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시리즈이긴 하다. 엄청 두꺼운 책이 술술 읽히고 마지막에 가서는 아하. 하는 맛도 있고. 무엇보다 해리 홀레라는 형사가 주는 흡인력 때문이기도 하다. 이 시리즈는 11부작까지 나왔고... 지금 번역은 9권이 되어 있다. 비채에서 전권을 번역하고 있고.

 

아 근데 이제 너무 괴롭다. 해리 홀레는 이제 거의 만신창이이다. 30대의 전도유망했던 형사는 저리 가고 거의 괴물급의 불사신으로 등극하였다. 얼굴에 긴 흉터 하나 박히는 건 아무 것도 아니고 손가락 잘려서 금속으로 채우고 여기저기 쑤시고 잘리고 뚫리고. 이 책 <팬텀>에서도, 예리한 칼날로 턱 부분에 자상을 입었는데, 병원에도 못 가고 직접 실로 꿰매고 (으악) 그것도 나중에는 떨어져서 덜렁거리니까 다시 한번... 붙으라고 테이프를 붙여두고... 아. 해리 홀레는 살아있는 게 용할 정도다. 그나마 머리는 안 다치니 시리즈가 연명은 할 수 있는 거겠지. 물에 빠지고 말에서 떨어지고 여기저기 채이고 찔리고 문에 끼이고... 읽고 있으면 정말 괴로와서 미칠 지경이다.

 

그 배경은 또 어떠한가. 노르웨이 오슬로라는 동네는 마약 천지라서 대부분이 마약 먹고 뿅.. 간 상태로 지내는 듯 하다. 경찰들도 다 배신자들 뿐이고 이넘 저넘 불륜이고... 으악. 막 불편해진다. 재미가 없지는 않으나, 뭐랄까. 이제 좀 그만해줘. 해리를 놓아줘. 그냥 편하게 살게 해줘... 이런 생각만 든다. 이 책의 마지막에서는 결국 해리가... 끝?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데, 이 이후에도 책을 쓴 거 보면 죽지는 않았나 보다. 이런 생각은 나만 하는 게 아니라서 해리 홀레 그만 좀 괴롭히라고 하니까 요 네스뵈가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니.. 라는 투로 대답을 했다는데..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닙니다요. 대부분은 나이가 들면서 좀더 안정되고 좀더 느릿해지고 그러지요. 이제 중년도 훌쩍 넘긴 아저씨를 이렇게 시달리게 해서야 불쌍해서 우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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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판다는 건 단지 50그램의 종이와 잉크와 풀을 파는 게 아니에요. 새로운 인생을 파는 거란 말이에요. 책에는 사랑과 우정과 유머가 들어 있고, 밤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들어 있고, 온 하늘과 땅이 들어 있어요. 진짜 책에는 말이죠! 만약 내가 빵장수라거나 정육업자라거나 빗자루 행상꾼이라면, 사람들은 내가 도착하자마자 우르르 달려들겠죠. 내가 파는 그 물건을 기다렸을 테니까요. 하지만 내가 가지고 가는 건 그런 게 아니죠. 나는 영원한 구원을 들고 가는 겁니다. 그래요, 맥길 양. 그들의 작고 왜소한 마음에 대한 구원이라고요. 그건 사람들 눈에 보여줄 수 있는 건 아니죠. 그러나 그래서 더 가치가 있는 겁니다. 나는 나사렛, 메인에서부터 월러월러, 워싱턴에 이르기까지의 그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을 하고 있어요. 이건 새로운 일이면서, 휘트먼의 이름으로 말하건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입니다. 지금 이 시골에 필요한 건 바로 더 많은 책을 공급하는 것이고, 그게 바로 내가 하는 일입니다!" 

 

- <파르나소스 이동서점> 중 p46-47

 

 

 

책에 대한 사랑과 열망으로 가득찬 로저 미플린과 새로운 인생에의 눈을 뜨게 되어,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길을 걷게 된 헬렌 멕길의 이 이야기 <파르나소스 이동서점 (Parnassus on Wheels)>은, 나로 하여금 책 뿐 아니라 인생에 까지도 묘한 활기를 가지게 하는, 괜히 기운이 부쩍 부쩍 나게 만드는 힘이 있는 책이다.

 

아울러,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위의 글을 읽고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얼른 크리스토퍼 몰리의 또 다른 작품이자 이 둘이 다시 등장하는 <유령서점>을 사서 (또!..) 봐야겠다. 그냥 살 때 한꺼번에 살 것을, 솔직히 같은 저자의 책인 줄 몰랐다는...휘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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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1-29 0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책은 뭐죠! 저도 다음번 지름에 넣어야겠어요. 불끈!

비연 2018-01-29 08:27   좋아요 0 | URL
으흐흐. 다락방님. 제가 락방님께 유혹의 글을..ㅋㅋㅋㅋㅋㅋ
이거 술렁술렁 잘 넘어가면서 재미있어요. 호호. 전 다음에 <유령서점>을...^^;;;;

레삭매냐 2018-01-29 1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너무 재밌었어요,
비연님도 읽으셨군요 !!!

비연 2018-01-29 11:42   좋아요 0 | URL
넵넵... 읽었는데 재밌어서 술술... 레삭매냐님이랑 동시다발적으로 읽다니 므흣~^^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의 10권을 방금 다 읽었다. 이 시리즈는 별 얘기 아닌데도 참 재미있다. 해미시와 프리실라와의 티격태격도 재미있고 게으른 해미시가 인간 본성에 대한 직관을 가지고 살인사건을 좇는 과정들도 즐겁다. 그러니까 무서운 살인사건 이야기인데도 유쾌하다는 생각? 이 든다. 이제 1/3 정도 번역을 한 상태라 아직도 많은 책들이 남았다는 것은 엄청난 즐거움을 준다.

 

이번 책은, 인간 내면에 깊게 내리깔린 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원래 작고 사람 왕래가 적은 시골마을이 훨씬 섬뜩하고 무서운 법이라. 외지 사람들에 대한 경계가 심하고 어떤 외부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양태가 그동안 감춰왔던 사람들의 저변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서 대응하기가 심히 난해한 것이다. 해미시의 관할구역인 드림은, 지금의 로흐두마을 보다도 더 폐쇄적이고 조용하고 젊은 사람들은 거의 찾기 어려운, 그래서 항상 고인 물 같은 동네이다. 이 곳에 정말 매력적이고 잘 생긴 젊은 남자가 들어와 살겠다고 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M.C.비턴은 이런 류의 소재를 잘 쓰는 것 같기도 하다... 젊고 멋진 남자가 주변에 살게 되면 중년의 여자들이 갑자기 스스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제는 쇠락한 모습에 자포자기하며 살고 있는 그들에게, 그래서 서로에게 위안이 되지만 별로 의욕도 없는 그들에게, 뭔가 큰 자극이 도래한 것이고. 머리를 염색하고 에어로빅을 배우고 .. 그렇게 그 젊은 남자의 주변을 돌면서 환심이랄까 관심이랄까를 사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 남자가 정말 순진하고 좋은 사람이라면 별 문제 없겠지만, 자신의 매력을 알고 이를 악의적으로 십분 활용하겠다고 하면 참 골치아픈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고.

 

읽다 보니 예전의 내 경험이 생각났다. 이십대 후반이었던가 삼십대 초반이었던가. 집의 오디오가 자꾸 고장이 나서 아 이 기회에 하나 사야겠어 하고는 친구와 이태원 전자상가엘 갔었다. 딱히 오디오를 살 건 아니었고, 친구가 카셋트 라디오인데 CD까지 넣을 수 있는 콤포넌트를 샀다며 그 모델부터 보자고 해서 그걸 찾아다녔다. 그리고 아 발견. 하고는 어느 집에 들어갔는데, 아. 거기 주인남자가... 너무 잘 생긴 거다. 난 급작스러운 그 잘생김에 너무 놀라서, 너무 가슴이 뛰어서 말을 더듬기 시작했고... 지금 돌이켜보면 유덕화처럼 생겼던 것 같기도 하고, 신성우처럼 생겼던 것 같기도 하고. 30대 초중반 쯤 되어 보였는데 목소리도 저음의 듣기좋은 상태였고... 설명을 해주는데 가슴이 쿵쾅거려서 자제가 안 될 정도였다. 나는 그냥 그 자리에서 그걸 사기로 결정을 했고... 나오면서 "감사합니다"를 연발. 같이 갔던 친구왈, "넌 물건을 사는데 왜 그렇게 감사합니다를 계속 말하는 거니?" 라고 할 정도였다는.. (아 화끈거려)

 

그렇게 잘생김을 구경(?)하고 온 건 좋았는데... 생각해보니 그 때 내 주위에 그렇게 생긴 남자가 정말 없었던 것 같다. 이건 변명일까. 어쨌든 내가 태어나서 그렇게 잘생겼다고 생각한 남자를 본 게 거의 처음이었다고 생각될 정도였으니. 근데 문제는 그 콤포넌트가 계속 고장이 났다는 거다. 이거 뭐지?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래서 잘생긴 남자도 볼 겸, 그걸 들고 다시 이태원 전자상가로 갔다. 그 잘생긴 남자는 여전히 앉아 있었고... 내가 고장이 자꾸 난다고 하자, 눈살을 좀 찌푸리더니 두고 가라고, A/S 맡기겠다고 하는 거다. 나는 뒷걸음질로 나오면서, 아 정말 잘 생겼어... 하트뿅뿅... 그러고 왔는데... 연락이 없다.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없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전화를 했으나, 답이 애매하다. 그래서 참다가 다시 이태원으로 갔다. 가게에 들어갔는데, 사람이 참 묘한게,... 화가 나니까 그 잘생김이 그닥 안 와닿고 짜증의 대상으로 느껴지는 거다. 갑자기, 그렇게 잘 생기지도 않았구만.. 뭐 이런 느낌? 그래서 내 콤포넌트 맡겼냐. 그랬더니... 막 머뭇거리면서 찾아보다가 어느 뒤쪽 구석에서 먼지가 뽀얗게 쌓인 '그것'을 들고 나오면서 아직 안 맡겼는데 이제 맡기겠다.. 라고 그러는 거다.

 

이거 뭥미?

 

잘 생김이고 뭐고, 화가 불같이 나서... 여기 가져온 게 언제인데 이제까지 쳐박아뒀다가 이게 뭐하는 거냐고 막 따졌더니 그 남자 왈, "그럼 물르실래요?".... 얼굴이 요괴로 보였다. 화가 머리 끝에서 터져 나올 것처럼 나는 것을 느끼며, 소리를 버럭. "물러주세욧!".. 그랬더니 그 남자. 아주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러세요" 그러면서 그 돈을 돌려주었다. 현금으로 착착 세더니.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고. 다시는 이태원에서 전자제품을 사지 않았다는 슬픈 뒷얘기. 잘 생겨도 일처리 그렇게 하면 유덕화가 요괴로 보이기도 한다는 경험과 함께.

 

... 이 책을 보다보니 그 에피소드가 생각나서 말이다. 내가 그렇게 허당이라는 걸 처음 알았기도 하고 (잘 생김에 그렇게 정신머리 다 뺴놓는 아이였던가...) 잘생김과 일처리는 절대 비례관계가 아님을 알았기도 하고. 본인이 잘 생긴 걸 아니까 그렇게 거만하게 나온 거겠지... 아뭏든 그러니... 평생을 시골에 있으면서 남편 하나 바라보고 별 낙도 없이 살던 여자들에게, 게다가 이제 나이들어 머리에 힘도 없고 몸도 살이 찌고 얼굴에 윤기라곤 없어지고 있는 여자들에게 그런 남자의 등장은 '쇼크'에 버금가지 않았을까. 라는 묘한 이해감이 들었다 이거다.

 

뭐 암튼, 이 책 재미있습니다..ㅎㅎ 한번들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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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vis 2018-01-14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그래도 잘생기면 좋아요ㅠ어쩌죠

비연 2018-01-14 18:00   좋아요 1 | URL
흑. 그건 그렇습...니...다 ㅠㅠ
 

 

 

 

 

 

 

 

 

 

 

 

 

 

 

 

 

저런 질문은 세상에는 여러 여자들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여자만 있다는 생각에서, 그 여자는 종 전체를 위한 엘리베이터처럼 반드시 결혼하고, 번식하고, 남자를 받아들이고 아기를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듯하다. (p16)  

 

내 인생의 목표 중 하나는 진실로 랍비처럼 문답할 줄 아는 자가 되는 것, 닫힌 질문에 열린 질문으로 답할 줄 아는 것, 내 내면에 대한 권한을 스스로 가짐으로써 다가오는 침입자에 맞서서 훌륭한 문지기가 되는 것, 최소한 "왜 그런 걸 묻죠"라고 재깍 되물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p19)

 

 

감기 걸린 머리로 읽다가 잠시 덮어 두었더니 연결이 되지 않는 느낌이라 다시 처음부터 읽어본다. 다시한번 이 책을, 올해 첫 책으로 감히 고른 나에게 으쓱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리베카 솔닛의 글 몇 장만으로도 왠지 정화되는 이 느낌. 페미니즘 책이지만, 어쩌면 타인에 의해 '하나'의 사람을 '강요'받는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성, 성소수자, 어쩌면 남성, 등등등. 열심히 줄 쳐가며 읽고 있다. 최근에 리베카 솔닛을 발견한 것은, 참 소중한 '득템'임을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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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1-07 15: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기 저기서 참...!
언제나 읽으려나.ㅠ
빨리 나으시길...!^^

비연 2018-01-07 17:5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이 책은 안 읽고는 못 배기는 분위기요 ㅎㅎㅎㅎ
스텔라님의 독후감 읽어보고 싶어요!
.. 감기는 여전히 진행중. 빨리 낫기를 저도.. 아멘...ㅜ

2018-01-07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07 18: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섬 2018-01-07 17: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궁금하네요.
잘 고르셨다니 찜해둬야겠어요.
비연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비연 2018-01-07 18:00   좋아요 1 | URL
꿈섬님. 지금 읽고 있는데... 정말 좋네요. 찜요 찜!^^
꿈섬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월 1일부터 감기에 척, 걸려버려서 병원 가서 약타오고 약먹으면 졸고 퇴근해도 졸고... 그러더니만 급기야 금요일부터는 상태가 매우 악화되어 집에서 계속 잠만... 어제 잠시 나갔다가 더 악화되어 집에서 쓰러지고... 그리고 또 잠잠... 어디 아프면 잠을 많이 자는 사람인 비연인지라 암튼 삼일간 30시간 넘게 잔 느낌. 오늘 일어나는데 허리에서 아야아야 소리가 날 정도. 아구구.

 

코감기와 두통이나 열감은 좀 나아진 것 같은데 이제 배 쪽으로 갔는 지 먹은 게 소화가 안되는 찌뿌뚱한 상태가 지속되고... 이넘의 감기. 사람들이 한번 걸리면 좀체로 안 나간다고 하더니만, 아주 내 몸을 한바퀴 돌고 초토화시킨 후 나갈 모양인 것 같다. 아프면 그냥 서럽고 외롭고 그런 지라... 흑흑. 너무 자서 잠도 안 오던 어제 저녁에는 책이나 보자 하고 읽던 책 들고 한 권 뚝딱 한 후 다시 잠... 일요일 아침 10시 기상. 아. 이게 아침인가 낮인가. 

 

한 권 다 읽어치운 책은 이거. 존 하트의 <구원의 길>.

 

 

 

 

 

 

 

 

 

 

 

 

 

 

 

이야기는 세개의 축으로 진행된다. 하나의 축. 13년 전의 살인사건. 피해자인 줄리아라는 여자. 그리고 살인자로 지목되어 13년을 교도소에서 보내고 이제 막 출소하게 된 前경찰 애드리안. 출소를 하자마자 그에게 들이닥친 사람은, 바로 죽은 줄리아의 아들 기드온. 열네살짜리 아이. 총을 들고 다가서는 아이를, 바의 남자가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총을 먼저 쏘았고, 아이는 배에 치명상을 입은 채 병원으로 실려간다. 또 하나의 축. 엘리자베스 블랙이라는 경찰. 명문가의 딸 채닝이 납치되어 강간되는 그 장소에서 범인인 두 남자에게 열 여덟발의 총격을 가해 사살한 사람. 불행히도 그 두 남자는 흑인이었고 그래서 흑백 논쟁으로까지 번지게 된 사건의 중심에 있다. 그냥 죽인 게 아니라 고문을 하며 죽였다는 이유로 지금 정직상태에서 주립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는 상황. 나머지 하나의 축. 엘리자베스와 애드리안을 둘러싼 사람들. 교도소장, 교도관들, 엘리자베스의 파트너 찰리 베켓과 서장 다이어.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블랙목사와 어머니.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을 법한 비밀을 속에 감춘 채 하나의 사건은 또 하나의 사건을 낳고 사소한 몇 가지 손짓으로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지고 상처받게 된다.

 

내용은 참 잔잔하게 흘러가는데, 그 안의 갈등은 상당한 소설이다. 결국 '상처'에 대한 이야기. 사람이 사람에게 가한 상처. 무엇보단 신뢰를 저버린 상처. 이런 것은 누구도 치유라는 걸 할 수 없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이야기. 스스로 이겨낼 수 밖에 없지만, 결정적인 상처는 평생을 지배하게 되고 사람들은 그것에 묶여 옴짝달싹 못한 채 자꾸만 실수를 한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렸다. 그 시절 동안 그녀는 애드리안만 쳐다보며 지냈다. 그가 책상에서 일어나는 모습, 범죄 현장에서 일하거나 목격자나 관료들을 상대하는 방식을 지켜 보았다. 애드리안은 자신감이 넘쳤고 항상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불빛만 쳐다보며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이 무척 낯설게 보였다. "우리 집에서 잠깐 지내실래요?"

애드리안은 눈을 감았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이 거절의 의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그녀는 아직 예전에 알았던 어린애일 뿐이었다. "와줘서 반가웠어."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만 가. 애드리안은 그런 의미로 한 말이었다.

고통을 느낄 수 있게 가만히 내버려 둬. (p119)

 

 

고통을 느낄 수 있게... 누구의 위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순간. 피폐해진 자신의 인생을 현실감있게 느끼기 위해 스스로에게 시간이 필요한 남자. 아마도 억울한 누명이었을 것 같은데... 13년동안 교도소에서 수없는 고초를 당한 후 나와 보니 아내는 사라졌고 오래된 집은 불타 버렸고, 아무도 주변에 안 남은 상황. 그리고 여전히 위협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일촉즉발의 상황. 그 속에서 남자는 뭘 해야 할까. 그저 느낄 뿐. 고통을. 나만의 고통을... 순간 그 고통이 전달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저번에 우리가 사막으로 갈 수도 있을 거라고 했잖아. 그게 좀 이상해서. 왜냐하면 그 직전에 나도 같은 생각을 했었거든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난 이제껏 사막에 대해 생각했던 적도 없고, 그곳에서 살고 싶었던 적도 없었어. 심지어 한 번 가본 적도 업었는데. 난 평생 여기서 살았고, 사막애 데헤선 아무것도 몰라. 그런데도 밤에 자려고 누우면 오븐에서 새어나오는 것 같은 바람이 떠올랐어. 붉은 돌과 모래 갈색 언덕의 장관과 함께 말이야." 엘리자베스가 소녀를 쳐다보았다. "왜 그런 것 같니?"

"그거야 단순하잖아요."

"나한텐 안 그래."

"곰팡이가 없으니까." 채닝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태양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막에선 지하실 같은 냄새가 나지 않잖아요." (p287)

 

 

지하실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한 소녀의 인생을 망치고 이제 한 경찰관의 인생까지도 망치게 될 지 모르는. 책을 읽다 보면 그 발단은 좀더 깊은 의미가 있었고, 이게 다 뭔가 싶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 지하실에서 일어난 일들은 이 둘의 정신을 영원히 지배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무의식 중에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장소를 갈구하게 되는 지도. 그것이 사막. 곰팡이 냄새가 나지 않고 축축하지 않은 사막. 결국 이들은 그곳에 가게 될 것이다.

 

 

"같이 갈래?"

"네?"

"네가 말했잖아. 여길 떠나야 한다고."

"어디로 갈 건데요?"

"그건 비밀." 애드리안이 말했다 리즈는 어두워진 도로를 쳐다보았다. 비밀은 위험하다.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애드리안은 지금 그녀가 상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녀의 인생 역시 교차로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탁이야." 그가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애드리안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혼자 있는 데 지쳤어." (p389)

 

 

가끔 생각한다. 사람의 마음의 상처라는 걸 치유는 못하지만, 그 옆에 위로가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버틸 수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누구나 상처를 안고 살고 그걸 말로 내뱉거나 내뱉지 못하거나 머리와 가슴에서 떠나보내지 못한 채 주저주저 하게 되기도 하는데, 그 때 혼자라는 느낌은... 그게 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싶다. 이 책에 나오는 많은 상처 받은 사람들은, 그렇게 사람을 찾는다. 버팀목이 되는 존재. 혼자 남기 싫어하는 마음. 이해를 구하는 심정.

 

존 하트의 작품은 늘 그렇듯이, 서스펜스 가득하기만 소설과는 약간 다른 분위기를 안겨 준다. 뭔가 정화되는 느낌. 이랄까. 결말이 완벽하게 마음에 든 건 아니었지만, 어쩌면 이게 가장 나은 결말이 아닌가 하는 마음도 들었고. 감기 걸려 골골 거리는 서러운 마음에 읽기에 딱 좋은 책이었다. 물론 그냥 건강한 상태에서 읽어도 좋은 책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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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01-07 1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픈 와중에도 비연님의 불굴의 책읽기 대단합니다~ 얼른 나으시기 바래요~~*^^*

비연 2018-01-07 13:32   좋아요 0 | URL
그냥 뒹굴거리려니 시간도 아깝고...ㅎㅎ 넘 자서 잠도 안 오고...
오늘 좀 낫긴 한데.. 여전히 붕 뜬 느낌이네요. 언넝 나아야죠. 감사~^^

2018-01-07 14: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07 14: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섬 2018-01-07 18: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감기, 얼른 나으셔야할텐데요.
저도 독감으로 고생했었는데 무섭더라구요.
얼른 건강회복하시길요.^^

비연 2018-01-07 20:18   좋아요 0 | URL
꿈섬님.. 감사요... 독감! 그건 더 지독했을텐데 우째 견디셨어요 ㅜㅜ
얼렁 기운차려야죠. 으쌰.

서니데이 2018-01-07 2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감기 빨리 나으세요. ^^

비연 2018-01-07 20:18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이넘의 감기가 절 안 떠나네요. 잘 쉬고 있으니 곧 멀리 보낼 수 있으리라.. (믿음)

카스피 2018-01-08 2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독감에 걸리셨네요.몸조리 잘하시고 얼른 쾌차하셔요^^

비연 2018-01-09 08:16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흑흑. 독감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정말 힘들었네요. 이제 좀 나아지는 듯요...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