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빈치 코드 1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이창식 번역 감수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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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역사는 힘의 언어로 쓰여진 박제품이다.' 현재 미국과 유럽의 역사는 기독교에 의해 쓰여진 역사이다. 그 기독교는 예수사후 4세기경 니케아종교회의를 통해 대주교들이 모여서 교황선임권과 황제선임권을 포함한 모든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지역적인 기독교사와 이면의 기독교사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조작된 것이다.  자신들에게 변함없는 부와 권력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절대화, 신격화시키는 것이 필요하였고, 그 절대자인 예수에 이르는 길은 자신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냄으로써 그들의 확고한 지위를 꿈꾸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예수가 가진 인간적인 면을 포함한 이면적인 역사는 인류의 역사에서 지워지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지워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빼앗기고 이교도라는 허울을 둘러쓰고 탄압받게 되면서 지하의 비밀조직으로 숨어들면서 그 생명을 유지해가게 된다. 다빈치 코드는 바로 이러한 기독교의 이면의 역사에 대한 코드이다.

시온수도원이라고 불리우는 기독교의 이면의 역사를 비밀리에 보존하고 전승하는 임무를 띤 비밀단체는 예수의 사랑하는 연인이자 아내였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후 프랑스로 망명할 때 이미 예수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그는 예수의 혈통을 이어가야 하는 중대한 사명을 부여받는다. 그래서 그 딸이 프랑스의 메로빙거왕조를 이루게 되고 비밀리에 그 후손을 지켜가는 것과 성배의 보존이 시온수도원의 임무가 된다.

그랜드 마스터 자크 소니에르가 기독교 극단주의 조직인 '오푸스 데이'의 행동대원 사일래스에게 살해되는 장면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소니에르가 죽어가면서 남긴 'P.S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는 말때문에  하버드 대학교 기호학 교수인 로버트 랭던이 사건에 연루되면서 소니에르의 손녀 소피와 함께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시온수도원 비밀조직과 오푸스 데이 그리고 이를 조종하면서 성배의 비밀을 찾아 세상에 드러내려고 하는 티빙간의 성배를 쟁취하기 위한 음모와 갈등이 펼쳐진다.

이 기독교의 이면의 역사를 파헤친 다빈치 코드는 작년에 미국에서만 700만부 이상이 팔리면서 기독교의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유럽에서 종교적 빅뱅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내용이 대중적인 소설로 만들어질 수 있는 역사적 분위기가 이미 형성되었다는 것에 이미 이 소설의 결말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되기도 하였다. 중세만 하더라도 이런 상상력조차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이미 종교적인 다원주의와 기독교 내에서의 자성적 목소리와 성서의 내용을 둘러싼 비판과 모색이 결국 종교적인 다원주의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이러한 상황이 이젠 기독교의 바탕위에 선 국가들에서 이러한 작품을 탄생시켜내었던 것이다.

몇 번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면서 그들은 쐐기돌의 비밀을 풀어내고 그 쐐기돌의 메세지를 따라 도착한 곳이 로슬린 성당이었고 그 곳에서 성배의 진실은 파헤쳐진다. 하지만 그토록 애타게 찾았던 성배의 진실은 없었다. "사실 시온은 성배가 결코 드러나지 않도록 유지해 왔답니다." "그것은 우리 영혼에 봉사하는 수수께끼이자 경탄이지요. 성배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배의 아름다움은 우아한 그 천성에 존재하는 거예요."

역시 그 말이 맞다. 훌륭한 결론이다. 사회적으로 본다면 기독교의 주류역사의 거짓과 기만을 들추어내는 것이 맹목적으로 기독교를 종교로 가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줄 수 있겠지만 그래서 그들의 권력과 부가 지탱하고 있는 기반의 명분을 허물어 뜨릴 수 있겠지만, 그것은 또 다른 명분과 기반을 쌓게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본다면 내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면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이, 예수의 또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고 해서 나는 믿음을 저버릴 것인가? 나의 종교적 믿음이 형상에 치우친 것이라면 당연히 그 믿음이 깨어지겠지만 그 믿음이 진실로 예수의 참된 말씀에서 찾는 것이라면 무엇이 과연 달라지겠는가?

따라서 성배는 일반인들에게 단지 '위대한 개념'일 뿐인 것이다.

시온 수도원의 십자가는 네 다리의 길이가 같은 십자가이다. 그것은 남과 여가 하나님의 말씀아래 평등함을 의미하며 기독교의 주류의 역사가 대접받는만큼 버려진 이면의 역사도 평등하게 대접받아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편향된(물질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종교적으로든)우리들의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균형의 십자가를 간직해야 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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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이 2005-02-04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은 근본적으로 픽션의 장치를 이용합니다. 있을 법한 이야기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소설이라는 문학의 매력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허구의 꿈과 상상력이 먹고 삽니다.

다빈치코드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 소설속의 성배입니다. 코드는 무언가의 숨김이고 드러내고 싶은 베일입니다.

그 코드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덮고 있는 베일을 걷어내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것이 소설을 읽는 우리들 마음속의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빈치 코드...달팽이 코드는 무엇입니까?

삶은 사실이지만 또 그 속의 살아있는 허구때문에 꿈이 됩니다. 소설속의 진실을 맏고 싶은 만큼 삶은 허구 속에 허덕입니다.

진실과 허구의 게임에서 벗어나는데까지 마음의 비밀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빈치코드가 어떻게 달핑이코드로 자리잡을 수 있는지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사회적 코드가 개인에게 내면화 되듯이 개인적인 코드가 사회를 이끌어 가게끔 하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접점에 우리가 알고 싶은 성배의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모두가 성스러운 핏줄의 후손이라는 것을 개달을 수 있을 때까지..코드는 우리들의 삶에서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소설속의 코드를 만들고 소설속의 코드가 삶으로 튀어나와 세상에 영향을 줍니다.

인생이라는 코드는 진실과 허구 사이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진실이 허구같고 허구가 진실같은 저마다의 코드에 속지말아야 겠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믿고 싶은 것을 진실이라고 믿고 살 뿐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본래 모습이 없는데 뚜렷한 모습으로 우리 사이에 유령처럼 떠돕니다.
 
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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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만일 당신이 끊없이 펼쳐진 태평양의 한가운데에서 조그마한 구명보트에 아무런 무기나 도구도 없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야생호랑이와 단 둘이서 태평양을 벗어나야 한다면 그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여기 16세인 파텔이라고 불리우는 한 인도 소년은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는 아버지가 캐나다로의 이민을 결정하면서 온가족이 화물선을 타고 가던 중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배는 좌초하였다. 가족 모두를 잃은 슬픔을 느끼지도 못하는 급박한 상황속에 던져진 그는 다리가 부러진 얼룩말 한마리와 하이에나 오랑우탄과 벵골호랑이가 탄 구명보트에서 지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그 소년에게는 그 막막하고 넓게 펼쳐진 태평양은 그저 외부의 세상일뿐 그가 생활하는 공간은 조그만 구명보트위가 되고 그곳에서 그는 서로 죽고 죽이는 먹이사슬에 놓여진 불쌍한 초식동물일 뿐이다.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죽이고 그 하이에나를 호랑이가 죽인 후에는 결국 파이와 리처드파크라는 호랑이만이 태평양의 망망대해에서 작은 점과도 같은 보트 위에 서있는 두 존재가 된다.

호랑이에 대한 인식을 한시라도 놓칠 수 없었던 한 소년이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노력과 삶에 대한 희망을 끝내 포기하지 않은 데에는 이 상황에 소년을 던졌던 신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년의 생명을 언제라도 위협할 수 있는 호랑이가 사실은 소년이 그 기나긴 시간동안 부모와 가진 모든 것을 잃은 슬픔과 외로움 그리고 막막한 바다위에서 밀려드는 어둠과 바닷속의 상어의 공격으로부터 정신적으로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지탱시키게 해준 생명의 열쇠였던 것이다.

일본 해양부의 직원이 일본 선박 침춤호의 침몰 원인에 대해 조사하려고 왔을 때 소년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려는 대로죠. 안그래요?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붙이지요. 아닌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요?"

확실히 그러하다. 소년이 만일 그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세상을 이해하려는 특별한 방식, 즉 현재의 상황에 대한 모든 이유를 신의 의지로 돌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을 발견해내지 못하였다면 아마 이 이야기는 작가가 만들어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앞서서 나온 이야기처럼 이 이야기는 결국 당신을 신으로 인도할 것이다라는 말을 우리는 이해할 수 가 있다.

화물선에 오르기 전에 소년이 가졌던 기독교와 힌두교와 이슬람교에 대한 다원주의적 종교관은 결국 그가 어떤 형식이나 교리를 떠나 자신의 생활속에서 참된 신앙을 찾으려는 노력이었으며, 그러한 노력이 극한적인 삶의 조건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고, 그렇게 이해되고 수용된 상황은 단지 그가 헤쳐나가야 하는 모험과도 같은 것이 되었다.

이제 우리들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보자. 그러한 극한적인 삶의 조건에 처했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을 통해 삶의 의미와 희망을 가지고 그 역경을 헤쳐나갈 것인가? 어쩌면 태평양 망망대해위에 놓여진 추진기관없는 구명보트에 호랑이와 함께 한 227일의 삶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일런지도 모른다. 이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 가지고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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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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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뼛'자와 '써라'자는 큼지막하게 크게 씌어져 있다. 무엇보다도 글쓰기에 대해 아직은 어떤 두려움과 짐을 가지고 있는 내게 '써라'라고 하는 절대명제 앞에 나는 어떤 숙제가 내게 남아 있음을 느낀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매력적인 작가이다. 그의 글쓰기는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다. 자신의 삶이요, 일상이다. 그리고 불교신자로서의 명상, 선이다.

우리는 어떤 글을 대할 때마다 저 글을 쓴 사람은 과연 글에 드러난 색깔대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고 묻게 된다. 그리고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을 대할 때에도 그 작품이 작가와 예술가의 삶의 기준과 이중적인 괴리를 보이게 되면 때로는 실망하기도 하고 그 작품에 대한 감동이 떨어지기도 한다. 골드버그는 그런 글쓰기를 하지 말라고 한다. 자신의 솔직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글, 자신의 일상의 마음에서 솟아난 글, 자신의 삶의 가치와 경험이 녹아난 글을 쓰라고 한다.

나의 글쓰기도 이젠 어느 정도 나의 패턴을 찾아가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늘 어떤 책을 읽고 서평을 쓰려고 하면 내 머리속에서 한 번 정리되어지는 절차들이 때로는 글쓰기의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사실 그런 압박감을 가지기 싫어 읽은 모든 책을 서평으로 남기지는 않지만 그래도 책이 주는 어떤 생각과 느낌들을 정리하고자 할 때에도 늘 그런 욕구와 더불어 글쓰기의 짐같은 것들이 덤으로 나에게 생기는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 내 글쓰기 아닌 글쓰기(?)의 반성 속에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골드버그의 글쓰기는 이런 면에서 오랫동안 나의 목에 걸려 있는 가시를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는가에 대해 친절한 충고를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특별한 글쓰기란 알고보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 속의 가시를 제거하는 평범한 방법이었다.

이 책의 핵심적인 단어를 고르라면 나는 "내면적 관찰자, 편집자"를 고를 것이다. 뼛속까지 깊이 내려가서, 즉 자신의 본성과 근원 깊이 도달하여 쓰는 글쓰기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자신의 마음 속 관찰자, 편집자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실체는 에고이다. 늘 나의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욕구와 욕망이 나의 세계인식을 가로막고 있듯이, 세상을 마음으로 투명하게 담아내는 데 그것은 자꾸만 창에 끼는 성에와 같은 것이며, 따라서 뿌옇게 담아낸 세상은 뿌연 글쓰기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글쓰기는 선이요, 명상이다. 자신의 근원 깊숙히 가닿아 깨어 있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바로 보는 것, 그 마음에서 세상을 담아낸 글들이 만들어내는 글쓰기는 그 자체가 우주의 비밀을 간직한 홀로그램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글쓰기는 화두이다. 내가 어떤 곳에 어떤 사람을 마주하건, 어떤 대화를 하고 있건 그것은 나의 세상과 우주를 만들어내고 또한 그것은 글쓰기로 이어진다. 결국 글쓰기는 자신의 인생에 가장 절실한 문제인 깨달음으로 자신을 인도하게 되는 것이다.

자 이제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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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10-07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쓰셨네요. 보관함에만 두고 읽어보지 못했는데 한번 읽어 봐야겠군요. 추천!^^

달팽이 2004-10-07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반갑군요..간간히 들러 사진 열심히 퍼고 있답니다...물론 가끔 추천도 부지런히 하구요...

stella.K 2004-10-07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면 저야 고맙죠.^^

달팽이 2005-01-14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이미 한 것으로 아는데요...그리고 정기적으로 들르고 있답니다...
 
야수의 허기 - 동물로서의 인간의 존재의미는 무엇인가?
르네 바르자벨 지음, 장석훈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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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소설가였던 그는 자신의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작가적, 철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인간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과 우리가 존재하는 우주에 대한 거시적 밑그림을 그려보고자 한 원대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 작품은 그의 말대로 자신이 쓴 이전의 모든 작품과 맞바꿀 수 있을 정도로 그가 자신과 애정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내놓은 작품이다. 야수로서의 인간 존재가 가진 허기의 궁극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그는 이 질문을 통해 베일에 가려진 우주의 비밀로 나아간다. 그 배고픔의 궁극적 원인을 궁구해가는 과정에서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으로 빠져들지도 모른다.

"나는 결코 봄을 심상히 지나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하는 첫 구절은 그가 가진 이 우주에 대한 경이로움과 신비함이고, 그것은 결국 우리가 우리의 삶에 대해 그리고 존재하는 우주에 대해 궁극적인 의문을 가지게 한다.

그의 시선의 출발점은 인간이다. 그 인간이란 모든 생명체를 포함하여 그저 하나의 생식기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외의 다른 기관들은 저마다의 역할을 갖고 생명을 유지시키고 생식기가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보조할 뿐이라고 말한다. 인간 존재란 중력의 법칙에 따라 흔들리는 진자처럼 생식의 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의 창으로 사다리를 타고 오른 것은 로미오가 아니라 그의 남성 생식세포였다. 자신을 강력한 힘으로 끌어당기는 여성 생식세포를 만나러 가기 위해 사다리를 오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은 또한 자신의 몸의 내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도 못한다. 어떤 병균이 자신의 몸을 파괴하고 있는 때라도 그는 오로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내버려 둘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이란 존재는 생태계의 모든 동물을 지배하고 이젠 이 지구라는 별을 자신이 정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존재하는 병균에 대해서도 의학의 발전과 더불어 정복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과학이라는 힘에 의해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 과학이라고 하는 것도 알고 보면 인간의 오감각을 기초로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며, 그 오감각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남이 없는 감각의 확장에 불과한 것이다, 더 나아가 그 과학 또한 여러번 반복되는 현상에 대해 공통의 법칙을 만들어내어 이름만 부여한 것이지 존재의 신비는 여전히 건드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자연의 법칙에 존재하고 있는 '균형'의 법칙이 존재한다면(보박이라고 하는 설치류는 자신의 천적인 늑대가 지구상에서 사라짐으로써 수백만에 해당하는 집단이 스스로 몇 개월에 걸치는 여행을 통해 집단자살을 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인간 역시 그런 법칙에 의해 스스로를 정리하게 될 것이다. 전쟁이든, 환경이든.... 결국 이 세상에서 자기보다 전능한 존재는 없다고 주장하며 안하무인격으로 자연계를 파괴하는 인간 역시 별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는 인간을 겸손하게 하고 나아가 이 자연과 우주에 대한 경이로움과 신비함을 품게 한다.

만일 과학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그것은 종교와 화해하고 결합할 때 우리가 잃어버린 앎을 언젠가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가 제시하는 날조된 이야기와 모호한 신비주의를 깨뜨릴 경우에만 과학은 정말로 필요하다. 그 이후에야 비로소 참된 진리에 이르기 위한 길을 만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겠다. "나는 결코 봄을 심상히 자나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우주의 창조자는 있을까? 만약 이 창조물을 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다면, 창조자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은 것이 된다. 창조는 인식되지 않는 한 창조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식된다면 창조자는 그 창조물의 각 부분 부분에 존재하게 된다. 이것을 아는 것, 그것이 인간의 생명활동을 통해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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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1-13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제 리뷰 안쓸래요....흑. 너무 잘 쓰시잖아요. 왜들 자꾸 저의 기를 죽이시는지요...

달팽이 2005-01-15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찬입니다. 저도 파란 여우님의 리뷰에 감동하는 독자인걸요...
 
죄와 벌 -하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철 옮김 / 범우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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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 속에 악령이 자리잡고 그 사람의 행동을 이끌고 있을 때 과연 몸만 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그 악령이 지시하는 바대로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아니면 그 행동과 자신의 의도를 정당화시키려고 하는 마음뿐이지 않은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 역시 한 노파와 그의 여동생을 도끼로 살해하기 위한 계획에서부터 그 이후의 내면적 심리의 변화과정에서 악령에 씌인 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살해이유를 한편으로는 자신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가난한 삶을 지켜보지 못하고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데서 찾았고, 또 한편으로는 돈도 없어 대학생활을 중단한 자신이 지금 고리대금업으로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근근히 유지하는 사람들의 등을 쳐먹으며 사는 이같은 존재에 불과한 늙은 노파를 살해하고 자신의 꿈을 위한 자금을 마련함으로써 보다 안정적으로 부모와 누이를 부양하고 자신의 보장된 앞날을 다져놓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사상으로서는 법의 테두리 내에서 행동하는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대의를 위해 법을 무시할 줄 아는 비범한 인간이기를 원했고, 그 대표적인 모델로서 나폴레옹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보다 큰 대의를 위해서는 그 앞에 걸림돌로 놓여 있는 사소한 범법행위는 마음의 가책없이 저지를 수 있다고 하는 그릇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허황된 대의라고 하는 것은 있었지만, 인간의 생명과 가치라고 하는 또 다른 것은 없었던 것이다.

도스또예프스키의 작품엔 늘 비참하고 굶주리고 헐벗은 민중들의 가슴아린 생활들이 그 무대가 되고 있다. 그 민중적인 삶을 사는 어머니와 누이의 오빠로서 자신의 노력에 따라 그 삶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대학생인 그가 결국엔 민중의 따뜻한 가슴과 사랑에 의해 상류사회로 접어들고자 팔아버렸던 자신의 양심과 선량한 마음을 되찾게 된다.

매춘부인 소냐는 바로 가장 낮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는 그 곳에서 가장 선량하고도 아름답고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로서 사람을 감화시킬 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그 누구 앞에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살인을 한 후에도 대중들을 얕보며 대할 수 있었으나, 그녀의 진실함과 선한 마음 앞에서만큼은 많이 알고 있고, 보다 나은 위치에 있고, 보다 교양이 있으며, 보다 상류사회의 가능성이 높은 그가  한없이 초라하고 작아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녀야말로 자신의 타락한 영혼을 구제해줄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선한 마음에 굴복한 그는 결국엔 경찰서로 가서 자수를 하고 감옥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정작 아직 자신의 마음을 구원받지 못한 그는 감옥생활에서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질시를 받게 되고, 끊임없이 자신을 사랑으로 돌보아주는 그녀가 몇 일 동안 나타나지 않자 가슴졸이며 그녀를 걱정하기 시작하게 되고, 깊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비로소 자기 안에 있는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악령을 떨쳐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자, 비로소 소냐의 사랑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비로소 세상은 180도 바뀌게 된다.  그가 같이 생활하는 수감자들이 이젠 어제와 전혀 다른 사람들로 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죄는 마음 속의 죄였고, 벌도 자신의 마음 속의 벌이었음을 그는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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