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를 봤다. 누구는 보고 나면 너무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진다고 추천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또 다른 누구는 아프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봐주고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그렇제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중
 
   

 

영화는 청각장애인학교에서 교장과 교직원들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폭력과 폭행을 자행했으나 솜방망이 처벌로 유야무야된 실제 사건을 다룬 공지영의 <도가니>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아내와 사별하고 어머니에게 천식으로 고생하는 딸을 맡긴 미술 교사 강인호(공유 분)가 안개로 뒤덮인 무진의 자애학원에 부임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무진, 낯이 익다. 김승옥의 <무진기행>. 안개가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삥 둘러선다는 곳. <무진기행> 속의 '나'는 결국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비겁하게 결심한다. 강인호도 결국 그렇게 되는 것일까?  

   

 

어딘가 불편하고 우울한 표정의 아이들.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초임교사에게 아이들은 기대를 갖고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찬송가를 부르고 하나님을 찾고 뒤돌아서서는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무기력한 작은 아이들에게 폭언, 폭행, 강간을 일삼는 교장과 교사는 그들의 범죄를 묵인하고 방조하는 지역 사회, 경찰, 검찰, 법원, 교육청과 결탁하여  악의 화신이 된다. 카메라는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들을 놓치지 않는다. 그들의 죄의 대속을 위해 가시 면류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는 다시 그들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힌다.

돈과 이해 관계 앞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모습. 선과 도덕이 생존의 문제와 만날 때 인간이 당면하게 되는 딜레마에 대한 시선이 예리하다. 강인호 교사는 가난하다. 게다가 어머니와 아픈 아이를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다. 부임할 때 학교 발전기금으로 전세금을 빼서 기탁하는 그의 출발은 이런 미묘한 갈등의 지점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아이들 재판 문제로 동분서주하는 그의 앞에서 침묵하기를 권하는 노모의 외침은 야속하기도 하지만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어 저릿하다. 세상에 옳고 그른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옳은 것만을 하고 살 수 없으니까 그렇다,는 어머니의 절규는 때로 올바르고 좋은 것들을 지키고 사는 삶을 포기해야 하는 생존의 비극성에 닿아 있다. 이 얘기를 어디서 들은 것도 같다. 

   
  오히려 문제는, 공감 능력 따위는 과감히 내던지고 앞만 보면서 달려가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도모해 나갈 수조차 없는 시스템의 압력 때문에, 우리가 애써 공감을 거부하고 있는 데 있지는 않을까.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수전 손택은 연민이 얼마간 뻔뻔한 감정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공감으로 나아가 적극적으로 타인의 고통의 해결을 위한 개입의 지점까지 닿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공감'은 행동, 그것도 얼마간의 포기와 용기를 필요로 하기에 어쩌면 상당히 두렵고 위험한 감정이기도 하다. 내부고발자가 되고 그것이 자신의 생계를 위한 수단을 잃을 수도 있음을 담보로 한다면 누구나 갈등없이 정의를 위한 행동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영화 <도가니>는 이 딜레마를 직시한다. 인두겁을 쓰고는 결코 저지를 수 없는 악행들의 나열과 그것에 정의롭게 대항해 나가는 불가능맨 대신 공감마저 무력화시키는 이 사회의 잔인한 자본주의 시스템과 그 시스템 안에서 선택을 강요당해야 하는 무기력하고 나약한 인간상의 모습은 누구나 자유로울 수 없는 자화상이다.  

이 영화는 미완이다. 알랭 드 보통의 얘기는 따라서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영화를 봄으로써 우리는 결국 절묘하게 고조된 감정, 슬픔, 흥분에 도달하게 된다. 극장을 떠나면서 우리는 스크린에 투사된 가치에 근거하여 자신의 전존재를 재평가하기로, 그리고 자신의 타락과 성마름을 없애기로 작정한다. 하지만 다음날 저녁만 되면, 그러니까 온종일 이런저런 모임을 가지고 짜증나는 일을 겪은 뒤에는, 우리의 영화적 경험은 이미 망각의 길로 향하게 된다.
- 알랭 드 보통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인터넷은 이 영화로 도가니처럼 들끓고 있다. 경찰의 재수사 결정 소식은 영화를 보고 나와 이 고조된 분노의 감정을 잊기 전에 함께 그것을 공유한 네티즌들의 힘이 모인 결과이기도 하다. 무기력하게 세상은 그렇고 그런 것이다,라고 체념하는 감정이 사실은 가장 위험한 순응이다. 크게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사치스러운 연민 때운이라고 해도 공감과 악에 대한 분노는 언제나 가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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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09-29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랭 드 보통 이 책 홍보하러 우리나라에 왔다고 하던데 님은 이미 읽으셨군요^*^
도가니, 책으로 읽고는 혼자 분노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영화 꼭 봐야 할듯한 의무감.
오늘 신문보니 이 학교 명칭 변경할 계획이라고 하네요. 이런 **놈들.
당장 폐교시키고, 재수사 들어가야죠. 당연히....

blanca 2011-09-29 22:59   좋아요 0 | URL
세실님, 알랭 드 보통이 왔군요. 지금 저 책 읽고 있는 중인데 전작들보다 신랄하고 예리한 맛은 좀 떨어지는 것 같아요. 영화 보다가 미친 사람처럼 '아이 씨' 그러다가 울다가 했네요. 재수사 시작이 어떤 결론을 맺을지 매의 눈을 뜨고 모두들 함께 지켜 보았으면 합니다.

순오기 2011-09-29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티즌의 힘이 발휘돼서 재수사해서 제대로 응징하면 좋겠어요.
날새면 독서회원들과 조조로 도가니 보러갑니다.

blanca 2011-09-29 23:05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독서회원들과 영화 이미 보셨겠어요. 영화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기억나는 일들도 몇 몇 있어서 성찰의 계기를 가지기도 했어요. 제가 공작가에 대해 가졌던 생각들도 수정된 부분이 있고 보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봉사'라는 것이 가지는 맹점에 대하여서도 생각이 많아졌답니다.

비의딸 2011-09-29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주 인화학교 사건을 재수사 한다는 경찰의 발표가 오늘 신문에 났더군요. 이번에는 제대로 정의가 살아있다는 걸 보여 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blanca 2011-09-29 23:06   좋아요 0 | URL
비의딸님, 재수사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단순히 하나의 액션에 그치지 않기를 기원해 봅니다. 식지 않는 도가니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프레이야 2011-09-29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가니 보셨군요. 영화의 힘이 책보다 크다는 걸 실감합니다.
재수사는 들어갔지만 일사부재리가 어떻게 될지 지켜볼 일이에요.
학교는 이미 폐교했다는데 이건 뭐..ㅠ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는 고3 큰딸 사줬어요. 보통의 책을 모두 좋아해 읽었거든요. 그래서..
공부하다 쉬면서 읽고있다고 하네요.(기숙사 있다보니^^)
딸 다 읽고 나면 저도 봐야겠어요.

blanca 2011-09-29 23:08   좋아요 0 | URL
아, 공지영씨도 그런 인터뷰를 했더라고요. 영화의 힘. 아, 보통의 책을 선물해 줄 수 있는 따님이라니. 저도 제 딸이 좀 그렇게 컸으면 좋겠는데^^;; 오늘 '곰 세 마리' 줄창 읽어주느라 힘들었답니다. 감기 걸려 목도 아픈데 말이에요--;;

cyrus 2011-09-29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주변에도 이 영화를 본 사람이 많았어요. 그런데 영화를 본 친구들에게
소설을 읽어봤냐고 물어봤는데.. 안 봤다거나 이 영화가 소설 원작인지 모르는 친구도 있었어요 ^^;;
영화 개봉 덕분에 알려져 있지 않은 문제의 사건이 다시 한 번 재조명받게 되어서
다행인거 같습니다.

blanca 2011-09-29 23:09   좋아요 0 | URL
저도 읽어보지 못했어요. 이런 식의 재조명은 정말 바람직한 것 같아요. 영화의 힘, 문학의 힘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는 것 같아 괜시리 흐뭇해집니다.

비로그인 2011-09-29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까 뉴스 보고 좀 놀랐어요. 도가니 소식이 연달아 나오던걸요. 이 책 나왔을 때 왜 읽어볼 생각을 안 했는지 모르겠네요. 사회적인 문제를 다룬 소설이라고 하면, 일단 선입견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순수한 예술이 아니라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써내려간 소설이라면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없을 것 같은 부담감 때문에요. 영화를 한 번 볼까, 고민하고 있네요.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 아들이 만든 영화 보려고 했는데 ( '')... 조금 민망하다는 생각이...

blanca 2011-09-29 23:13   좋아요 0 | URL
말없는수다쟁이님, '코쿠리고 언덕에서' 말씀하시는 거죠. 저도 담주에 보려고 하는데요. 민망하긴요. 저도 사실 소설이 나왔다고 했을 때에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답니다. 아무래도 영화는 좀더 실감나게 사건을 재현하여 사람들의 직접적인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것 같아요. 저부터도 그랬으니까요.

stella.K 2011-09-30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지영의 작가 정신은 높이 사 줄만은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놓는 방식은 어딘가 모르게 치우친 감이있어
별로 신뢰는 안 가요. 나름 영화 우행시 보고 저건 좀 아닌데 하는 게 있었거든요.
인정주의로 경도되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리고 무엇보다 우울하잖아요.
이 영화도 그럴 것 같긴한데 하도 들끊으니 한번 보고 싶긴하네요.
어느 날 조조로 몰래 살짝 볼까봐요. 리뷰 잘 봤습니다.^^

blanca 2011-09-30 22:51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영화 우행시 보셨어요? 저는 책만 읽었는데 읽는 동안 감정적으로 많이 동요하고 공감하긴 했지만 지금 와서 사형 제도에 대하여서 공작가의 얘기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손을 들어주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워낙 극악무도한 범죄들이 많고 특히 아동 상대로 벌어지는 추악한 범죄들은 무기징역도 사치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 영화 보시면 좋겠어요. 잘 만든 영화이고 가슴에 호소하는 메시지의 무게가 상당합니다. 저도 크게 내켜서 본 영화는 아니지만 보고나서는 보기를 잘 했다,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조로 보시기에는 너무 어둡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