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한 점이 없어도 구름이 휘핑크림처럼 쌓여 있어도 찬연하다. 우산 밑에서 고개를 떨구어야 했던 숱한 나날들은 거짓말처럼 가버리고 절로 까치발을 하고 고개를 쳐들게 하는 하늘. 어딘가에 가두어 놓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설픈 사진과 조야한 말재간으로 가능할 성싶지 않다.  

고3, 2학기 가을 바람이 스산해지면서 입시의 중압감이 본격적으로 느껴졌다. 하늘을 감히 보지 못하고 바람만 느꼈다. 해방을 예감하게 하는 야릇한 전조가 싫지 않았다. 입사해서는 결산과 실적을 예고하는 계절. 어리버리한 신입사원은 실적보다 한번도 해보지 못한 결산업무가 자신에게 떨어지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느라 가을을 놓쳐 버렸다. 첫애를 가진 임산부는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산고에 대한 공포와 잦은 요의로 가을밤을 전전반측하며 보내느라 푸른 하늘을 등졌다. 작은 생명체가 젖을 떼고 두 발로 서고 걷고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기까지 하늘은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사계절 병풍에 그려져 있는 달, 그리고 거지 법사와 소설속 화자인 '나'의 삶은 평행하게 흐르는 듯하다 결국 겹친다. 가을 병풍, 지금의 '나'로부터 꼭 십년 전, 서른 살 때의 '나'  이미 '나'는 충분히 늙어 있다.  미루야마 겐지는 망설이지 않고 단언해 버린다.

그러나 비쩍 마른 그의 몸은 추억에 가득 차,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행복했던 나날들을 생생하게 기억해낸다.-p.61 

봄과 여름에는 가을과 겨울을 상상하지 못하지만 가을에는 겨울의 차가움을 상상할 수 있고 봄과 여름의 따스함과 설익음을 기억해 낼 수 있다. 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좋은 것 같기도 한 모호함. 나는 지금 유년을 다시 살고 있다. 아이를 먹이는 것도 재우는 것도 어떻게 놀아줘야 할지 고민하는 것만큼 힘들지 않다. 아이와 함께 논다는 것이 영 낯설고 어색했다. 부모교육을 받다 보니 나를 놀아준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나는 내 안의 항상 심심하고 외로웠던 그 어린 '나'를 다시 아이 앞에 불러내야 할 것 같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 병풍을 두고 이루어지는 <달에 울다>의 '나'의 회고. 여기 나의 회고는 아이를 앞에 두고 이루어진다. 삼십 년 전. 이십 년 전. 십년 전.  

"잘 있어"하고 법사는 중얼거린다.
바람 소리가 마치 칼을 휘두를 때 나는 신음소리 같은 초원을 헤쳐나가며, 한 발자국씩 내디딜 때마다 "잘 있어"를 되풀이한다. 그렇게 그는 '어제'와 헤어져 간다.
-p.80 

가을은 그런 계절. '어제'와 잘 헤어져야 하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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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9-24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 하늘은 언제 어떤 사각 프레임에 담겨도 멋져요!
외로웠던 어린 날의 '나'를 불러내어 분홍공주와 같이 놀면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가을은 조금 외로워도, 쓸쓸해도 좋은 계절이어요!^^

blanca 2011-09-25 20:37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순오기님. 정말 살 맛이 나는 계절이지요. 요 며칠 새 날씨가 정말 너무 좋아요. 야외에 앉아 있으면 살아 있다는 게 참 눈부시게 느껴지는 나날들입니다.

프레이야 2011-09-24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와 잘 헤어져야 하는 계절!
블랑카님의 언어창고엔 찬란한 언어들이 얼마만큼이나 있는걸까요?^^
잘 헤어져야 잘 만날 수 있는 것이겠죠!
어디에 있어도 마음에 가을바람 선선하게 안기는 주말 보내고 싶어요. 블랑카님도^^

blanca 2011-09-25 20:38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는 이 좋은 계절 '감기'님의 왕림의 조짐이 또 보이네요. 호되게 앓는 편이라 걱정입니다. 벌써 두 번째인 것 같아요. 프레이야님은 행복한 주말 마무리하고 계시나요.

oren 2011-09-24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동네 마을도서관에 나와, 나무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서 '가을 바람'을 느껴가며 '커피'를 즐기면서, blanca님의 이 글을 읽고 있답니다. 오늘은 비록 하늘에 구름 한점 없지만 벤치 한켠에서는 어느새 벌써 샛노란 은행잎이 '뚝뚝' 떨어지고 있네요. 가을은 대체로 제겐 '너무 슬픈 계절'인 것 같아 애써 가을의 '좋은 것들'만 보고 느끼려 애쓰는 그런 계절이지만, 우리들 모두에겐 각자 저마다의 '그런' 계절이 또 있겠지요. 어김없이 또 찾아온 그런 가을도 머지않아 또 훌쩍 우리곁을 떠나가고 말겠지요. . . '좋은 가을' 되세요. . .blanca님.

blanca 2011-09-25 20:40   좋아요 0 | URL
oren님 읽기만 해도 얼마나 찬란한 풍경인지. 도서관 벤치에서 커피까지^^ 저는 오렌님 댓글 읽을 때 하늘을 보고 있었어요. 아, 가을이 은근히 신산하기도 하지요. 겨울이 올 테니까요. 그래도 가장 살아 있다는 것에 즐거움과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잘잘라 2011-09-24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감각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우리의 판단이 우리를 속인다. -괴테

사진과 프로필 글귀가 잘 어울려요. 하늘만큼 사람도 멋있게 보이는 가을,이 좋아요.

blanca 2011-09-25 20:42   좋아요 0 | URL
메리포핀스님, 저도 모르게 저도 자꾸 감각이 느끼는 것들을 외면하려고 그랬던 것 같아요. 다시 한번 짚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가운 바람이 불면 또 겨울 추위에 대한 예감 때문에 좀 움츠려지기도 하고 한 살 더 먹을 일이 아연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그래도 정말 근사한 날씨들입니다.

cyrus 2011-09-24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막 해가 질 무렵의 가을 구름도 운치가 있고 멋져요. 그런데 여기 대구는
낮에만 여름인거 같아요. 밤이 되서야 가을 바람이 불어서 선선해요.
그래서 여름이 한순간에 지나간거 같아서 아쉽기도 합니다.

blanca 2011-09-25 20:43   좋아요 0 | URL
아, 그래요? 대구는 아직 그렇군요. 대구 얘기만 하면 괜시리 반가워져요. 아버지 고향도 할머니와의 시간들도 다 대구인지라. 언젠가는 대구를 한번 꼬옥 가서 제 유년 시절들의 추억들을 되짚어 보고 싶어요.

비로그인 2011-09-25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집니다. blanca님! ^^

blanca 2011-09-25 20:43   좋아요 0 | URL
무엇이요? ㅋㅋㅋ 그냥 다 멋진 걸로 알게요, 바람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