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초.호조키
요시다 겐코.가모노 조메이 지음, 정장식 옮김 / 을유문화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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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렇다 할 일도 없이 지루하고 심심하여, 하루 종일 벼루를 붙잡고, 마음 속에 오가는 부질없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쓰노라니, 이상하게도 기분이 복받쳐 나도 모르게 미칠 것만 같구나."로 시작되는 이 글은 30살에 출가하여 40대에 쓴 인생을 돌아본 유교, 도교, 불교적 깨달음이 어우러진 요시다 겐코의 글 모음집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30년 동안이나 중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을 만큼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으며 나아가 일본 고전 수필의 자존심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한다.

  첫 서단의 글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작심하여 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상사의 잡다한 글들을 그냥 써내려간 것 치고는 너무나 훌륭한 글들이 많으니 말이다. 마치 하루의 인생을 살아 본 하루살이가 다음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잘 알고서 새로 맞이하는 하루를 적어놓은 글 같다. 그의 글 속에는 그래서 몇 생을 살아온 할아버지가 웅크리고 앉은 것 같다. 삶의 어떤 희노애락의 곡선 위에서도 그것을 미끄럼틀 삼아 재밌게 타고 내려오는 어린아이의 동작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 말이다. 때로는 인간의 삶으로부터 훌쩍 들어올려져 자연의 세계로 갔다가 거기서도 훌쩍 날아 올라 이 세상에는 없는 마음의 고향 속에 영원성 속에 머물러 있기도 하다가 어느덧 평범한 인간의 인생사로 돌아와 작고 사소한 일 하나에도 미세한 감정 표현을 그대로 드러내어 인간 생활의 해학과 웃음 속에서도 뭔가 놓쳐버릴 수 없는 진한 향기를 떨어뜨리고 간다.

  카메라를 지금 이 순간 속으로 들이대기도 하고 자연의 흐름을 재빨리 감아서 보다 넓은 시야를 확보하게 해주기도 한다. 우리들의 시선은 때로는 창조주만큼 커지기도 하고 또 미립자와 소립자의 단계를 너머 그 없는 텅빈 공간 속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이 능구렁이같은 할아버지는 여자들과 어울려 질펀하게 놀아보기도 하고 삶의 의미 없이 권세와 명예에 휘둘려 허깨비같이 사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치기도 한다. 그가 내려치는 손바닥이 바로 내 머리 뒤에 있는 것 같아 슬며시 고개를 돌리기도 한다.

  호조키를 이 글의 뒤에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두 그림은 우선 밑그림부터가 다르다. 도연초는 그림에 달관한 마스터가 아무렇게나 밑그림을 스윽 스윽 그려내어 한 편의 자연스러운 경물을 떠올리게 한다고 하면 후자는 억지춘향꼴로 변사또의 수청을 뜨는 불편한 표정이 연상되니 말이다. 호조키는 인생의 수많은 굴곡과 배반을 통해 속세를 버린 한 사람이 자신의 상처를 씻어내고 편안해지려고 발버둥치는 인생 후편의 이야기이다. 그러니 앞 이야기와 뒷 이야기가 마치 대학생과 초등학생이 어색하게 어깨를 걸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런 어색한 자세가 어쩌면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은 왜일까? 공부도 제대로 못하면서 발버둥치는 내 모습이 호조키를 닮지는 않았는가? 연어는 죽을 때 자신의 새끼를 놓기 위해 자신이 태어났던 곳으로 되돌아간다고 했지. 아마 내 마음의 지향점도 호조키의 시행착오를 거쳐서 페이지를 거슬러 올라가 도연초라는 마음의 고향으로 달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일까? 도연초의 서문에 눈길이 자꾸 간다.

  "이렇다 할 일도 없이 지루하고 심심하여, 하루 종일 벼루를 붙잡고, 마음 속에 오가는 부질없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쓰노라니, 이상하게도 기분이 복받쳐 나도 모르게 미칠 것만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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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6-07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 서두가 정말 마음을 끄네요.^^

달팽이 2007-06-08 0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공감입니다. 혜경님.

혜덕화 2007-06-08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못 구해서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기억이 새롭네요. 올라오는 글을 보면서 예전에 느꼈던 감동을 느낍니다. 가끔 책 정리해서 아름다운 가게에 가져다주면서, 내게 꼭 100권만 남긴다면 무얼이 남을까,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아직은 백권만 남기기엔 책이 많아서 차츰 차츰 줄어들면 추려볼까도 생각중입니다. 자꾸 사들여서 줄어들긴 커녕 좁은 책꽂이에 늘 빈자리가 없어, 책욕심도 줄여야하는데, 싶기도 하네요.

달팽이 2007-06-08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흐, 혜덕화님.
그 말 듣고 보니 저도 반성할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죽을 때 소용닿는 곳에 기증하고 싶군요...ㅎㅎ
이 책도 좋은 책이더군요..
 
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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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신문기사에서 군부대 이전 반대시위 도중 퍼포먼스로 어린 돼지를 능지처참하는 기사가 실렸다. 알라딘에서 지인의 페이퍼에서 그 사진을 보다가 돼지의 눈빛이 너무 안타까워서 사진을 오래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오직 안타까운 마음 뿐이었다. 그런 어리석은 행위를 계획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군부대 이전으로 인한 자신들의 경제적 피해와 그로 인한 무언가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았을 것이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그것을 표출하는 행위까지 그들은 성숙하지 못했다. 군부대도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직이고 그것이 빠져나가서 생기는 경제적 손실이 지위와 계층에 따라 크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따라서 이로 인한 불안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에서 그들은 여리고 가엾은 한 생명을 재미삼아 거두어들였다. 비록 가축의 운명으로 인간의 굶주림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운명의 돼지였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거두어야 하며 생명을 거둘 때 최소한의 예의와 감사하는 마음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 식용으로 생명을 앗는 자의 도리일진대 이렇듯 무식하면서도 맹목적으로 표출된 어리석은 행위의 이면에 그들의 불안이 얼마나 크게 작용했었던가를 짐작케 한다. 사람은 누구나 그 뿌리가 같은 불안을 갖고 산다. 때로는 그 불안이 자신의 생명을 앗을 정도로 크기도 하고 때로는 작고 미세하여 그것을 제대로 알아차리기도 전에 소멸해 버리는 불안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하나의 근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따라서 자칫 그 기사를 읽고 그들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불타서 그들을 마음으로 이미 죽여버렸다면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 우리들도 크게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다.

  우리도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 뭇생명을 해치며 삶을 연장한다. 그리고 우리도 삶의 극한 상황에서는 죽음과 생명의 안전에 대한 불안으로 인한 비이성적인 행동을 한다. 다만 그것의 정도를 가늠하는 사회적인 상황의 악화 정도와 우리들이 마음으로 수용하는 정도의 차이에 따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심각함이 달라질 뿐이다. 보통은 말한다. 불안을 극복하는 여러 가지 대안들은 그것이 기독교적인 신념이든 철학이든 예술이든 아니면 부르주아적 삶에 대한 대안적인 모델로서의 보헤미안적인 삶이든, 그것은 지위의 위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준으로 그 위계를 다시 쓰려고 했을 뿐이라고. 그러니 그것이 가치가 되고 선악이 되고 시비가 되면 그것은 그 가치와 선악과 시비에 의해 새로이 위계가 생기는 것일 뿐이라는 얘기가 된다.

  물론 사회적인 일에 사회적인 기준과 선악과 시비가 없을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선악과 시비와 가치가 생기는 마음의 그 자리에 분노와 화가 자리잡느냐 아니면 자비와 사랑과 깨어있음이 자리잡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회적인 선악을 너머 우리 삶의 성숙이 요구하는 태도이다. 세상은 겉모습만으로는 어떤 것이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는 미묘하고 복잡한 인과가 존재한다. 독재에 반대하는 집회에 참여했다고 해서 그 모든 참여자들의 마음이 순결하고 진정성에 가득찬 것이 아니다. 그래도 그 집회가 사회적으로는 필요하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맞는 말이니까. 하지만 나의 삶으로 그 마음으로 돌아오면 비록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더라도 세상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좋은 마음 내는 그 자리가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이 책은 '불안'에 대한 원인과 해답을 보통이 내렸다. 인간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적절한 사건과 문학 작품 예술 작품을 통해서 인간성에 내재한 불안의 사회적 심리적 원인과 해답에 대해 너무나도 일상적이면서도 특별한 서술로서, 늘 보통이 그러하듯, 우리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나는 왜 보통이 진정한 불안의 정체와 그 뿌리를 파헤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결국은 불안은 한 개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고 그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은 사회적인 상상력이며 이론에 불과한 헛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은 나는 그래서 더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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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7-05-27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의 말씀이 다 옳다해도 분노할 상황에는 분노하고 욕도 해줘야 합니다.
그 부분만큼은 동의 하기 어려운게 분노 대신에 대체할 대안을 알지 못하기 때문.
성철스님은 성철스님이고, 다혈질 파란여우는 여우니까요^^
근데, 보통씨 책은 예전에 좀 읽었는데 우째 이 책은 안 읽고 있는지 몰라요.
달팽이님이 읽고 불안하다고 하시니 읽지 말아야 하나...ㅋ

달팽이 2007-05-27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혹 이 책 안가지고 계시면 제가 한 권 보내드리면 안될까요?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당신의 선량한 마음과 삶의 진정성을 달팽이는
믿어요.
근데 벌써 갖고 계신 건가요?

사마천 2007-05-28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이 책 괜찮습니다. 저도 같이 권해드릴께요.
달팽이님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저도 한번 써보려고 준비 중입니다. ^^

달팽이 2007-05-28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사마천님.
그대의 생각도 듣고 싶군요.

비로그인 2007-05-28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돼지.. 가련한 돼지의 죽음.
일본인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닌 내가 속한 한국인에 의해 저질러진 참혹한 만행.
저는 소름이 끼쳤답니다.
언제부터 한국 사람들의 심성이 저토록 끔찍한 일을 '무감각'하게 저지를 수 있을
만큼 잔인하고 누추해졌는지.. 저는 자괴감을 느낍니다.
저를 포함한 한국의 많이 배운 자들의 책임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달팽이님. 저는 큰 충격을 받았답니다.


달팽이 2007-05-28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한사님.
세상 어느 민족 어느 국가의 사람이건..
인간이 가진 가능성과 선악의 정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영역과 한계에 뻗어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한사님처럼 인생의 폭과 깊이가 넓은 분이 그래도 받은 그 충격과 소름은
우리가 발딛고 살고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한 애정과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세상엔 왜 그리도 슬픈 일이 많은 것인지..
세상엔 왜 그리도 자괴감이 드는 일이 많은 것인지..
문득 하늘을 쳐다보고 싶어집니다.

혜덕화 2007-05-28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피터 싱어 교수와 도올의 대담 기사가 생각나는군요. 인간의 목숨이나 동물의 목숨이나 소중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어린 아기 돼지가 군부대 이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저런 잔인한 짓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인 것이 부끄러운 일이 한둘이 아니네요.

짱꿀라 2007-05-28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오랫만에 들어와 리뷰 읽습니다. 알랭 드 보통씨의 작품은 익히 알려져 있듯이 그의 문체는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달팽이 2007-05-30 0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덕화님/하지만 사람으로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공부할 수 있으니까요.
산타님/동감입니다. 새로운 생활에 또 적응하시느라 생활의 불편이 많겠습니다.
 
토란
이현수 지음 / 문이당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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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기억마저도 희미해진 어느 나른한 봄날, 난 겁도 없이 녹이 슨 철로를 통째 삼켜버렸다. 쇠에 난 녹이 그 쇠를 먹어치운다는 건 알았지만 몸주인 나까지 갉아먹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때때로 뱃속이 거북했으며, 잊을 만하면 녹슨 철로 위를 덜컹거리며 불규칙하게 달리는 기차바퀴 소리가 목울대를 뚫고 쓴 물처럼 올라오기도 했다. 내가 녹을 먹고 녹이 나를 먹는구나. 방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던 밤사이, 철로 가에는 아주까리와 맨드라미, 채송화 따위의 잊힌 꽃들이 이슬을 머금고 피어났다. 왜 지금 하필이면 아주까리와 맨드라미, 채송화인가? 입춘 무렵, 뿌연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어쨌든 가거라, 이젠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내 청춘의 자국들."

  이 현수 작가의 책머릿 글이다. 자신의 녹을 통째 삼켜버렸다는 말, 그것은 이젠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내 청춘의 자국들일런지도 모른다. 그녀에게서는 왠지 토속적이고 오래된 것의 맛이 풍긴다. 신기생젼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글의 맛깔스러움과 예스러움도 그랬지만 이야기 전체가 전해주는 마음의 울림을 생각할 때, 그녀는 확실이 우리 마음 속의 깊고도 예민한 곳을 건드릴 줄 안다. 세월이 오래도록 겉으로 다 표현하지 못했지만 마음 속으로 재어두고 쌓아두어 더욱 뼈 속에 사무친 삶의 의미들을 한 순간에 토해낸다. 그녀의 소설들이 가진 매력이 자꾸만 그녀의 또 다른 소설을 들게 한다.

  그녀가 주로 다루고 있는 사람들은 소외된 자이며 약자이다. 빛 속에서 보면 그늘이 더욱 어두컴컴해 보이고 그늘에서 보면 그 빛이 더욱 눈부시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빛 속에 서 있는 자들은 그 그늘에 서있는 자들을 불결하고 더럽게 생각하고 자신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부의 그늘에 서 있는 민중들에겐 부의 빛 속에 서 있는 자들의 탐욕과 이기심에 역겨워한다. 그들의 주체할 수 없는 부와 버려진 잉여는 그늘에 서 있는 사람들의 애환이 되고 한이 된다. 그 깊은 마음의 응어리를 포착해내어 문학적으로 표현해내는 재미가 그녀에겐 있다. 

  '토란'에서의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오래묵은 갈등, '비하리에서 나는'에서의 "자신의 온 생애를 무너뜨린 검은 얼굴의 사내는 비하리에 전염병처럼 떠도는 우울과 권태, 단조로움이라고 나경은 생각했다."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불운을 자신의 지역 전체에 감도는 기운으로 파악하는 눈이 대단했다. '거미집'에서는 평생 아들들의 뒷바라지에 자신을 헌신해온 어머니와 나와 딸의 3대에 걸친 이야기이다. 그 바보같은 어머니의 삶이 싫고 나에게 기대는 것이 미우면서도 나도 모르게 어머니의 삶을 닮아가버리는 자신을 보면서 삶의 쓸쓸함을 느끼게 된다.

  '파꽃'은 너무 감동적이다. 평생 마음에 품고도 한번도 표현할 수도 없고 표현하지 않은 한 여자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그녀의 오래된 말 한마디에서 자신의 사랑을 확인받고 싶은 그 마음에 나는 너무 애절하면서도 슬펐다. "파꽃도 분명 꽃은 꽃이지요? 꽃...........맞지요?" 현실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자신의 삶 전체를 그녀를 통해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 사실 그 마음마저 버리면 인생이란 또 얼마나 밋밋하고 허무하랴..문학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그녀는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보다 삶 속에 꾹꾹 묻어두었다가 인생의 결정적 순간에 그것을 한 번, 단 한 번 터트리는 불꽃처럼 그려낸다. 그 불꽃같은 삶의 모습은 그래서 예술이 되는 것일까?

  '불두화'와 '미노'를 거쳐 '그 재난의 조짐은 손가락에서부터 비롯되었다'에서는 인간의 삶 자체를 대상화시키는 시각을 보여준다. 그녀가 이 작품으로 마무리를 한 데에 나는 왠지 이 소설의 단편들이 하나하나의 의도를 가지고 맞추어진 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녀의 모든 작품 속에 흐르는 그 한 마음이 불현듯 만져질 듯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나의 삶을 돌아본다. 그녀가 오지 않은 그 황량한 공간을 뒤로 남겨 두고 묵묵하게 걸어온 날들, 나도 이젠 녹슨 철로를 삼켜버려야겠다. 이미 내 것이 아닌 것들을 뒤로 하고 당당하게 앞 길을 걸어가야겠다. 가슴아팠던 내 청춘의 자국들을 밀려오는 파도에 쓸리는 모래 위의 자국처럼 그렇게 바다너머로 쓸려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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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7-05-18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감칠맛 나는 책은 언제 또 구하셨대요?^^(따라서 보관함으로~~)
파꽃이건 장미건 열매 맺는건 다 꽃을 피워냅니다. 꽃없는 열매와 이파리는 없잖아요.
-알라딘의 파꽃처럼 매운 여우-켁~*.*

달팽이 2007-05-18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궁 위에 불안하게 흔들리는 파꽃이 마치 별처럼 흔들립니다.
우리 여우님의 말대로 모든 열매맺는 것들은 다 꽃이 있어요.
그대의 꽃향기를 둘러싸고 모인 많은 사람들과
그대의 열매를 탐하여 모인 많은 사람들 뒤에서
제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동물원에 가기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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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알랭 드 보통을 안 것은 처의 오래된 그의 책 한 권에서부터였다. 사랑에 접근하는 그의 평이하고도 쉬운 글들을 음미하면서 하지만 그리 녹록치 않은 그의 사고와 만나면서 이 사람 '보통' 사람아닌 '보통'이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이 책은 그의 에세이적 글쓰기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그만의 깊은 철학적 사유과정을 거쳐서 나온 생활의 언어들은 마치 똑같은 재료의 채소와 고기로써 정말 맛있고 독창적으로 우리 앞에 나온 요리같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인터넷을 찾아 먼저 본다. 누드의 자세로 창밖을 내다보는 여자. 어느 낯선 도시의 호텔 바의 침침한 듯 하면서도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침대에 앉아 조그마한 책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여자 등 그의 그림은 도시의 복잡하고 정신없는 일상에서 벗어난 세계이다. 또한 일상의 중력상태로부터 벗어나 무중력의 공간을 응시하는 눈빛이 뭔가 내면으로 향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마 낯선 환경속으로 자신을 던져놓는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 속에서 새로운 모습과 빛깔을 발견한다는 것이리라. 그 낯섬이 끌리고 그 내면의 마음의 세밀하게 변하는 상태가 매력적인 그림이다.

  '공항에 가기'는 그의 일상에 대한 포착이 얼마나 특별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지구로 떨어지는 별같다."는 표현과 "그 영원한 이동성은 정체와 속박으로 답답해진 마음에 상상의 평형추를 제공한다." "새로운 시점은 풍경에 질서와 논리를 부여한다." '진정성'에서는 삶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우리들이 하는 기만의 행위가 실은 아무것도 이루어내는 것이 없음을 풍자적으로 느낄만큼 보여준다. 인연은 기적같이 뜻하지 않은 곳에서 시작되고 나는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낯선 손님처럼 그 일을 맞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아무런 마음의 장애가 없어야 그 결실을 취하지 않겠는가?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가장 위대한 결실과 가장 위대한 기쁨을 수확하는 비결은, 위태롭게 사는 것이다! 너의 도시들을 베수비오 산기슭에다 세우라!" 일과 행복에서는 우리가 일을 행복으로 할 수 있는 조건이 역사적으로 변해왔다는 사실을 나열한다. 그 끝에서 행복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그는 결국 조건없이 주어진 행복으로 나아간다. 어떤 가치와 의미 그리고 기대를 부여하지 않고 일을 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사실을 발견해낸 것이다. 그의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평범하면서도 삶의 깊은 통찰을 통해 어떤 목표에 닿으려고 하는 것, 그것이 그의 글쓰기에 그대로 나타나있다.

  세상 사람들은 당분간 그의 글쓰기의 매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의 글쓰기가 부르주아적인 낭만과 관념의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황폐해져버린 도시의 정신적 뒤뜰 어딘가에 우리들을 끌어당기는 빛으로 비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호퍼의 그림을 통해서 예전에 우리에게 없었던 생각과 의미가 생기듯 그의 글들도 그가 언어에 불어넣은 그의 내면의 힘이 예전에는 발견하지 못한 일상의 미를 발견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의 책이 다른 책으로 나가는 입구도 되지만 그의 책이 정말 우리 삶의 자리로 현실로 되돌아와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문도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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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4-18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보통의 책들을 얼마전 사두고 아직 못 읽고 있어요. 이 책이랑 다른 것 세권 더요. 아마 님이 처음 보통의 책으로 만났다는 그 책도요.
위태롭게 살기! 고수해야겠어요.^^

달팽이 2007-04-18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장있게 살기! 겠지요.
저도 배우고 싶군요..
앞으로 몇 권의 책을 더 봐야겠군요...

2007-04-18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짱꿀라 2007-04-18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번주 일요일에 서울에서 대전으로 내려오면서 이 책 사가지고 왔답니다. 여기에서 달팽이님의 리뷰를 보게 됩니다.

달팽이 2007-04-18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ㅖ ㄱ ㅕ ㅇ ㄴ ㅣ ㅁ . 서재로 가지요..

산타님/일상의 묘한 인연들이 이야기거리가 됩니다.
저는 님의 페이퍼를 보다가 문득 집에서 책을 뒤적이기도 합니다.ㅎㅎ

프레이야 2007-04-18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일 도착예정이에요^^
 
내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
김선우 지음 / 미루나무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책 제목과 표지를 보고 나는 젊은 날의 잃어버렸던 사랑의 열정을 떠올렸던가? 얼굴만 봐도 싱그러웠고 그림자만 봐도 가슴이 뛰었던 그녀를 생각했던가? 검은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다가오던 그녀에게 바람 한 줄기가 만들어놓은 머릿결의 풍경을 보면서 나는 갑자기 주변의 풍경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고 있었지. 모든 경물이 흑백처럼 빛을 잃어버렸을 때 오로지 천연의 빛으로 밝은 햇살로 내 눈에 들어온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 책의 첫 느낌이 그랬다면 첫 장부터 그 강렬함은 더욱 거세어질지나 그 방향은 불현듯 뒤바뀌어 있다.

  파블로 네루다의 '젊음'에 보이는 입에 들어온 설탕같은 키스들...빗속에서 뒤집어 엎은 램프처럼 탁탁 튀며 타오르는 한창 때...아! 그 때...마냥 하루 하루가 즐겁고 새로웠던 날들...

 하지만 그녀의 사랑은 이런 열정의 화려한 원색으로만 채워져있지는 않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그녀의 사랑은 변해간다. "봄날은 간다" 에서 사랑이 어떻게 변할 수 있니? 라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사랑은 당연히 변하는 것이다. 사랑의 대상도 사랑의 빛깔도 변한다. 사랑이라는 욕망구조의 본래모습을 마음으로 들여다보면 그 에너지는 변하지 않을런지 몰라도 그것이 입는 옷은 시시각각 변한다. 그래서 그녀는 니체에게로 그리고 장자에게로 먼저 달려갔던 것일까? 극한 절망을 늪을 지나서 사랑의 절망마저도 수용하게 되는 도의 경지로 먼저 닿고 싶었던 것일까?

"살다보면 그렇다네 내 혼이

다른 육체에 머물고 있는 느낌

그마저 사랑해야  하는 때가 온다네"

그녀가 장자의 도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잘 모르지만 그녀는 재빨리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삶의 한가운데는 바로 사랑의 자리이다 라고 말한다. 그 사랑이 남녀간의 사랑인 에로스와 생명적 존재 모든 것에 대한 아가페의 사이 어느 지점엔가 놓인 것은 분명하리라. 김소월의 초혼 처럼 처절하고 깊은 사랑과 디킨슨의 삶 이전과 삶 이후의 본래적 에너지에 대한 회귀적 욕망을 거쳐서 그녀는 계속 여정을 이어간다. 만해처럼 절대적이고 운명적인 사랑의 빛에 물드는가 하면 릴케처럼 예이츠처럼 낭만적이고 봄같은 사랑의 햇살 속에 알몸으로 드러눕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새 사랑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 인생의 지혜에 묻은 사랑의 흔적을 찾아 신비주의로 들어서기도 한다. 루미를 만난 그녀는 이제 사랑의 대상이 곳곳에 현존하고 그것을 통해 신의 현전을 알아차리게 된다.

  삶의 한쪽 끝에는 어떤 사랑의 고통과 상처도 보듬어낼 수 있는 달라이라마를 비롯한 불교적인 사랑과 종교적 사랑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녀의 다른 한쪽의 이상에선 체게바라의 삶처럼 직설적이고 직접적인 현실적인 사랑이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더욱 성숙해진 마음의 자리에서 다시 꽃으로 피어난 사랑의 미세하고도 깊은 감정들을 그대로 가슴으로 느끼고 있다. 사랑의 기쁨,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적 접촉과 그 어머니의 품음에 대한 안도감과 보호본능에서 느끼는 편안함, 세상의 모든 이념과 신념을 넘어서 오로지 진실하고도 진정성이 담긴 대상과의 사랑에 올인하는 태도...

  김종삼의 목포항에서 보이는 그녀의 사랑은 "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게 되기를..."바라는 사랑이다. 사랑이 남기는 그 배면의 슬픔과 아픔이 생기고 사라지는 자리에 대한 깊은 응시를 통해서 바라본 사랑의 본체가 다시 그녀를 세상의 드러난 사랑으로 이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쏟아내는 감성적이고 육감적인 시어들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으며 그리 음란하지만은 않다. 이미 40을 눈앞에 두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젊은 방황이 헛되지 않았고 그 치열한 방황이 지금의 꽃물든 가을의 단풍같으면서도 활짝 그 생명의 씨앗을 틔워내는 봄의 생명력도 전달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 사랑의 진실 앞에서 인생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랑의 진정성 앞에 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내 입 속에 들어온 설탕같은 키스들이 더욱 달콤해지고

봄 날같이 지나가버린 내 사랑에 무너지듯 가슴 아파도

더욱 쓸쓸해져만 가는 나의 사랑의 뒷모습도 말없이 아름다워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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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4-04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은 살아있는 자의 영원한 화두입니다.


짱꿀라 2007-04-05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의 말씀도 기억해 둘 아주 훌륭한 말입니다. 달팽이님 서평 잘 읽고 갑니다.
김선우 작가의 작품속에 글자들이 생생이 움직이는 것 같은 그럼 감동을 받고 갑니다.

달팽이 2007-04-05 0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사랑은 우리의 본래모습이자 우리를 움직이는 가장 원초적 동기라고 생각합니다. 한사님의 뜨거운 열정과 사랑이 불현듯 느껴지는 것은 왠일일까요?
산타님/ 앞으로 김선우라는 또 하나의 기억해 둘만한 한국시인을 만났습니다.

2007-04-05 0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7-04-05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기꺼이 보내드리고 싶어요.
주소를 이곳에 남겨주시면 고맙겠군요.
선생님의 이미지가 불현듯 지나간 이유가 있었군요..ㅎㅎ

2007-04-05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