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성. 평. 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해 이리 저리 뒤척이다 문득 중학교 윤리 선생님의 음성이 들려 화들짝 잠이 깼다. 콧날이 오똑하고 눈이 서글서글했던 여선생님의 특유의 억양이 생생했다. 한 차시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은 핵심 내용을 뽑아 질문을 만들고 답도 주셨다. 단 하나의 문제였는데도 소위 임팩트가 대단했다. 우리 반 아이들은 다 윤리를 잘 했다. 선생님은 더욱더 기분이 좋아지셔서 수업 말미에 이르면 '형. 성. 평. 가'를 부르짖었다. 우리는 이미 답이 주어지는 문제를 또박또박 받아 적었다.   

대체 몇 번을 봤는지 기억할 수도 없다. 티비에서 해 줄 때마다 봤던 것 같다. 그런데 기어코 또 보고 말았다. 일요일 새벽. 너무 늦어서 찰리가 학교에 돌아가는 씬까지는 아쉽게도 보지 못했지만 봐도 봐도 멋진 탱고장면은 제대로 봤다. 삶의 후반부에서 청춘을 동행하는 설정은 진부하지만 가장 효과적으로 삶과 시간을 조감하게 해 줄 수 있어 대부분 성공한다.  <여인의 향기>라는 영화의 미덕은 관객이 나이들어가며 시점이 고등학생 찰리에게서 알파치노가 연기한 프랭크로 서서히 이동해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질릴래야 그럴 수가 없다. 나는 마치 찰리와 프랭크 사이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찰리를 봐도 프랭크를 봐도 가슴이 저릿했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 마침내 당도할 시간들. 얼마간 아프기는 마찬가지였다. 

사고로 시력을 잃은 퇴역중령 프랭크. 그의 자살 여행에 동행하게 되는 사립고등학생 찰리. 세상은 온전하게 똑같이 놓여 있는데 그 속에서 우리는 나이들어가며 저마다의 프리즘으로 굴절된 바깥을 전부로 인식하며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때로 답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찰리의 눈에는 아직 수많은 물음표가 있고 프랭크의 눈에는 미처 답을 얻지 못한 질문이 삭아서 비늘처럼 벗겨지고 있다. 그리고 그 둘은 손을 잡는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형성평가의 답처럼 명쾌하지 못한 수많은 질문을 그대로 인정해 주고 때로 그 질문을 밀어두는 일에 익숙해지는 것이기도 한 것 같다.  

극중 프랭크의 말처럼 인생과는 달리 실수해도 괜찮은 탱고 스텝처럼 너그러운 영화다. 처음 봤을 때는 프랭크와 함께 탱고를 췄던 여배우 미라 소르비노가 이쁜 줄 몰랐는데 지금 보니 정말 눈이 부시다. 이런 관점의 변화도 나이탓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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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0-10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파치노가 화를 내기 전에 그렇게 말하죠. 후와~ㅎㅎ^^

blanca 2011-10-10 13:24   좋아요 0 | URL
ㅋㅋㅋ 무슨 얘기인가 하다 뻥 터졌어요

마녀고양이 2011-10-10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탱고를 추는 장면, 정말 찡하잖아요......... 미치도록 찡하죠.
그리고 학교에서 변호하는 장면도 멋지구요, 저두 그렇게 늙어갔으면. ^^

blanca 2011-10-11 11:32   좋아요 0 | URL
마고님, 참 이상한 게 어렸을 때 봤을 때는 탱고씬도 큰 감흥이 없었는데 요전번에 보니까 확 와닿더라고요. 아, 넘 멋져요. 크리스 오도넬도 찾아 보니 가정을 일구고 대가족을 잘 이끌고 살아가고 있더라고요. 그 장면도 넘 인상적이에요.

비로그인 2011-10-16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리 선생님 하니, 저는 꽥 스러운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도, 좀 아주 날카로운 칼이 스치는 느낌이 드네요~ 시간이 지나 다시 보는 영화. 꼭 여인의 향기가 아니더라도 왠지 blanca님의 얘기는 다른 영화를 볼 때마다 생각날 것 같습니다.

blanca 2011-10-17 10:29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꽥스럽다,고 하니 저도 고등학교 때 윤리샘이 떠올라서 갑자기 웃음이 나네요. ㅋㅋ 요새 자꾸 EBS에서 야심한 시각에 해주는 영화들이 빠져 잠이 모자라 죽겠습니다.^^

감은빛 2011-10-19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오래전에 봤는데도 춤추는 장면만큼은 잊혀지지 않네요.
덕분에 저도 한번 찾아보고 싶어졌어요.

blanca 2011-10-20 09:43   좋아요 0 | URL
저는 볼 때마다 좋더라고요. 전도연의 <인어공주>와 함께 한 세 번씩은 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