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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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보면서 1984년을 떠올린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빅브라더라는 시스템에 의한 인간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개인의 자유의지를 말살시키는 세상의 이야기였지. 내겐 이미 그 책을 읽은 시점이 1984년 이후였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소설적 상상력으로만 읽혔지만, 적어도 그 책을 쓴 조지 오웰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 세상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는 그 세상이 또 달리보이게 된다. 마음에서 문제를 만들면 그 문제에 의해 세상이 눈 앞에 정렬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묻지 않는다면 어떨까? 묻지 않는 자는 자유의지가 없는 시스템의 부속일 뿐이다. 결론부터 내리자면 하루키는 이 책에서 이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일상적으로 주어지는 모습과 풍경에 아무런 의미도 의문도 두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평범한 삶들은 또 별다른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평범하게 주어지는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의심하는 행위가 필요하다. 묻는 행위는 당연하게 주어지는 현실을 다시 보게 하고 그 마음에 물음을 가지고 보는 세상은 이제 긴장감과 함께 떨리는 세상으로 다가온다. 그 물음이 스스로의 마음 속의 답을 찾을 때까지 나에게서는 이제 의미있는 과정이 시작된다. 하루키가 그린 IQ84의 풍경 또한 그렇다. 의심하는 자들에게만 보여지는 두 개의 달, 그것은 진리가 내포하고 있는 실체와 허상의 세계이다. 때로는 우리들도 진리와 허상의 세계에서 산다. 굳이 플라톤을 모셔오지 않더라도 실재의 세계와 동굴의 세계가 우리들 앞에 펼쳐져 있다. 우리가 존재의 실체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면...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깊의 잠 속의 세계에서 나는 도대체 어디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말이다. 아침이 되어 나라는 의식이 돌아옴과 동시에 펼쳐지는 이 똑같은 우주와 내가 어디에 머무는지도 모르는 숙면 때의 우주의 모습 그것은 두 개의 달이 아닌가? 

  묻지 않는 자에겐 진리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선가의 말처럼 모든 우주는 마음에서 비롯된 산물이다.(일체유심조) 자신의 마음이 깊게 품은 것은 현실로 드러나 그 마음의 우주가 펼쳐지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의심을 가진 자는 이미 진리의 길을 걷는 자이다. 그것은 진리로 향하는 삶이다. 마찬가지로 권력과 돈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그것의 어떠한 형태의 삶이건 권력과 돈의 세상에서 사는 것이 된다. 개인의 마음과 의지까지도 통제해버리고 마는 전체주의적인 사회에서 아오마메와 덴고가 깨어 있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마음 속에서 어떠한 현실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의 마음이었다. 그 마음이 허상의 세계를 통제해내는 리틀피플의 세상에서도 그에 저항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는 뭔가 뚜렷하게 잡히지 않는 신비스러운 점들이 많이 나온다. 두 개의 달, (공기번데기에 의해 탄생하였울까?) 리틀 피플의 존재와 그들의 역할, 현실의 세계와 아오마메가 이름붙인 IQ84의 세계, 선구조직의 실체와 더 리더의 역할, 후카에리와 덴고의 역할에 대해 독자들로 하여금 어렴풋이 안개 낀 장면을 보는 듯하게 처리하였다. 어쩌면 지금의 삶의 모습에 대해 우리가 의심을 가져야 하듯...정확히 내릴 수 있는 해석을 피하여 될 수 있으면 많은 해석과 상상력의 여지를 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삶 속에서 이 이야기를 통해 다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자 했던 그의 의도는 아닐까? 그래서인지 이 소설 속에 많은 의미들을 담아내려 했다는 생각도 든다. 진실한 사랑의 이야기, 가족관계에 대한 이야기 부정과 모정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그리고 직업적 신념적 종교적 동반자들의 이야기, 친구와의 관계 등 우리들이 살아가며 일반적으로 가지는 관계들을 통해 우리들의 삶 그 자체를 다시 보게끔 한다. 이것 역시 해변의 카프카 이후로 더욱 소설적으로 완성되는 듯한 하루키적인 것을 닮아 있다.  

  보여지는 것만이 세상의 진실한 모습은 아니다. 세상의 진실은 말로 표현할 수도 어떤 표현을 빌려서도 그대로 드러낼 수 없다. 어떤 설명을 필요로 한다면 어떠한 설명을 하더라도 알 수 없다는 덴고아버지의 말처럼 언어적 장벽 나아가 그 언어적 장벽을 만들어내는 마음의 장벽을 제거해야만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어떤 의지가 있다면 우리 눈 앞에 드러나는 세상은 그 마음이 품은 세상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에 대해 의심해야 한다. 진실한 세상의 모습을 알기까지는 의심말고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다. 인간의 삶이라는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전체주의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나는 어떤 의심을 가져야 하는가? 덴고가 그녀에 대한 사랑의 기억과 마음으로만 살아있듯이 오직 진리에 대한 열망만으로 나는 살아 있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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