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위화의 작품은 이것이 두번째다. '허삼과 매혈기'를 통해 중국의 근현대사를 살아간 중국민중의 고통스럽고도 묵묵했던 인생이 중국의 역사를 끌어온 저변에 깔린 힘이었고 그것은 개인적인 삶으로 돌아오면 어떤 삶의 현실에서도 그것을 수용하며 살아가게 만드는 인간의 저변적인 힘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서문에서 그는 글쓰기를 '마음의 소리'라고 한다. "마음의 소리는 작가가 진실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자신을 이해하면, 곧 세계를 이해한 것이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한 사람으로서 중국의 근대사를 살아온 민중들도 그 참혹하고도 고통스러운 날들을 묵묵하게 극복해가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일종의 깨달음같은 것으로서 살아갔던 것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고상함을 독자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고상함이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일체의 사물을 이해한 뒤에 오는 초연함, 선과 악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동정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다."

  위화의 작품에서 중국의 공산화 과정과 문화대혁명이라는 큰 사건이 개인을 스쳐가는 방식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푸구이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기생과 어울리거나 도박을 하다가 자신의 전 재산을 날려버리고 비로소 세상에서 그저 주어진 삶이 아닌 농부와 민중으로서의 자각된 자신을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런 그 앞에 빈털터리의 삶이라도 가족과 사랑이 있는 한 행복한 삶이라는 그의 인식은 무참하고도 눈없는 역사적 폭력이 지나가면서 폐허로 바뀐다. 가족으로부터 강제로 격리되어 전쟁터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며 간신히 집으로 돌아온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겪게 되고 어처구니없는 헌혈때문에 유칭도 잃는다. 인생의 행복이 그에게 주어지는 듯 쉽다가도 마치 손위에 놓인 모래처럼 사르르르 허물어져 내리고 행복은 영원히 잡을 수 없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삶의 고통과 상처들에 반응하는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귀울인다. 자신이 빈털터리가 되지 않았다면 총살형을 면할 수 없었듯이 인생은 늘 동전의 양면처럼 겉모습만으로 그 의미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삶을 그는 고난했던 지난날을 통해 배운다. 결국 그에게 있어 공산화과정과 문화대혁명 그리고 극심했던 사회적 기아 문제도 삶의 문제 깊숙히 그의 가슴을 찌르지는 못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작품에 대해 주변의 민중들의 삶을 보다 세밀하고 공감적으로 표현해내지 못했다는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민중들의 삶의 시각에서 어떤 삶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가치관의 배제를 문제삼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화가 작품 속에서 춘성이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에게 갖은 뭇매를 맞아가며 길거리를 끌려다닐때 그는 단지 춘성의 인간성에 대한 연민으로 말한다. 홍위병 왈 "그가 누군지 알아? 옛날 현장이야, 주자파라구." "나는 그런거 몰라요. 나는 그가 춘성이라는 것밖에 몰라요." 그 말을 들은 홍위병은 더 이상 춘성을 때리지 않았다. 그의 삶에 대한 태도는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관련되어 있다. 사상과 편과 선악을 떠나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같은 삶을 대면할 때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수용해야 하며 또 타인을 어떻게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지에 대해 나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이 책의 원제는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행형인 데에는 묘한 의미가 있는 듯 보인다.

  한 권의 책이 보여줄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 한 권의 책을 통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삶의 통찰이 우리들 마음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릴 수 있다면 그 책은 나름대로 실패하지 않은 책이다. 객관적이라고 여겨지는 세상은 때로는 아무런 객관성도 없이 주관적으로 우리들에게 주어진다. 현실을 인식하는 것은 인식하는 주체가 있기 때문이라는 불교적 진리가 때로는 나를 매혹시킨다. 글과 이론과 사상이 때로는 우리들의 고유하고도 독자적인 마음의 영역의 일들을 표준화 객관화라는 허상 속에 사람들의 마음을 매어두듯이 우리들은 우리가 가진 존재의 두려움을 사람들과 공유함으로써 잊고자 한다. 아니 공유한다고 착각함으로써...그렇게 우리는 지금 우리 앞에 놓여진 삶을 회피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회피한다. 그렇다면 인생은 우리 마음이 빚어낸 환상 속에서의 일이 될 것이다. 위화의 '살아간다는 것 그 자체에 관한 일'에 대한 관심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에게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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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08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을 그가 가진 이념과 그가 가진 물질적 재화와 무관하게,
그 사람됨으로 평가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특히 한국에서..

저의 개인사에서 두 번 "오싹" 소름이 끼쳤던 적이 있답니다.
한번은 '광주사태' 때였고, 한번은 DJ에 대한 호남의 '98%의 몰표'였답니다.
전자 때는 '개죽음'의 위협을 실감했고, 후자 때는 '민중의 광기'에 소름이 끼쳤답니다.
모두 지난 일이 되었습니다.


비로그인 2007-07-09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의미있는 책을 읽으셨군요 .. 그동안 그래서 이렇게 글을 자제하심이..
저는 영화 '우리학교'에서 비슷한 문제를 생각했던 기억이 있어요..
답답했던 마음을 누르고 영화관을 나섰던 기억..도 새롭네요..
저 책도 두분의 말씀도 가지고 돌아갑니다..

프레이야 2007-07-08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의 리뷰 오랜만이에요.^^ 읽어가다 보니 '살아간다는 것'이 원제군요. 전 위화를 처음 만난 소설이 '살아간다는 것'이었어요. 허삼관은 두번째.. 표지도 저렇게 바뀌고 제목도 바뀌었나 보군요. 훨씬 강렬한 느낌이 들어요. 신간 '형제'를 바구니에 담아두었는데..
님의 리뷰에 꾸욱!

2007-07-08 14: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7-07-08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두 사건은 저한테도 무척이나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한사님의 인간에 대한 이해가 그래서 저는 좋습니다.
"모두 지난 일이 되었습니다." 이 말도 마음에 듭니다. ㅎㅎ

수경님. 아마도 '우리학교'는 방학의 과제로 미루어두어야할 듯 하군요.
차이를 넘어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근저에 우리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인간성의 바닥과 생명성이겠다 싶습니다.
그것이 선악과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관의 너머까지 뻗어있어야 한다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혜경님. 어머님 때문에 마음이 많이 쓰이시지요.
그래도 긍정적이고 밝은 님의 글을 대할 때에 저는 무한한 존경심과 친근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시간 내서 다시 둘러봐야겠습니다. ㅎㅎ 고마워요.

드팀전 2007-07-09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위화책은 이상하게 저랑 인연이 안닿고 있습니다만..좋아 할 듯 해요.

말하는 '주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사람됨으로 평가하는 날'..에만 신경쓰면 당연히 맞는 말입니다.그러나 물적 토대를 갖춘 '주체'가 할 경우에 진정성과 설득력은 떨어지게 되며 기득권적 가치를 옹호하는 권력으로 작용됩니다.이미 가질 만큼 가진 상태에서 물적 토대를 잊고 인간으로 평가하지니요...물적토대와 인간됨이 전혀 관련 없다고 생각치 않습니다.우리나라의 도시빈민 비율이 30%가 넘은다고 하는데요...그들은 있는 사람들은 그냥 무시할 돈 만원에 서로 얼굴 붉히고 십장생을 서로 외쳐됩니다..그들의 비인간적인 모습이 참 견디기 힙들지요.없는 것들의 비루함은 진짜 신물납니다.그런데 그게 그 인간들의 인간됨만의 문제일까요...물적토대를 잊고 인간됨을 찾자는 것이 어느 '주체'에서 나오는가에 따라 달리 해석되겠지요.이 말은 아주 신중하게 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에 대한 몰표도 현상만 뚝떼어서 보면 대중적 파시즘적 현상으로 보일 수 도 있습니다.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딱 그 현상만 떼어서 보면 말이지요...그렇게 현상을 단절시키면서 애써 외면하는 것이 무엇이냐...역사성이지요.전라도가 근현대사에서 정치적으로 어떻게 소외되었는지..여전히 '광주사태'(조땡일보는 아직 그렇게 보지요.신문에는 그렇게 쓰지 않지만)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핍박받았는지...그런 역사성을 이해한다면 광주의 몰표가 그냥 단순한 대중광기가 아니라 억압에 대한 반작용으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대중의 광기'라는 부분이 전라도 사람들에게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건 그 동네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지요.반작용을 불러 일으킨 작용의 힘을 외면하고 반작용의 군집성만 보는 시각이 갖는 폭력성 역시 권력의 작용방식이라고 생각됩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보다 훨씬 부드럽고 친절하며 인간적인 미덕을 많이 지키고 있습니다.권력은 부드럽거든요.부드럽지 않은 것은 권력이 아니라 폭력이지요...부드러움이 실로 성찰적인 부드러움이고자 한다면 훨씬 신중해야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다 지나간 것 아닙니다..도대체 뭐가 지나갔냐구요..현재 속에 있다구요...


비로그인 2007-07-09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팀전님 저분들의 말씀은 그게 아닌 듯해요. 일단 한사님은 뒷 구절을 뒤에 첨가하셨나보네요. 제가 처음 답글 달때와 다른 글이 되어버렸어요. 그러나 저분들의 뜻은 님의 말씀하셨던 앞부분이고 누구든지 무엇을 평가할때 물적 토대자체가 먼저 앞서서 보지 않았으면 하는거지요. 그래도 님의 말씀처럼 이미 사회는 그것이 아니기에 그럴수도 없을 거예요. 그러나 물적토대와 인간됨 자체를 어느 한면으로 보기에는 너무 많은 문제가 있어요. 돈 만원 앞에서 개나 소되듯 소리지르는 것은 빈민층만이 아니예요. 없는 것들의 비루함이요?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님이 말씀것 처럼의 그 한면이 아니예요.. 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들의 비루함이 실물이 난다는 말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어요 . 저는 있는 것들의 비루함이 /종종/ 더 실물이 나거든요. 비루함이 라는 단어를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쓰셨는지를 모르겠으니 .. 더이상 언급하는건 옳지 않을것 같습니다. 제가 느끼기엔 저분들의 말씀은 나보다 없고 못하다하여 비하하며 보지 말자는 뜻이구요 ..님은 현실을 말씀하시는건데 저분들의 말이 의미가 없다 생각하지 않구요.

또 광주문제에 대해서는 저도 부모님이 고향이 전라도라 참 할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전라도에서는 특정당을 밀어주는 식의 일들이 많지요.. 그분들과 이야기해보면 드팀전님께서 정의하신 작용에 대한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더이상 이성의 힘에 의존할 생각을 안하시는 경우가 많아요.. 아직도 경상도에도 그런 분들이 가득한것 처럼요. 그러나 이문제를 작용 대 반작용의 문제로 읽어버리면 지금의 파시즘적 광기에 대해서는 오히려 이해가 더 쉬어져 버리는 모순이 생기죠. 제가 보기엔 문제가 훨씬 복잡해요. 마치 국가 앞에서는 남편 앞에서는 부모 앞에서는 절대적 복종을 해야 한다는 과거의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살아있는 것처럼.. 지방이 군집한다는 건 보다 자발적 복종을/ 트라우마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끊임없이 재생시켜서 이성이 살아남을 수 없게 하는 끔찍한 모습이지요.그리고 그 안에는 모든 소수의 목소리를 금지시키는 파시즘적 요소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건 전라도 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어디에서도 마찬가지로서요 ..

저는 님의 말씀에 많은 것을 인정하는 편이지만 언제나 약간의 이분법적인 전제가 지속적으로 존재함에는 조금 .. 옆에 서고 싶습니다. 즉 부자/ 가난한 자 = 친절하기 쉽다/ 그 삶으로 인해 비루해지기 쉽다 라는 것과 같은 공식은 때론 그 적실성에도 불구하고 놓치게 되는 부분도 많거든요 ..


권력이 부드럽다는 말에도 전혀 동의 할 수 없어요. 어느 권력이 폭력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지를 묻고 싶구요. 그 둘이 그렇게 쉽게 따로 분리되어져 나올수 있는지도 의심스러워요. 동의가 주어지는 폭력이 결국은 권력이 최소한 겉으로는 부드러울 수 있는 경우이겠지요.. 권력이란 속성 자체가 폭력적이지 않을까요?

현실속에도 살아있다는 님의 말씀에는 전적으로 동감이구요. 어찌보면 그건 과거가 어떤 모습으로든 사라질 수 없음과 같은 이치일꺼예요. 끊임없이 묻고 고치도록 노력하면서 현실을 부정하자는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내부에 있는 아니 인간 모두 그 자체에 있는 편견과 겉모습에 대한 집착또한 조금씩은 나부터도 고쳐가야 하지 않을까를 말하셨을꺼라 믿습니다..지난날이 되었다라는 말씀에 드팀전님이 왜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싶으신지 또한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저분들이 지난날이라 함이 아예 무시하자라는 말이 아님또한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듯해서요. 님의 의견이 어쩌면 감상적으로만 흐를 수 있는 문제의 논의에 긴장을 가져다주셨네요. 물흐르는 듯한 논의에 의견을 던지셔서 다시한번 생각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좀 더 고통스럽더라도 현실을 보라 하시는 글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드팀전 2007-07-09 23:55   좋아요 0 | URL
네..제가 댓글을 한번썼다가 회사퇴근하느라 바빠서..오늘 밤 9시넘어 퇴근했거든요.대충 정리하는 톤으로 쓰고 말았습니다.수경님의 긴 댓글에 대한 예의가 아닐듯하여 아기 재우고 다시씁니다.
사실 책 볼 시간도 없는 마당에 이런 짓 하고 있는게 과연 현명한 짓인가...당장 자본의 압력에 작업 환경이 직접적으로 타격받는데(이건 실제상황이거든요.) 이 짓 하고 있는게 맞는 일인가...생각해보게 됩니다.일단 이것까지만 하고 말겠습니다.

달팽이님과는 이미 몇 번의 술자리를 통해서 이와 유사한 맥락의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먼저 수경님의 말씀처럼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빈부나 지식,이념의 틀을 넘어서 인간됨을 보자는 말..저도 동의합니다.도덕적인 그 말에 어느 누가 아니라고 할 수있겠습니까?
다시금 보니 아주 상투적인 말이네요.제가 과민하게 반응한게 맞는데..거기에는 직접적인 이유가 있습니다.그것까지 이야기하진 않겠습니다..괘적을 그린다 라는 정도에서 멈추지요.

가난한자들의 비루함은...마치 수경님이 그 언설을 하지말라고 하시면서 가난한자들을 옹호하는 듯이 보이게 되었습니다.가난한 자들의 비루함과 댓구되는 부자들의 부드러움 그리고 그 안에서 놓치게 되는 것들을 이야기한 것입니다..가난한자들이 비루하다고 욕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은 다음 줄만 읽어보시면 압니다.그리고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 힘든 상황이어서 안하무인인 경우도 많습니다.그들의 안하무인을 그들 개인의 태생적 인간성으로 보지 않는다는 게 제 의도입니다.몇 년전 부산의 빈민가에 장마가 낫지요...자선단체에서 선풍기를 100대 보냈습니다.집 당 하나씩 체계적으로 배분되어야 했는데..그 조직이 좀 어설펐는지 그렇게 하질 못했습니다.그 위기에 몰린 가난한 빈민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거기 계셨으면 아마 놀라서 뒤집어지셨을 겁니다...그런데 욕할 수 없습니다.왜냐구요? 부자들은 수해를 당하지 않습니다.부자들은 선풍기 하나에 전부 귀신들처럼 쌍욕을 하지도 않습니다.

부자는 착하고 선하고 빈자는 욕쟁이다..또는 그 반대도..제가 그렇게 이야기했나요.좀 모순되네요.가난한 자들의 비루함에 신물난다고 했으면 빈자들을 선으로만 취급하지 않는다로 볼 수 있을텐데요..

이분법적으로 본다는 것도 좀 수정을 해주셔야겠어요.그 이분법이란 말은 님이 문제를 이분법으로 보고 있는 것이지요..예를 들까요..권력은 강제라고 보는 방식이 훨씬 이분법입니다.권력은 억압이자 생산이라 보는게 훨씬 비이분법적이지 않습니까..
계급 문제도 그렇네요.지난 번에도 말했지만 계급환원론은 더 큰 딜레마를 낳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계급이 모두다 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이것은 개념화를 위한 것이지 한 계급이 동일한 부를 축적하는 것도 아니고 동일한 취향을 공유하고 동일한 정치적 위치를 갖는 것도 아닙니다.이것이 과연 이분법일까요?
제가 빈부를 이야기하며 계급을 건드린 것은...이런 질문을 합시다.역설적이게도 우리사회에서 계급담론이 과잉되어있습니까 아니면 과소화 되어 있습니까?...계급이란 말이 우리 사회에서 거부감을 주기때문에 전 계급이란 말 자체도 다른 것이 없나 찾아봐야 할 정도라고 생각할 정도입니다.즉 계급론이 과소화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그렇다고 80년대식 경제환원론적 계급으로는 현재의 계급분화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그러나 계급자체를 부정하는 보수적 환경하에서 계급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정상성에 대한 욕구일 뿐입니다.계급이 없다고 말하고 계급이 없기를 가장 바라는 것이 누구인지는 또한번 생각해보면 될 일입니다.

파시즘문제에서도 수경님은 모순에 빠집니다.먼저 파시즘이란 단어가 개념적으로 남발되는 것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집니다.폭력적인 권위주의/독재와 파시즘이 같은 단어로 쓰여도 되는가의 문제입니다.일단 그건 다른 차원의 것이니까 넘어갑시다.파시즘적 광기라는 것은 자발적 복종을 전제로 하지요.이 자발적 복종은 폭력에 의해서만 유지되지 않습니다.폭력에 의해서만 운영되는 권력은 지속력이 짧습니다.권력은 항구성을 특징으로 하기때문에 당연히 타협과 동의를 구합니다.님이 전라도의 자발적 복종을 이야기하시는 방식은 분명히'부드러운 파시즘'이라는 접근입니다..그런데 반대로 권력은 억압에만 의존한다고 하시면 앞의 말을 뒤엎는 것이 되지요.

일상적 파시즘 논의가 담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저는 많은 부분에 동의합니다.그러나 그 논의는 권력의 집행 방식과 헤게모니가 형성되는 방식은 간과하고 아래 민중들의 군집과 그에 따른 내부적 폭력성만 부각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나부터 고쳐가자는 말 역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지요.거기에 이 말 하나 더 첨가하거나 이런 질문 하다 더 넣으면 제 뜻이 반영됩니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를 스스로 속이지 말고 낱낱이 보고, 그 안에서 사회적 주체,정치적 주체로서의 나를 보고,그리고 더불어 함께 살 수 있는 나를 고민하여, 나부터 고쳐가자..라고 말이지요...단계론적이지는 않습니다.대신 맨 마지막만 계속 강조하는 방식은 곤란하다는겝니다.

밤도 늦었구...이게 뭐하는 짓인지..전 사실 이런 논쟁에서 별로 바꿀게 없다고 생각하여 별로 관여를 안했는데..그놈의 괘적때문에..^^ 이렇게 말리고 말았습니다.스스로 말린거니까 자업자득이라고 봅니다.

<따뜻한 알라딘 만들기>에 적극 노력하겠습니다...긴 댓글에 지치신 분들께..(다른 건 피곤하니까 읽지 않으신분들과) 한시 한 편 올려드리지요.다들 좋아라 하시잖아요.^^ 저 역시.

초당에서 (권필)

맑은 개울가에 터잡았으니
문열면 곧 바로 작은 소일다.

창이 비었으니 산빛이 자리에 들고
처마가 짧으니 침상에 비 뿌리지만

소원이 이룩되니 하늘땅이 널찍하고
애쓰는 일 없으니 해 달도 느직하다

다만 시와 술버릇은 오히려 늘어나
늙어갈수록 더욱 미쳐갈 뿐이어라!

비로그인 2007-07-19 19:14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께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시는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달팽이님도 ..한사님두요 )
드팀전님 여름 건강하게 보내시구요. 다시 또 좋은 글에서 뵙겠습니다. 건강하세요 ..



달팽이님 죄송합니다.

달팽이 2007-07-09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런 제 말이 한바탕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군요.
드팀전님의 반론과 수경님의 재반론에서 배울 것이 많습니다.
사람의 언설은 늘 제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지도 못하며
또 전달되어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경험과 주관이 개입되기 때문이죠..(저의 이야기입니다.ㅎㅎ)

서로 다른 우리가 삶의 진정성으로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면..
문득 우리가 만날 곳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