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할 수 있는 것이 많다고 믿기 시작하면 역설적으로 불안감이 더 높아진다. 할 수 있음에도 할 수 없는 경우는 자괴감으로 다가온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일, 그냥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실어버리면 더 쉬워지는 경우도 있다.
첫아이를 낳고 소위 멘붕이 왔다. 일차적으로 자고 먹고 싸는 일에 갑자기 장애가 왔다. 신생아는 두 시간에 한번씩, 때로는 한 시간에 한번씩 수유를 해야 한다. 이유없이 밤을 새워 울기 시작하면 아이를 안고 베란다를 서성이다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게 수면의 전부가 되는 경우도 있다. 급하게 기저귀를 갈거나 달래줘야 하는데 화장실을 가야 하는 경우가 생기면 참다참다 변비가 오기도 한다. 게다가 나에게 온 아이는 좋게 표현하면 섬세했고 정직하게 얘기하자면 극도로 예민했다. --;;
자, 언제나 그랬듯 나는 육아를 책으로 할 수 있는 줄 알고 책을 사모으며 독파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한 손에 안고 오른손으로 책도 넘기고 줄도 긋는 신공이 생긴다.
이 영국인 간호학교 출신의 저자는 양육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아이의 불규칙성과 돌출행동들을 충분히 관리 가능하다고 설파한다. 이 책이 항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무조건 아이를 울리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대신 최대한 아이를 덜 안아주면서 아이에게 규칙적인 일과성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귀띰을 준다. 아이의 기질을 관찰하고 그 기질에 딸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지에 대한 친절한 안내는 적어도 육아와 보육의 그 무한 반복의 질곡에 생각없이 얽매이는 실수는 방지해 주려 한다. 적어도 지금 여기에서 아기를 돌보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한 찬찬한 관찰과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 지에 대한 좌표 정도를 설정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니 육년이 지나 둘째를 낳은 지금에도 나는 이 책들을 여전히 꺼내본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 수시로 수유하고 안아 흔들어 재우는 나의 모습이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첫째는 소위 '수면교육'에 들어가 두 시간 동안 안아주는 대신 자장가와 다독임을 시도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런 과거를 후회한다. 아이의 수면과 수유는 그렇게 관리하려는 수고 대신 상당부분을 시간이 해결해 준다. 그런데 그 앞의 거리를 내다보지 못하고 지금 여기에서 아이의 생리활동을 통제하고 관리하려는 노력이 승산없이 좌절당하면 육아는 오히려 더욱 난공불락의 것으로 보인다. 무언가 나는 노력하고 있고 통제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자족감은 아이의 울음이 미칠 아이의 상실감으로 다 상쇄되어 버리는 것같다. 물론 아이를 존중하고 믿어주는 그 긍정의 자세는 배울 만한 것이지만 아무래도 업고 어르고 부둥켜 안고 키웠던 우리 어머니들 밑에서 나온 오늘의 엄마가 따로 재우고 아이의 수면과 수유를 완벽하게 시간표에 맞추어 관리하는 정서는 낯설고 어색하다. 설사 그래서 그것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도 그것은 아이의 기질이 협조해 준 덕분이 더 크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안 될 아이는 아무리 수면교육을 시켜도 안 잔다. 2008년도의 다이어리에는 예민한 기질의 아이가 스스로 등대고 스르르 잠들 날을 고대하며 수면교육을 시키며 좌절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수면교육과는 상관없이 아이는 세 살이 되고 여섯 살이 되며 밤에 자지 말라고 해도 키가 커야 한다며 스스로 들어가 잠이 든다. 결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당시 더 많이 안아주고 기다려 주지 못한 시간들이 참 아쉽다.
2013년 아이가 유치원을 다니며 맛보았던 달디달았던 자유의 시간들은 다시 추억이 되고 --;; 자발적으로 다시 그 기본적인 욕구들이 저지당하는 상황이 출몰하는 육아의 전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전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이미 EBS에서 방영되어 반향을 불러일으킨 방송분에 대한 책이다. 다들 아기띠나 유모차를 사용할 때 오히려 외국에서는 우리 전통 포대기를 이용하여 아이를 업어주는 것에 대한 관심이 일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아이를 업는 방법에 대한 동영상의 주인공도 우리나라 엄마가 아닌 외국 여성이다. 친정엄마와 시어머니는 첫손녀를 업고 싶어하셨다. 그러나 이미 국민아기띠로 안고 업히는데 익숙했던 아이는 포대기를 동원해서 업어주려는 할머니들에게 착 업히는 대신 울음으로 항변했다. 할머니 등에 업혀 사방팔방을 다니며 이것저것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배웠던 나의 경험을 애석하게도 나의 딸은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등의 온기와 그 등의 체취로 할머니와 교감했던 만큼 나의 딸은 할머니와 친하지 않다.
여기에는 본능과 직관에 따르는 육아가 있다. 책으로 배우고 아이의 일과를 통제하는 육아가 아닌, 그저 살을 맞대고 부비며 아이가 달라는 대로 주고 자고 싶은 대로 재워주는 세 살 이전까지의 애착형성의 보살핌이 있다. 엄마가 편하자고 아이를 울리며 불편한 정서를 역으로 경험해야 하는 고문 아닌 고문도 없다.
이자벨 필리오자는 육아에는 유용한 성장의 법칙들이 있지만 '반드시'라는 것은 없으며, 초보부모가 배워야 하는 것은 그런 법칙들이 아니라 자신을 믿고 아이를 믿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인류학자들은 수유는 자연적인 반응행동이지 관리되는 행동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류는 탄생 이래 17세기까지 한 번도 수유를 관리당해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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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전통육아라고 능사는 아니다. 대가족 전체가 협력하고 동네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지 않았던 예전의 육아는 분명 현실에 부합하지 못하는 한계들을 가지고 있다. 양육자 자체의 정서나 휴식에 대한 배려도 아쉽다. 단, 육아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가슴으로 하는 것이라는 지침에는 대단히 값진 무게가 실려 있다.
어제 둘째 아이 대신 일곱 살 큰 아이를 업어 주었다. 아이는 아직도 무던한 편이 아니다. 임신했다고 동생이 있다고 더이상 안아주지 않았던 아이가 등에 업히니 부끄러워하면서도 좋아했다. 많은 말 대신 가끔 업어주려 한다. 나는 연년생 동생이 태어나고 맨날 꿈을 꾸었다. 그 꿈 속에서 엄마는 동생을 업고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 꿈이 어찌나 서러웠던지 나는 아직도 그 서러움을 기억한다. 우리 육아에서 '업는다'는 행위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같다. 세련된 아기띠로도 업는 자세가 가능하지만 그것은 예전에 우리 엄마들이 포대기로 업어주던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누구나 결국 사랑과 관심을 요구한다. 죽을 때까지 그리워하는 것도 그런 것들이 아닐까. 너무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신, 그냥 내 앞에서 요구되는 관심과 사랑을 주려고 노력해 볼란다. 십 년이 지나고 무엇이 옳았는지보다는 어떤 것이 후회를 덜 남기는 지로 판단해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