호였던 분지(糞池)에 집중한다.

반일민족주의는 거의 무조건적인 지지를 얻지만, 북에 우호적이거나 반미민족주의는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민족에 대해 가지는 소속감에서 나오는 애착심이 대상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면 필시 이런 세상은 뭔가 이상한 세상임에 틀림없다. (당시 남정현 씨와 변호인단은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승복이 아니라 체념으로 상고를 포기했다. 당시 변호인이었던 한승헌은 나중에 이런 말을 남겼다. “필화는 있어도 불행하고, 없어도 불행하다. 필화가 있다는 것은 규제자의 억압과 작가의 수난을 생각할 때 불행한 일이고, 필화가 없다는 것은 작가의 무력이나 문학 부재의 반사적 평온일 수도 있기 때문에 역시 불행하다.”

 

 

미국과 연루된 우리 모두의 노스탤지어에 대해 잘 보여준 글이라고 생각된 것은 이번 호의 마지막 기고 글이기도 했던 김보경 필자가 쓴 콜럼 토빈 브루클린(2016) 리뷰였다.

 

홀로 타지로 이주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멀쩡하게 돌아다녀도 유령이 된 듯한 기분. 방에 들어오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영영 깨지 않을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 이곳이 딱히 나에게만 배타적인 것도 아닌데 물 위에 뜬 기름 같은 기분. 성인이 되어 집으로부터 독립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고립감을 매우 고통스럽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또 새로운 삶이 주는 즐거움이 생겨난다. 갈등도 있고 어려움도 있지만, 내가 꾸려가는 인생이라는 게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고향에 돌아갔을 때 비로소 알게 된다. 내가 그곳을 떠나온 데에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이 다양한 아메리칸들이 함께 만들어낸 관용의 정신이 미국을 기회의 땅으로, 꿈의 땅으로 만들었다. 김진웅이 쓴 미국인의 탄생이라는 책에는 신생 공화국 미국의 비공식적인 표어는 결코 뒤돌아 보지 마라였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렇게 미래만 바라보고 모인 이들이었기에 기존의 관습은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 사회가 오로지 배타적이고 폭력적이기만 했다면, 세계사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 미국은 아예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아메리카는 관대한 타향이 아니다. 그곳을 지탱하던 관용의 정신도 없다. 왜냐하면 미국은 이제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낡은 고향과 같은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극심한 불평등에 시달리는 사회, 계층 이동의 기회가 없는 사회, 하층 계금과 빈곤층이 경쟁하며 살아야 하는 사회가 된 지금, 미국은 그들의 선조들이 떠나왔던 과거 신분제 사회의 유럽과 같은 곳이 되었다. 2016년 미국을 휩쓸었던 논픽션 힐빌리의 노래가 보여주었듯이 이주 노동자들의 후세대들이 백인 하층 계급으로 몰락하고 재생산되고 고착화되고 있고, 그런 사회에서 관용의 정신은 뿌리내릴 토양은 없다.
오늘날 태어난 곳에서 자라 죽는 사람은 거의 없다. (중략) 본인이 미국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음에도 그곳에서 그렇게 고생을 했음에도 아메리카라는 말에 자부심을 느끼던 전세계의 이민자들, 그들의 청춘을 지켰던 그 관대한 타향은 또 어느 시대에 어느 곳에서 만들어질 수 있을까.”


다시 처음의 주제를 돌아오면 미국은 우리 내외부에 속속들이 관련된 세계의 요소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원소도 복잡하고 상반되는 것들이 뭉쳐 만들어지는 물질인 걸 생각하면 이 세계의 지난한 상충들도 자연의 이치겠다. 불 났는데 도 닦는 소리일까.
이 글을 쓰느라 식은 된장찌개를 다시 데우기 위해 일어선다. 어쨌든 오늘을 성실히 살아 봐야 뭐든 할 수 있을 테니까. 

    
ps)
보통 200페이지가 훨씬 넘던 것에 비해 이번 호가 좀 얇아서 더 빨리 읽을 수 있었나 싶은데 글의 질과 편집이 좋아 술술 읽은 거다에 더 손을 들어 주기로 했습니다^^ 1월에 하는 일도 술술 풀리라고 이렇게 하신 건가Axt 처음으로 완독해서 엄청 기뻐요 T^T)!
트루먼 카포티에 대한 기획 글도 좋았는데 리뷰가 너무 길어져서 그 부분은 책을 산 저 혼자 즐기는 걸로)~

제가 산 《Axt》는 대체로 품절되는 경향이 있는 듯? 천명관 편, 듀나 편, 파스칼 키냐르 편. 그러니 저처럼 띄엄띄엄 사시는 분들은 이번 호 사시는 걸 권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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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1-20 14: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 잡지 읽을 때마다, 어렵군, 다 읽으면, 다 읽었군, 하고 끝인데..... 아갈마님bb

AgalmA 2018-01-20 16:19   좋아요 1 | URL
매번 다 못 읽어서 리뷰를 못 쓰고 있었는데;_;) 이제 다 읽고 리뷰 쓸 능력이 되어 기쁩니다ㅜㅁㅜ

2018-01-20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1-20 19:08   좋아요 1 | URL
이상하지요. 이상국가를 부르짖었던 혁명이 결국 절대 권력의 제국의 성질로 바뀌는 모습을 우린 공산주의 혁명들에서 많이 봤지요. 오히려 복지 혜택이라든지 해서 자본주의 영역이 공산주의/사회주의 제도를 흡수해 더 탄력적인 정치 형태를 보여줬죠. 참으로 아이러니하죠. 미국은 어쩌면 자유주의 이상국가의 마지막 변질을 보여주는 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다음의 비전은 무얼까요. 우리 모두가 궁금해 하는 점이죠.

겨울호랑이 2018-01-20 19:10   좋아요 1 | URL
「드래곤 볼」에서 샤이어인 다음의 초샤이어인이 나온 것처럼, 초민주주의가 나오지 않을까요? ㅋ

2018-01-23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3 0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기둥 - 제36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242
문보영 지음 / 민음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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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대는 끝났다는 요지의 가라타니 고진  《근대문학의 종언》을 나는 새 시집을 만날 때마다 생각한다. 사건의 개연성이나 구성, 스토리, 인물, 주제 등을 두고 따지는 소설보다 시가 더 요령부득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시를 읽는 이들은 다른 문학 장르보다 더  문학을 대하는 자신을 점검해보게 될 것이다. 호불호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도  자주 본다. 점잖게 ‘요즘 시는 어렵네요’ 라거나 ‘이런 시는 별로예요’ 말하면서도 시를 꾸준히 읽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히키코모리나 외계어 같은 문장과 생각에 넌더리를 내며 시에서 점점 멀어지는 이들도 있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시가 뚜렷했던 것처럼 한국시는 한국인의 시대적 감수성과 아주 밀접했다. 소설보다 정서에 더 가깝게 와닿기 때문에 소설보다 기대하는 게 컸다. 신춘문예와 각종 문예지, 많은 시 모임들만 봐도 한국인의 시 사랑은 대단하잖은가. 그만큼 많은 시들이 쏟아져 나왔고 분량이 짧은 시의 구조상 기존 시 스타일로 더 이상이 나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시는 새로운 모색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시는 소비에서도 뚜렷한 두 양상이 있다. 시 쓰는 자들이 읽는 시와 일반 독자들이 읽는 시. 전자는 더욱 신선한 걸 원하고 후자는 자기 감성에 와닿는 시를 써주길 바란다는 게 내가 보는 현 상태다. 그래서 무수한 실험이 펼쳐지고 있는 이 시집이 전자에겐 환호 받겠지만 후자에겐 환영받기 어렵겠다는 게 내 소견이다.
 
나는 나대로 이 시집에 몇 가지 말하고 싶은 게 있다.
1. 작위와 無用 사이
시의 無用은 시인이 말하는 게 아니라 시 자체가 어쩔 수 없이 가닿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가 쓸모없다고 말하는데 그 말은 기분 좋은 말입니다. 저는 평소에 제가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내가 아무리 쓸데없어 봤자 시만큼 쓸모없겠냐 싶고 그런 생각을 하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입니다”라는 시인의 <김수영 문학상> 수상 소감이나 이 수상 소감에 깔깔대며 좋아하는 박상수 시인·평론가는 자조를 넘어  문학 판의 치기로 보였다. 그 말은 약간의 허세였고  詩作에서는 다르다고 해도 그 수상 소감은 내가 이 시집에서 내내 느꼈던 개운하지 못한 의심을  확인해줬다. 문 시인이 시를 ‘쓰는 도구’로 생각하는 게 시집  전반에 뚜렷이 보였다. 그러지 말란 법도 없고 막을 생각도 없지만 몇몇 이들의 공감과 인정으로 만족하거나(과연?) 개의치도 않는다면(더 과연?) 스스로 자신의 시 가치를 깎는 것 아닐까.
“문장들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느라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다. 주변을 신경 쓸 재간도 없이, 미래를 도모하지도 않고도 않고 오직 한자리에서 홈을 파며, 어쨌든, 바닥에 흔적을 내고, 그것을 위해 몸을 꼴 대로 꼬며 깊어지는 동작만을 반복하고 있다//…(중략)…//이 문장은 다른 문장에 비해 더 오랜 기간 외롭게 매듭을 만들고 있으며 고유한 방식으로 몸을 꼬고 있는 것 같다”(「멀리서 온  책」)고 말하는 이 문장처럼 이 시집에서는 낯선 것들을  ‘이중 매듭’으로 엮는 것들이 상당히 많다. 아래에는 두드러졌던 예 하나만  가져왔다.
    
ex) “피는 끝에 오니까. 나무뿌리처럼 뽑히기 직전까지 땅을 움켜쥐니까. 배다. 작은 어선. 당신은 졸고 있다.  지루하게 돌아가던, 구석의 앉은뱅이 도르래의 속도가  빨라진다. 당신은 넓은 모자의 끝을 턱에 걸었다. 턱으로 흐르는 검은 액체를 해풍이 말리고 있다.”(「뾰루지를 짠다」)
 
뾰루지 짜는 정황을 갑자기 항해를 하는 정황으로 점프 컷 연결했다. 재밌거나 신선하게 느낄 윤활유가 전혀 없어서 과장만 되고 말았다. 사소한 것들에 과장을 붙이는 게 문 시인 시작 특징이라면 특징이겠지만.   
  
 
2. 시시함과 단언 사이
이 시집은 이질감과 딱딱한 느낌을 주는 현재 시제로 대부분 진행되고 있는 데다 단언이 많아서 읽는 이에게 거부감을 주는 구석이 많다. 신은 왜 그렇게 시시해야 하며, 시인의 단언을 우리가 신뢰하며 귀 담아들을 이유는 또 무엇인가. 재기 넘치고 빛나는 문장이 곳곳에 있어도 설득력은 뒷받침되지 않아 시 자체를 부질없고 시시하게 만든다
 
●  동의되지 않는 神
ex 1) 신의 손을 편 채 뒤집어 가방 위에 올려놓았으므로/신이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는/모양의 책은 누구에게나 공유될 수 있다(「역사와 신의  손」)
 
ex 2) “그녀는 일찍 태어나 버렸다./ 신이 무단횡단을 하는  바람에 //…(중략)…//인간에게 약간의 삭제가 허락된다면 ㅡ 그것이 신의  직업적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일일지라도 ㅡ 전봇대 아래의 똥, 아니 똥이 보여 주는 침착함 그 자체가 되고 싶었으며, 깜깜한 밤보다 비 오는 대낮을 무서워하는 똥의 속사정을 몰랐지만 그것까지 알았다면 정말 똥이 되었을  것이다.”(「무단횡단은 왜 필요한가」)
 
ex 3) "중력의 법칙은 원자보다 작은 입자들의 세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신이 원자보다 작은 미생물이기 때문이다 신은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너무 작아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고 따라서 신을 보려면 특수한 기구가 필요하다 신은 인간과 연락을 끊기 위해 자신이 속한 세계에 인간세계의 중력 법칙이 미치지 못하도록 막았는데 인간들이 섭섭해한다”(「과학의 법칙」)
 
ex 4) "손이 부족한 천국에서는/천사가 악마도 겸임한다는 사실 같은 게/사람들의 따뜻한 여름날을 망쳐선 안 된다고.”(「공원의 싸움」)
 
ex 5) “새/가창문에부딪혀자꾸자꾸죽었다신은실력이좋지않았던/거지,도끼를내려놓고도그런생각이가능했다”(「도끼를 든 엉덩이가 미친  사람」)
    
신을 인간 위치로 끌어내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상품성이 있다는 듯 신을 가져와 쓰는 방식이 굉장히 소비적이며 문제적이다. 그 위치시킨 신, 추상에 대한 비유와 정의도 너무 가볍다. 지금 시대 이것이 과연 신선한가.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시대도 아니고. 전복적이라기보다 신의 추종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부딪힌 벽을 그렇게 처리하고 마는 한계로 느껴졌다.
  
● 있어 보이는 문장이지만 동의하기엔 미숙해 보이는  화자의 단언들
ex 1) 죽음은 두둑하게 쌓여 있는 무엇일 뿐이다(「N의 백일장의 풀숲」)
ex 2) 인간을 불행으로 나눈 뒤 다시 불행을 곱해 인간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수학의  법칙」)
 
과학과 수학 등을 동원하며 고민하는 흔적이 역력하지만 소화가 덜 되어 보였고 시인의 사색과 상상력이 좌중을 휘어잡을 설득력도 부족해 보였다. 시인이 정서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 이성의 시 쓰기를 하고 있어서 더 그렇다.
문 시인의 가능성에는 꽤 긍정하고 있다. 다음 시집에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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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8 1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1-08 11:15   좋아요 1 | URL
네... 일단 시가 분량이 적어 다른 장르보다 쓰는 부담이 덜하죠^^; 그래서 쉽게 접근하게 되죠. 막상 써 보면 좋은 시 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지만. 시처럼 보이게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닫죠.
문장에 고심하게 되면 비틀리는 단계가 추동되는 건 언어와 사고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철학의 현학성과 비슷하죠. 감성 시를 원하는 독자에겐 반갑지도 않고 필요도 없는 현상이겠고요ㅎ;
읽는 사람이 있으니 쓰기도 하는 거겠으나 문학도 자본 시장인 만큼 요즘 소비자의 위상처럼 독자도 늘 불만을 표할 수밖에 없겠죠^^;

곰곰생각하는발 2018-01-08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좋습니다. 릿터 같은 문예지 글 읽는 기분으로 읽었습니다아..

AgalmA 2018-01-08 14:0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요즘은 민음 시집을 많이 읽게 되는데 젊은 시인들의 경향을 특히 잘 알 수 있죠. 대중과의 소통이 어려운 부분이 많이 느껴져서 안타까우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도 알겠고 복잡하네요....

cyrus 2018-01-08 1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인은 난감한 직업이에요. 읽기 쉬운 시를 쓰면 사람들은 시인의 자질을 의심하고(ex: 서울시 지하철 스크린도어 시 수준 논란), 오랜 사색을 해서 나온 시가 비평가들이 인정해줘도 독자들은 어렵고 난해하다고 말합니다. ‘독자들이 좋아할 수 있는 시‘가 어떤 것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

AgalmA 2018-01-08 18:35   좋아요 0 | URL
그렇죠^^; 다른 장르도 그렇지만 한국의 시 문화도 다양성으로 형성된 게 아니라서 아카데믹한 데가 있잖아요. 안 그런 척 하지만 대학 따지고 국문학과, 문창과, 급을 나누기도 하고; 그런 학적이 없는 신춘문예 시인은 제대로 성장하지도 못 하죠....
출판사별로 주로 활동하는 비평가들로 나뉘어진 것도 눈에 뻔히 보이는데 시에 비해 평이 과하다 싶을 땐 평가를 신뢰하기 어려운 점도 있고요. 평을 위한 평을 볼 때도 많고요.
걍 저는 저 대로 읽어요. 좋은 시집이 나오길 기대할 뿐...

그것은실로 2018-01-08 2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의 무용은 어쩔 수 없이 가닿는 지점이다. 무척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책기둥 - 제36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242
문보영 지음 / 민음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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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식 탐구라면 시보다는 소설이 더 낫지 않을지. 보르헤스처럼. 소설까진 안 되는 시와 시까진 안 되는 소설, 시를 소설이나 산문으로 넓히려는 또는 그 반대의 경향, 이 혼종성과 사유의 확장성을 보며 다분히 읽는 자의 편리에 치우친 장르에 얽매이는 내 습관을 또 탓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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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선과 양반들 - 정규 3집 방랑가
전범선과 양반들 노래 / 워너뮤직(WEA)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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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각수 <흥보가 기가 막혀>는 잊어라. 전범선과 양반들이 나가신다~ ˝신선놀음이나 하자~지화자지화자♪지화자지화자♪˝ ˝훈장질해서 내 무슨 나랄 구하랴 나 하나 구하기도 바쁜~~뱅뱅사거리 뱅뱅˝ㅋㅋㅋ ˝서울의 밤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꽂히고 십자가를 진 예수는 홀로 거리에 내앉아 울고 있다 할렐루야~˝ ˝옴 마니 반메 훔˝이 이렇게 멋지게 록이 될 수도 있구나!ㅎㅎ ˝나-그네˝가 ˝롹-이있네˝로 들려ㅋㅋㅋ 참 찰지게 부르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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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18-01-02 2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게 무슨 쌍팔년도 B급 정서! ㅋㅋㅋㅋㅋㅋㅋ 뭔가 하고 들었다가 뿜었네요.

AgalmA 2018-01-02 20:51   좋아요 1 | URL
넘 재밌지 않아요ㅋㅋ ˝전기성˝(인디밴드 이름임) 들어봤어요? 핵잼ㅋㅋㅋ

뷰리풀말미잘 2018-01-02 20:56   좋아요 2 | URL
전기성 이 도시의 밤 틀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 왜케 촐랑대 ㅋㅋㅋㅋㅋㅋㅋ 비트도 그렇고 목소리도 그렇고 ㅋㅋ

뷰리풀말미잘 2018-01-02 21:01   좋아요 2 | URL
아, 뭔가 원더버드 생각나네요. 가사 때문인가 정서 때문인가. 아세요? 원더버드? 옛날사람이라는 스몰 히트곡이 있는 인디밴드인데.

술을 마시면 언제나 / 생각이 나는 옛날사람 / 꿈을 찾아서 오늘도 / 기타를 치는 옛날사람!

뷰리풀말미잘 2018-01-02 21:05   좋아요 2 | URL
전기성 사이코메트리-O 듣고있는데 아련합니다 아련해요. 이 90년대 초반 삘이란. ㅠ_ㅠ

AgalmA 2018-01-02 21:07   좋아요 1 | URL
맞아요. 원더버드 비슷하죠. 원더버드가 <사피엔스>라면 전기성은 데이터가 더 축적된 <호모데우스>랄까^^

양철나무꾼 2018-01-03 1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100자평엔 웬만해선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데,
이런 발랄함이라니,
‘좋아요‘하지 않을 수 없지 말입니다~^^

AgalmA 2018-01-03 18:46   좋아요 0 | URL
이 100자평은 엄밀히 말하면 100자 평이 아니라서 가능한 거였죠ㅎ; 무슨 센서의 오류인지 북플로 100자평을 쓰면 내용을 무제한으로 쓸 수 있더라고요.
 

 

절망의 음유시인 에밀 시오랑의 책이 모조리 절판이던 시절 도서관을 이리저리 찾아 빌려 읽으며 그의 문장에 대한 내 열광은 정말 대단했다. 메모가 거의 필사가 됐던 터라 개정판이 나왔을 땐 그다지 필요 없었지만 실물 책으로 갖고 싶긴 해서 중고책으로 모았다.

중고책을 사다 보면 누군가 확신을 담아 책장을 접어둔 표시를 종종 본다.

밑줄만큼이나 눈길을 끌어 그 페이지를 유심히 본다.

누군가 도착했다 떠난 흔적, 
내 책이라 하기 아직 어색한 순간.

그 접힘은 밑줄보다 풍부하며 모호하다.

그러나 어떤 문장 때문이었는지 기어이 짐작하게 되고 ‘당신은 그때 그랬군요‘ , ‘나도 어쩌면‘ , ‘그렇지만...‘ 마음으로 얘기를 건넨다.

절망을 노래하는 작가의 혼잣말, 우리의 혼잣말.

나는 조금 부끄러워하며 접힘을 조심히 편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다르지 않다.
이 글도 당신이 목격하게 된 하나의 접힘이다.

책은 매 순간 모든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가르쳐준다.
하나의 옷, 하나의 페이지.

책의 모든 여백은 우릴 위해 마련된 것 같지.
각각의 공간, 각각의 세계.

서로가 서로에게 전달자가 되는 시간, 이 긴 릴레이.

우리는 함께 사는 건 아니었다.

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영원히 그러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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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2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1-02 14:22   좋아요 0 | URL
시오랑은 언제 읽어도 울컥 하게 만드는 게 있어요^^ 하루키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처럼 시오랑도 한 번 빠져든 사람은 잊기 힘들고 다시 찾게 되죠.
↓밑에 계신 pek0501님처럼^^

페크pek0501 2018-01-02 1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하십니까?
- 내 자신을 견딥니다.

에밀 시오랑,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 53쪽.
....................

에밀 시오랑의 광팬이 남기고 갑니다.

AgalmA 2018-01-02 14:24   좋아요 0 | URL
잘 알죠^^ 제가 pek0501님께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에밀 시오랑 때문인 걸요. 좋아하는 작가가 같다는 건 얼마나 친근한 일입니까(>_<)!

2018-01-02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1-02 23:23   좋아요 1 | URL
제가 언젠가 불면에 대한 책을 읽고 정리를 해드리겠다 말씀드린 적 있는데 다른 책이랑 꼬여서 다 못 읽고 말아서 흐지부지 됐죠. 다시 읽어야 하는데 이것참...
마이클 브레우스 <WHEN 시간의 심리학> 한번 읽어 보시죠. 그 방면 책을 많이 읽으셨을 거 같아서^^; 사지는 마시고 도서관에서 빌려서.
불면이 있을 수밖에 없는 진화적 체질적 이유, 환경적 생활적 개선 방안을 알려 주는데 참고할 부분이 있어요.그 책에 대한 리뷰 함 읽어 보세요. 알라디너들이 쓴 게 몇 개 있더군요^^

2018-01-02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8-01-03 08: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밀 시오랑을 다시 담으며. 아갈마 님 새해에도 멋진 페이퍼 자주 보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제가 좀 뜸했지요. 서재의달인도 그래서 2015 이후 못 들고 ㅎㅎ 무술년 복 많이 받으세요

AgalmA 2018-01-03 18:10   좋아요 1 | URL
책 준비하시느라 바쁘셨을 텐데 뜸하셨다고 섭섭하거나 그렇진 않습니다^^;
제 페이퍼가 멋진 건 잘 모르겠지만 좀 웃기긴 하죠ㅎ?
안부 인사 주셔서 감사드리고 프레이야님도 올해 복 많이 받으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