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디너 치고 책방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좋아하는 책을 사방에 두고 유유히 책을 읽으며 책을 사러온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추천도 하고... 아 생각만 해도 뿌듯한 정경이 아닌가.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지. 좋아한다는 것과 그걸로 먹고 산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니까. 이런 로망을 단박에 깨주는 책이 있다. <오늘, 책방을 닫았습니다>

 

 

 

 

 

 

 

 

 

 

 

 

 

 

 

 

"여긴 뭐가 생기나?"

"서점요. 책 팔 거예요."

천장을 칠하느라 사다리에 올라타 있던나는 고개를 뒤로 돌리며 아주머니에게 답했다.

"아, 만화방?" - p33

 

서점이라고 하면 만화방을 연상하는 동네에 작은 책방을 연다. 희망을 가지고 열었지만, 처음 시작부터 현실이 닥쳐온다.

 

며칠 뒤 총판의 B2B 웹사이트에 접속해 희망 도서를 장바구니에 하나씩 담아보았다. 당장 내 것이 되는 것도 아닌데 책을 고르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주문 금액은 순식간에 몇 백만원을 훌쩍 넘겼다. 번뜩 정신이 들면서 책이 더 이상 '책'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제때 팔지 못하면 고스란히 빚으로 남는 마음의 짐. 우선순위를 따져가며 삭제, 삭제, 삭제 버튼을 계속해서 클릭했다. - p37

 

책을 파는 곳이니, 책방이고 서점이고. 따라서 책은 상품이다. 더 이상 내가 즐겨 읽고 사랑하기만 해도 되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 빈 벽을 활용하여 전시공간도 마련해주고 수익을 위해 여러 이벤트도 준비한다. 아무도 없는 책방에 출근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외로움을 느끼며 두려워한다. 혼자 운영하니 화장실을 못 가고 버티는 일이 빈번해져서 나중에는 에라 이건 그냥 해야겠다고 손님들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능청을 부려보기도 한다. 저녁 무렵 나타나는 길고양이들이 반갑고, 때로 만나는 이웃들이 든든하며, 책방을 운영하면서 알게 되는 사람들과의 유대관계도 좋기는 하다.

 

회사를 나왔다고 해서 자유분방한 삶이 내 품에 와락 안기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느 직장인들이 겪는 고충과 불만은 책방 주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일단멈춤의 안녕을 위해 저녁을 담보로 시간을 빌려 쓰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저녁에 진행되는 워크숍이 책방의 주된 수입원으로 자리 잡으면서 일주일에 두 번뿐이던 수업이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계속됐다. 자연히 퇴근 시간도 늦춰졌다. 밤 8시면 문을 닫는 평소와 달리 워크숍이 있는 날은 두세 시간 더 자리를 지켜야 했다. 사람들이 떠난 염리동 골목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불을 밝힌 책방에 덩그라니 앉아 있노라면 하루를 무사히 보냈다는 보람 대신 쓸쓸함이 앞섰다. 밝은 대낮에는 느끼지 못한 일상의 무게에 덜컥 겁이 났다. - p121

 

회사를 벗어나면 자유. 24시간을 내 맘대로 쓸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환상에 불과하다. 물론 돈도 많고 정기적인 수입원이 있어서 놀아도 되는 입장이면 그럴 수 있겠지만, 내가 뭔가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자유는 없다. 책방도 자영업이고, 자영업은 운영하는 사람이 뼈빠지게 일을 해야 그 만큼이 수입으로 돌아온다. 그나마 수입이 있으면 다행. 책방이 생활의 일부가 되고 나면 또 다른 곳을 그리워하게 되고, 그 곳은 어쩌면 더 편하고 더 멋지고 더 자유로울 것이라 상상하게 된다. 내가 속한 곳이 아니면 뭐든 좋아.. 라는 심정쯤일까.

 

그리고, 책방을 일년 육개월 여만에 닫으면서...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남겨두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핑계를 대며 닫으면서도 저자는 절망하지는 않는다.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 더 많은 책이 읽고 싶어졌고,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의욕이 생겼으니 끝이 아니라 어떤 시작과 닿아 있노라 (p169) 이야기한다. 그렇게 오답 앞에서 서성대고 있노라 이야기한다.

 

다른 책들처럼, 책방을 운영하는 것이 엄청나게 재미있고 즐겁기만 한 일이 아니라고 솔직히 털어놓아 주는 이 책이 반가왔다. 책을 정말 좋아한다면, 책방을 하지 말라는 조언도 들었던 바, 이 책이 현실적인 고민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마음에 많이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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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8-20 2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방을 운영하고 싶어도 못할 것 같아요. 책 소유욕이 강해서 책 팔고 나면 엄청 후회하지 싶어요.. ㅎㅎㅎ

비연 2018-08-20 23:36   좋아요 0 | URL
앗, 그런 점도 있었네요 ㅎㅎㅎ

카스피 2018-08-21 17:10   좋아요 0 | URL
ㅎㅎ 헌책방이면 몰라도 일반 책방이면 팔린책은 주문하면 책 바로 들어와요^^

비연 2018-08-21 17:1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소장의 욕심이 커서 다 팔지는 못할 듯 ㅜㅜ

카스피 2018-08-21 17: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릴적 꿈이 책방 주인이었는데 요즘보면 책방 운용하다간 망할것 같아요ㅜ.ㅜ

비연 2018-08-21 17:16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그냥 사서 읽는 방향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이 책 보면서 그런 생각이...

오후즈음 2018-08-21 1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점에서 맥주도 마시는 그런 다른 스타일의 책방이 생기더라구요. 그런 형태라도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비연 2018-08-21 19:57   좋아요 0 | URL
맞아요 맞아요~ 다양한 형태로 많이 생기고 ... 안 망했으면 좋겠어요 ㅠㅠ
 

 

 

 

 

 

 

 

 

 

 

 

 

 

 

 

사회파 미스테리의 대가다.. 라고 생각해온 미야베 미유키가 최근에 열심을 다하는 분야는, 에도 시대 소설. 북스피어에서 계속 내고 있는데, 나는 이 시리즈를 정말 사랑한다. 책을 사두고도 아까와서 참다가 참다가 읽을 정도. 이 책, <삼귀>도 사둔 지는 좀 되었는데 지난 주말부터 조금씩 쪼개서 읽었는데... 아. 오늘 다 읽어버린 것이다..ㅜ  

 

미미여사의 에도시대 소설 시리즈는 (마포 김사장의 편집 후기에 나왔듯이) 세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오하쓰와 현명한 우쿄노스케가 함께 사건을 해결해가는 시리즈, 또 하나는 느긋한 도신 헤이시로와 총명한 어린 아이 유미노스케가 함께 사건을 해결해가는 시리즈, 그리고 이 <삼귀>가 속한 미시마야 괴담이야기 시리즈가 있다. 미시마야 괴담이야기 시리즈는... 고향에서 불의의 사고로 마음의 상처를 받은 오치카라는 소녀가 우연히 의탁하게 된 숙부집 미시마야(주머니 만드는 집)에서 우연히 '흑백의 방'이라는 곳을 빌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세상에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들, 마음에 한으로 남겨진 이야기들을 손님들이 풀어내는 동안,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던 오치카는 오히려 세상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간다.. 하는 과정이 즐겁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한 내용이라 에도 시리즈 중에서 내가 특히 애정하는 시리즈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그것은 때로 인생의 한 귀퉁이에 스며들어 떨어지지 않는 무언가를 보여주는 일이나 마찬가지이니 아무래도 많은 사람의 귀에 들어가는 건 곤란하다. 다만 한 번쯤 입 밖으로 내어 토해 버리고 싶을 뿐이다. 무덤까지 그대로 가져가기는 괴로우니까. 그 무언가가 비석 밑에 다 들어가지 않을까 봐 불안하니까.

그래서 미시마야의 특이한 괴담 자리에는 사람이 모인다.

어려운 규칙은 없다. 듣고 잊어버리고, 말하고 잊어버리고, 그것뿐이다.

오늘도 또 한 사람, 흑백의 방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온다.

- p10 ~ p11

 

 

이번 책들에 속한 네 가지 이야기들은 더욱 마음을 파고드는 내용들이었다. 그넘의 괴담 이야기야 그게 그거 아니냐 할 수도있겠지만, 미미여사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는 정말 대단한 것이, 어디서나 들었음직한 괴담 이야기를 마치 새로운 내용인양, 무엇보다 소설 속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감정 이입되어 함께 웃고 울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그래서 좋다. (마음이) 많이 건강해진 오치카가 앞으로 그 역할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게 될 것 같기도 해서 이 시리즈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이 더 깊어지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매년 몇 권씩 읽어대는 이 에도 시리즈 중에서도 이 책이 마음에 많이 남는다.

 

귀신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결국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인지라...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들이 애달프기도 하고, 외따로 떨어진 곳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며 하지 말아야 할 일들도 해야 했던, 그래서 그 마음들이 원혼이 되기도 하고.. 읽을수록 왠지 모르게 마음 한켠 따뜻해지면서 사는 게 무언지, 산다는 건 이런 게 아닌가 라는 마음까지 들게 하는 책이다.

 

곧 <삼귀>의 속편을 번역한다고 하니 (마포 김사장님 감사!) 기대하면서 기다려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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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8-07-18 0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안녕하세요. 이책 사놓고 읽지 못하고 있어요. 좀 순서가 밀렸어요. 제가 미미여사 현대물은 좋아하는데, 고대물은 그보단 조금 덜, 이어서요. 그래도 읽고나면 역시 미미여사야, 라고 하겠죠^^

비연 2018-07-18 14:03   좋아요 0 | URL
앗 마태우스님! 안녕하시죠? ^^ 읽고나면 역시 미미여사야, 하게 되는 거 맞아요 ㅎㅎ 요즘 미미여사는 현대물은 안 쓰는 것 같아요. 에도시대 소설들을 시리즈로 계속 내니.

카스피 2018-07-18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귀신 이야기를 좋아사신다면 포송령이 지은 요재지이를 강추해 드립니다.민음사판인데 절판된것 같기도 한데 귀신 소설의 정점이라고 할수 있어요^^

비연 2018-07-18 18:57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요재지이가 5권인가요? 님의 추천 받고 바로, 바로 보관함에 퐁당퐁당 했습니다.. 감사.. 하지만 읽지 않고 쌓아둔 책들을 바라보며 한숨 푸욱. 추천해주시는 책이 눈에 쏙 들어와 안 살 수 없으니.. 그냥 사서 보렵니다.. 몰라. 사서 볼래. 책 사는 걸로 스트레스 안 받을래.. 이젠 뭐 이런 모드 ㅋㅋㅋ;;;;;

카스피 2018-07-19 11:28   좋아요 1 | URL
아마 모두 6권일 겁니다.대략 500편이 넘는 단편들을 모은 책인데 이 단편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장국영,왕조현 주연의 천녀유혼일 겁니다.이후 다른 단편인 화피(황제의 딸의 여주인공인 조미?가 주연)란 영화도 나왔는데 천녀유혼보단 파괴력이 적었던것 같아요^^
 

 

 

 

 

 

 

 

 

 

 

 

 

 

 

 

현대문학에서 서평이 가능하냐는 메일이 왔을 때 나는 무슨 정신으로 확인도 안 해보고 이걸 하겠다며 메일을 바로 보냈을까.. 받아보니 거의 700페이지. 으악. 이 주 안에 서평 써서 올려야 한다. 공짜로 책 받았으니 그것은 당연한 일. 지금 열심히 읽고 있다. 사실 내용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받은 거라 아 이거 어쩌지 싶긴 했는데 말이다.. 막상 읽어보니 재미지긴 하다..(으하하)

 

현재 100페이지 좀 넘게 읽었는데.. 그러니까 제정 러시아 시대의 백작 칭호를 가진 유서깊은 집안의 남자가 볼셰비키 혁명 이후 호텔에 구금되어 살게 되는, 특이한 이야기이다. 호텔 밖을 한 발짝이라도 나가면 총살을 면치 못할 것이라 하니 작은 방에 내몰려서 책 읽다가 졸다가 나와서 밥 먹고 차 마시고... 그러나 그 안에도 인생이 있고 이벤트가 있고 사람이 있고. 그렇게 구금된 생활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그린 이야기이다.  의외로 재미있어서 술술 넘어가니 다행한 일이다. 얼른 읽고 리뷰 올릴게요, 현대문학님...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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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50 2018-07-04 1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밌을 거 같아 구입했어요!^^

비연 2018-07-04 13:58   좋아요 0 | URL
오홍~ 로제트50님. 우리 함께 읽어요.. ^^ 동지가 생긴 듯 하여 왠지 뿌듯.. ㅎㅎ

로제트50 2018-07-04 14: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럽시다^^*

비연 2018-07-04 14:12   좋아요 0 | URL
*^______________________^*

2018-07-04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04 15: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7-04 15: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700 페이지에 기겁해 거절했는데
제가 그때 잠시 미쳤나 봅니다.ㅠ

비연 2018-07-04 15:42   좋아요 1 | URL
아. 스텔라님. 잘 하신 걸 거에요. 재미있기는 한데 700페이지가 좀 압박이긴 해요.
자기 전까지 열심히 읽다가 자는데도 진도가 쭉쭉 안 나가거든요 ㅎㅎㅎ;;;;;
 

 

 

 

 

 

 

 

 

 

 

 

 

 

 

저자의 약력부터가 독특하다. 국립타이완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직업 독자' 였고 독서와 독서 관련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고 하니. 그의 부인도 소설가이고,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의 제부이고... 등등등, 집안 자체도 글과 관련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매우 흥미롭기도 하고 부럽기도 한 사람이다. 네 명의 작가가 한 집에 살아서 자기 책상이 없는 탓에 매일 아침 단골 카페에 출근해서 오후 다섯 시까지 책읽기와 글쓰기로 하루를 보낸다.. 이런 인생도 있구나!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인류의 '낭비', 마음을 아프게 할 정도의 낭비에 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 인간이 평생 열심히 배우고 익힌 성과는 삶이 끝나는 순간. 무의 상태로 돌아간다. 칼비노처럼 똑똑하고 존 스튜어트 밀처럼 박식하며 칸트처럼 치밀한 사상을 지녔다 해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인류가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도 이처럼 터무니없는 낭비에 대한 초조함 때무에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어떻게 이처럼 간단하게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착실하고 힘들게 얻은 사유의 성과들은 어떤 초월적 메커니즘과 특별한 잔류의 방식을 갖기 마련이다. 그리고 최소한의 희미한 기억과 흔적이 남는다. 하지만 우리가 갓 태어난 아기들의 반짝이는 눈에서 보는 것들, 중국 소설가 아청의 표현대로 하자면 '아주 깨끗하여 아무것도 없는' 것들은 전부 다시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무력하게 이것이 조물주가 악의적으로 만들어놓은 계책이리라고 믿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항상 기억의 강 같은 구식 기억청소 장치를 통해서만 익숙한 인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p73-p74)

 

아. 내가 늘 허무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잘 짚어낸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의 머릿 속에 든 그 하나하나의 우주들이 죽음과 동시에 다 사라진다니. 그것들은 도대체 다 어디로 가는 것인가... 저자는 그래서 문자와 책이 중요하다고 얘기한다. 먼저 죽어도 기록으로 남겨두면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니다. 후세에 길이길이 남겨져 제로 베이스가 아닌 '거인의 어깨 위에 앉아'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책에 대해서, 기록에 대해서, 문자에 대해서, 그 효용성을 나름 논리적으로 잘 정리한 듯.

 

 

... 다름 아니라 아예 이런 비교를 포기하고 독서 자체를 일종의 습관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아울러 가능한 한 독서를 보르헤스가 말한 '향수'의 경지에 놓고 신경질적으로 수확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다. 나태하게 그다지 믿을 만하지 못한 계시가 머리에 떠오르기를 기다리지도 말고, 수시로 투입과 산출의 손익 균형을 세세하게 계산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독서가 몰라도 행할 수 있는 일종의 의식이 되게 하는 것이다. 심지어 독서를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언제든 책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펼쳐서 읽고 잠들기 전에도 펼쳐 갈수록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수면제로 삼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매일 책을 읽지 않으면 샤워를 하지 않거나 양치질을 하지 않은 것 같은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p120)

 

이건 뭐. 알라딘 서재 하시는 분들은 이렇게 하지 말라고 해도 이미 하고 있을 것 같다. 흐흐.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뭔가 잃어버린 것 같고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부분을 지나치며 사는 기분이 드는... 뭐 그런 것. 물론 요즘의 나는 이 수면제로서의 기능이 너무 극대화되어 책을 얼굴에 자주 떨어뜨리는 바람에 큰 책은 들지 않는다는 신념 아닌 신념을 구가하고 있지만 말이다. 허허.

 

 

나는 독자들이 눈을 감고 책을 고르는 게 모두 옳다거나 책은 다 좋은 것이고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렇게 좋은 일은 절대로 없다. 반대로 책의 세계는 만신창이가 된 실존 세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일고의 가치도 없는 쓰레기 같은 책이 너무나도 많다. 그렇다고 그런 책들이 사라져야 한다거나 전부 스린에 있는 폐지 공장으로 보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쓰레기 같은 책들도 나름대로 생존하여 유전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언젠가는 가려지지 않는 질병의 증상으로서 진실을 드러내면서 우리가 이 세계를 얼마나 형편없는 모습으로 만들어놓았는지를 증명하는 증거물이 될 수 있다. 우리 실존세계에 쓰레기 같은 인간이 많듯이 이런 책들도 양도할 수 없는 생존의 권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원래의 모습으로 환원시켜 흙먼지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p136)

 

맞는 말이다. 간혹, 서점에 가서 보이는, 손으로 싹 쓸어버리고 싶은 책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책의 세계도 인간세계와 마찬가지라서, 다 좋을 수는 없는 것이고 내 눈에 좋아 보이지 않는 것도 그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렇게 기다리고 참으면 언젠가는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것이라고 믿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책에 미쳐 사는 사람의 글을 읽는 것은 늘.. 즐거움이고 부러움이다. 그렇게 줄곧 책을 사랑하고 글을 사랑하며 사는 인생이 가능하다는 것에도 놀랍고. 그렇게 만들어진 철학을 함께 하는 것은, 독자로서의 기쁨이기도 하다. 끝까지 재미나게 읽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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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3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4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 책, 묘한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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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5-01 17: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의 길을 따라 가면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요. 그래서 책을 읽는 건 좋은 일이에요. ^^

비연 2018-05-01 20:41   좋아요 0 | URL
완전 동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