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레미 말랭그레 그림, 드니 로베르 외 인터뷰 정리 / 시대의창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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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암 촘스키(Noam Chomsky)란 이름을 안 것은 대학에 갓 입학해서다. 내 전공이 국어교육이고, 그러다보니 대학 1학년 필수과목 중의 하나가 <국어학개설>이다. 이런 언어학 관련 강의 첫 시간에는 의례히 언급되는 몇몇의 이름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촘스키다. ‘변형(생성)문법’의 창시자 격으로 촘스키는 언급된다. 변형문법은 최근까지의 언어학계에 있어 거의 지배적 이론의 위치에 있다. 그렇기에 촘스키란 이름은 세계적 권위의 언어학자  쯤으로 기억되어졌다.

  촘스키란 이름은 그렇게 기억되었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발음상 쉽고 재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여기저기서 그의 이름이 들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던 것은, 그의 이름이 들려오는 곳에 <언어학>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촘스키가 그 촘스키가 아닌가 보다 했다. 그러나 이 촘스키는 그 촘스키였던 것이다.

  언어학자, 그것도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언어학자, 언어학계에서 ‘한 획을’ 굵직하게 그어 논 大언어학자가 언어학하고는 별반, 아니 거의 상관없어 보이는 분야에서 그 이름이 크게 울리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정치, 외교, 언론 등의 분야에서 그의 비판적 목소리에는 그의 언어학자로서의 목소리는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상했고, 그렇기 때문에 내 관심을 끌었다.

  사실 촘스키의 이름이 내게 크게 울리면서 ‘그를 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우선 촘스키란 이름을 처음 접했던 그때의 모습, 바로 언어학자로서의 촘스키를 아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그의 언어학 관련 저서를 접하기가 어려웠다. 그의 저서를 구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촘스키 읽기는 지금까지 미뤄져왔던 것이다.

  그러던 중 촘스키 과련 서적을 구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언어학 관련 서적은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촘스키 읽기를 시작하겠다는 뜻은 없었다. 단순히 언젠가는 읽게 될 것이니, 이 기회(값싸게 살)에 사 둬서 손해 볼 것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구입하게 된 것이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3권의 시리즈였고 덤으로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를 얻었다. 그 후로 조금은 오랫동안 내 책상위에 쌓여 있었다.

  이제야 그 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바로 이 책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이다. 그리고 하루하고 반나절 동안, 기회가 될 때마다 열심히 이 책을 읽었다. 쉽고 흥미 있었기 때문이다. 촘스키의 명쾌하면서 신랄한 비판들을 엿볼 수 있었다. 이것은 또한 이제 촘스키 읽기의 시작을 의미한다. 만약 내가 애초의 언어학 관련 저서로부터 촘스키 읽기가 시작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면서, 아 이게 천만다행임을 알게 되었다.

  이 책에서 촘스키가 말하는 것들은 우리가 대부분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는 것들이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돈’, ‘돈을 가진 자’, 그리고 그것을 유지시켜주는 ‘권력’, ‘권력을 가진 자’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가를 잘 알지 못한다. 촘스키가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 언어학자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날카로운 시각의 정치비평가의 모습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언어학자의 모습이 아닌 촘스키는 더 다가가고 싶게 나를 유혹했다. 그래서 다행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천만의 다행.

  사실 촘스키를 ‘집어 들게’한 것은 『시대의 양심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이다. 거기에 실린 짤막한 인터뷰에서 촘스키의 비판적 목소리를 엿들었고, 이제 본격적으로 들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확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도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어 『시대의 양심~』에서 접했던 촘스키의 모습을 계속해서 읽어볼 수 있었다. 좀 더 친근함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 촘스키가 말하는 것들은 대개 이런 것들이다. (현대의) “지식인의 역할은 민중을 소극적이고 순종적이며 무지한 존재, 결국 프로그램된 존재로 만드는 데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지식인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 곧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지식인의 역할’은 바로 그러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오늘날의 현실에서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족속들은 그 진실이 말해지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법이라는 이름으로 제도라는 이름을 그것을 가둬둔다. 여기에도 촘스키의 목소리는 칼날을 드리운다.


“내게 중요한 것은 표현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허락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는 생각만을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정직하다면 반대편의 주장까지도 수긍할 수 있어야 합니다.”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탄원서에라도 서명하겠다는 촘스키다.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허락되어야” 한다는 촘스키에게 “표현의 자유”란 생명과도 같다. 이 땅의 지식인으로서의 촘스키의 사명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고, 거기에 “표현의 자유”는 지식인으로서 살아있게 하는 숨결과도 같기 때문이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라는 물음은 너무 자명하다. 그러나 너무 자명하기에 우리는 거기에 무관심하다. 우리의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그러한 무관심 속에 우리를 지배하는 그 무엇들은 더욱더 그 세력을 공고히 하고 우리를 헤어 나올 수 없는 암흑 속으로, 곧 無知 속으로 밀어 넣는다. 촘스키는 우리들에게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말을 인용하여 말한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고 말이다. 앎이 곧 힘이다.

  이 시대를 일컬어 우리는 ‘자본주의’의 시대라 말한다. 하지만 “무엇이든 의심하라”(『시대의 양심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는 촘스키는 진정한 “자본주의는 없다”고 말한다.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순수한 시장경제의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용과 위험을 공동으로 부담하는 거대한 공공 분야와, 전체주의적 성격을 띤 거대한 분야가 양분하고 있는 경제 현실에 우리는 살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세상은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면서 “엄청난 권력을 지닌 개인 기업들이 서로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강력한 국가권력에 의존하면서 위험과 비용을 분산시키는 체제”라고 ‘현재의 경제체제’를 정의한다. 몇몇의 거대한 기업들이 이 세계의 자본과 권력을 독점하는 사회를 어떻게 ‘자본주의’라 칭할 수 있겠는가?

  ‘자본주의’라는 이름하에 이러한 세력들은 모든 ‘경제’를 독점하고 지배한다.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기위해 별의별 수단을 동원한다. 여기에 우리는 무기력하게 지배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촘스키의 목소리는 친절히(?) 다가온다. “한국의 금융시장은 완전히 미국의 지배하에 떨어지고 말았”다고 말이다. 모든 것들을 먹어 삼키기 위해 범죄로 서슴지 않는 그들인 것이다.

  그들은 경제를 지배하고, 자본을 독점하기 위해 ‘권력’을 동원한다. 나아가 ‘권력’을 소유하고자 한다. 다국적 기업들은 어지간한 국가보다도 그 힘이 세다. 국가보다도 힘이 센 다국적 기업들,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촘스키는 말한다. “대중이 저항하고 싸워서 때때로 승리를 거둘 때에야 진정한 변화가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알지 못하면 저항할 수 없고, 싸울 수 없다. 그러니 오늘날의 현실에 어떤 변화가 있겠는가? 우리는 알아야 하고, 지식인은 ‘진실’을 말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촘스키는 ‘민주주의’ 또한 의심한다. 의심의 도를 넘어 아예 ‘가짜’라고 말한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국민이 당사자가 아니라 방관자에 머무는 체제’”라고 과감히 말한다. ‘방관자’, 그렇다. 그래야만 그들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다. 함부로 시비 걸지 못하게 아예 그 근본을 없애겠다는 노릇인 것이다. 때로는 협박을 동원하기도 한다. “전쟁에 대한 공포심 조장”이 그것이다. 우리도 이 대목에서는 크게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런 협박에 어지간히 당해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렇게 ‘방관자’를 만드는 민주주의, 그리고 협박과 공갈을 일삼은 오늘날의 지배체제는 그 ‘정당성’을 상실한 것은 아닐까? “모든 형태의 지배구조를 찾아내서 정당성을 입증하도록 촉구해야”한다. 그러나 그것을 누가 할 수 있는가? “가난한 흑인은 암살해도 상관없지만 권력을 움켜쥔 사람을 비난해서는 안” 되는 이 사회에서 말이다. 언론? 지식인들? 그들을 촘스키는 “‘조작된 동의’의 배달부”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그들에게 ‘정당성’을 묻지 않는다. “권력자들을 비난해서는 안” 되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들에게 순응하고 동조한다.

  그러나 모든 지식인들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촘스키와 같은 극히 일부의 지식인들이 있어 우리에게 이러한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와 같은 지식인들이 너무 미미하기에 그들의 대략 ‘미친 놈’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촘스키는 굴하지 않는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이 내 목표”라고 말하는 촘스키의 목소리는 더욱더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라면 절대 굴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있는 듯하다.


“미국과 영국은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두렵게 생각하고, 그들이 언제라도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 국가이익을 위협받을 때마다 미국은 ‘비합리적이고 반드시 보복하는 국가’라는 이미지를 세계에 심어주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동네 뒷골목의 불량배쯤으로 여기면 그만일까? 폭력조직 일제단속 기간에 조직폭력배로 구속시키면 되는 것일까? 어불성설이다. 미국의 제국주의 아래 우리는 시나브로 종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유를 소중히 생각하는 나라라면 언론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보장해줘야” 하고 “비밀로 감추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며, “모든 문서가 공개되어야” 한다고 촘스키는 말한다.

  우리는 참 무서운 세계에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난 이 책을 통해 촘스키의 날카로운 시각과 명쾌한 열변에 흥미로우면서도 한편으로 이런 두려움과 무서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의 힘’을 기르고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떠오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그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세상일을 염려하는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고자 한다. 그 사람, 바로 촘스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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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2006-12-13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전투적인 조직의 초청이라면 전국, 전세계 어디라도" 간다는 촘스키를 우리 알라딘 서재님들과 함께 초청해 보면 어떨까? ㅎㅎ 근데, 우리가 '전투적'이기는 한가? ㅎㅎ

딸기 2007-01-12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촘스키는 그 촘스키였던 것이다." 재밌어요 ^^
반대로 저는, 비판적 지식인 촘스키의 글은 많이 읽었는데,
정작 언어학자 촘스키를 몰라서 많이 아쉬워요. 생성문법에 대해 들은 거라곤
과학책(생물학책)들에서 단편적으로 본 것 밖에 없거든요.

그러고보니, 처음 인사드리는 것 같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추천하고 갑니다.

멜기세덱 2007-01-12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그 유명한 딸기님 맞으시죠! ㅎㅎ 몸소 찾아와 주시고, 댓글까지 남겨주셔서 너무나 기쁘답니다. 많은 분들의 귀한 서재를 몰래몰래 훔쳐보면서 먼저 인사드리지 못하는 저는 참 못났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감사드려요. 아참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딸기'랍니다. 너무 좋아요...ㅎㅎ

딸기 2007-01-15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히히 그 유명한 딸기냐고 하면, 유명하긴 하지요. '딸기'를 모르는 사람은 갓난아기 말고는 없을테니까요. 베리베리 스트로베리... ^^
근데 저는 정작 딸기를 안 좋아해요. ㅋㅋ 시어서... 인삼딸기는 그래도 괜찮아요, 안 시니깐.

멜기세덱 2007-01-16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삼딸기도 있나요? 난 왠지 인삼은 싫은뎅..ㅎㅎ 하긴 알라딘 갓난서재인 말고 '딸기'님을 모르는 분들은 없을거에요.ㅎㅎ
 
시대의 양심 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
노암 촘스키.하워드 진.에드워드 W. 사이드 외 17인 지음, 강주헌 옮김, 데이빗 버사미 / 시대의창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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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의 열렬한 추종자처럼 보이는 <시대의창>에서 또하나의 이벤트성, 프로젝트성 책 한 권이 나왔다. 이 책『시대의 양심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이하『시대의 양심』)가 그것인데, 이것이 이벤트성, 프로젝트성으로만 치부해 버릴 그런 책은 아니다. 그야말로 쟁쟁한, 우리나라에서 그야말로 인기있는 촘스키를 비롯해서, 에드워드 사이드, 하워드 진 등 전세계적으로 지명도 있는 인사들과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그것은 이 책이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유리한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례 그렇듯이, 상업적 목적의 이벤트성 도서들이 그 질적인 측면에서 기대이하였던 것들이 많았던 바, 이 책도 그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한다면 크게 오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맨 뒷페이지에 이런 글귀가 있다. "독자를 먼저 생각하는 정직한 출판". 이게 <시대의창> 출판사의 회사로고인가보다. 그리고 또 이런 글귀도 있다. "시대의창이 '좋은 원고'와 '참신한 기획'을 찾습니다."라고. 그런데, <시대의창>이라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그러니까 그렇게 클 거 같지 않은 출판사(출판자본)에서 촘스키의 여러 저작들을 독점적으로 계약하여 출판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보이는 듯도 하다. 어쨌거나 이런 회사의 로고처럼, <시대의창>에서 '좋은 원고' 하나 건져내서 번역해 내놓은 것만은 분명하다. 이 책『시대의 양심』은 "독자를 먼저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독자에게 좋은 책임에는 틀림 없을 것 같다.

이 책은 데이비드 바사미언이 미국의 한 지방 방송 프로그램에서 여러 인사들을 대상으로 인터뷰한 것을 간추려 모은 것인데, 그 이름도 쟁쟁한 촘스키, 진, 사이드를 비롯해서, 의외의 인사 대니 글로버, 랄프 네이더 등 내가 알고 있었던, 또는 모르고 있었던 주요 지성들의 인터뷰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 거창하게 "세상의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거반 거짓말에 가깝지만, 또한 약간은 시기가 지난 시류적절치 못한 내용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특히 나에게는 이 책이 참 유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촘스키나 사이드는 너무 유명해서, 우리가 잘 아는 듯 하면서도 잘 모른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 난 촘스키의 여러 저작들(특히 <시대의창>에서 내놓은 "촘스키, 세상의 ~"시리즈 등)을 구입해 놓고 있지만 읽지는 않았다. 이런저런 핑계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뻔한 내용일 듯 싶기도하고, 읽기 지루하고 어려울 듯도 해서일 거라고 생각하는 측면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 책은 그런 점에 있어서 너무 유명해서 우리가 잘 모르는 오늘날 세계의 선각자라고 불리기에 충분한 지성들의 지적, 인간적 측면들에 쉽게 접근하게 해주는 하나의 출입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그리고, 내가 의외의 인물로 칭한 영화배우 대니 글로버의 또 다른 면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을 포함하여, 우리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분야의 여러 지성들을 소개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또다른 장점이 있다.

이 책에서는 특히 미국비판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는 듯 하다. 이 책에 구성된 대부분의 인물들이 지금까지 그런 역할을 해왔고, 아직도 그렇게 해오고 있다. 다만 사이드가 하늘의 부름을 받았을 뿐이다.(이 자리를 빌어 삼가 애도를 표한다.) 그 외 몇몇 분야들에도 우리의 관심을 끌기 충분한 인사들도 포함되고 있다. 20인의 인사들을 조금씩 '맛볼 수' 있는 그런 책인 것이다.

이 책이 의미있기 위해서는 이 책으로써 만족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을 통해 사이드에게로, 진에게로, 아흐메드 라시드에게로, 아룬다티 로이에게로 나아가야만 이 책은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이 책에서 '진실'을 찾기는 무척 어렵다. 아니 제로다. 그들은 '시대의 양심'으로서 때론 날카롭게, 때론 친근하게, 그리고 유쾌하고 명쾌하게, 그러면서도 자신의 삶과 현실을 진지하게, 그러나 너무 짧게 들려주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아쉬움이 남고, 그렇게 아쉬움을 남겨 놓고 외면한다면 이 책은 단순 이벤트, 프로젝트, 이름만 거창할 뿐 남는 것 없는 그런 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단언하건데, 이 책은 '세상의 진실'을 찾으러 떠나보려는 우리들에게 출입구를 작지만 환하게 열어주고 있다. 그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나의 몫이고, 우리의 몫이리라. 들어가 보시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 책이 분명 그 가치를 다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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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2-07 0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사람들 때문에 미국이 희망이 있는 나라라는 게 싫을 정도입니다.ㅠㅜ
읽어봐야겠군요. 잘 읽고 갑니다.^^
 
남자생활백서 - 보다 행복해지기 위한 남자들의 생활 기술
에스콰이어남자생활연구회 엮음 / 가야북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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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새는 이러저런 ‘~백서’가 붐이다. 무엇보다 출판시장에서 그렇다는 얘긴데, ‘~백서’란 이름을 달고 나온 책이 수백 권이다. 최근 들어 이 ‘~백서’가 눈에 띄게 된 것은『백수생활백서』(박주영, 민음사, 2006.)로부터이다. 무엇이 앞이고 뒤인지 모르겠지만 이로부터 서점 진열대나 인터넷 도서 목록에서 ‘~백서’가 참 많이 눈에 들어왔다.『여자생활백서』,『현대생활백서』,『팀장생활백서』등 줄줄이 백서더니, 이제는『크리스천 생활백서』까지 나와 있다. 하여간 요즘에는 이 ‘백서’를 붙여야 책이 잘 팔리나 보다. 그걸 시비 걸자는 건 전혀 아니다. 

  ‘백서’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예전에 ‘개그콘서트’라는 프로그램 중에 <청년백서>라는 코너가 있었다. 몇 년 전으로 기억하는데, 재밌게 봤던 코너로 기억이 된다. 혹시나 최근 들어 이 ‘~백서’ 붐이 그 개그 코너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백서, 백서’하는데, 이 ‘백서’라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

 

  ‘백서’라는 말의 시작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영국의 정부 공식보고서의 명칭을 ‘white paper’라 불렀는데, 이는 보고서의 겉표지가 흰 색이었기 때문이란다. 그로부터 여러 나라에서 정부의 공식보고서에 ‘백서(白書, white paper)’라는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경제백서’, ‘환경백서’ 등이 그러한 예이다. 따라서 이 ‘백서’라는 말에는 무엇에 대한 보고서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봤을 때, 최근의 ‘~백서’ 붐은 자기계발의 중요성과 맞물려 있는 듯하다. 현대사회에 있어 자기계발의 생존의 필수전략일 수밖에 없고, 그 중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그 전략서나 방법론들이 책으로 출간되어 잘 팔리게 되는 것이 터이다.『백수생활백서』를 빼면 대다수의 ‘~백서’가 거의 모두 이런 종류의 책이다.

 

  나는 이렇게 많은 ‘~백서’들 중에 딱 두 권의 책을 읽었다. 사실 자기계발 서적은 다분히 상업적이고, 또한 나한테는 별반 득 될 것 없다는 생각(아직도 이 생각에는 크게 변함은 없다.)에 소설인『백수생활백서』만 읽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여러 종류의 ‘~백서’들이 우연찮게(사실 너무 많아서 눈에 띌 수밖에 없었으니 우연만은 아닐 터이다.) 이 책 『남자생활백서』가 눈에 들어왔다. 어떤 충동이 일어서 인지는 몰라도, 이 책을 집어 들고 계산대에서 바로 값을 치르고 집에 와 읽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떤 충동이라기보다는 이 책의 내용들이 많은 부분 대한민국의 어엿한 ‘남자’로 태어난 나에게 어떤 필요성으로 작용했던 것이 아닌가한다. 이 책은 대체로 쉽게 읽혀지면서도, 몇 몇 장들에 대해 집중력을 갖고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대충 여기서 언급하자면, 2장과 3장과 4장이 그것이었다.

 

  이 책은 말하자면, 요즘과 같이 이 사회에서 ‘남자’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변화해야하고, 전략을 가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단적으로 ‘위버 섹슈얼 시대’의 도래를 말하면서 남성도 자기의 몸을 가꾸어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사실 나는 지금까지 여기에서 언급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알지 못했고, 행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행할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무언가 달라져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어떤 불안감도 엄습한다.

 

  대부분의 동물(일단은 여기서 인간은 제외한다.)들은 수컷이 암컷보다 더 아름답다고 한다. 그것은 생존본능 혹은 전략으로써, 그래야만 암컷을 꼬실 수 있고, 그래야 자기의 종족번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사회에서 조금 다르게 작용한다. ‘아름다움’이 수컷이 아닌 암컷, 다시 말해 남성이 아닌 여성에게 해당되는 용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따져보면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적용되었을 뿐, 동물들의 그러한 전략은 여전히 인간 사회에도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동물의 수컷의 전략이 아름다움이었다면, 인간사회에서의 수컷은 부와 권력(사실 이것 또한 동물들의 세계에서 수컷이 갖추어야할 덕목이기도 하다.)으로 바뀌었을 뿐이다.(바뀌었다기 보다는, 아름다움이 제외되었다고 해야 맞겠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또 무언가가 달라졌다. 바로 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다만 여성의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요즘의 대세는 이준기 스타일, 꽃미남 천국, 즉 ‘아름다운 남자’가 트렌드인가 보다. 얼추 틀린 얘기도 아니고, 고깝고 볼 일도 아니다. 사실 꽃미남, 이준기 이러면, 짜증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우리 남자들은 ‘아름다움’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남자에게 ‘멋지다’를 여자에게 ‘아름답다’를 강요해 왔다. 나는 이것이 우리사회는 큰 병폐라고 생각한다. 남자는 멋있어야 하기에, 눈물을 흘려서도 안 되고, 부엌엘 들어가서도 안 되며, 어디 가서 얻어맞고 들어와도 안 된다. 반면 여자는 아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 수많은 ‘안 됨’과 억압을 당해온 것이 아닌가? 남자나 여자나 이 사회의 단순한 억압에 종사하여 우리 사회는 무언가 잘못된 길로 간 것이 아닌가 한다.

 

  요즘의 이 ‘남자의 아름다움’이란 논리는 무엇보다 예전의, 원초의 그것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복고의 성격을 띠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렇게 본다. 새로운 세기, 오늘날 21세기는 바로 부드러운 남자, 아름다운 남자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요구에 우리 남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바로 이 책『남자생활백서』는 그런 요구에 적잖은 답안들로 가득 차 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절대 마사지를 받으러 다니거나, 화장을 하거나 하지는 못하겠다. 그런데, 몇몇 부분에서 이 정도는 그래도 내가 노력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지금까지 옷 한 번 내 돈 주고 사본 기억이 별로 없다. 사다주면 입는 것이고, 대충 옷장에 있는 옷들 꺼내 입고 집을 나선다. 그런데 우리에게는(비단 남자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전략들이 필요하다. 그런 필요성은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그런 최소한의 전략들을 갖추어야 한다. 수트를 입을 줄 아는 정도, 구두를 잘 골라 신을 수 있을 정도, 깔끔하고 단정된 옷차림을 갖출 수 있을 정도, 여자들을 매너 있게 대할 수 있는 정도 등은 우리가 최소한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들이다.

 

  사실 이런 것들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데, 그동안 우리를 강요해 왔던 ‘남자다움’의 병폐로 인해 이런 것들을 우리는 어렵게 만든 것은 아닐까? 또 하나의 사실은 여자들이 좋아하는 남자는 남자가 봐도 멋지고 예쁘다는 것이다. 멋짐과 아름다움을 보는 시각은, 그것을 인식하는 기준들은 남자나 여자나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책의 내용들이 다분히 ‘여자에게 잘 보이기’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타인에게 잘 보이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이 사회에서 남자로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생존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 이름, 곧 ‘백서(白書, white paper)’라는 이름에 충실히 값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사회 남성들의 필수생존전략보고서,『남자생활백서』는 대한민국 노무현 정부의 그 어떤 보고서보다는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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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6-11-21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직하면서도 재미있고, 분석적이면서도 날카롭지 않은 글이네요. 글 잘 보고 갑니다. :)

멜기세덱 2006-11-21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과찬의 말씀이세요. 아무튼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 - 우리말로 옮겨진 고전, 무엇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교수신문 엮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요즘 『논어』 관련 책들을 사모으고 있다. 이름난 『논어』만큼이나 이곳저곳에서 한 구절씩을 얻어 들은 것은 꽤 많다. 말하자면 서당개 풍월읇는 식이라고 할까. 아직 이 『논어』란 책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것이 나 스스로에게는 부끄러움이다. 특히나 유명한 고전들은 읽어야지 하면서도 그 유명세의 귀동냥으로 아는 체나 할 뿐, 제대로 읽어본 것이 없으니 참 한심한 노릇이다. 그래서 이참에나마 차분히, 그리고 정성껏 읽어보고자 하는 마음에, 그 시작은 무엇보다도 이 『논어』여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논어』관련 서적들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들'인가 하고 의문을 갖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 『논어』를 '그냥'은 읽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의무방어전 삼아 읽겠다는 소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제대로 읽어보자는 심산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논어』와 관련된 책들, 이를테면 번역서, 해설서 등의 여러 책들을 함께 읽어보겠다는 거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여간에 이것이 하루 이틀 만에 끝날 일이 아니기에 그 계획의 실효성 여부를 지금은 판가름할 수 없겠지만, 『논어』를 시작으로 여러 동양고전들을 차근차근 읽어보겠다는 큰 포부를 가지고 있다.

그런 생각으로 『논어』관련 도서들을 구하고 있다. 현재까지 내가 구한 도서는 얼추 5~6권 가량이다. 이전에 구입한 것도 있고, 최근 구입해 놓은 것도 있다. 이것들을 찾아보겠다고 시중 서점들에도 가보고, 인터넷 서점들에서도 검색을 해보기도 했는데,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논어』란 제목을 단 책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하기사 그 유명세에 비하면 그정도는 약과이기도 하겠다. 문제는 그 많음이 아니라, 그 많음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있었다. 그 많은 양의 도서들을 모두 살 필요도 없겠거니와, 그럴 만한 경제력도 내게는 없으니, 무엇보다도 '좋은' 것을 골라야 했다.

하지만 나는 이쪽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고, 그리 많은 문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기에 그 선택의 문제를 해결하기가 여간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한문학 전공 교수님의 추천도서나 유명한 『논어』전공자의 번역서 위주를 택하는 길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이런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주변의 여건이 있었지만, 이 『논어』를 읽어보겠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있을 턱이 없다. 이것도 문제라면 문제인데,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그런 문제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여기에 그 문제가 나게, 그리고 많은 독서가들에게 분명 '대수롭지 않은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는 책이 있다. 바로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이다. <교수신문>에서 그간의 우리 학계의 고전번역에 문제를 인식하고 이런 기획을 통해 고전 번역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왔으며, 이 책은 그런 노력의 결과물 중 하나이다.

사실 우리에게는 외국의 고전들의 유명세를 앞세워 무자비하게 번역만 되어 내놓아졌을 뿐, 그 번역에 대한 여하의 비판은 전무했다. 거기에 나같이 외국말이라고는 ABCD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그런가보다 할 뿐 이게 잘된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를 판단할 수는 없었다. 그리니 큰맘먹고 그 유명한 고전 한 번 읽어보자, 나도 교양인 한 번 되어보자 하는 사람들은 그저 손 가는데로 집어들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런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이번 책의 시도는 진작에 이루어졌어야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의 반가움 못지 않게 아쉬운 마음도 적지 않았던 듯 하다.

사실 이 책을 만난 반가움은 아쉬움을 덮을 만큼은 아니다. 아쉬움은 이 책을 만난 후에도 더 찾을 수 있었다. 우선 이 책에서 대상으로 삼은 고전들이 너무 적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책의 머리말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여전히 계속되어야 하는 번역비판 작업이기 때문에, 이 아쉬움은 앞으로 계속될 번역비판에 대한 기대감으로 상쇄시키고자 한다.

또다른 아쉬움은 우리의 한문문학의 번역작업에 대한 비판이 너무 적은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박지원, 정약용 등의 뛰어난 한문 산문들도 시중에 많이 번역되어 나왔있고,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다. 따라서 이것에 대한 작업도 빠른 시일 내에 이뤄져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대로된 번역서를 보기위해 이런 종류의 책을 읽어야만 하는 것인가하는 회의다. 한 권의 고전을 사기위해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를 먼저 읽어야만 하는가? 난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그렇게 할 만한 사람들이 그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런 번역비판에 대한 작업이 보다 대중화되고, 더욱 많이 공공연해져야 한다. 그래야만 많은 대중들이 좋은 번역서를 사게되고, 따라서 더 많이 팔기 위해서라도 번역작업에 충실히 기한 책들이 나올 수 있을리가고 본다.

그런 아쉬움들이 많이 남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의 2, 3권이 빨리 나왔으면 한다. 그런 것이 아직 자리잡지 못한 번역비판의 문화의 형성에 기여하는 바 클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내 서가의 손이 가장 잘 닿는 곳에 놓아둘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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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11-20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보관함에 들어갑니다. 꾹.

파란여우 2007-06-08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권 나왔습니다. 님께 땡스투를 하고 오늘 1,2권 모두 신청했거든요^^
와 기대됩니다.

멜기세덱 2007-06-08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온지 꽤 됐는데요.ㅎㅎ 2권 나오자 마자 후딱 사서 봤어요...ㅎㅎ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페미니즘’이니 ‘페미니스트’니 하면 우선 경기(驚氣)부터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나에게도 어떤 거부감이나 거리감을 갖게 하곤 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흔히 ‘여성주의’라고 번역이 되는데, 이 단어 자체에 대한 대립적 위치에서 오는 거리낌 같은 것이 존재하는 듯하다. 남성과 반대 개념으로써의 ‘여성’, 그에 기초한 ‘여성주의’에 대한 인식은 일단은 반대부터 해야 될 것처럼만 여겨지기 때문이다.

 

  언어학의 의미론에서는 단어를 의미관계에 따라 분류하는데, 그 가운데 ‘반의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두 단어의 의미가 반대관계에 있을 때 반의 또는 반대성에 있다고 말하고, 반의관계에 있는 단어를” 말한다. 이런 반의어는 다시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뉘는데 상보적반의 ․ 단계적반의 ․ 관계적반의 등이 있다. 그 중에 상보적 반의라는 것은 “이쪽이 아니면 저쪽이라고 자동적으로 정해지는 반의로서 원칙적으로 양극만 있고 그 중간, 즉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간 상태가 없는 양극적 상보적관계가 성립되는 반의를” 말한다. 다른 말로 ‘배타적(排他的) 반의라고’도 한다.

 

  이 상보적 반의에 해당되는 단어의 대표적인 예가 ‘남성/여성’이다. 즉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는 중간항이 없으며 상호 배타적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남성/여성’의 중간항이 존재한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고, 그렇다면 이것을 상보적 반의로 구분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런 측면에서 기존의 의미론은 문제제기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언중들은 남성과 여성은 상호 배타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언어적 인식으로부터 편견은 시작된다. 이런 편견은 ‘여성주의’를 제창하는 ‘여성주의자’들을 ‘배타적’으로 바라볼 뿐이다. 왜 ‘여성주의’를 부르짖는가? 왜 ‘페미니즘’인가? 라는 물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은 정도한 비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물음 없는 비판은 비난이고 편견이기 쉽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은 이런 편견과 비난에 대한 ‘도전’이다. 왜 우리 사회가 ‘페미니즘’을 혐오하고 배척하는가에 대한 결코 가볍지 않은 사유가 담겨있다. 그로부터 왜 ‘여성주의’를 말해야 하고, 왜 ‘여성주의’여야 하는 가는 우리 사회의 곳곳에 담겨있는 편견들과 비난들에 차분하지만 강력하게 말함으로써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정희진은 우선 ‘언어’에 주목한다. 위에서 말한 언어 속에 숨어있는, 그래서 우리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처럼 여기는 편견과 오류들을 밝혀내고 있다. 페미니즘을 말하는 데 왜 언어에 천착해야 하는가? 그것은 지금은 ‘언어’가 남성들의, 정희진의 말을 빌리면 “백인, 남성, 중산층, 성인, 비장애인, 이성애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를 통한 사유는 “백인이 아닌, 남성이 아닌, 중산층이 아닌, 성인이 아닌, 비장애인이 아닌, 이성애자가 아닌” 흑인과 유색인을, 여성과 중성을, 서민과 극빈층을, 미성년을, 장애인을, 동성애자를 배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배제는 억압과 착취를 낳고, 편견과 오류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언어에 대한 천착과 도전은 ‘페미니즘’의 중요한 작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언어 속에는 많은 것들이 배제되어 있고, 남성중심적인, 그것도 서구의 백인 남성 중심의 사유와 인식이 담겨있다. 그러한 언어를 자신의 언어로 사유하는 우리들에게는 “사유 방식의 전환”이 요구된다. 정희진의 이러한 언어에 대한 세심한 분석은 예리함을 보여준다.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던 것들에 대한 전복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여성’에게만 주창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동안의 남성언어에 대한 ‘전복’으로서 ‘여성언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주의’는 남성의 언어도, 여성의 언어도, 그리고 다양한 타자의 언어도 존재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목소리들이 공존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여성주의다.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회는, 갈등 없는 사회가 아니라 가능성이 없는 사회”라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에 대한 천착을 통해 우리는 여성주의에 대한 편견에 지대한 ‘도전’, 아니 그 이상의 철퇴를 맞게 된다. 남성에 대한 적대감으로서의 ‘여성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는 다양성의 공존을 지향하자는 목소리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에게 ‘페미니스트’로서의 사유는 이 다양성의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된다.

 

  정희진은 남성의 언어가 만들어 놓은 이 사회의 가부장적이며 권위주의적이고 폭력과 억압으로 인해 ‘진정한 남성’이 아닌 이 사회로부터 타자화된 이들에 대한 인식과 그들과의 공존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성차별, 성폭력, 성매매에서부터 다양한 사회의 소수자들의 ‘차별과 타자성’이, 이 사회에 얼마나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실증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차이에 대한 배척과 억압에서부터 오는 것이기에, 남성주의의 ‘전복’을 통한 차이의 인정, 즉 다양성을 공존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무엇보다 페미니즘이 남성주의적, 가부장적, 이분법적 사회에서 하나의 효과적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주의는 “‘다른 목소리’가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고, 여성도 남성도 성장시키”며 “현실을 바로 알기 위해서”도 “여성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존의 “남성 중심 사고의 기본 구조는, 세상을 인식자를 중심으로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이분법이”었지만, 다양성과 다양한 목소리의 공존을 추구하는 페미니즘은 이 사회에서 강력한 대안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희진는 ‘가장 현실적인’ 세계관으로서, 페미니즘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들의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에 대한 편견은 벗어버리고, 페미니즘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귀 기울여야 한다. 이 사회가 다양성의 공존을 인정하고 추구할 때 우리 사회는 한층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 사회에 ‘인식의 전화’, ‘사유의 전복’으로서의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도전’으로써의 무모함보다는 설득과 타협과 대안으로써의 정희진의 목소리가 깊게 울리고 있다.

 

  나는 ‘과감히’ 말할 수 있겠다. 이제부터는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겠다고. 섣부른 소리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도 좋을 것만 같다. 그래야 이 사회가 풍요하지고 아름다워질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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