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다시 시간을 되돌려 살 수 있다면 나는 어디쯤에 갈까.
답은 항상 비슷한 것 같다.
바로 중학생 시절.
아주 아주 작았고 동그란 안경을 쓰고 의무 단발제로 인해
두껍고 곱슬인 머리칼을
억지로 잘라 머리는 항상 둥둥 뜨고
단짝 친구들이랑 붙어 다녔고
이해할 수 없었던 헤세를 붙잡고 동생 앞에서만 잘난 척하고
학교로 가는 급경사에서 세 번에 한 번 꼴은
꼭 타이어 타는 냄새가 나고 바로 정차해버려
어쩔 수 없이 승객들이 한꺼번에 다 내려 차도를 걸어 학교로 가던 기억.
힘든 일도 있었지만
세상이 가장 명료하고 생생해 보이던 시간들.
너무 너무 그립다.....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는 두번 째. 어느 서재분의 페이퍼에서 소개된 것을 보고
간만에 다시 만화책을 만나게 되었다.
중년의 회사원 히로시는 회사 출장에서 돌아오다 무언가에 끌리듯 고향 가는 열차를 타게 되고
어머니를 모신 절의 묘지에서
갑자기 열네 살로 돌아간다.
중2때 불현듯 집을 나가 버린 아버지. 그 아버지를 기다리며 남매를 키우느라 세상과 고투를 벌이다
지금 히로시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
이제 히로시는 48세의 깨달음과 앎과 세상에 대한 시선을 지닌 채
다시 한 번 그 순수하고 치기어렸던 열네 살의 시간을 다시 살게 된다.
이미 어떤 행로를 알고 덤비는 과거는 어떤 경로로 다시 재창조될 수 있을까.
히로시는 조금씩 미묘하게 다른 행동과 선택을 하게 되지만
그리고 떠나는 아버지를 붙잡아 보려고 하지만
결국 다시 현재로 오는 길에 주저앉게 된다.
평행우주처럼 우리의 또다른 선택이 만들어 내는 다른 삶이 아니라
그저 모호하게 가슴에 묻었던 과거의 일들을 조금 더 설득력 있는 것으로
만들고 마는 것으로 히로시의 과거 여행은 마무리된다.
아버지는 다시 붙잡을 수 없고
어머니는 다시 홀로 남는다.
가족을 위하여 자기를 포기했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를 찾아 떠났던 그 행로에서
히로시는 자기 자신의 현재를 만난다.
아버지의 그 떠낢을 가까스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히로시.
소설가를 꿈꿨던 친구가 보내 온 <시간의 나그네>라는 책을 받아들고
히로시는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온다.
"우리 시대가 안고 가야 하는 많은 걱정거리들이 불만입니다. 아무리 위험을 감수하고 견뎌내도 제 안에 있는 양심의 가책은 가라앉을 줄 모릅니다. 그런 제 마음을 시원하게 적셔주는 유일한 샘물을 저는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서 찾습니다. 그건 바로 크리스마스 때마다 피우던 양초냄새예요. 오늘날 이토록 황폐해진 건 바로 영혼입니다. 사람들이 목이 말라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간이 있어 책을 쓰려면 쓰겠지만, 아직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아직 제 안에 있는 책이 무르익지 않았어요. 사람들의 '목을 축여 줄 것 같은' 그런 책이 말입니다.
다시 편지드릴게요, 엄마, 마음으로 안아드릴게요.
엄마의
앙투안
생텍쥐페리는 그렇게 사람들의 '목을 축여 줄 것 같은' 책을 남기고 비행을 떠났다 죽음에 이른다. 이미 결론을 알고 과거로 돌아가 그가 어머니에게 쓴 사랑스러운 편지들을 읽는 일은 삶의 종결을 앞두고 우리 자신의 삶을 천천히 돌아보는 일과도 닮아 있다. 돌아올 것을 알고 믿고 떠나는 여행은 안온하다. 하지만 삶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반드시 다시 여기로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우리는 다시 과거를 살아낼 수는 없다. 다만 과거를 조금 더 잘 이해하고 과거와 화해할 수 있는 정도이다. 그렇게 우리가 살아온 시간들은 차곡차곡 쌓인다.
다시 열네 살이 된다면 이 시간이 그렇게 언덕에 버스가 정차한 것처럼 순간의 기착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 명료하게 인식하리라. 친구 얼굴도 시선으로 꾹꾹 눌러 나의 기억 저장고에 담아두고 일기장도 더 잘 챙겨두어 나중에 못 읽게 되는 경우가 없도록 하리라. 노인이 되어 그리워할 지금의 시간들을 위해서도 더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