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시 맥베스 시리즈의 10권을 방금 다 읽었다. 이 시리즈는 별 얘기 아닌데도 참 재미있다. 해미시와 프리실라와의 티격태격도 재미있고 게으른 해미시가 인간 본성에 대한 직관을 가지고 살인사건을 좇는 과정들도 즐겁다. 그러니까 무서운 살인사건 이야기인데도 유쾌하다는 생각? 이 든다. 이제 1/3 정도 번역을 한 상태라 아직도 많은 책들이 남았다는 것은 엄청난 즐거움을 준다.
이번 책은, 인간 내면에 깊게 내리깔린 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원래 작고 사람 왕래가 적은 시골마을이 훨씬 섬뜩하고 무서운 법이라. 외지 사람들에 대한 경계가 심하고 어떤 외부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양태가 그동안 감춰왔던 사람들의 저변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서 대응하기가 심히 난해한 것이다. 해미시의 관할구역인 드림은, 지금의 로흐두마을 보다도 더 폐쇄적이고 조용하고 젊은 사람들은 거의 찾기 어려운, 그래서 항상 고인 물 같은 동네이다. 이 곳에 정말 매력적이고 잘 생긴 젊은 남자가 들어와 살겠다고 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M.C.비턴은 이런 류의 소재를 잘 쓰는 것 같기도 하다... 젊고 멋진 남자가 주변에 살게 되면 중년의 여자들이 갑자기 스스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제는 쇠락한 모습에 자포자기하며 살고 있는 그들에게, 그래서 서로에게 위안이 되지만 별로 의욕도 없는 그들에게, 뭔가 큰 자극이 도래한 것이고. 머리를 염색하고 에어로빅을 배우고 .. 그렇게 그 젊은 남자의 주변을 돌면서 환심이랄까 관심이랄까를 사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 남자가 정말 순진하고 좋은 사람이라면 별 문제 없겠지만, 자신의 매력을 알고 이를 악의적으로 십분 활용하겠다고 하면 참 골치아픈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고.
읽다 보니 예전의 내 경험이 생각났다. 이십대 후반이었던가 삼십대 초반이었던가. 집의 오디오가 자꾸 고장이 나서 아 이 기회에 하나 사야겠어 하고는 친구와 이태원 전자상가엘 갔었다. 딱히 오디오를 살 건 아니었고, 친구가 카셋트 라디오인데 CD까지 넣을 수 있는 콤포넌트를 샀다며 그 모델부터 보자고 해서 그걸 찾아다녔다. 그리고 아 발견. 하고는 어느 집에 들어갔는데, 아. 거기 주인남자가... 너무 잘 생긴 거다. 난 급작스러운 그 잘생김에 너무 놀라서, 너무 가슴이 뛰어서 말을 더듬기 시작했고... 지금 돌이켜보면 유덕화처럼 생겼던 것 같기도 하고, 신성우처럼 생겼던 것 같기도 하고. 30대 초중반 쯤 되어 보였는데 목소리도 저음의 듣기좋은 상태였고... 설명을 해주는데 가슴이 쿵쾅거려서 자제가 안 될 정도였다. 나는 그냥 그 자리에서 그걸 사기로 결정을 했고... 나오면서 "감사합니다"를 연발. 같이 갔던 친구왈, "넌 물건을 사는데 왜 그렇게 감사합니다를 계속 말하는 거니?" 라고 할 정도였다는.. (아 화끈거려)
그렇게 잘생김을 구경(?)하고 온 건 좋았는데... 생각해보니 그 때 내 주위에 그렇게 생긴 남자가 정말 없었던 것 같다. 이건 변명일까. 어쨌든 내가 태어나서 그렇게 잘생겼다고 생각한 남자를 본 게 거의 처음이었다고 생각될 정도였으니. 근데 문제는 그 콤포넌트가 계속 고장이 났다는 거다. 이거 뭐지?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래서 잘생긴 남자도 볼 겸, 그걸 들고 다시 이태원 전자상가로 갔다. 그 잘생긴 남자는 여전히 앉아 있었고... 내가 고장이 자꾸 난다고 하자, 눈살을 좀 찌푸리더니 두고 가라고, A/S 맡기겠다고 하는 거다. 나는 뒷걸음질로 나오면서, 아 정말 잘 생겼어... 하트뿅뿅... 그러고 왔는데... 연락이 없다.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없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전화를 했으나, 답이 애매하다. 그래서 참다가 다시 이태원으로 갔다. 가게에 들어갔는데, 사람이 참 묘한게,... 화가 나니까 그 잘생김이 그닥 안 와닿고 짜증의 대상으로 느껴지는 거다. 갑자기, 그렇게 잘 생기지도 않았구만.. 뭐 이런 느낌? 그래서 내 콤포넌트 맡겼냐. 그랬더니... 막 머뭇거리면서 찾아보다가 어느 뒤쪽 구석에서 먼지가 뽀얗게 쌓인 '그것'을 들고 나오면서 아직 안 맡겼는데 이제 맡기겠다.. 라고 그러는 거다.
이거 뭥미?
잘 생김이고 뭐고, 화가 불같이 나서... 여기 가져온 게 언제인데 이제까지 쳐박아뒀다가 이게 뭐하는 거냐고 막 따졌더니 그 남자 왈, "그럼 물르실래요?".... 얼굴이 요괴로 보였다. 화가 머리 끝에서 터져 나올 것처럼 나는 것을 느끼며, 소리를 버럭. "물러주세욧!".. 그랬더니 그 남자. 아주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러세요" 그러면서 그 돈을 돌려주었다. 현금으로 착착 세더니.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고. 다시는 이태원에서 전자제품을 사지 않았다는 슬픈 뒷얘기. 잘 생겨도 일처리 그렇게 하면 유덕화가 요괴로 보이기도 한다는 경험과 함께.
... 이 책을 보다보니 그 에피소드가 생각나서 말이다. 내가 그렇게 허당이라는 걸 처음 알았기도 하고 (잘 생김에 그렇게 정신머리 다 뺴놓는 아이였던가...) 잘생김과 일처리는 절대 비례관계가 아님을 알았기도 하고. 본인이 잘 생긴 걸 아니까 그렇게 거만하게 나온 거겠지... 아뭏든 그러니... 평생을 시골에 있으면서 남편 하나 바라보고 별 낙도 없이 살던 여자들에게, 게다가 이제 나이들어 머리에 힘도 없고 몸도 살이 찌고 얼굴에 윤기라곤 없어지고 있는 여자들에게 그런 남자의 등장은 '쇼크'에 버금가지 않았을까. 라는 묘한 이해감이 들었다 이거다.
뭐 암튼, 이 책 재미있습니다..ㅎㅎ 한번들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