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 - 우리가 꼭 읽어야 할 이청준의 문학상 수상작
이청준 지음 / 푸르메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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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청준 님의 작품을 대하는 것은 아주 오래 전에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작품을 대하고 두번째다. 작가생활 45년의 이력을 가진 그에게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어렴풋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조금 가진 것이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나의 그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알라딘에서 파는 할인도서에서 인연이 닿아 고른 이 책은 작품 한 편 한 편을 읽으면서 멈추고 또 읽어나가기를 반복하며 틈새의 사색의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소설가는 그의 작품을 통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면적인 탐색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모험가요 탐험가이다. 그러기 위해선 낯선 환경 속으로 또 소설의 주제를 찾아서 늘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매잡이]라는 작품은 작가의 선배가 평생동안 현장답사만 해온 자료를 접하면서 쓰게 된 작품이야기이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소설가가 되기 위한 치열하고도 끝없는 노력없이 좋은 작품이 나오기 어렵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존재하는 세상만큼이나 넓은 인간 인식의 영역과 내면의 우주를 탐색하여 인간이 갖고 있는 정신적인 정수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소설이 가진 매력이다.  

  그 소설은 현실의 사건들을 바탕으로 하여 그 역사적 사건이 인간의 삶 속으로 들어와 내면의 세계를 형성하는 것을 보여준다. [퇴원]과 [병신과 머저리]는 개인의 정신적 상처가 그 사람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한다. 개인에게 있었던 군대생활과 자신의 성장과정이 눈모양으로 고스란히 담겨 삶의 한 가운데를 차지해 버리는 이야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형이 자신의 동료인 오관모 병에게 총을 쏜 경험이 자신의 의사생활 인생에서도 마음의 큰 상처로 남아 있는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잊을 수 없는 경험과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녹여내고 극복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삶에 집착이 되기도 하고 그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난 삶을 살 수도 있다. [매잡이]와 [이어도]는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상상적인 삶이 자신의 현실의 삶을 지배하는 경우이다. 매잡이에서는 자신의 삶을 매와 같이 이상화시킨 극단적인 삶이 매잡이 곽서방의 죽음을 가져오게 된다. 이어도에서는 제주도 사람들이 빠져있는 집단무의식과 자아망실감이 환상의 섬 이어도에 대한 그리움과 두려움의 이중적인 감정을 극으로 치닫게 하고 결국엔 그 섬 때문에 천기자는 자살한 내용이다.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흑백이데올로기와 개발독재라는 집단무의식 속에서 서민들은 어떤 꿈을 꾸고 살았을 것인가를 생각해볼 때 뭔가 마음 속에서 이런 연결고리같은 것이 생기는 것을 느낀다. 

  [살아있는 늪]에서는 농촌에서 도시의 삶이 베어가는 한국의 현실에서 도시에서 살고 있는 젊은이가 어머니를 찾아보고 돌아가는 이야기이다. 농촌의 삶이 싫어 도시로 떠난 아들은 낮이 되면 이곳에서의 아프고 힘들었던 유년시절이 더욱 선명해질까봐 날이 새기 전 새벽차로 서울로 올라가려 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 차는 문제를 일으키고 정차하게 되고 그 속에서 농촌에서 자라고 평생을 살아온 촌사람과의 갈등을 통해 도시와 농촌의 삶을 대비시킨다. 그리고 그 이중적인 갈등을 삶 속에서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 젊은이가 겪게 되는 아픔을 늪으로 표현했다. 오히려 그 어렵고 힘든 6,70년대의 삶을 버텨온 것은 도시인의 세련되고 합리적인 자기주장이 아니라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며 그 불편을 웃음으로 넘기는 말못하는 민중들의 따뜻한 가슴이 아니었던가 하고 말이다. 인정하기 싫은 젊은이의 의식과 엄연히 존재하는 민중의 현실과 진리가 한 사람의 내면에서 갈등과 고뇌로서 잘 나타난다. 

  [날개의 집]은 자신의 꿈을 늘 바꾸던 시골의 한 소년이 드디어 화가의 꿈을 꾸면서 그것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이자 그림소설이다. 당숙인 유당선생님의 지도하에 참다운 그림의 모습을 배워나가며 현실의 삶 속 그 깊은 사람과 생명의 아픔을 자신이 느끼면서 마음 속에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형상을 화지 위에 올려놓는 것, 그것이 다름아닌 그림인것을 배우기까지 한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의 노력과 고통과 좌절은 계속된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그림에 새롭게 눈뜨게되는 것은 그림그리기의 벽을 통해 매 순간 처절한 고통과 맞닥뜨리게 될 때였다. 그 좌절에 굴하지 않고 다시 한 걸음을 딛고 나설 때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만의 생명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림은 스스로에게 만족스러운 무엇으로 다가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작가의 소설에서도 똑같이 적용된 것은 아니었을까? 일종의 삶의 깨달음처럼 온갖 삶의 굴곡속에 한국의 현실과 그 속에서의 경제성장의 시대를 살아오며 그 아픈 상처들을 모두 어루만지며 자신의 삶 속으로 받아들이면서 써낸 작품들이었기에 더욱 그만의 세계에 가닿았을 것이리라. 책 속으로 들어가기 전 깨끗한 여백에는 이 말이 적혀 있다. "아픔을 배우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그 아픔을 앓는 것, 그 아픔을 숙명의 삶 속에서 앓아가는 것이 사랑이었다. 자신의 온 몸뚱이로 그 아픔을 참고 앓아나감이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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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2-25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온 몸뚱이로 그 아픔을 참고 앓아나감이 사랑이었다."
꽤나 고전적인 표현입니다.
요즈음 작가들은 이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듯합니다.


달팽이 2010-02-25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몸으로 체험하는 공부는 반드시 필요한 것 같습니다.
마음공부도 몸으로 체험되어지는 바가 없으면 공허할 것 같아요.
 
캔들 플라워
김선우 지음 / 예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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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국사회를 다시 한번 민주주의적 소통과 참여의 장으로 이끌었던 촛불집회. 그에 대한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좀 더 이상적인 형태의 촛불집회는 무엇이었을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소설가가 내렸다. 한국을 휩쓸고 간 촛불의 에너지는 어디로 사라졌으며 다시 무엇으로 태어날 것인가? 촛불 집회가 내린 영향은 무엇인가? 또 지금의 현실은 과연 어느 곳에 위치해있으며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학문이 아니라 소설적인 플롯을 통해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새롭다.  

  전체와 소통하는 사람 

  캐나다 벤쿠버의 어느 시골에서 자라 15살이 되어 한국을 정신적 자립의 첫 여행지로 선택한 지오, 그녀는 정규적인 학교교육을 받지는 않지만 읽고 싶은 책을 읽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하루하루 나무의 잎이 자라는 것을 느끼고 동물의 마음과 교감한다. 7살이 된 어느 날 뇌의 정전사고를 겪고 난 후 그녀의 인식의 세계는 바뀌었다. 뇌의 세계에서 가슴의 세계로...그녀는 동식물과 교감하게 되었고 전체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녀 뿐만이 아니다. 희영이도 연우도 개와 소통하는 인연으로 만난다. 그 소통의 비밀의 문은 '사랑'이다. 그 대상을 사랑하게 될 때에만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또 소통할 수 있다. 이지훈 기자에게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필요하다고 조언하고 그에게 있는 내면적 장점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는 홍씨 노인도 이런 면에서 전체와 소통하는 사람이다. 세상을 진보와 보수라는 틀로만 나누지 않고 진보와 보수가 제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서로 교류하고 소통함을 통해 더욱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 또한 소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고 되찾고 싶어했던 숙자씨도 사과의 마음을 읽어주었던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쓰기에 따라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는 이 마음. 그것을 일러 소통의 마음이요 전체의 마음이라 부르면 어떨까?  

  아픔은 영혼을 성장시킨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누구나 자신만의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의 삶을 실패하고 고국을 떠나 세계의 각지를 떠도는 가족을 가진 희영이의 상처가 있고, 아버지의 폭력적인 그늘 하에서 불행하게 살다 결국엔 남편을 죽이게 되는 엄마의 삶을 가진 수아의 상처가 있다. 보수 기자인 아버지의 삶과 자신에 대한 보수적인 가부장제를 거부하는 속에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는 민기의 아픔이 있는가하면 아주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갖게 되어 그 아이를 출산하면서 동시에 어머니는 생명을 잃고 동갑의 아버지는 자살을 한다. 부모를 잃고 홀로 고아가 된 연우의 상처다. 하지만 이 깊은 상처를 가진 그들이 그 아픔 속에 머물지 않는다. 그 아픔을 타인들과의 관계를 통해 어루만지고 그 아픔을 속으로 녹여내면서 더욱 단단하게 성장해간다. 지오가 보기엔 한국의 청계천은 야생성을 읽어버린 하천이다. 원래 지형의 생겨먹은 대로 흐르는 물의 흐름이 아니다. 어쩌면 한국의 아이들은 바로 자연성을 잃어버린 문명 속에서의 삶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 청계천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은 이미 기형화되고 왜곡되어버린 물의 흐름이지만 그것은 나름대로 시멘트 틈새에서 생명을 피워내고 또 물고기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주며 그런대로 또 하나의 물의 흐름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젊은이들도 자신의 주어진 환경에서 제 각각의 삶의 꽃을 피워내는 스스로의 물줄기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안의 괴물을 어떻게 다룰까? 

  촛불집회가 반복되면서 사람들의 순수한 마음은 이제 반대의 폭력 속에 놓이게 된다. 정부는 교묘하고도 다양한 선전을 통해 그들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그것은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은 채 일방적인 통보로 세상에 배포된다. 촛불집회의 규모도 커지면서 점차 집회는 국가권력과의 대면 양상을 띠게 되고 국민들의 안전한 먹을 거리와 물가 서민들의 삶, 교육문제 등 생생한 현실문제들에 대한 토론과 소통의 장이 투쟁과 갈등의 장으로 변하게 된다. 주어진 역할 속에서 서로 담배와 먹을 것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나누던 시민들과 전경들은 이제 물리적인 폭력과 대응 앞에서 마음을 닫고 적대시한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마음 속에 생겨났던 괴물...그것은 애초에 한국과 국민에 대한 사랑과 소통의 마음을 서서히 지배하며 삭트는 적대감과 서로에 대한 단절감이었다. 작가는 사회적인 갈등 속에 놓여진 개인의 마음과 심리의 변화를 통해 촛불집회의 성격이 어떻게 변화해가고 또 어떤 성격의 모임이 되는지도 보여주고 있었다. 놀랍다. 우리 안의 분노와 적대감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한편으로 이쪽과 저쪽의 싸움이 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체의 세상과 소통하며 하나의 만남을 위한 소통이 될 수도 있었다.  

  더 넓어진 세상인식은? 

  안전한 먹거리를 위한 시민들의 정당한 요구를 민주주의적 해결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에서 나아가 육식의 입맛을 채워주기 위해 잔인하게 자라고 도축되는 소들의 영혼도 위로해주고 빌어주는 마음, 인간의 쾌락과 욕망 속에 버려진 세상의 굶주린 사람들과 황폐해져만 가는 지구,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들의 마음 속의 괴물이 더 이상 자라지 않고 그 에너지를 다시 생명을 살리고 지구를 살리는 에너지로 변화시키려는 의지...그것이 이 소설이 보여주는 더 넓어진 세상인식이다. 어쩌면 문제의 촛점을 흐리는 것으로 보일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 안에 들어온 것만을 문제라고 인식한다. 그러니 하나의 인식의 창 속에 가려진 많은 면들을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글을 쓰는 사람들의 소명이 아닌가? 민주주의적 의사결정과 소통의 문제를 소에서 사회문제에서 인간의 마음 내면으로 옮겨다 놓고 또 그것을 사회 전체로 우주전체로 존재의 층위 전체로 옮겨다 놓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이 보여주는 새로운 면이라고 생각된다.  

  아직 희망은 남아 있다.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은 사회문제들, 그리고 촛불집회의 순수한 에너지와 그것을 분출했던 사람들은 결국 어디로 가는 것일까? 세상과 소통하고 동식물과 소통하고 사소한 일상 속에서 삶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추출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그 에너지와 마음은 사람지지 않고 축적된다. 젊지만 인생을 사는데 있어 결코 어리지만은 않은 지오와 민기 태현과 희영 연우와 수아들 우리 사회의 젊은 층들이 바로 그 희망이다. 다만 그들의 마음 속에 생겨서 자라나는 괴물의 존재를 잘 다스릴 수 있는 고삐를 쥔 자들 말이다. 밖으로는 세상과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고 안으로는 자신의 마음 속의 분노를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당당한 시민들이 존재하는 한 그 사회의 희망은 늘 존재한다. 그 희망은 마치 촛불처럼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소리없이 옮겨가고 어느새 세상을 밝히는 횃불이 된다. 촛불은 그 빛의 반경이 작다. 널리 세상을 구하기 전에 우선 자신의 주위를 밝혀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는 성찰의 의미를 촛불은 갖고 있다. 자신의 마음이 밝혀진 후에야 비로소 주위를 넓혀 사회를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촛불의 지혜에서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세상이 모두 하나의 꽃처럼 피어날 수 있다면 희망은 바로 그 한 송이의 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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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0 1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1 1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동대문도서관 2010-07-27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동대문도서관 입니다^^
『근대의 책 읽기』 저자 천정환 교수님의 강좌 <독자, 그들의 대한민국 - 근현대 문학과 독자의 문화사>가 9월 7일부터 매주 화요일 7시에 동대문도서관에서 열립니다.
4주차 강의에서 김선우 작가의 <캔들 플라워>에 대해 다룹니다.

강의에 관한 더욱 자세한 사항은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http://blog.daum.net/ddmlib/63
 
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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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보면서 1984년을 떠올린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빅브라더라는 시스템에 의한 인간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개인의 자유의지를 말살시키는 세상의 이야기였지. 내겐 이미 그 책을 읽은 시점이 1984년 이후였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소설적 상상력으로만 읽혔지만, 적어도 그 책을 쓴 조지 오웰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 세상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는 그 세상이 또 달리보이게 된다. 마음에서 문제를 만들면 그 문제에 의해 세상이 눈 앞에 정렬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묻지 않는다면 어떨까? 묻지 않는 자는 자유의지가 없는 시스템의 부속일 뿐이다. 결론부터 내리자면 하루키는 이 책에서 이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일상적으로 주어지는 모습과 풍경에 아무런 의미도 의문도 두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평범한 삶들은 또 별다른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평범하게 주어지는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의심하는 행위가 필요하다. 묻는 행위는 당연하게 주어지는 현실을 다시 보게 하고 그 마음에 물음을 가지고 보는 세상은 이제 긴장감과 함께 떨리는 세상으로 다가온다. 그 물음이 스스로의 마음 속의 답을 찾을 때까지 나에게서는 이제 의미있는 과정이 시작된다. 하루키가 그린 IQ84의 풍경 또한 그렇다. 의심하는 자들에게만 보여지는 두 개의 달, 그것은 진리가 내포하고 있는 실체와 허상의 세계이다. 때로는 우리들도 진리와 허상의 세계에서 산다. 굳이 플라톤을 모셔오지 않더라도 실재의 세계와 동굴의 세계가 우리들 앞에 펼쳐져 있다. 우리가 존재의 실체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면...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깊의 잠 속의 세계에서 나는 도대체 어디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말이다. 아침이 되어 나라는 의식이 돌아옴과 동시에 펼쳐지는 이 똑같은 우주와 내가 어디에 머무는지도 모르는 숙면 때의 우주의 모습 그것은 두 개의 달이 아닌가? 

  묻지 않는 자에겐 진리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선가의 말처럼 모든 우주는 마음에서 비롯된 산물이다.(일체유심조) 자신의 마음이 깊게 품은 것은 현실로 드러나 그 마음의 우주가 펼쳐지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의심을 가진 자는 이미 진리의 길을 걷는 자이다. 그것은 진리로 향하는 삶이다. 마찬가지로 권력과 돈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그것의 어떠한 형태의 삶이건 권력과 돈의 세상에서 사는 것이 된다. 개인의 마음과 의지까지도 통제해버리고 마는 전체주의적인 사회에서 아오마메와 덴고가 깨어 있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마음 속에서 어떠한 현실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의 마음이었다. 그 마음이 허상의 세계를 통제해내는 리틀피플의 세상에서도 그에 저항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는 뭔가 뚜렷하게 잡히지 않는 신비스러운 점들이 많이 나온다. 두 개의 달, (공기번데기에 의해 탄생하였울까?) 리틀 피플의 존재와 그들의 역할, 현실의 세계와 아오마메가 이름붙인 IQ84의 세계, 선구조직의 실체와 더 리더의 역할, 후카에리와 덴고의 역할에 대해 독자들로 하여금 어렴풋이 안개 낀 장면을 보는 듯하게 처리하였다. 어쩌면 지금의 삶의 모습에 대해 우리가 의심을 가져야 하듯...정확히 내릴 수 있는 해석을 피하여 될 수 있으면 많은 해석과 상상력의 여지를 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삶 속에서 이 이야기를 통해 다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자 했던 그의 의도는 아닐까? 그래서인지 이 소설 속에 많은 의미들을 담아내려 했다는 생각도 든다. 진실한 사랑의 이야기, 가족관계에 대한 이야기 부정과 모정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그리고 직업적 신념적 종교적 동반자들의 이야기, 친구와의 관계 등 우리들이 살아가며 일반적으로 가지는 관계들을 통해 우리들의 삶 그 자체를 다시 보게끔 한다. 이것 역시 해변의 카프카 이후로 더욱 소설적으로 완성되는 듯한 하루키적인 것을 닮아 있다.  

  보여지는 것만이 세상의 진실한 모습은 아니다. 세상의 진실은 말로 표현할 수도 어떤 표현을 빌려서도 그대로 드러낼 수 없다. 어떤 설명을 필요로 한다면 어떠한 설명을 하더라도 알 수 없다는 덴고아버지의 말처럼 언어적 장벽 나아가 그 언어적 장벽을 만들어내는 마음의 장벽을 제거해야만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어떤 의지가 있다면 우리 눈 앞에 드러나는 세상은 그 마음이 품은 세상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에 대해 의심해야 한다. 진실한 세상의 모습을 알기까지는 의심말고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다. 인간의 삶이라는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전체주의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나는 어떤 의심을 가져야 하는가? 덴고가 그녀에 대한 사랑의 기억과 마음으로만 살아있듯이 오직 진리에 대한 열망만으로 나는 살아 있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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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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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화의 작품은 이것이 두번째다. '허삼과 매혈기'를 통해 중국의 근현대사를 살아간 중국민중의 고통스럽고도 묵묵했던 인생이 중국의 역사를 끌어온 저변에 깔린 힘이었고 그것은 개인적인 삶으로 돌아오면 어떤 삶의 현실에서도 그것을 수용하며 살아가게 만드는 인간의 저변적인 힘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서문에서 그는 글쓰기를 '마음의 소리'라고 한다. "마음의 소리는 작가가 진실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자신을 이해하면, 곧 세계를 이해한 것이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한 사람으로서 중국의 근대사를 살아온 민중들도 그 참혹하고도 고통스러운 날들을 묵묵하게 극복해가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일종의 깨달음같은 것으로서 살아갔던 것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고상함을 독자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고상함이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일체의 사물을 이해한 뒤에 오는 초연함, 선과 악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동정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다."

  위화의 작품에서 중국의 공산화 과정과 문화대혁명이라는 큰 사건이 개인을 스쳐가는 방식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푸구이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기생과 어울리거나 도박을 하다가 자신의 전 재산을 날려버리고 비로소 세상에서 그저 주어진 삶이 아닌 농부와 민중으로서의 자각된 자신을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런 그 앞에 빈털터리의 삶이라도 가족과 사랑이 있는 한 행복한 삶이라는 그의 인식은 무참하고도 눈없는 역사적 폭력이 지나가면서 폐허로 바뀐다. 가족으로부터 강제로 격리되어 전쟁터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며 간신히 집으로 돌아온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겪게 되고 어처구니없는 헌혈때문에 유칭도 잃는다. 인생의 행복이 그에게 주어지는 듯 쉽다가도 마치 손위에 놓인 모래처럼 사르르르 허물어져 내리고 행복은 영원히 잡을 수 없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삶의 고통과 상처들에 반응하는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귀울인다. 자신이 빈털터리가 되지 않았다면 총살형을 면할 수 없었듯이 인생은 늘 동전의 양면처럼 겉모습만으로 그 의미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삶을 그는 고난했던 지난날을 통해 배운다. 결국 그에게 있어 공산화과정과 문화대혁명 그리고 극심했던 사회적 기아 문제도 삶의 문제 깊숙히 그의 가슴을 찌르지는 못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작품에 대해 주변의 민중들의 삶을 보다 세밀하고 공감적으로 표현해내지 못했다는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민중들의 삶의 시각에서 어떤 삶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가치관의 배제를 문제삼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화가 작품 속에서 춘성이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에게 갖은 뭇매를 맞아가며 길거리를 끌려다닐때 그는 단지 춘성의 인간성에 대한 연민으로 말한다. 홍위병 왈 "그가 누군지 알아? 옛날 현장이야, 주자파라구." "나는 그런거 몰라요. 나는 그가 춘성이라는 것밖에 몰라요." 그 말을 들은 홍위병은 더 이상 춘성을 때리지 않았다. 그의 삶에 대한 태도는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관련되어 있다. 사상과 편과 선악을 떠나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같은 삶을 대면할 때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수용해야 하며 또 타인을 어떻게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지에 대해 나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이 책의 원제는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행형인 데에는 묘한 의미가 있는 듯 보인다.

  한 권의 책이 보여줄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 한 권의 책을 통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삶의 통찰이 우리들 마음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릴 수 있다면 그 책은 나름대로 실패하지 않은 책이다. 객관적이라고 여겨지는 세상은 때로는 아무런 객관성도 없이 주관적으로 우리들에게 주어진다. 현실을 인식하는 것은 인식하는 주체가 있기 때문이라는 불교적 진리가 때로는 나를 매혹시킨다. 글과 이론과 사상이 때로는 우리들의 고유하고도 독자적인 마음의 영역의 일들을 표준화 객관화라는 허상 속에 사람들의 마음을 매어두듯이 우리들은 우리가 가진 존재의 두려움을 사람들과 공유함으로써 잊고자 한다. 아니 공유한다고 착각함으로써...그렇게 우리는 지금 우리 앞에 놓여진 삶을 회피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회피한다. 그렇다면 인생은 우리 마음이 빚어낸 환상 속에서의 일이 될 것이다. 위화의 '살아간다는 것 그 자체에 관한 일'에 대한 관심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에게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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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08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을 그가 가진 이념과 그가 가진 물질적 재화와 무관하게,
그 사람됨으로 평가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특히 한국에서..

저의 개인사에서 두 번 "오싹" 소름이 끼쳤던 적이 있답니다.
한번은 '광주사태' 때였고, 한번은 DJ에 대한 호남의 '98%의 몰표'였답니다.
전자 때는 '개죽음'의 위협을 실감했고, 후자 때는 '민중의 광기'에 소름이 끼쳤답니다.
모두 지난 일이 되었습니다.


비로그인 2007-07-09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의미있는 책을 읽으셨군요 .. 그동안 그래서 이렇게 글을 자제하심이..
저는 영화 '우리학교'에서 비슷한 문제를 생각했던 기억이 있어요..
답답했던 마음을 누르고 영화관을 나섰던 기억..도 새롭네요..
저 책도 두분의 말씀도 가지고 돌아갑니다..

프레이야 2007-07-08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의 리뷰 오랜만이에요.^^ 읽어가다 보니 '살아간다는 것'이 원제군요. 전 위화를 처음 만난 소설이 '살아간다는 것'이었어요. 허삼관은 두번째.. 표지도 저렇게 바뀌고 제목도 바뀌었나 보군요. 훨씬 강렬한 느낌이 들어요. 신간 '형제'를 바구니에 담아두었는데..
님의 리뷰에 꾸욱!

2007-07-08 14: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7-07-08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두 사건은 저한테도 무척이나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한사님의 인간에 대한 이해가 그래서 저는 좋습니다.
"모두 지난 일이 되었습니다." 이 말도 마음에 듭니다. ㅎㅎ

수경님. 아마도 '우리학교'는 방학의 과제로 미루어두어야할 듯 하군요.
차이를 넘어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근저에 우리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인간성의 바닥과 생명성이겠다 싶습니다.
그것이 선악과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관의 너머까지 뻗어있어야 한다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혜경님. 어머님 때문에 마음이 많이 쓰이시지요.
그래도 긍정적이고 밝은 님의 글을 대할 때에 저는 무한한 존경심과 친근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시간 내서 다시 둘러봐야겠습니다. ㅎㅎ 고마워요.

드팀전 2007-07-09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위화책은 이상하게 저랑 인연이 안닿고 있습니다만..좋아 할 듯 해요.

말하는 '주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사람됨으로 평가하는 날'..에만 신경쓰면 당연히 맞는 말입니다.그러나 물적 토대를 갖춘 '주체'가 할 경우에 진정성과 설득력은 떨어지게 되며 기득권적 가치를 옹호하는 권력으로 작용됩니다.이미 가질 만큼 가진 상태에서 물적 토대를 잊고 인간으로 평가하지니요...물적토대와 인간됨이 전혀 관련 없다고 생각치 않습니다.우리나라의 도시빈민 비율이 30%가 넘은다고 하는데요...그들은 있는 사람들은 그냥 무시할 돈 만원에 서로 얼굴 붉히고 십장생을 서로 외쳐됩니다..그들의 비인간적인 모습이 참 견디기 힙들지요.없는 것들의 비루함은 진짜 신물납니다.그런데 그게 그 인간들의 인간됨만의 문제일까요...물적토대를 잊고 인간됨을 찾자는 것이 어느 '주체'에서 나오는가에 따라 달리 해석되겠지요.이 말은 아주 신중하게 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에 대한 몰표도 현상만 뚝떼어서 보면 대중적 파시즘적 현상으로 보일 수 도 있습니다.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딱 그 현상만 떼어서 보면 말이지요...그렇게 현상을 단절시키면서 애써 외면하는 것이 무엇이냐...역사성이지요.전라도가 근현대사에서 정치적으로 어떻게 소외되었는지..여전히 '광주사태'(조땡일보는 아직 그렇게 보지요.신문에는 그렇게 쓰지 않지만)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핍박받았는지...그런 역사성을 이해한다면 광주의 몰표가 그냥 단순한 대중광기가 아니라 억압에 대한 반작용으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대중의 광기'라는 부분이 전라도 사람들에게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건 그 동네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지요.반작용을 불러 일으킨 작용의 힘을 외면하고 반작용의 군집성만 보는 시각이 갖는 폭력성 역시 권력의 작용방식이라고 생각됩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보다 훨씬 부드럽고 친절하며 인간적인 미덕을 많이 지키고 있습니다.권력은 부드럽거든요.부드럽지 않은 것은 권력이 아니라 폭력이지요...부드러움이 실로 성찰적인 부드러움이고자 한다면 훨씬 신중해야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다 지나간 것 아닙니다..도대체 뭐가 지나갔냐구요..현재 속에 있다구요...


비로그인 2007-07-09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팀전님 저분들의 말씀은 그게 아닌 듯해요. 일단 한사님은 뒷 구절을 뒤에 첨가하셨나보네요. 제가 처음 답글 달때와 다른 글이 되어버렸어요. 그러나 저분들의 뜻은 님의 말씀하셨던 앞부분이고 누구든지 무엇을 평가할때 물적 토대자체가 먼저 앞서서 보지 않았으면 하는거지요. 그래도 님의 말씀처럼 이미 사회는 그것이 아니기에 그럴수도 없을 거예요. 그러나 물적토대와 인간됨 자체를 어느 한면으로 보기에는 너무 많은 문제가 있어요. 돈 만원 앞에서 개나 소되듯 소리지르는 것은 빈민층만이 아니예요. 없는 것들의 비루함이요?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님이 말씀것 처럼의 그 한면이 아니예요.. 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들의 비루함이 실물이 난다는 말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어요 . 저는 있는 것들의 비루함이 /종종/ 더 실물이 나거든요. 비루함이 라는 단어를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쓰셨는지를 모르겠으니 .. 더이상 언급하는건 옳지 않을것 같습니다. 제가 느끼기엔 저분들의 말씀은 나보다 없고 못하다하여 비하하며 보지 말자는 뜻이구요 ..님은 현실을 말씀하시는건데 저분들의 말이 의미가 없다 생각하지 않구요.

또 광주문제에 대해서는 저도 부모님이 고향이 전라도라 참 할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전라도에서는 특정당을 밀어주는 식의 일들이 많지요.. 그분들과 이야기해보면 드팀전님께서 정의하신 작용에 대한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더이상 이성의 힘에 의존할 생각을 안하시는 경우가 많아요.. 아직도 경상도에도 그런 분들이 가득한것 처럼요. 그러나 이문제를 작용 대 반작용의 문제로 읽어버리면 지금의 파시즘적 광기에 대해서는 오히려 이해가 더 쉬어져 버리는 모순이 생기죠. 제가 보기엔 문제가 훨씬 복잡해요. 마치 국가 앞에서는 남편 앞에서는 부모 앞에서는 절대적 복종을 해야 한다는 과거의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살아있는 것처럼.. 지방이 군집한다는 건 보다 자발적 복종을/ 트라우마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끊임없이 재생시켜서 이성이 살아남을 수 없게 하는 끔찍한 모습이지요.그리고 그 안에는 모든 소수의 목소리를 금지시키는 파시즘적 요소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건 전라도 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어디에서도 마찬가지로서요 ..

저는 님의 말씀에 많은 것을 인정하는 편이지만 언제나 약간의 이분법적인 전제가 지속적으로 존재함에는 조금 .. 옆에 서고 싶습니다. 즉 부자/ 가난한 자 = 친절하기 쉽다/ 그 삶으로 인해 비루해지기 쉽다 라는 것과 같은 공식은 때론 그 적실성에도 불구하고 놓치게 되는 부분도 많거든요 ..


권력이 부드럽다는 말에도 전혀 동의 할 수 없어요. 어느 권력이 폭력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지를 묻고 싶구요. 그 둘이 그렇게 쉽게 따로 분리되어져 나올수 있는지도 의심스러워요. 동의가 주어지는 폭력이 결국은 권력이 최소한 겉으로는 부드러울 수 있는 경우이겠지요.. 권력이란 속성 자체가 폭력적이지 않을까요?

현실속에도 살아있다는 님의 말씀에는 전적으로 동감이구요. 어찌보면 그건 과거가 어떤 모습으로든 사라질 수 없음과 같은 이치일꺼예요. 끊임없이 묻고 고치도록 노력하면서 현실을 부정하자는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내부에 있는 아니 인간 모두 그 자체에 있는 편견과 겉모습에 대한 집착또한 조금씩은 나부터도 고쳐가야 하지 않을까를 말하셨을꺼라 믿습니다..지난날이 되었다라는 말씀에 드팀전님이 왜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싶으신지 또한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저분들이 지난날이라 함이 아예 무시하자라는 말이 아님또한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듯해서요. 님의 의견이 어쩌면 감상적으로만 흐를 수 있는 문제의 논의에 긴장을 가져다주셨네요. 물흐르는 듯한 논의에 의견을 던지셔서 다시한번 생각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좀 더 고통스럽더라도 현실을 보라 하시는 글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드팀전 2007-07-09 23:55   좋아요 0 | URL
네..제가 댓글을 한번썼다가 회사퇴근하느라 바빠서..오늘 밤 9시넘어 퇴근했거든요.대충 정리하는 톤으로 쓰고 말았습니다.수경님의 긴 댓글에 대한 예의가 아닐듯하여 아기 재우고 다시씁니다.
사실 책 볼 시간도 없는 마당에 이런 짓 하고 있는게 과연 현명한 짓인가...당장 자본의 압력에 작업 환경이 직접적으로 타격받는데(이건 실제상황이거든요.) 이 짓 하고 있는게 맞는 일인가...생각해보게 됩니다.일단 이것까지만 하고 말겠습니다.

달팽이님과는 이미 몇 번의 술자리를 통해서 이와 유사한 맥락의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먼저 수경님의 말씀처럼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빈부나 지식,이념의 틀을 넘어서 인간됨을 보자는 말..저도 동의합니다.도덕적인 그 말에 어느 누가 아니라고 할 수있겠습니까?
다시금 보니 아주 상투적인 말이네요.제가 과민하게 반응한게 맞는데..거기에는 직접적인 이유가 있습니다.그것까지 이야기하진 않겠습니다..괘적을 그린다 라는 정도에서 멈추지요.

가난한자들의 비루함은...마치 수경님이 그 언설을 하지말라고 하시면서 가난한자들을 옹호하는 듯이 보이게 되었습니다.가난한 자들의 비루함과 댓구되는 부자들의 부드러움 그리고 그 안에서 놓치게 되는 것들을 이야기한 것입니다..가난한자들이 비루하다고 욕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은 다음 줄만 읽어보시면 압니다.그리고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 힘든 상황이어서 안하무인인 경우도 많습니다.그들의 안하무인을 그들 개인의 태생적 인간성으로 보지 않는다는 게 제 의도입니다.몇 년전 부산의 빈민가에 장마가 낫지요...자선단체에서 선풍기를 100대 보냈습니다.집 당 하나씩 체계적으로 배분되어야 했는데..그 조직이 좀 어설펐는지 그렇게 하질 못했습니다.그 위기에 몰린 가난한 빈민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거기 계셨으면 아마 놀라서 뒤집어지셨을 겁니다...그런데 욕할 수 없습니다.왜냐구요? 부자들은 수해를 당하지 않습니다.부자들은 선풍기 하나에 전부 귀신들처럼 쌍욕을 하지도 않습니다.

부자는 착하고 선하고 빈자는 욕쟁이다..또는 그 반대도..제가 그렇게 이야기했나요.좀 모순되네요.가난한 자들의 비루함에 신물난다고 했으면 빈자들을 선으로만 취급하지 않는다로 볼 수 있을텐데요..

이분법적으로 본다는 것도 좀 수정을 해주셔야겠어요.그 이분법이란 말은 님이 문제를 이분법으로 보고 있는 것이지요..예를 들까요..권력은 강제라고 보는 방식이 훨씬 이분법입니다.권력은 억압이자 생산이라 보는게 훨씬 비이분법적이지 않습니까..
계급 문제도 그렇네요.지난 번에도 말했지만 계급환원론은 더 큰 딜레마를 낳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계급이 모두다 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이것은 개념화를 위한 것이지 한 계급이 동일한 부를 축적하는 것도 아니고 동일한 취향을 공유하고 동일한 정치적 위치를 갖는 것도 아닙니다.이것이 과연 이분법일까요?
제가 빈부를 이야기하며 계급을 건드린 것은...이런 질문을 합시다.역설적이게도 우리사회에서 계급담론이 과잉되어있습니까 아니면 과소화 되어 있습니까?...계급이란 말이 우리 사회에서 거부감을 주기때문에 전 계급이란 말 자체도 다른 것이 없나 찾아봐야 할 정도라고 생각할 정도입니다.즉 계급론이 과소화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그렇다고 80년대식 경제환원론적 계급으로는 현재의 계급분화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그러나 계급자체를 부정하는 보수적 환경하에서 계급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정상성에 대한 욕구일 뿐입니다.계급이 없다고 말하고 계급이 없기를 가장 바라는 것이 누구인지는 또한번 생각해보면 될 일입니다.

파시즘문제에서도 수경님은 모순에 빠집니다.먼저 파시즘이란 단어가 개념적으로 남발되는 것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집니다.폭력적인 권위주의/독재와 파시즘이 같은 단어로 쓰여도 되는가의 문제입니다.일단 그건 다른 차원의 것이니까 넘어갑시다.파시즘적 광기라는 것은 자발적 복종을 전제로 하지요.이 자발적 복종은 폭력에 의해서만 유지되지 않습니다.폭력에 의해서만 운영되는 권력은 지속력이 짧습니다.권력은 항구성을 특징으로 하기때문에 당연히 타협과 동의를 구합니다.님이 전라도의 자발적 복종을 이야기하시는 방식은 분명히'부드러운 파시즘'이라는 접근입니다..그런데 반대로 권력은 억압에만 의존한다고 하시면 앞의 말을 뒤엎는 것이 되지요.

일상적 파시즘 논의가 담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저는 많은 부분에 동의합니다.그러나 그 논의는 권력의 집행 방식과 헤게모니가 형성되는 방식은 간과하고 아래 민중들의 군집과 그에 따른 내부적 폭력성만 부각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나부터 고쳐가자는 말 역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지요.거기에 이 말 하나 더 첨가하거나 이런 질문 하다 더 넣으면 제 뜻이 반영됩니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를 스스로 속이지 말고 낱낱이 보고, 그 안에서 사회적 주체,정치적 주체로서의 나를 보고,그리고 더불어 함께 살 수 있는 나를 고민하여, 나부터 고쳐가자..라고 말이지요...단계론적이지는 않습니다.대신 맨 마지막만 계속 강조하는 방식은 곤란하다는겝니다.

밤도 늦었구...이게 뭐하는 짓인지..전 사실 이런 논쟁에서 별로 바꿀게 없다고 생각하여 별로 관여를 안했는데..그놈의 괘적때문에..^^ 이렇게 말리고 말았습니다.스스로 말린거니까 자업자득이라고 봅니다.

<따뜻한 알라딘 만들기>에 적극 노력하겠습니다...긴 댓글에 지치신 분들께..(다른 건 피곤하니까 읽지 않으신분들과) 한시 한 편 올려드리지요.다들 좋아라 하시잖아요.^^ 저 역시.

초당에서 (권필)

맑은 개울가에 터잡았으니
문열면 곧 바로 작은 소일다.

창이 비었으니 산빛이 자리에 들고
처마가 짧으니 침상에 비 뿌리지만

소원이 이룩되니 하늘땅이 널찍하고
애쓰는 일 없으니 해 달도 느직하다

다만 시와 술버릇은 오히려 늘어나
늙어갈수록 더욱 미쳐갈 뿐이어라!

비로그인 2007-07-19 19:14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께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시는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달팽이님도 ..한사님두요 )
드팀전님 여름 건강하게 보내시구요. 다시 또 좋은 글에서 뵙겠습니다. 건강하세요 ..



달팽이님 죄송합니다.

달팽이 2007-07-09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런 제 말이 한바탕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군요.
드팀전님의 반론과 수경님의 재반론에서 배울 것이 많습니다.
사람의 언설은 늘 제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지도 못하며
또 전달되어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경험과 주관이 개입되기 때문이죠..(저의 이야기입니다.ㅎㅎ)

서로 다른 우리가 삶의 진정성으로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면..
문득 우리가 만날 곳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노트 - 글쓰기에 대한 사유와 기록 조선 지식인 시리즈
고전연구회 사암, 한정주, 엄윤숙 지음 / 포럼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마치 새로 나온 책이 있어 그 책의 서문을 읽고는 모르는 것을 책을 사들고 집에 와서 다 읽어야 비로소 그 책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가 이 책의 비유라면 비유이다. 우리 선비들의 글쓰기를 통해 그들의 특별한 글쓰기의 비법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먼저 가졌다면 그것은 욕심일 뿐이다. 글은 우선 생각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고 그 생각이란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며 또 그 마음이란 그 사람이 추구하는 인생의 방향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며 그것은 그 사람이 지향했던 삶의 목표를 이해하는 것이 된다.

  글을 쓸 때 미리 생각해서 전체의 밑그림을 마음으로 그린 다음 써내려가는 것, 그리고 글을 쓰고 나서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아 몇 번의 수정을 거치는 것, 끊임없이 생각하여 덧붙이고 고치고 하여 수많은 작업 끝에 잘 완성된 하나의 작품을 내어놓듯이 쓰는 글은 나에게 인연이 없는 듯하다. 그저 책을 덮고 난 후 마음에서 올라오는 생각들을 써내려가는 것이 아직까지도 거의 전부인 나는 아무래도 글쓰기와는 큰 인연이 없어보인다. 다만 글쓰기 책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이러하다

  글은 그것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표현수단이며 그 마음은 자신의 인격과 삶에 대한 태도로부터 나온다. 그러하니 자신의 삶의 깊이가 있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글의 깊이가 생기는 것이며 자신의 인격이 바르게 갖추어진 자라야 비로소 바른 글이 나올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자신의 글만 화려하게 치장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쓰레기를 비단에 싼 것과 같으니 그래도 역시 쓰레기일 뿐...이라는 책의 글이 적합하다. 하지만 또한 책에 표현된대로 "성심을 다하는 것은 기본, 일머리를 잘 아는 것이 실력, 마무리까지 깔끔한 것이 품격."이라 했듯이 우리 선비들에게는 이러한 삶의 진정성이 이미 기본적으로 갖추어지는 것을 전제로 한 글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옛 글을 읽을 때에는 지금 발견할 수 없는 진정성과 삶의 깊이에 자연히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리라.

  따라서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에 또 하나의 말이 유효해진다. "인기가 곧 실력은 아니고, 변화가 곧 성장은 아니며, 화려함이 곧 아름다움은 아닙니다."라고 하는 책 속의 글이 진정 그렇다. 구태여 해석할 필요가 없는 말이다. 다음의 문장도 빼놓을 수 없다. "목수가 연장을 탓하지 않는다지만, 고수는 자신만의 연장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도록 늘 갈고 닦습니다." 이것은 단지 글쓰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의 삶에 바로 적용된다. 멋진 말이지 않는가?

  글은 뜻을 전하기 위해 쓰여져야 한다. 때로는 말과 글이 너무 불필요할 때가 많다. 때로는 침묵이 보다 많은 것을 전달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글을 공부한답시고 우리가 너무 글만 알면 안되겠다. 때로는 글 밖의 세상도 알아야 한다. 이 책 속에 좋은 글이 있다. "기이한 것으로는 서커스만 한 것이 없고, 재미있는 것으로는 코미디만 한 것이 없고, 화려한 것으로는 불꽃놀이만 한 것이 없습니다. 글은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장자에 보면 문장은 뜻을 전달하기 위한 것으로 그 뜻을 취했으면 문장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과연 뜻을 취하고 글을 버릴 줄 아는 자가 있다면 그와 더불어 친구하고 싶다는 장자의 마음에 무릎을 친다.

  이 책은 조선시대 지식인의 글쓰기에 관한 글을 묶었다. 비록 그 글들이 대단하지 못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이 책은 그저 그 지식인들의 삶을 볼 수 없는 표현에 그쳤으므로 아쉽다. 마치 그것은 책의 내용을 보고 감동해야 할 것을 책의 표지 색깔과 디자인 그리고 머릿말만 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책의 내용이 더 궁금해지고 책의 내용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책 속의 말대로 글이 너무 단순해서 뼈만 남으면 읽기에 영 걸린다. 너무 살이 많아 비만인 글도 읽기엔 아쉽지만 그렇다고 너무 생략해버린 삶의 이야기는 감동이 덜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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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글이란?
    from 한사의 서재 2007-06-25 11:50 
         “글은 우선 생각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고 그 생각이란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며 또 그 마음이란 그 사람이 추구하는 인...
 
 
비로그인 2007-06-24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뜻을 취하고 글을 버릴 줄 아는 자가 있다면 그와 더불어 친구하고 싶다는 ..


저도 그러네요.........

이 글들로 어수선한 마음이 달래집니다.. 잊지 않고 기억해두어야겠습니다..

달팽이 2007-06-24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나서 반갑습니다.
별스런 글이 아닌데도 작은 기연으로 마음을 달래니 그것은 당신의 마음이 서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로그인 2007-06-25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의 글에 대한 좋은 말씀, 제가 먼댓글로 엮어 제 서재로 옮겨갑니다.
고맙습니다. 달팽이님.


달팽이 2007-06-25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의 글에 대한 감각을 모르지 않는 저로서는
이렇듯 분에 넘치는 칭찬이 부끄럽답니다.
마음에 늘 긍정적인 면을 보는 삶의 혜안이라 생각합니다. 한사님.

2007-06-30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7-06-30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저는 감자 좋아합니다.
방학때에는 조그만 감자를 껍질채 삶아서 점심으로 넘기기도 합니다.
여우님의 마음이 담긴 선물을 고맙게 받겠습니다.
귀한 유기농 감자로 방학을 맞는 마음이 덩달아 즐거워집니다.

2007-07-04 2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7-07-05 0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수경님. 그렇게 해서 찾아보겠습니다.

리뷰는 좀 쉬고 있는 중이고..
책은 잘 읽고 있습니다.

요즘 부산엔 운무 해무 온통 신선의 도시입니다.

비자림 2007-07-06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쓰는 글을 쓰는 사람이 바로 저이지요^^
추천 누르고 가옵니다.

달팽이 2007-07-07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흐르는 마음대로 돛단배를 탄 듯 그 마음을 맡기면
우리 세상사 따로 일이 없겠지요..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