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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란
이현수 지음 / 문이당 / 200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기억마저도 희미해진 어느 나른한 봄날, 난 겁도 없이 녹이 슨 철로를 통째 삼켜버렸다. 쇠에 난 녹이 그 쇠를 먹어치운다는 건 알았지만 몸주인 나까지 갉아먹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때때로 뱃속이 거북했으며, 잊을 만하면 녹슨 철로 위를 덜컹거리며 불규칙하게 달리는 기차바퀴 소리가 목울대를 뚫고 쓴 물처럼 올라오기도 했다. 내가 녹을 먹고 녹이 나를 먹는구나. 방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던 밤사이, 철로 가에는 아주까리와 맨드라미, 채송화 따위의 잊힌 꽃들이 이슬을 머금고 피어났다. 왜 지금 하필이면 아주까리와 맨드라미, 채송화인가? 입춘 무렵, 뿌연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어쨌든 가거라, 이젠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내 청춘의 자국들."
이 현수 작가의 책머릿 글이다. 자신의 녹을 통째 삼켜버렸다는 말, 그것은 이젠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내 청춘의 자국들일런지도 모른다. 그녀에게서는 왠지 토속적이고 오래된 것의 맛이 풍긴다. 신기생젼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글의 맛깔스러움과 예스러움도 그랬지만 이야기 전체가 전해주는 마음의 울림을 생각할 때, 그녀는 확실이 우리 마음 속의 깊고도 예민한 곳을 건드릴 줄 안다. 세월이 오래도록 겉으로 다 표현하지 못했지만 마음 속으로 재어두고 쌓아두어 더욱 뼈 속에 사무친 삶의 의미들을 한 순간에 토해낸다. 그녀의 소설들이 가진 매력이 자꾸만 그녀의 또 다른 소설을 들게 한다.
그녀가 주로 다루고 있는 사람들은 소외된 자이며 약자이다. 빛 속에서 보면 그늘이 더욱 어두컴컴해 보이고 그늘에서 보면 그 빛이 더욱 눈부시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빛 속에 서 있는 자들은 그 그늘에 서있는 자들을 불결하고 더럽게 생각하고 자신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부의 그늘에 서 있는 민중들에겐 부의 빛 속에 서 있는 자들의 탐욕과 이기심에 역겨워한다. 그들의 주체할 수 없는 부와 버려진 잉여는 그늘에 서 있는 사람들의 애환이 되고 한이 된다. 그 깊은 마음의 응어리를 포착해내어 문학적으로 표현해내는 재미가 그녀에겐 있다.
'토란'에서의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오래묵은 갈등, '비하리에서 나는'에서의 "자신의 온 생애를 무너뜨린 검은 얼굴의 사내는 비하리에 전염병처럼 떠도는 우울과 권태, 단조로움이라고 나경은 생각했다."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불운을 자신의 지역 전체에 감도는 기운으로 파악하는 눈이 대단했다. '거미집'에서는 평생 아들들의 뒷바라지에 자신을 헌신해온 어머니와 나와 딸의 3대에 걸친 이야기이다. 그 바보같은 어머니의 삶이 싫고 나에게 기대는 것이 미우면서도 나도 모르게 어머니의 삶을 닮아가버리는 자신을 보면서 삶의 쓸쓸함을 느끼게 된다.
'파꽃'은 너무 감동적이다. 평생 마음에 품고도 한번도 표현할 수도 없고 표현하지 않은 한 여자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그녀의 오래된 말 한마디에서 자신의 사랑을 확인받고 싶은 그 마음에 나는 너무 애절하면서도 슬펐다. "파꽃도 분명 꽃은 꽃이지요? 꽃...........맞지요?" 현실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자신의 삶 전체를 그녀를 통해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 사실 그 마음마저 버리면 인생이란 또 얼마나 밋밋하고 허무하랴..문학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그녀는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보다 삶 속에 꾹꾹 묻어두었다가 인생의 결정적 순간에 그것을 한 번, 단 한 번 터트리는 불꽃처럼 그려낸다. 그 불꽃같은 삶의 모습은 그래서 예술이 되는 것일까?
'불두화'와 '미노'를 거쳐 '그 재난의 조짐은 손가락에서부터 비롯되었다'에서는 인간의 삶 자체를 대상화시키는 시각을 보여준다. 그녀가 이 작품으로 마무리를 한 데에 나는 왠지 이 소설의 단편들이 하나하나의 의도를 가지고 맞추어진 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녀의 모든 작품 속에 흐르는 그 한 마음이 불현듯 만져질 듯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나의 삶을 돌아본다. 그녀가 오지 않은 그 황량한 공간을 뒤로 남겨 두고 묵묵하게 걸어온 날들, 나도 이젠 녹슨 철로를 삼켜버려야겠다. 이미 내 것이 아닌 것들을 뒤로 하고 당당하게 앞 길을 걸어가야겠다. 가슴아팠던 내 청춘의 자국들을 밀려오는 파도에 쓸리는 모래 위의 자국처럼 그렇게 바다너머로 쓸려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