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죽는다.

 

개별적인 인간 존재는 강물 같아야 한다. 처음에는 미약하다가 좁은 강둑을 따라 흐르게 되고, 때가 되면 열정적으로 바위들을 지나 폭포 위로 돌진한다. 강폭이 점점 더 넓어지고 제방이 멀어지면 강물은 더욱 빠르게 흐르며, 마침내 눈에 띄는 휴식도 없이 바다와 합쳐지고 나면 아무런 고통 없이 자신의 개별적인 존재를 잃어버린다. 나이가 들었을 때 자기 삶을 이런 식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통받지 않을 것이다. 개별적인 존재는 소멸되더라도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은 지속될 테니까.

-버트런드 러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중

 

 

 

 

 

 

 

 

 

 

 

 

 

 

버트런드 러셀은 늙어가며 '죽음'과 화해한 것 같다. 죽음 앞에서 개별적인 세상에 하나뿐이었던 '나'들은 의미없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소중하게 여긴 가치들과 평생 추구한 과업들은 그의 죽음 뒤에 남는다. 그런데 그의 죽음에 대한 이해는 솔직히 조금 거창하고 쉽지 않다. 누구나 그처럼 담대하게 '죽음'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죽음 앞에 설 수 있는 게 아니다. 수전 손택도 마지막 앞에서는 울음을 터뜨렸다. '나'라는 주어가 사라지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렵고 두렵다. 벌써 주어진 시간의 허리에 근접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가끔 소름이 돋는다. 러셀은 과거에 연연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노년을 폄하했지만, 그가 폄하한 그 모습이 사실은 가장 평범하고 많은 '나'에 대한 묘사다. 평생 거의 아픈 적이 없고 지적인 역량으로 수많은 창작물들을 펴내고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귀기울여줬던 그가 말하는 '죽음'과 '노년'은 이상적이지만 손에 닿을 만큼 가까이 있지는 않다.

 

 

평범한 죽음, 도처에 널린 죽음은 여기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는 쓰러지는 것과는 거리가 먼, 불길한 운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느낌으로, 다시 충만해지기를 갈망하며 밑으로 내려갔지만 결국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심장마비. 그는 이제 없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처음부터 두려워하던 바로 그대로.

-필립 로스 <에브리맨> 중

 

 

 

 

 

 

 

 

 

 

 

 

 

 

 

우아하게 사는 것도 우아하게 죽는 것도 어렵다. 부지불식 간에 삶에서 비어져 나오는 것들은 너무 많다. 모르는 사이에 늙고 모르는 사이에 병들고 모르는 사이에 이 지상을 떠난다.  언어로 포장할 수 없는 곳에 진실이 앉아 있는 풍경이 너무 을씨년스럽다. 필립 로스는 이 풍경 앞에 다가선다. 늙어가는 것, 죽는 것이 두려워질 때 이 책을 다시 펼쳐들면 때로 위로가 된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님을 환기해 주니까. 주인공은 처음도 마지막에도 죽는다. 남겨진 사람들은 그의 요약된 삶과 응축된 노년기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누구나의 삶도 그런식으로 끝맺음한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우리의 마침표는 가족들,지인들 사이에서 하나의 간략한 이야기가 된다. 곡해되고 이가 빠져도 항변할 수 없다. 죽음은 그렇게 무기력한 것이다. 아픈 이야기. 놀라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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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11-05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죽어 갈 때 말고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노년에 이른 어느 몽상가가 '늙어서는 온 채로 죽는 게 아니다'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위로하던 말도 조금은 고려에 넣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 * *

하느님은 사람들의 생명을 조금씩 빼앗아 가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내리는 혜택이다. 이것은 노령의 단 하나의 소득이다. 마지막에 죽는 것은 그만큼 온전한 생명을 잃는 것이 아니며, 그만큼 고통도 덜 받을 것이다. 이런 죽음은 사람의 반이나 반의 반쪽밖에 죽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제 내 이 하나가 아프지도 않고 힘도 안 들이고 빠졌다. 그것은 이 이의 상태로서 자연스런 한계였다. 그리고 내 존재의 이 부분과 다른 부분들은 이미 죽었고, 내가 정력이 왕성하던 시기에 가장 생기 있던 다른 부분들은 이미 반은 죽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무너져 가며 나로부터 빠져 나간다. 죽음으로의 뜀박질이 이렇게까지 진척되어 있는 것을, 내가 이제 온 채로 죽는 것으로 느낀다면 내 오성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일까? 나는 오성이 그렇게 어리석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몽테뉴)


blanca 2013-11-06 10:44   좋아요 0 | URL
oren님, 몽테뉴 인용해주신 대목 읽으니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서글퍼지는 것도 어쩔 수 없네요. 마음 속에는 아직도 십대 때의 시간들이 생동하는 것 같은데 저는 벌써 마흔으로 차곡차곡 가고 있어요. 마흔이되면 정말 산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여전히 미성숙하고 실수도 많이 하면서요.

마녀고양이 2013-11-05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하게 살려고 하고 우아하게 죽으려고 하면 정말 힘들거 같아요, 블랑카님.
그냥 진흙에 쳐박고 허우적대면서, 곁에 있는 사람 바짓가랑이 잡고 끌어달라고도 하면서, 때론
남의 바짓가랑이 움켜쥐고 끌어올려주시도 하면서 사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요즘엔 든답니다.

모두들 허우적대도, 그래도 따스한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을 꿈꿔봅니다.
언젠가는 다들 죽을테니까요. 좋은 날 되세요, 둘째 잘 크죠?

blanca 2013-11-06 10:46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정신 없어요. 밥도 서서 먹고요 ㅋㅋ 엉덩이 붙일 시간도 없고 무언가를 해 보려면 잠 같은 기본적인 생리적 활동을 줄여야 합니다. 어느새 가을은 저만치 가버렸네요. 아이 재우고 한 삼십 분 배깔고 스탠드 밑에서 책 읽는 낙으로 버팁니다. 그리고 달달한 믹스커피를 다시 시작했어요. ^^ 딱 감기 걸리기 쉬운 계절 몸 조심하셔요.

페크pek0501 2013-11-06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하게 죽기 위해서 안락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고통스럽게 앓다가 죽는다는 건 참 끔찍하잖아요.

"~이 책을 다시 펼쳐들면 때로 위로가 된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님을 환기해 주니까. "
- 제가 생각하는 바예요. 지구가 멸망이 된다고 해도 다 함께 죽는 거라면
무섭지 않을 것 같아요. 무서움은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데 나만 그럴 때 최대의 크기가 되는 것 같아요.


blanca 2013-11-07 10:53   좋아요 0 | URL
맞아요...견딜 만한, 그래도 괜찮은 정도의 죽음을 맞고 싶어요...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것들과도 화해해 가는 과정인 것 같기도 해요. <에브리맨>은 젊음에 취해 있는 사람은 절대 쓸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작품인 듯해요. 저도 더이상 젊지 않다는 방증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