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저녁 어스름에 집을 나왔다. 휴일인 탓에 늦잠에 낮잠에 잠이란 잠을 잘때로 자고, 더이상 잠이 오지 않기에, 배고 고프기에, 엉금엄금 집을 나온 것이다. 아하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집을 나와 얼마지 않아, 오늘 이 시간이나마 나오길 잘 했다는, 오늘은 왠지 기분좋은 날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정말 기분 좋은 일이 버러졌다.

  강원도 지역에 물난리가 났다는 소식은 먼데 이야기, 이곳 인천은 날도 찜찜하고, 거리도 뜨겁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찝찝하던 그런 날에, 시원한 폭포수처럼, 그렇게 내 곁을 지나가는 여인을 발견했으니, 옷차림도 시원시원, 생김생김도 늘씬 날씬, 깎아 놓은 듯한 귀여운 얼굴, 그런 여인을 보고 있자니 내 몸조차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어깨에서부터 파여진 옷은 부끄럽다는 듯이 가슴을 살짝만 가리고, 등짝은 그야말로 움푹 파여, 스치고 지나간 그녀를 뒤따르고 싶을 정도였으니, 허허, 따르지는 않고, 오늘은 나오길 잘했으니, 기분 좋을 징조려니하고, 그렇게 지나왔다.

  길을 지나던 차에, 헌책방이 있어 들렀다. 몇 번 다녀간 곳이었고, 대학교 근처여서인지 주로 교재위주로 진열해 놓은 곳에서, 내 눈이 또하난 커졌다.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전집 <<우울과 몽상>>이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얼마전에 보관함에만 담아놓고 있던 차에, 반갑게 집어들어, 이리저리, 이장저장 넘기면서 살펴보니, 겉표지에 살짝 흠집이 난 것 빼고는 새책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아저씨, 이 책은 얼마해요?"했더니, 대충보더니, 10,000원에 준단다. 이 책의 정가가 28,000원인데, 새책이나 다름없는 책을 10,000원에 준다는 것이다. 약간은 주춤했다. 헌책방에서 10,000원이나 하는 것은 고가의 책이기에, 좀 비싸다하고도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책이 여기서 금방 나가겠나하고 생각이 들어, 우선 서가에 다시 꽂아 놓고, 좀더 들러보다가, 상태가 굉장히 양호한 <<문화기호학과 문화컨텐츠>>라는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계속 둘러보았는데, 또하나 월척을 발견했다 싶어 집어들고 다시 가격을 물어보니 이 책은 교재로 쓰는 것이라, 좀 비싸다며 17,000원은 줘야 한단다. 그 책은 <<심리학의 즐거움>>이란 책이다. 이런책을 교재로 쓴다는 게 별로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이 책을 다시 놓고, <<우울과 몽상>>을 다시 집어들었다. 이 책을 10,000원에 준다는데, 얼른 사가지고 가자 싶었던 것이다. 이런 결단과 함께, 고마운 마음에 아까 보았던 책 한 권을 더 산 것이다.

  <<우울과 몽상>>과 <<문화기호학과 문화컨텐츠>>라는 책을 묶어 14,000원을 달라기에 조금 당황스럽게 내어주며 돌아 나서는 가운데, <<문화기호학과 문화컨텐츠>>라는 이 얇팍한 책을 4,000원이나 줬다는 생각이 조금은 아쉬웠다. 미리 물어나 볼 걸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헌책방에서도 횡재한 것이 만족했다.

  아! 오늘 집에서 늦게 나온 것이 2번의 횡재를 가능하게 했으니 여간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강원도의 물난리가 먼데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쏟아지는 폭우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에 빠진 쥐새끼 모양으로 행여 횡재한 책이 젖을까봐 가슴에 품고 돌아왔다.

  과연 오늘 나는 횡재했는가? 횡재, 거기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한 것이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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