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째 내린 비는 비가 아니었다. 악마적 테러리즘이라 불러도 좋을 만치, 9.11 테러보다도 사실은 더욱 위협적인 그런 비. 非였다.

  비가 어쩜 그렇게 무서울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기독교도라는 특히 잘 알고 있는) 노아의 홍수라는 성경적 사실로써 입증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자연 재해의 역사에서도 이 물은 아주 큰 자리, 그 역사의 장을 마련해 놓고 있다. 불보다 물이 더 무서운 법인 것은 또 새삼 느끼게하는 계절이다.

  비에는 우리가 다양한 속성들을 내포시켜 놓았다. 홍수와 폭우 등에서 그러하듯이 여기에는 두려움과 무서움을 입혀 놓았으며, 차가운 겨울날의 비에는 인생의 고통을, 촉촉한 봄날의 소나기에는 어렴풋 한 어린날의 추억을, 가을 추적추적거리는 비에는 어느 중년의 쓸쓸함을 달아 놓았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사실 인간만이 피하고 막으며 산다. 동물들도 비를 피해 움직이지만 본질적으로 비를 피하지는 않는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인간은 가장 극한적으로 비를 피한다. 비를 피하지 않고는 살 수 없듯이. 대지와 푸른 초장의 풀과 나무들은 비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어쩔 수 없어서일까? 발이 땅 속 깊이 매어있으니 피할길이 없어서인가? 과연 그럴까?

  비 오는 날 비를 맞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움이다. 우리는 비가 오면 우산을 챙기고, 문 밖을 나설 때면 우산을 펼쳐들고, 혹여 바람에 우산이 날아나 갈까봐 꼭 꼭 붙들어 잡고, 행여나 비가 우산의 방패를 피하여 내 몸으로 새어들까봐, 우산의 그늘 밑으로 움츠려든다.

  그런데, 나는 가끔 비를 맞고 싶어진다. 특히 따사로운 봄날에는. 비를 맞는 다는 것은 촉촉히 젖을 수 있다는 것. 촉촉히 젖는다는 것은, 내 마음과 몸이 부드러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감동적인 한편의 시와 소설을 읽어가는 그 기분처럼 말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맞아 촉촉해 지는 느낌은 산뜻하고 감동 깊은 글을 만나는 느낌과 같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요즘 연이어 비를 맞으며 집에 오게 되었다. 이것은 순간 짜증스러움이다. 젖은 옷과 신발, 온 몸을 적셔놓은 빗줄기. 이것은 촉촉히 젖는 느낌은 없다. 그러면 왜 비를 맞은 것이냐? 내 우산을 준비하는 준비성이 적은 탓이던지. 우산을 준비할 수 없었을 때에 비가 테러처럼 낙하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다만 우리에게는 촉촉히 비에 젖는 저 들판의 한 떨기 야생화처럼, 일 년의 어느 한 날에는 자연스러움으로 비를 맞아보자. 마치 감동의 책 한 권 만나는 그 느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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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천자문 2006-07-20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산성비를 많이 맞으면 머리가 빠지는 부작용이 있기 때문에 무섭죠. --;;

멜기세덱 2006-07-21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산성비!! ㅋㅋ 그걸 몰랐네. 그래도 가끔 한 번 맞아줘도 괜찮지 않을까요...ㅎㅎ
 



서재지수
: 2565점
 
 마이리뷰: 21편
 마이리스트: 5편
 마이페이퍼: 785점
 7분께서 즐겨찾고 있음

  누군가 날 이렇게 '즐겨찾고' 있다. 자그만치 7'분'씩이나. 7분이 나를 즐겨찾고 있는데, 나는 그 귀하신 분들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이곳 알라딘 서재에는 좋은 기능이 있어서, 누군가를 '즐겨찾기'에 등록을 해서 단번에 찾아갈 수도 있고(물론 그 사람의 서재를) 또는 누가 나를 자주 찾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끔 되어 있다. 여기서 후자의 기능, 곧 누가 나를 즐겨찾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기능은 참으로 정당한 기능이 아닐 수 없다. 왜 정당하지 않은가?

  <즐겨찾기>에 대하여

  '즐겨찾기'라는 것은 아마도 인터넷이라는 허공, 혹은 비공간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네트워크를 형성함에 있어, 허공 속을 헤매는 적막함을 벗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용한 기능이라고 본다. 그만큼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결속을 강화시켜주는 기능이겠다. 이런 좋은 기능을 나 또한 사용하고 있다. 좋은 리뷰와 페이퍼를 남기고 있는 멋진 분들의 서재를 나 또한 즐겨찾기에 등록해 놓고, 하루에도 수시로 찾아뵙고 있는 중이다.

  불합리한 기능 추가

  이런 '즐겨찾기'에 나는 다소 불합리한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즐겨찾기를 당한 당사자에게 자기가 즐겨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릴지 말지를 정하는 권한이 즐겨찾기를 하는 본인에게 속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왜 불합리한가?

  '즐겨찾기' 하는 사람인가? 당하는 사람인가?

  누가 나를 즐겨찾기 하는가를 알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즐겨찾기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기가 누군가를 즐겨찾고 있음을 알리지 않을 권리가 자기 자신에게 있는가? 나는 이것이 즐겨찾기 당하는 사람에게 있어야 함이 정당하다고 생각된다. 나는 누가 내 서재를 방문했는지 크게 알고 싶지는 않지만 오늘 방문자 수가 10명이면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내 서재를 방문해서 좋은 것을 얻어갔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이 즐겨찾기 수준에 이르면, 당연히 지극히 알고 싶어지고, 그러다보니, 알 권리가 나에게 없는 것이 못내 못마땅하고, 그것은 왠지 불합리해 보이고, 나는 나는, "내 귀의 도청장치가 있다"고 외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내 서재를 도청당하는 기분?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 서재를 즐겨찾기에 등록해주는 것은 고마우나,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 권리가 있고, 그들또한 당당히 누구인지를 밝힐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않은가?

  생각난 김에 투표를 해 보자.

  누군가를 즐겨찾고 있는지 당사자에게 공개해야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투표기간 : 2007-07-30~2007-07-31 (현재 투표인원 : 47명)

1.
42% (20명)

2.
57% (2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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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천자문 2006-07-19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하고 싶던 말을 다 해주셨네요. 1번에 투표했습니다.

마법천자문 2006-07-19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겨찾기 해주시는 건 물론 고맙지만 정확히 어떤 분들인지 모르니까 꼭 감시당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해리포터7 2006-07-19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멜기세댁님! 저두 맨날 이 즐겨찾기 때문에 고민에 빠져듭니다..제가 즐겨찾는걸 공개해? 말어? 하지만 이 알라딘에 서재를 연이유가 저자신에게 외로움을 덜어주려고 맹글어서요..전 뭐 다른님께서 즐겨 찾아주시면 감사합니다. 이러고 기뻐한답니다.ㅎㅎㅎㅎ

마늘빵 2006-07-20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는 접니다.

멜기세덱 2006-07-20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리포터7님 > 물론 찾아주니 고맙죠. 그런데 저는 그분들이 왜 나를 비밀리에 찾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해 지더라구요. ㅎㅎ 혹시 알아요, 절 좋아하는 데 말하진 못하고...그럴까봐요...ㅎㅎ
달의눈물님 > 전 그 사람들과 좀더 긍정적 관계가 이뤄질 수 있으리라고 봐요. 감시라고까지는 생각지 않지만, 그래도 당당히 공개하고 즐겨찾으시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아프락사스님 > 그 하나로 무게추가 확 기울어 버렸어요. 감사!!

멜기세덱 2006-07-21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 님>결국 우산을 파는 아들과 나막신을 파는 아들을 둔 어머니와 같은 슬픔을 가진 건가요.^^ 해법도 그곳에 있겠죠. 나를 즐겨찾아 주는 이들이 과연 누굴까 하는 궁금증은 오히려 행복일 듯 싶어요. 그 궁금증이 이렇게 바람구두님께 찍히는 영광을 얻었으니 말입니다. 좋은 말씀 감사해요. 위의 글이 저를 즐겨찾아 주시는 분들께 괜한 오해 없기만을 바랍니다. 저는 그분들께 고마울 따름이에에요.ㅎㅎ 아웃팅! 전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데요.

sayonara 2006-07-22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갠적으론 궁금하기도 하고, 공개된다는 것이 뭐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1번이지만...
뭐,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니까요... ㅎ

부엉이 2006-07-25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지 늘 궁금해할 수 있다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인듯해요. 넘 변태적인가..^^;;

조선인 2006-07-27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 즐겨찾기를 했습니다만, 제가 누굴 즐겨찾고 있는가를 늘 공개할 필요성을 못 느낍니다. 즐겨찾기를 하는 목적은 다양할 수 있으니까요. ^^;;
 

  결혼이란 무엇일까?

  '結婚' 즉 혼인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인다. 혼인이란, 남녀가 부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부부의 관계를 맺는 것이 결혼이다. 부부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일종의 관계맺기이다. 이 관계맺기는 사회의 주된 유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회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관계맺기가 다양한 차원에서 이루어질 때 가능한데, 결혼이라는 관계맺기는 가장 기초적 사회 성립의 단위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결혼에는 따라서 사회성이 크게 작용한다. 흔히들 사랑의 결정으로서의 결혼은 근대적 산물에 불과하다. 아니 그것이 사실적 산물, 실체하는 어떤 것이라기 보다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근대적 관념에 불과하겠다. 현재까지, 결혼에는 사랑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다고 본다. 지금에도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사랑이라는 요소가 이 결혼을 결정짓는데 어느 만큼 작용한는지를 조사해 본다면, 머리를 갸웃하기에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아직까지도 결혼이란 것이 사랑의 결론, 결정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니 한국전후 7~80년대까지만을 생각해보더라도, 결혼이라는 관계에서 사랑은 그 성립조건이 되지 못했다. 거기에는 사회적 위상과, 상호 가문의 동급성에 따라, 혹은 경제적 여하에 따라 성립되었고, 그 결정과 판단은 부모라는 가부장의 몫이었다. 이것은 지금도 크게 나아졌다고 보기 어렵지 않을까?

  그렇게 볼 때 결혼은 사랑과는 비례하지 않는다 라는 결론 도출이 가능한가? 여기에 불만을 갖는다면, 현대라는 시간을 제쳐놓고, 이전까지의 결론으로만 본다면, 인정가능하리라 생각된다.

  결혼에 관여한 것이 사랑이 아닐진대, 성의 문제는 또한 더욱 크게 소외더었다고 볼 수 있다. 성이라는 것이 자손번창, 즉, 유전자번식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볼 때에도 결혼은 이 요소와 밀접히 연관되었으리라 생각되지만, 여기에서는 자손번창의 유리성을 가진 여성의 간택이 중요했을 따름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왕비 간택을 생각하며 확실해지는 듯 하나, 왕비 간택에서 이런 자손번창의 요소는 단지 일부분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결혼에서의 결정 요소는 자손번창도 그 큰 요인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쉽게 결론을 말하자면 결혼이라는 행위, 사회적 관계 맺기에는 원천적으로 사회적 요인만이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성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며, 유전자 번식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성의 측면, 여기에도 다양한 요소가 있을테지만, 여기서는 크게 논하지 아니한다.

  얼마전에 <<섹스의 진화>>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것은 섹스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다양한 의문점들을 도출하고 해설하고 있다. 나름대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인간이 왜 일부일처제를 택하고, 결혼을 하며, 일생을 한 명의 배우자와 함께 살면서, 아이를 키우고 사느냐? 그것은 대부분의 동물(인간의 일부를 제외하고, 일부를 포함한)들과는 다르지 않느냐? 그것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물음 들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섹스나 결혼 등을 크게 작용한 요소가 유전자 번식이라는 목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섹스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유전자 번식을 위한 본능의 작용이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인간이 역사의 길을 들어선 후부터는 이 유전자 번식의 목적은 큰 폭으로 축소되어 졌다고 본다.

  여자를 많이 거느리고, 자손을 많이 낳는 것은 사회적 위세를 드러내는 효과적 방법으로 작용했고, 그것은 현재에도 비공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에는 권력과 경제적 부를 드러내는 또다른 측면에서 기능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무슨 얘기를 한 것인지 나도 지금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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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실히 동양과 서양 사이의 경계선은 유럽측에 언제나 무엇인가를 인상지운 것이었다."(141쪽)

  '무엇인가를 인상지운 것'은 자기화 하는 것, 아니 자기 멋대로의 형상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그것을 이용가능하게끔 변형하고 왜곡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동양은 언제나 유럽의 '사업'대상이 된다.

  "우리들이 아는 한 그들의 대부분은 '식민지의 개량을 촉진함과 동시에 자국의 지식을 높이고 예술을 향상시키는 것을 희망하여 아시아의 여러 학문과 예술을' 연구한다고 하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지녔다."(152쪽)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은 '오리엔탈리즘의 공통된 목표'라고 사이드는 말한다. 나는 이렇게 이해하고자 한다. 자국은 곧 제국이며, 그 제국은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의 힘었으며, 그들의 지식은 침략과 약탈에 봉사하였다. 결국 오리엔탈리즘은 그들의 이익이 목표였던 것은 아닐까?

  "유럽인이 고전적 동양이라고 하는 과거로부터 끌어낸 것은, 자기를 위해서만 유리하게 작용시킬 수 있는 비전(및 수천 개의 사실과 인조물)이었다."(153쪽)

  결국 오리엔탈리즘은 유럽의 이익을 위한 사업이었다.

  "이집트에 대한 나폴레옹의 계획은, 연면히 계속된 유럽과 동양의 만남 속에서도, 오리엔탈리스트의 특수한 전문적 지식이 직접 기능적으로 식민지지배의 도구로써 이용된 최초의 보기가 되었다."(154쪽)

   "유럽의 중요한 오리엔탈리스트는 거의 모두 실베스트르 드 사시의 제자였고, 유럽에서는 어언 4분의 3세기에 걸쳐 그들이 이 분야를 지배했다."(159쪽)

  실베스트르 드 사시는 당시의 유일한 아라비아어 교사였단다. 동양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언어를 알아야 했던 것일까?

  "동양에 대한 서양세계 공통의 사명이 낳은 유산은 대대로 계승되어 새로운 프로젝트와 새로운 비전 그리고 새로운 사업이 되어 나타났으며, 그것들이 옛 동양의 남은 부분과 정복자로서 유럽정신을 결부시키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나폴레옹 이후, 오리엔탈리즘이란 말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 오리엔탈리즘의 서술적 사실주의는 격상되었고, 더 이상 단순한 표상의 한 양식이 아니라 하나의 언어, 실제로 '창조'를 위한 수단으로 변했다."(166쪽)

  "수에즈 운하의 구상에는, 오리엔탈리즘적인 사고의 논리적인 귀결과, 더욱 흥미 깊은 것으로는 오리엔탈리즘적인 노력의 논리적인 귀결이 같이 나타난다."(173쪽)

 


 

  오랜만에 놓아두었던 <<오리엔탈리즘>>을 다시 읽었다. 오리엔탈리즘을 충실히 건설하였던 그 제국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은 밤잠을 자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충실함을 다했을 것인데, 나는 오히려 그들만도 못하니 애석할 따름이다. 알지 못하고는 아직까지도 존재하고 있는 오리엔탈리즘과 그 수행자들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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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저녁 어스름에 집을 나왔다. 휴일인 탓에 늦잠에 낮잠에 잠이란 잠을 잘때로 자고, 더이상 잠이 오지 않기에, 배고 고프기에, 엉금엄금 집을 나온 것이다. 아하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집을 나와 얼마지 않아, 오늘 이 시간이나마 나오길 잘 했다는, 오늘은 왠지 기분좋은 날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정말 기분 좋은 일이 버러졌다.

  강원도 지역에 물난리가 났다는 소식은 먼데 이야기, 이곳 인천은 날도 찜찜하고, 거리도 뜨겁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찝찝하던 그런 날에, 시원한 폭포수처럼, 그렇게 내 곁을 지나가는 여인을 발견했으니, 옷차림도 시원시원, 생김생김도 늘씬 날씬, 깎아 놓은 듯한 귀여운 얼굴, 그런 여인을 보고 있자니 내 몸조차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어깨에서부터 파여진 옷은 부끄럽다는 듯이 가슴을 살짝만 가리고, 등짝은 그야말로 움푹 파여, 스치고 지나간 그녀를 뒤따르고 싶을 정도였으니, 허허, 따르지는 않고, 오늘은 나오길 잘했으니, 기분 좋을 징조려니하고, 그렇게 지나왔다.

  길을 지나던 차에, 헌책방이 있어 들렀다. 몇 번 다녀간 곳이었고, 대학교 근처여서인지 주로 교재위주로 진열해 놓은 곳에서, 내 눈이 또하난 커졌다.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전집 <<우울과 몽상>>이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얼마전에 보관함에만 담아놓고 있던 차에, 반갑게 집어들어, 이리저리, 이장저장 넘기면서 살펴보니, 겉표지에 살짝 흠집이 난 것 빼고는 새책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아저씨, 이 책은 얼마해요?"했더니, 대충보더니, 10,000원에 준단다. 이 책의 정가가 28,000원인데, 새책이나 다름없는 책을 10,000원에 준다는 것이다. 약간은 주춤했다. 헌책방에서 10,000원이나 하는 것은 고가의 책이기에, 좀 비싸다하고도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책이 여기서 금방 나가겠나하고 생각이 들어, 우선 서가에 다시 꽂아 놓고, 좀더 들러보다가, 상태가 굉장히 양호한 <<문화기호학과 문화컨텐츠>>라는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계속 둘러보았는데, 또하나 월척을 발견했다 싶어 집어들고 다시 가격을 물어보니 이 책은 교재로 쓰는 것이라, 좀 비싸다며 17,000원은 줘야 한단다. 그 책은 <<심리학의 즐거움>>이란 책이다. 이런책을 교재로 쓴다는 게 별로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이 책을 다시 놓고, <<우울과 몽상>>을 다시 집어들었다. 이 책을 10,000원에 준다는데, 얼른 사가지고 가자 싶었던 것이다. 이런 결단과 함께, 고마운 마음에 아까 보았던 책 한 권을 더 산 것이다.

  <<우울과 몽상>>과 <<문화기호학과 문화컨텐츠>>라는 책을 묶어 14,000원을 달라기에 조금 당황스럽게 내어주며 돌아 나서는 가운데, <<문화기호학과 문화컨텐츠>>라는 이 얇팍한 책을 4,000원이나 줬다는 생각이 조금은 아쉬웠다. 미리 물어나 볼 걸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헌책방에서도 횡재한 것이 만족했다.

  아! 오늘 집에서 늦게 나온 것이 2번의 횡재를 가능하게 했으니 여간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강원도의 물난리가 먼데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쏟아지는 폭우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에 빠진 쥐새끼 모양으로 행여 횡재한 책이 젖을까봐 가슴에 품고 돌아왔다.

  과연 오늘 나는 횡재했는가? 횡재, 거기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한 것이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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