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 들어갈 때는 --;; 어떤 활자라도 읽어 주어야 한다. 그러니 읽을 책이 떨어졌을 때 느끼는 초조감은 말도 못한다.
인지기능과 생리기능의 반사적 연합이라고나 할까 ㅋㅋ 요새 사람들은 하도 스마트폰을 가지고 들어가서 그 오염도가 말도 못한다고 뉴스에서 나오기는 했다. 어느 날 책은 똑 떨어지고 할 수 없이 대형서점에서 매달 발행하는 무가지를 들고 들어갔다 이 책을 만났다.
나는 프랑스에 가본 적이 없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불어를 배우면서 하도 고생을 해서 솔직히 프랑스에 대한 큰 호감은 없다. 그러나 기회가 된다면 이 서점에는 찾아가 보고 싶다. 미국인인 저자 실비아 비치는 파리에 1919년 11월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라는 서점을 개업한다. 벽에는 시인들의 사진, 그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걸고 그 안은 모두 골동품, 파리의 영어책 전문 헌책방에서 사모은 책들로 채웠다. 실비아는 프랑스 작가를 미국에 소개하고 영어권 작가를 프랑스에 소개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서점은 초창기 비싼 책가격 때문에 주로 도서 대여점의 구실을 하게 되며 유명 작가들의 아지트가 된다. 앙드레 지드, 제임스 조이스도 회원이었다. 특히나 조이스는 반납에 불성실했다고 한다. 1920년 여름 실비아와 제임스 조이스의 첫만남은 그녀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어 놓는다. 이 아일랜드 출신의 경제관념 없는 괴짜 작가에 대한 회고는 참으로 흥미롭다
조이스로 말하자면, 그는 항상 남들을 자기와 동등하게 대우했다. 상대방이 작가건, 어린애건, 웨이터건, 귀부인이건, 파출부건 간에 말이다. 그는 누구를 만나건 상대방이 하는 말에 흥미를 표했다. 자기는 어떤 사람을 만나서 한 번도 지루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가끔은 서점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동안 건물 관리인의 길고 긴 이야기를 경청하며 앉아 있기도 했다. 간혹 택시라도 타고 오는 날에는 택시기사가 하던 이야기를 마저 끝내기 전에는 결코 내리지 않았다. 누구나 조이스에게 매력을 느꼈다. 어느 누구도 그의 매력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p.67
세기의 이야기꾼은 무엇보다 세기의 경청자였다. 누구나 그 앞에서는 귀중한 연사 대접을 받았다. 그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을 흡수하여 다시 세상에 흩뿌렸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마침내 실비아를 만나 세상에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율리시스>는 음란물 취급을 받아 세상에 정식으로 선을 보이기까지 온갖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이 미혼의 서점 여주인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오늘날 이 작품은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었을 지도 모른다.
율리시스의 방대함과 난해함, 나는 아직 이 책을 읽어 볼 용기를 내지 못한다. 평생 녹내장으로 고통받아 주변의 사물과 활자를 정확하게 제대로 편하게 관조할 수 없었던 이 아일랜드의 사내는 일상 생활과 경제 관념에서는 오히려 평균이하였다고 한다. 서점 주인이자 출판인이었던 실비아는 마침내 제임스 조이스의 가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녀 또한 경제적으로 허덕였고 대책없는 몽상가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다녀야 했지만 위대한 작가의 위대한 책을 세상에 내어 놓는 일에서 말할 수 없는 보람을 느껴 그 고난의 과업을 자처했다.
우리가 무척 좋아했던, 그리고 아무런 말썽도 피우지 않았던 손님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의 한쪽 구석에서 잡지나 매리엇 대령의 소설 또는 다른 책을 읽었다. 이 사람이 바로 어니스트 헤밍웨이로, 내 기억이 맞다면 1921년 말에 파리에 처음 왔을 것이다.
-p.120
그녀의 헤밍웨이에 대한 호감과는 달리 각주는 냉정하다. 헤밍웨이의 허풍, 거짓말과 그것을 또 곧이곧대로 믿어주는 실비아에 대한 객관적인 해명. 그녀는 자신이 사랑했던, 숭앙했던 작가들을 지켜주고 싶어했다. 그녀의 회고록은 그래서 대체로 무덤덤하다. 작가와의 친분의 과시 대신 그 작가와의 교감이 태반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작가들과의 만남, 그들의 이야기가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 장교가 진열장에 남아 있던 단 하나의 책,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를 달라고 위압적으로 이야기하자 그녀는 황급히 서점을 정리하고 숨어 지낸다. 수용소에서의 생활도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녀가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를 지켜낸 것이 그녀 자신의 고된 수용소 생활보다 더 그녀 삶에서 의미 있는 일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헤밍웨이와의 재회. 담담한 회고록은 막을 내린다.
물론 그녀는 이미 고인이 되었고 그녀의 뒤를 이어 조지 휘트먼이라는 사람이 이 서점의 명맥을 잇는다. 지금도 가면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을 만나볼 수 있다. 그 서점을 들락날락하며 낭송회를 열고 책을 찍어내고 객쩍은 농담들을 교환했던 사라진 우리의 작가들은 이제 흔적 정도만 확인할 수 있겠지만.
이제 동네에는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같은 서점이 설 곳이 없다. 도서대여점도 보기 힘들다. 아니 종이에 찍힌 활자로 교감하고 소통을 나누는 풍경 자체가 점차 화석화되어 가는 것같다. 그러니 이 책들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향수, 그리움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은 다시 돌아 다시 종이로 된 책, 그 책을 쓴 작가, 그 책을 읽는 이들의 아지트가 활성화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곳이 다시 생긴다면 슬며시 들어가 가만히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싶다.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따스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