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때였는지 여섯 살 때였는지 가물가물하다. 동네 아주머니가 과실주를 담가 왔다. 우리 집에서는 시음회가 벌어졌고, 나도 아마 한 모금 졸랐던 것 같다. 예상 외로 너무 달콤해서 홀짝 홀짝 계속 먹었나 보다. 먹었던 과정은 사실 기억이 잘 안 나고 영화의 장면 전환처럼 갑자기 엄마 등에 업혀 울고 불고 하며 술기운에 고통스러워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의 그 출렁이던 멀미의 포격 같은 기분은 아직도 삼삼하다. 술에 참 일찍이도 취했다. 

그래서 <빨강머리 앤>에서 철저하게 감정이입이 된 대목은 앤이 라즈베리 시럽으로 착각하고 건네 준 포도주를 연거푸 마시고 술에 취한 다이애너에게 앤이 절교당하는 부분이다.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간 다이애너는 곤드레만드레 취한 모습으로 엄마 배리 부인을 경악시킨다. 이 대목을 떠올릴 때마다 엄마 등에 업혀 울며 주정을 했던 꼬마도 같이 생각나 기분이 묘해진다. 그 꼬마는 하여튼 커서도 술과 관련된 많은 해프닝의 주인공이 된다.-..-  

 

  

사실 그린 게이블즈의 그 주근깨투성이의 빨강머리 소녀의 얘기는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ANNE>에서는 초반에 불과하다. 무뚝뚝한 중년의 남매에게 뚝 떨어진 고아원에서 온 소녀의 얘기가 기대 이상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자 작가에게는 속편에 대한 부담과 압력이 가해진다. 이 덕택에 앤은 성장해서 유년기의 첫사랑 길버트와 결혼하여 대가족을 이루고 아들들을 전장에 내보내며 늙어간다. 앤의 시점에서 이야기는 점차 확대되어 앤의 보금자리를 둘러싼 이웃들의 삶까지 닿는다. 이 작품은 앤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앤이 성장한 애번리 마을사람들의 연대기에 가깝다. 유년시절의 꿈, 청춘의 무모함과 순수, 열정, 중년기를 거쳐 노년기의 쇠잔, 소멸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대한 밀착된 시선과 섬세한 묘사는 삶을 횡적으로 종적으로 아우른다. 앤을 읽다 보면 어느새 나의 유년, 청춘, 지금 뿐만 아니라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망에 얽힌 가족들, 타인들의 시점까지 함께 자꾸 돌아보게 한다. 지나치게 낭만화된 결말들, 조금씩 서투른 반전들의 아쉬움까지도 다 덮어줄 정도로 이 작품이 매력을 가지는 이유는 사람과 삶을 결국은 믿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의 본능적 치우침을 작가가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성장'에 대한 얘기는 필연적으로 끌리고 만다. 뒤돌아봐도 만질 수 없는 것들. 그 애달픈 서투름. 시간을 돌려도 항상 과거의 실수는 그 자리에 그대로 그 몫을 고스란히 지키려 든다.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우유부단하고 어리버리한 청춘의 모습은 의외로 촌스럽지 않다. 육십 년대의 청춘이든, 구십 년대의 청춘이든, 21세기의 그것이든 청춘은 본질적으로 어리석음을 담보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의 청춘이든 그것은 시행착오, 실수와 더불어 채색되고 어느 정도 그것이 줄어들 때쯤 석별의 정을 나누어야 한다. <졸업>에서 그가 유난히도 망설이고 자신없어 하는 모습은 관객을 웃기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울리려는 전략이었을 수도 있다. 성장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확실한 것이 언제나 정답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술에 취해 본 것은 스물 다섯 언저리였다. 낙지 안주가 너무 잘 받아서 주량인 소주 세 잔의 두 배를 마시고도 거뜬하다고 생각하며 음식점을 나오자 갑자기 하늘과 땅이 붙어 버리는 경험을 했다. 놀림도 받고 위로도 받았던 그 사건의 최후는 엄마 등에 업혀 울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과 같다. 졸업해 버린 것들. 언제나 부끄럽고 가끔은 절절하게 그리운 것들.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1-11-12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섯 살인가 여섯 살 무렵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친구 어머니가 집에서 담갔다는 포도주를 억지로 먹이고는 혼자 집에 보내는 바람에 술 기운에 비틀비틀 집에 돌아왔던 기억이 있어요. 이틀쯤 앓아누웠었죠 아마. 이 페이퍼를 읽으니 그 기억이 떠오르네요^^

blanca 2011-11-13 22:06   좋아요 0 | URL
후와님은 정말 다이애너와 흡사한 경험을 하셨군요. 그런데 지금 포도주 마셔보면 너무 맛있어서 계속 먹을 정도는 아닌데 어렸을 때 어찌 그리 달콤하게 느꼈었는지 참 불가사의해요. 후와님도 아시는군요^^

poptrash 2011-11-13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렸을 때부터 그런 술, 많이 마셨어요. 집에서 담근 포도주, 아버지 친구들이 마시던 맥주. 미취학 아동이던 시절에... 그래서 결국 이런 어른이 되었는지도...

blanca 2011-11-13 22:07   좋아요 0 | URL
ㅋㅋㅋ 이런 어른^^;; 저는 제가 상태가 안 좋은 게 혹시 그 때 술에 너무 취해 뇌에 약간이 손상이 가서가 아닌가 가끔 생각해 봅니다.^^;;;

cyrus 2011-11-13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올해 최근에서야 포도주를 처음 마셔본 적이 있었어요, 이전까지는 포도주가 달달한 포도주스인줄 알았는데,,
마셔보니 아니더군요 ^^;; 포도주는 포도주스가 아니라 포도 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ㅎㅎ

책으로 된 앤의 이야기는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블랑카님의 글을 읽으면서
어렸을 때 TV에서 해주던 만화에서 술 취한 앤이 나오는 에피소드를 본 기억이 나네요.
혹시 <토지>에 이어서 <앤> 시리즈를 읽고 계신가요? ^^



blanca 2011-11-13 22:08   좋아요 0 | URL
오, cyrus님 포도주와 너무 늦게 만나셨군요. 그죠, 생각보다 맛없죠! <앤>은 다 읽었답니다. 이제 되도록 시리즈물은 안 읽으려고요. 부담감이 커서요. 중간에 읽다 그만둘 수도 없고. 그러면서 또 <임꺽정> 재미있다는 얘기에 자꾸 마음이 동하네요.

노이에자이트 2011-11-13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주 전에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가 '걸어서 세계속으로'에 나왔는데, 서양에서도 <빨간머리 앤>은 여자들이 읽는 소설이라고 알려졌더군요.백인남자관광객이 "남자들은 아무래도 잘 안 읽는 작품이죠.제 아내는 감명 깊게 읽었대요." 하더군요.나는 재밌던데...

blanca 2011-11-13 22:10   좋아요 0 | URL
어, 정말요? 정말 아름다운 섬이라면서요. 죽기 전에 가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더라고요. 여자들이 읽는 소설 ㅋㅋㅋ 노자님 재미있게 읽으셨어요? 내용이 남자들이 재미있게 읽기는 힘든 요소들이 있는 것은 맞는 것 같아요. 노자님은 안 읽은 책이 없군요. 정말 박학다식하십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11-14 16:18   좋아요 0 | URL
그쪽은 애틀랜틱 캐나다라고 해서 대서양 쪽의 동부 캐나다입니다.전에도 무슨 여행 프로그램에서 봤는데 바다경치도 좋고 산도 아름다워요.특히 캐번디시는 몽고메리 고향이면서 '빨간머리 앤'을 집필한 곳이라 관련시설이 잘 되어 있더군요.'걸어서 세계속으로' 다시 보기 하면 나올 거에요.

20여년 전에 나온 완역본 10권 짜리를 읽었는데 시간 꽤나 잡아먹었죠.

2011-11-13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3 2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11-13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전 얼마전에 선물받은 포도주를 따서 홀짝 홀짝 마시다가 그만 다 마셔버렸는데, 아..어릴 때 포도주 담아둔것을 마셨던 생각이 나더라구요. 잘 읽었습니다. ^^

blanca 2011-11-13 22:13   좋아요 0 | URL
탁님 반갑습니다.^^ 저는 포도주를 한 잔 이상 마시면 머리가 너무 아프더라고요. 어렸을 때 다들 과실주에 취한 경험들이 있군요.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니 괜히 반갑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