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도 1월 1일 일어나 보니 무려 열 시였다. 아무런 다짐도 결심도 미처 하지 못했는데 일어나 보니 해는 중천에 떠 있는 기분은 착잡했다. 그냥 똑같은 시간들, 인간이 임의로 지은 경계에 불과하다고 되뇌어도 역시 한 살 더 먹는 일은 서른 이후로 익숙해지지 않는다. 마흔도 되고 쉰도 되고 그럴 텐데. 잘 할 수 있을까?

 

어느 날인가 나는 문득 이제 내가 살아갈 세상에는 괴로운 일만 남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는 늘 누군가 내가 알던 사람이 죽을 것이고 내가 알던 거리가 바뀔 것이고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떠나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문득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 김연수 <뉴욕제과점> 중

 

이모부는 사촌동생의 결혼식 폐백실 앞에서 나와 시선이 마주쳤고 나를 향해 걸어 오셨다. 병색이 어려 있기만 했지만 그래도 이모부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는데 이모부와 나는 작별하였다. 이모부도 나도 무언가 할 이야기가 있었던 듯 서로 머뭇거리며 또 한번 마주치려고 했지만 그 날은 그렇게 무언가 아쉬움을 남기고 헤어졌었다. 하지 않은 이야기들 미처 챙기지 못한 것들은 이제 담을 곳이 없어졌다. 영영 완성되지 않을 것 같은 교각 위에 입김을 내뿜으며 안전모를 쓰고 작업하는 인부들의 모습과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가족을 부양했던 젊었던 당신이 겹쳐 가슴 한켠이 아렸다.

 

나는 붙잡아 두고 싶은 풍경들이 가차없이 차창 뒤로 쉭쉭 밀리어져 나간다. 기착지는 잠깐씩 있겠지만 예전처럼 간이 판매대에서 우동까지 사서 들고 올 시간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2011년 12월 31일 기분이 저조했나 보다. 그래서 꼭 읽어 보려고 했던 김연수의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를 읽었다. 밤에도 읽고 대낮에도 읽었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꼭 내용을 읽지 않아도 제목만으로 수많은 추억들, 느낌들은 저마다 수런거리며 벌써 거대한 이야기를 이룬다. 이미 김연수는 얘기를 하기 전에 얘기를 끌어 내는 방법을 알았다. 그래서 작가인가 보다. 이러한 느낌을, 추억을 끌어낼 수 있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죽을 때까지 이야기를 해야 한다.

 

 

 

물론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처럼 여기에도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와 같은 제목의 단편은 없다. 그것을 찾는 건 읽는 이의 몫이다. 김연수가 아직 아이였을 때 김연수는 뉴욕제과점 막내 아들이었다. 그때 그 거리를 다시 복기하며 천천히 걸어가는 작가처럼 나는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사당동 시장 골목을 언제나 어른 같았던 나의 친구와 다시 걸었다. 가정 시간 만들 치맛감을 끊어서 언제나 언니 같고 침착했던 그 친구와 함께.

 

죽게 되면 자신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되돌아볼 기회가 찾아온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던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다른 시절에 할애된 시간을 줄여서라도 어렸던 그 시절 그 거리를 오랫동안 공들여 천천히 다시 걸어가고 싶다.

-김연수 <뉴욕제과점> 중

 

되도 않은, 호러물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주면 그 친구는 세상에서 제일 대단한 얘기를 듣는 것처럼 맞장구를 쳐주고 호들갑을 떨고 분석까지 하며 들어주곤 했다. 가차없는 비판도 아프지 않았다. 이제 그런 친구는 없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는 아직이라는 말을 너무 당연하게 여겼다. 오지 않은 것들, 기다리는 것들이 한아름 내 몸 속을 꽉 채우고, 지나치는 것들이 다 그 자리에 고대로 서서 나를 기다려 줄줄 알았다.

 

그러지 않았고 그러지 않을 것임을 알고 가야 할 길을 보는 심정은 서늘하다. 아직 계획도 포부도 세우지 않았는데 길은 또 내 앞에서 저만지 달음질쳐 가서 기다리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또 걸어가야 한다. 이별도 해야 하고 포기도 해야 하고 실망도 해야 한다. 김연수의 말처럼 죽게 되면 자신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되돌아볼 기회가 온다면 지금 이 시절에 할애된 시간도 소중하게 여겨졌으면 좋겠다. 자꾸 태엽을 뒤로 감아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만을 아련하고 아쉽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늦잠 잔 새해 2012년을 천천히 되짚어 다시 걷고 싶을 만큼 소중하고 그득한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유년기와 청춘을 추억하는 모습이 당연한 것처럼 중년과 노년을 복기하는 모습도 낯설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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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1-02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작년 12월 31일과 1월1일이 뭐라고.
이렇게 새 계획들을 새우고, 포부를 다지고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계획을 세우지 않는 건 못 지킬 것을 알기에 안 세우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즈음 드는 생각은, 계획을 세우건 안 세우던지간에 내가 행복하기를
결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불행해지겠더란 말이죠.
언젠가 저도 나의 어린 시절을 복기하고 싶은데 그게 마음에만 있지 쉽지 않네요.
블랑카님도 행복하시길 빌어요.^^

blanca 2012-01-03 17:0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스텔라님. 저도 모르게 그런 강박에 시달렸나 봐요. 오늘은 온 세상이 하얗게 덮였어요. 내가 행복해지기를 결심해야 한다는 말, 참 귀중하게 들리네요. 스텔라님도 저도 올해는 작년보다 더 건강하고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마녀고양이 2012-01-02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내가 위로해줄게요.
난 1월 1일에 11시반에, 2일에 또 11시반에 일어났어요! 진짜 위안이 되지 않아요?
일어났더니, 하루의 반이 휙 사라졌는데, 몸은 개운하더라구요. ^^

내가 차끌고, 분홍공주님 델구 일산 오랬죠. 강변북로 타면 올만할건데... 그럼
내가 가차없이 비판해주고 분석해주고 안아주고 할게염. 그리고 블랑카님은 항상 안절부절하지만
항상 무엇인가 준비하고 나아가고 있다고, 전 보고 있는데요.. 멋지세요, 항상.

올해 건강하고, 즐거운 일 가득하세요.

blanca 2012-01-03 17:06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저의 운전은 꾸준히 동네운전이랍니다.ㅋㅋ 사실 이것도 저를 작아지게 하는 원인 중 하나지요. 전용도로를 탔다 주눅들었어요. 그 후로는 자신감 완전 상실했어요--;; 일산에는 꼭 한번 가보고 싶은데. 아마 올해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중이에요^^ 코알라도 마녀고양이님도 만날 날이 오겠죠? 아, 지금 밖에 보니 완전 눈보라예요. 일산은 어떨까요? 마고님도 창밖을 한번 보세요. 올해 감기 바이러스란 바이러스는 다 마고님을 피해가기를 기원합니다.

순오기 2012-01-02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는 언제나 돌아가고픈 추억이죠.
새해에 늦게 일어났으면 어때요, 잠을 푹 잤으면 몸도 마음도 개운하고 건강에도 좋잖아요.^^
이러면 위로가 될려나~

blanca 2012-01-03 17:09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위로가 됩니다. 맞아요. 정말 숙면을 취했어요. 이제는 좀 일찍 일어나 보려 해요. 아이가 방학을 하니 밤에 잠을 안 자서 이런 일과가 굳어졌어요. 저도 자주 아이가 되고 싶어요. 오늘 같이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도요. 순오기님, 새해에는 더욱더 건강하셔야 합니다.

이진 2012-01-02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2년이 되었는데도 교회와 학교를 오간다고 아침 일찍일어나야 해요 ㅠㅠ
맞아요, 인간이 임의로 정해논건데 신경쓸 필요가 없겠네요.
그렇다면 저는 이때까지 미뤄둔 다이어리를 더 미뤄야겠어요 ㅋㅋ

아무리 나이가 한 겹 한 겹 더 쌓여간대도
블랑카님 새해 복은 무수한 겹으로 받길 바래요~

blanca 2012-01-03 17:10   좋아요 0 | URL
이진님 사진 아이돌 같습니다.^^ 포즈도 너무 자연스럽네요. 고맘때는 마음껏 미루고 유예해도 되는 게 특권 아닐까요? 저는 그 때 일찍 일어나는 게 넘 힘들어서 꼭 대학가면 일주일 동안 잠만 잘 거라고 결심하곤 했었는데 그 심정 알지요. 이진님도 새해 복 많이 받아요!!

gimssim 2012-01-02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아이였을 때>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내가 아이였을 때... 이렇게 인생길을 가고 있으리라 생각은 못했어요.
'소통'이 사회적인 이슈로 대두되어 있는데, 소통하기를 어려워하는 남편 때문에 고전하고 있어서일까요?
어머니와 아버지만 계시면 모든 것이 다 되던 그 시절이 정말 눈물나게 그립습니다.

blanca 2012-01-03 17:13   좋아요 0 | URL
눈물나게 그립다는 말씀 절절하게 공감합니다. 언제나처럼 강고하고 차분하게 중전님은 다 잘 이겨나가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힘내시고 더불어 새해 복도 많이 받으세요!

cyrus 2012-01-03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가끔은 어린 아이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어렸던 그 시절 그 거리를 오랫동안 공들여 천천히 다시 걸어가고 싶다'라는 책 속 구절이 마음에 깊이
와닿네요. 저도 한 번은 예전에 어렸을 때 살던 동네를 지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느낀 감정이
책 속 구절과 같았거든요. 비록 그 당시의 모습을 완벽히 재현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기억이라는 게
남아 있어서 그런지 감회가 새롭더군요 ^^

제가 작년에는 학교 생활에 치중하느라 서재에 자주 들려서 댓글이랑 안부 인사를 남기지 못했어요.
내년에도 학교 생활하면 바쁘겠지만 올해에는 안부인사는 꼭 할께요 ^^
올해에도 건강하시고 행복하고 좋은 일 있기를 바랍니다 ^^

blanca 2012-01-03 17:15   좋아요 0 | URL
아웅 고마워요. cyrus님이 88년생이시라는 얘기 듣고 저는 그때 무얼 했나 잠시 생각했어요. 학교 생활하느라 바빴던 시간들도 그립습니다. 그 땐 참 저도 이리저리 분주했고 이리저리 갈 곳도 많았던 것 같은데 그 일들, 그 장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올해 사랑도 성취도 미래도 얻으시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잉크냄새 2012-01-03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허,새해 첫날 일어난 시간이 저와 똑같다니.
언제부턴가 새해가 별다른 의미없이 지나가네요.
자주하던 금연도 이제는 시작안한지 오래되었고, 5년째 새해를 중국에서 맞이하게 되네요.

blanca 2012-01-03 17:17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님, 정말요? ^^ 금연결심은 건강을 위해 음력 설에 다시 하시는 게 어떨까요? ^^ 저희 집 어른 두 분께서 올해는 금연 얘기를 아예 안 꺼내시더라고요. 올해 분위기가 그런 걸까요? 중국에서 벌써 5년이나 되셨어요? 이국에서 새해를 맞는 기분은 어떨까요? 올해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oren 2012-01-03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의 글은 언제나 특별히 예민한 감수성의 촉각이 느껴져서 좋습니다. 그리고 blanca님의 이 글을 읽으니 문득문득 제가 최근에 읽었던 책 속의 몇몇 구절들도 새삼 떠오르는군요.
* * *
"오직 현재만이 실재하며, 그밖의 모든 것은 다만 머릿속에 간직된 표상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있던 것은 현재의 것이 아니라 이미 없어진 것이라 할 수 있으며, 현재 있는 모든 것은 다음 순간에는 방금 있었던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아무리 무의미한 현재도 가장 의미 있었던 과거보다 낫고, 현재와 과거의 관계는 무와 존재와의 관계와 같다."

"삶의 지혜는 대부분 현재와 미래에 대한 주의와 관심이 알맞은 균형상태를 이룰 때만 얻을 수 있다. 경박한 많은 사람들은 지나치게 현재 속에 파묻혀 산다. 불안과 근심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미래에만 매달려 산다. 그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적다. 끊임없이 무엇인가 추구하며 미래 속에 사는 사람은 늘 앞을 보며 살아간다. 그들은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줄 무엇인가를 향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서둘러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들은 현재를 즐기지 않는다. 현재는 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채 그 곁을 지나쳐갈 따름이다. 이처럼 그들은 죽을 때까지 미래를 향해 줄곧 '잠정적'인 상태로만 살아간다.

현재의 평온함이 불확실한 불행, 또는 확실하다 해도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행으로 깨뜨려져서는 안된다. 틀림없이 겪게 될 불행, 그리고 언제 겪을지 분명한 불행은 매우 적다. 불행은 대부분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아마도 그렇게 되기 쉬우리라고 생각될 뿐이다. 틀림없이 겪을 수밖에 없는 나쁜 일들도 있기는 하다. 이를테면 죽음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일들도 언제 일어날 것인지는 확실치 찮다.

우리가 이 같은 일들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다면, 우리는 잠시도 평온한 순간을 갖지 못하게 된다.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불확실하거나 언제 생길지 불분명한 불행 때문에 평생 마음의 평화를 잃어서는 안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런 불행이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거나 적어도 지금 일어날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blanca 2012-01-03 17:20   좋아요 0 | URL
이 글을 제가 다시 적어 봐야겠습니다. 저한테 지금 가장 절실한 얘기들이네요. oren님에게 들킨 기분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oren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이런 좋은 댓글도 많이 달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카스피 2012-01-03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ca님,2011년 서재의 달인 등극을 축하들려요.
2012년 흑룡의 해,좋은일만 계시길 바라며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그리고 신년 새해 용꿈 꾸시라고 용 한마리 선물로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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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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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2-01-04 15:13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정말 고맙습니다. 카스피님도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