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매우 인상적인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1795년 정조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하여 수원으로 행차하던 그 8일 간의 여정과 준비과정 등을 낱낱이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를 드라마틱하게 복원한 프로였다. 자신의 행차를 행복한 축제 '행행'으로 명명한 정조의 행차는 33년 전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어야만 했던 생부 사도세자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 사랑의 표현이기도 했다. 다른 의궤들과 달리 널리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를 바랐던 정조의 의중이 반영되어 인쇄본으로 제작된 여덟 권의 의궤 속의 그 세밀한 준비과정과 축제의 묘사는 3D로 충실히 복원되어 아름다운 영상과 교차되며 화면 전체를 압도한다. 정조의 의궤는 단순히 왕실의 의식을 기록하는 형식적인 문서가 아니라  축제를 함께 하며 나눔을 베풀고자 했던 백성을 향한 진솔한 사랑의 표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의 예,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들에 대한 은밀한 견제 등이 어우러져 또다른 정조의 개혁 정책 표방의 일환이 된다. 육천여 명을 육박하는 수행인원을 거느리고 행차하는 왕의 모습과 그 왕을 스스럼없이 구경할 수 있는 백성들의 자유로움, 그 풍경을 가로지르며 분분하는 꽃잎, 장엄한 배경 음악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잘 만들어진 영화의 클라이막스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의궤 그 자체를 3D로 복원하여 붓 끝에서 생동하는 그 축제 현장의 기록들도 인상적이었다. 배우 이성민의 담담한 나레이션도 좋았다.

 

사람이, 그도 왕족이 쌀을 보관하는 뒤주에 갇혀 8일동안이나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죽어간 사건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경악이요, 더없는 비극이다. 게다가 가해자는 친아버지이다. 이것이 픽션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오늘날에도 많은 논란거리와 시사점을 던져준다. 여기에는 대치되는 시각이 있다.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남긴 한중록에는 남편 사도세자가 중증의 정신병을 가져 비상식적인 행동과 살생을 일삼았던 것으로 그려진다. 자연히 늙은 아버지 영조의 미움을 자초했다는 결론이다.

 

 

 

 

 

 

 

 

 

 

 

 

 

 

 

또다른 시각은 사도세자가 당쟁의 희생자였다는 것이다. 탕평책을 폈던 영조는 집권 노론 세력들을 장악할 수 없었다. 자신들의 손아귀에 포섭되지 않고 문보다는 무에 관심이 많았던 사도세자는 끊임없는 공격 대상이었고 결국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손으로 자식을 죽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당시 왕권은 보이는 것과 달리 미약했었다는 시선이다. 그러니 혜경궁 홍씨가 남긴 한중록은 집권 노론 세력이었던 친정 식구에 대한 변호쯤으로 해석된다. 물론 말로 남은 사실들의 체에는 군데군데 진실이 빠져나가기 마련이므로 완벽한 결론을 내리기란 쉽지 않다. 그 어디쯤엔가 진실은 제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다.

 

 

 

 

 

 

 

 

 

 

 

 

 

 

다만 노론 세력들이 죄인의 자식으로 왕위 계승에 적합하지 않다고 이야기했던 정조는 할아버지에 이어 조선말 최고의 현명한 통치자가 되었다는 것에는 큰 이견이 없다. 그는 복수할 수 있음에도 복수하지 않고 그칠 '지'를 이야기한다. 정치는 살풀이가 아니다. 그럴 수 있음에도 그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어머니의 회갑연을 열기 위하여 신하들을 이끌고 행차한 곳은 아버지의 무덤 앞이었다. 어머니의 생일이 아닌 아버지의 생일에 어머니의 생일잔치를 계획했던 정조. 열한 살에 할아버지의 손에 죽어가는 아버지를 봐야 했던 왕. 수많은 개혁 정책을 펼쳤지만 번번이 신하들의 유교적 명분과 당파적 이기심 앞에서 좌절당해야 했던, 그럼에도 끊임없이 백성들을 위한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이상주의자였던 왕. 정조의 그 아름다웠던 꿈들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를 설레게 한다. 고흐가 그 절박하고 힘든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하늘의 별을 그리고 싶어했던 마음과도 만나는 지점. 아무리 현실이 각박해도 절망적이어도 인간은 꿈꾸고 싶어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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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3-10-28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삼대를 보노라면 끊이지 않는 연극을 보는 느낌이 종종 듭니다. 세자에게 갈 땐 늘 나쁜 일이 있을 때만 드나드는 문으로 출입했다는 영조, 결국, 정신질환까지-결벽증이 있었다지요- 얻었다는 사도세자, 그리고 역사 한귀퉁이를 말끔하게 지워내는데 성공한 정조까지. 세자의 자질이 이미 훌륭했다는 전하는 말도 있으나 자식을 죽이던 날, 뜰에 엎드린 세자에게 영조가 전하는 첫마디는 역시 살인에 관한 것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네가 왕손의 어미를 박살내 죽이지 않았는가?'

실제 세자의 살인은 한둘이 아닌 백여명에 넘었다고 전하고, 형벌에 처한 숫자는 더하지요. 연산군조차 직접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고(때리는 것에 그쳤다는!) 성리학과 유교의 조선에서 백여명도 넘는 사람을 직접 죽인 세자는 군주가 될 수 없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천하의 성군인 정조 제위 당시 승정원 일기 훼손 삭제분만 하여도 백여 군데가 넘으니, 효심으로 역사를 덮는 일은 성군을 가리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도. 당쟁이 전부가 아닐 거란 생각, 아비의 홀대와 자식의 살인과 각종 정신질환, 그 자취 일부를 먼지 속에 보내는 뒤를 잇는 아비와 아비의 자식까지, 사람의 깊이만큼 기록과 드라마가 그 간극을 벌리는 느낌이었어요. 어디까지나 제 느낌과 전해들을 말이 섞인 댓글이라 저역시 정리가 힘들지만, 이 삼대를 부족한 기록으로 완전히 정리하기는 누구라도 온전히 해내기 힘든 일이지 싶습니다.

blanca 2013-10-28 14:16   좋아요 0 | URL
쟌느님,사도세자에 관련된 부분은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들끼리도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대목인 것 같더라고요. 저는 감정적으로 정조에 기울어 있지만 (승정원일기 삭제는 몰랐어요.) 사도세자가 과연 왕위계승자로서 적합했느냐, 하는 문제에는 저도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비극이지만 결국 영조 다음으로 정조가 왕위를 계승한 것이 결론적으로 더 나은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기회가 되면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어요. 하고 싶은 것 아쉬운 것은 많은데 시간은 너무 빨리 가네요. 다시 시작했던 피아노도 한창 열심히 하다 놓아 버리고. 하던 일도 그렇고. 다 다시 잡을 날이 오겠지요...
 

8월 10일 오후 세 시 둘째를 낳았다.

생각보다 짧고 강한 진통 끝에. 첫째는 아이의 탄생 그 자체가 경이로웠다면 둘째는 짧은 시간 동안 몸 전체가 수축과 이완을 되풀이하며 생명을 밀어내는 그 자연적인 매커니즘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유난히도 기록적인 폭염을 만삭으로 버텨내는 것부터 엄마가 각오해야 하는 것들을 연습해야 했던 지라 막상 출산 그 자체는 비교적 수월하게 느껴졌지만.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아이를 낳아 젖을 먹일 때마다 경험한, 젖꼭지가 으스러지는 듯한 아픔을 기억해내는 것만으로도 오싹해졌다. '그리고 아이들의 병, 끊임없는 불안, 양육, 못된 성격(그녀는 딸기밭에서 어린 마쉬아가 저지른 장난을 생각해해냈다), 교육, 라틴어, 이거고 저거고 모두 조금도 알 수 없는 어려운 것들뿐이다.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중

 

톨스토이는 정말 여자들 마음 속에 들어갔다 나온 남자임에 틀림없다. 내가 읽은 책 중에 이렇게 여자들의 마음 속에서 오고가는 생각들을 정확하게 묘파해낸 남자는 단 하나, 레프 톨스토이뿐이다. 생명을 낳는 일은 아무리 포장되어도 또다른 커다란 불안과 불확실성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밤에 가끔 오싹한다. 어느새 내 옆과 발 밑에는 두 아이가 자고 있다. 아이 앞에 일어날 수많은 일들, 경험으로 이미 일어나야 한다고 여겨지는 일들에 침잠하다 보면 그 어느것도 자신있게 감당하지 못할 것같은 두려움으로 가슴이 때로 스산하다. 시간과 거리를 뛰어넘어 톨스토이의 여인들이 느껴야 했던 부담감을 공유한다. 이거고 저거고 조금도 알 수 없는 어려운 것들뿐. 상당부분을 시간이 주도하겠지만 결국 그 시간도 나를 타고 흐르니 내가 피할 수 없는 과제들이 너무 많다.

 

그러니 나는 책을 읽고 그 감상을 정리할 시간이 부족하다. 어느날 밤, 나는 갑자기 커피 한잔의 여유가 너무 고팠다. 그 밤에 막 뛰어나가 서머싯 몸의 <면도날>에서 '나'와 래리가 함께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를 나누다 동이 터버려 함께 한 그 아침의 그 까페오레. 당장 <면도날>을 꺼냈다.

 

우리는 빵집에서 금방 배달된, 바삭한 크루아상과 까페오레를 먹었다.

-서머싯 몸 <면도날> 중 

 

 

 

그리고 그런 김에 내처 이 책을 다시 읽었다. 지나치게 형이하학적인 것들에 시달리다 보면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것들이 그리워진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 않는 청년 래리의 선택과 궤변들이 그래서 더 청량감있게 들렸다. 면도날의 화자인 중년의 작가는 마치 서머싯 몸 그 자체같다. 이 책 속의 화자는 친절하고 상식적이고 매력적이다. 그가 들려주는 젊은 래리의 구도자 같은 삶은 '그'의 여과기를 지나 읽는이들에게 초록 잔디 위의 스프링쿨러가 내뿜는 물처럼 뻔하지만 역시나 시원하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일이 시작될 것 같다. 그래서 책을 사는 일이 정당화된다. 그냥 빌려서 읽었더라면, 처분했더라면, 내가 밤에 당장 뛰어나가 까페오레와 크루아상을 먹을 수 없는 일에 위로 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결론은 여전히 나는 책이 좋고 책으로 치유받는다. 태어난 지 두 달도 안된 꼬마가 자주어 디카페인 커피 한 잔 하며 이 글을 쓸 수 있는 지금, 나는 이 순간 최고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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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10-20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어째 blanca님 글이 안올라온다 궁금해하고 있었어요. 즐겨 읽는 분의 서재가 한동안 비어있으면 전 속으로 막 서운해한답니다. 그런데, 둘째를 나으셨군요. 정말, 많이, 왕창 (이렇게 중복 표현을 마구 써도 오늘은 이해해주세요^^) 축하드려요. 서머싯 몸의 <면도날>중의 저 구절은 저 같은 사람은 늘 자극받는 문장이네요 ^^ 모유수유 하시나요? 전 아기 낳고 한달만에 그냥 커피를 마셔버렸는데... ("따라하지 마시오" ㅋㅋ)

blanca 2013-10-20 21:59   좋아요 0 | URL
hnine님, 감사합니다. 궁금해하셨다니 그래도 제 존재감이 있긴 있구나, 하며^^;; 안심 좀 하고요. 커피 저도 마셔요. 낳고 삼일 있다 라떼 마셨는 걸요 ㅋㅋ 모유수유하고 있긴 하지만 커피는 저의 삶의 낙이라서 끊고는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고요. 커피 마시는 그 순간의 여유가 너무 소중해요.

노이에자이트 2013-10-20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신세타령하는 사람들이 우굴거리는 세상에 "나는 이 순간 최고로 행복하다"고 쓴 마무리가 기분 좋습니다.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부모를 가진 사람 역시 행복할 것입니다.

blanca 2013-10-20 22:01   좋아요 0 | URL
ㅋㅋ 노자님, 저는 원체 단순한 유형이라 쉽게 행복해지고 쉽게 슬퍼집니다. 먹을 것을 밝히는 지라 맛있는 음식 먹으면 정말 세상 전체가 아름다워보이는 그런 유형이랍니다.

프레이야 2013-10-20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고로 행복한 블랑카님, 그동안 이런 대단한 일이 있었군요. 많이많이 축하드려요. 기록적인 폭염에 산후조리하시며 고생 많으셨겠어요. 얼마나 이쁠까요! 전 요새 새삼 아기들 보면 너무너무 사랑스럽더라구요. 그래서 늦둥이도 낳게 되고 그러나봐요. ㅎㅎ 분홍공주에게 동생이 생긴 것도 축하해요. 책에서 우린 위안을 받는다는 사실, 공감하며^^

blanca 2013-10-20 22:02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고맙습니다! 하지만 저는 따님들 잘 키워낸 프레이야님이 너무 부러워요. 빨리 커라, 커라 주문 외우는 중입니다. 시간이 가면 내가 늙는건데도 요즘의 시간들은 좀 빨리 가주었으면 합니다. 분홍공주는 나이 차이가 나는데도 요즘 성장통을 혹독히 겪고 있는 중이랍니다.

마녀고양이 2013-10-20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두째 출산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어머, 마음이 너무 흐믓해요.

blanca 2013-10-20 22:05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안 그래도 며칠전 딸아이한테 핑크 토끼 무릎담요를 꺼내 주며 마녀고양이님 생각을 했더랬어요. 둘째는 뜬금없이 와주어서 ㅋㅋ 첫째랑 여섯 살 차이가 나버렸어요. 그리고 저는 유치원에서 늦둥이를 낳은 엄마처럼 되어 버렸어요. 지금으로선 또 눈앞의 과제들을 일단 해치워버려야 되는 입장이 되어 '나'를 찾는 일은 또 멀리 가버렸어요. 마고님이 차곡차곡 걸어나가는 모습 보면 참 대단해 보이고 부럽기도 하고 그래요. 멀리서 조용히 응원할게요. ^^ 그리고 고마워요.....

heima 2013-10-20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정말 축하드려요 ^^ 더운 날씨에 산후조리하시느라 고생 많으셨겠네요.. 얼른 몸 회복잘하시길, 그리고 세상에 내려온 예쁜 아가도 무럭무럭 잘 크길 응원합니다.

blanca 2013-10-20 22:0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8월달에 무거운 몸으로 세상을 활보하는 일은 정말이지 인생 최대의 ㅋㅋ 도전이었어요. 숨이 턱턱 막히더라고요. 차라리 낳고 나니 좀 낫더라고요.

cyrus 2013-10-20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둘째 낳으라 고생했어요. 그나저나 둘째가 아들인가요, 딸인가요? ㅎㅎㅎ 두 아가들이 블랑카님 따라 책 읽는 귀여운 모습이 벌써부터 상상되네요. 점점 날씨가 쌀쌀해지니까 산후 몸조리 잘 하세요 ^^

blanca 2013-10-20 22:07   좋아요 0 | URL
첫째는 딸이고 둘째는 아들이에요. 누나 책 읽어주며 같이 책에 가까워지기를 바라는데 잘 될지는 미지수예요^^;; 눈부신 가을날들을 흘려 보내는 일이 속상하기도 하지만 내년을 기약하며 참아 봅니다. cyrus님은 가을을 만끽하고 계시죠?

다락방 2013-10-20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지난번 만삭이라는 글을 떠올리며 간혹 이제는 돌아오실 때가 되지 않았을까 했는데 이렇게 멋진 페이퍼로 컴백 하셨네요. 축하하고 환영합니다 :)

blanca 2013-10-21 12:0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도 그리웠습니다.^^ 만삭의 배가 바로 꺼지지는 않더라고요--;;

블루데이지 2013-10-21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blanca님!
예쁜아기와 더 많이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저희 아이들은 11살 7살 2살인데요.터울이 크다보니
큰아이와 작은아이가 막내아기를 다루는 방법이 나름 달라요.ㅋ
아마 조만간 남매가 펼쳐내는 멋진 남매애를 느끼실수있으실거예요.
다시한번 축복드립니다.

blanca 2013-10-21 12:03   좋아요 0 | URL
우아, 진정 존경스럽습니다,블루데이지님! 저는 빨리 백일이 되라, 돌아 와라! 이러고 있어요.
둘째는 좀더 육아를 즐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나 또다른 어려움들이 있네요.
힘든데 이 시절이 좋은 거라고 그리울 거라고들 하니 또 즐겨 보려고 하지만
일단 졸립고 배가 고프네요^^;;

순오기 2013-10-21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님이 둘째를 낳을 거라는 걸 내가 몰랐던가요?
아래 페이퍼에 달린 댓글에도 출산했다고 적혀 있는데... ㅠ
분홍공주에게 남동생을 안겨주셨네요~ 정말정말 축하합니다.
동생을 본 큰아이 마음이 시앗을 본 조강지처와 같다는 말씀을 기억하시고
부디 분홍공주의 마음을 헤아려주시길.... ^^

2013-10-21 0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1 1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1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1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1 1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2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13-10-21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어난 지 두 달도 안된 꼬마가 자주어 디카페인 커피 한 잔 하며 이 글을 쓸 수 있는 지금, 나는 이 순간 최고로 행복하다.


아,,, 슬몃 제 입가에 미소가 돌았어요~
꿀같이 주어지는 짬... ㅎㅎ

테레사 2013-10-21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이유가 있었군요..블랑카님은 어디 이민가셨나..했더랬죠..ㅎㅎ 순산 축하드려요.

blanca 2013-10-22 10:30   좋아요 0 | URL
테레사님 이야기 들으니 갑자기 여행이 ㅋㅋ 가고 싶어지네요. 감사합니다. 저를 궁금해하셨다고 착각하고 기뻐하겠습니다.^^;;
 

우리 집은 정남향이다. 그러니 요즘 같은 날 그 더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그런지 정신줄을 거의 놓고 산다. 휴가 가면서 꼭 챙긴다고 의식하고 지퍼백에 싸두었던 핸드폰 충전기와 이어폰은 제 발로 어디로 걸어간 것이며, 무언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꼭 딴짓만 잔뜩 하다 끝난다. 어제는 옆지기가 아끼는 이어폰을 구태여 들고 나갔다 쥐도 새도 모르게 또 잃어버렸다고 자학하고 있었는데 본인이 딴 곳에 두었다고 고백. 가까스로 '살았다' 줄창 더위사냥만 물고 있다. 신혼 때 에어콘 없이 견뎠던 1년이 아득하다. 그 땐 더우면 서로 회사에 가서 있으라고 ㅋㅋ 독려했던 기억이 난다.

 

 

 

알라딘 서재에서 칭찬이 자자한 책. 쉽게 읽히고 참으로 상큼했다. 계속 '맞아, 맞아'하면서 읽게 되는 책. 나보다 나이 든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참조할 곳이 있다. 아집이나 독선, 지나온 궤적에 대한 합리화와 만나지 않는다면 더없는 고견이다. 저자 박웅현이 고창 선운산의 절에서 맞닥뜨리게 된 '보왕삼매론' 더위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청량감.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공부하는 데 마음에 장애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수행하는 데 마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마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시극 바라지 마라.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마라.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마라.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마라.

-<보왕삼매론> 박웅현의 <여덟 단어> 중 인용 

 

 

삶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수긍하는 과정이 삶을 살아가는 과정인 것 같다. 그런데 그 '뜻대로'가 가장 최선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살아가는 것의 묘미다. 무엇인가 더 커다란 지도 안에서 궤적을 그리며 나아간다는 느낌은 반드시 체념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더 큰 의미, 더 빛나는 별로 향하는 여정일 수도 있다는 앎. 뻔할 수도 있지만 잊고 지냈던 이야기들을 간명하게 재미있게 하는 재주가 있는 저자의 이야기가 땀을 식힌다.

 

 

 

 

 

 

 

 

 

 

 

 

 

 

이 책은 아이 셋을 키우는 미국의 유대인 엄마의 지극히 솔직한 자기 고백이다. 무언가를 가르치려 들지도 않고 '~척'하지 않는 담백한 글. 언뜻 보면 블로그의 단상들로 이루어진 가벼운 글인 것 같지만 군데 군데 자기 방어도, 가식도 떨어 내고 한 솔직 담백한 이야기들은 예비엄마들이나 아이를 다 키운 엄마들에게도 강한 공감과 자기 위안을 준다. 한 마디로 아주 재미있는 책.  '육아'란 의의로 참 지난하고 때로 강한 고통과 예기치 않은 기쁨과 의외성을 가득 품은 고독한 여정이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조금은 냉정한 유럽식 육아보다 오히려 미국 엄마들과 정서적으로 접점 지대가 더 많은 것 같다. 저자가 혼자 아이 셋을 데리고 외식을 나갔다 우연히 만난 80대 할머니가 해 주었다는 이야기는 벽에 써 붙이고 두고 두고 기억하고 싶다.

 

"그렇게 괴로워하지 말고 지금을 즐겨요. 눈 깜짝할 사이에 아이들의 어린 시절은 지나가 버릴 거고, 당신은 남은 평생 그 시간을 그리워하며 살게 될 테니까."

-질 스모클러 <왜 엄마는 나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했을까?> 중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우아한 사만다가 고급 레스토랑에서 테이블을 더럽히며 엉망으로 식사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 할머니의 시선과는 달랐지만 분명 공감가는 구석이 있었다. 저렇게 더럽게, 저렇게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라니. 적나라한 현실의 부스러기는 꿈꾸는 구석과는 다르지만 그 여정이기도 하다.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던 할머니에게서 저자는 새로운 진실을 발견한다. 피천득이 유학간 딸아이가 가지고 놀던 인형을 노년에도 쓰다듬고 머리 빗기며 그리워하는 풍경은 주책이 아니라 그리움에 대한 가장 농도 짙은 표현과 다름 아니다. 지금 놓치고 가는 것들이 나중에는 반드시 절절한 그리움을 담고 돌아온다, 는 사실.

 

나는 이 더위를 2주 동안 견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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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3-08-09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덟 단어>생일선물로 받아놓고 여직...ㅠ
아이 셋이 자라서 벌써 엄마품을 벗어났고, 남편도 멀리가서 혼자 사는 여자에요.
남들이 말하길,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고...^^
2주를 견뎌야 하는 더위도 겁내지 말고 맞짱 떠요, 우리!

blanca 2013-08-09 10:15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빨랑 빨랑 읽어보셔요. 요새 그쪽도 무지하게 덥지요. 그런데 한편 순오기님의 자유가 부러워진다는 것. 아직도 저는 갈 길이 머네요. 예! 자꾸 덥다, 덥다 불평만 하지 말고 즐겁게 더위 이겨 나갈게요.

transient-guest 2013-08-09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긴 입추답게 날씨가 많이 선선해졌습니다. Sunny California라는 말 답게 태양은 뜨겁지만요.ㅎ global warming때문에 북극의 얼음이 바닷물로 녹아서 전체적으로 steam이 꺼져서 추워졌다고들 하네요.ㅎ 좋은 글은 소리내어 읽으면 마음에 감응이 오는게 참 신기합니다. 저 위에 쓰신 보왕삼매론 인용구를 읽으니까 심장이 고요하게 편해지네요, 마치 기도문을 정성들여 외울때처럼 말이에요.ㅎ

blanca 2013-08-09 10:17   좋아요 0 | URL
아, 어젯밤도 열대야로 허덕이며 괴로워했던 저로서는 참 부러운 상황이네요^^ 그쪽은 더워도 습기가 적어 쾌적하다면서요. 그죠! 이 인용문구 읽으니 참 좋더라고요. 이제 나이가 점점 들어가니 '좋은 체념'과도 익숙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프레이야 2013-08-10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왕삼매론 인용글귀가 쓰되 좋은 약이 되는 것 같아요. 되뇌어봅니다. 다음주까지도 무더위는 기승을 부린다는데 분홍공주랑 건강하게 나시길요.^^

blanca 2013-08-21 17:33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둘째를 낳고 나오니 벌써 낮에 가을 바람이 스며드네요. 이렇게 여름을 보내게 됩니다.

세실 2013-08-10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마라......그래도 없었으면 좋겠어요. 가끔 배가 조금만 아파도 무기력해지는데......ㅎ
박웅현책 참 좋지요.
더워도 너무 더운 요즘, 다행히 도서관은 시원합니다.

blanca 2013-08-21 17:35   좋아요 0 | URL
저도 과민성대장증후군--;;이 있어 그 고통을 알지요. 그냥 세상만사 다 싫어지더라고요. 시원한 도서관, 상상만 해도 너무 가고 싶어지네요.

비로그인 2013-08-18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나라한 현실의 부스러기는 꿈꾸는 구석과는 다르지만 그 여정이기도 하다.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던 할머니에게서 저자는 새로운 진실을 발견한다. 피천득이 유학간 딸아이가 가지고 놀던 인형을 노년에도 쓰다듬고 머리 빗기며 그리워하는 풍경은 주책이 아니라 그리움에 대한 가장 농도 짙은 표현과 다름 아니다. 지금 놓치고 가는 것들이 나중에는 반드시 절절한 그리움을 담고 돌아온다, 는 사실




이 말씀 너무 좋아요... blaca님,,, 기억하고 싶어요 ...

blanca 2013-08-21 17:37   좋아요 0 | URL
새벽숲길님, 좋으시다니 저도 씨익^^ 제가 아이를 낳으니 피천득의 노년의 행동이 주책이 아니라는 것에 절절한 동감이 가요. 이 세상에서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은 결코 없다,는 사실을 배워갑니다. 그 자리에 가면서 그렇게 하나 하나 이해하고 배워가다 보면 점점 성숙해질까요. 나이 드는 것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래 살고 싶다.

좋은 글을 써보려면 공부도 공부려니와 오래 살아야 될 것 같다. 적어도 천명을 안다는 50세에서부터 60,70.100에 이르기까지 그 총명, 고담의 노경 속에서 오래 살아보고 싶다. 그래서 인생의 깊은 가을을 지나 농익은 능금처럼 인생으로 한번 흠뻑 익어보고 싶은 것이다.

- 이태준 <무서록>  '조숙' 중 

 

 

 

 

이렇게 노골적으로 '오래 살고 싶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이의 집을 다녀왔다. 비가 긋던 오전. 촉촉하게 젖은 고택의 대문은 활짝 열려 있고 까페로 활용되는 이곳에서 달짝지근한 모과차와 쫄깃한 인절미를 먹으니 이런 곳에서 글을 썼다면 '오래 살고 싶다'는 말을 절로 내뱉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상허 이태준이 1933년부터 1946년 월북할 때까지 살았다는 이곳. 그가 붙인 '수연산방'이라는 당호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의 수필집 <무서록>에 이 집을 지은 과정이 나와 있다기에 급하게 읽어보았는데 그의 수필 전편이 실려 있는 게 아니라 '수연산방' 이야기가 제대로 나와 있지 않아 아쉬웠다. 또 아무래도 걸러지지 않은 당시의 표현과 한자어 등이 접근을 쉽게 하지 않아 제대로 완독했다고 하기 어렵다. 그저 오렌지 빛깔의 손바닥 만한 아취 있는 수필집을 손에 넣은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선풍기를 틀지 않아도 덥지 않은 집. 건넌방 앞의 툇마루에서 난간에 기대어 본 아담한 마당의 풍경은 보면서도 절로 그립고 아쉬웠다. 하룻밤 자고 갔으면 싶은 집. 왠지 내가 아이가 되어 팔짝 팔짝 뛰면 할머니가 내다보고 손수 만든 식혜와 인절미로 나를 부를 것만 같은 집. 나는 인생으로 한번 흠뻑 익어가고 있는 것인가. 익는 과정에서 놓치고 가는 것들이 한없이 아린 날이다. 나도 오래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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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3-08-03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우와 우와아~~!!! 멋져요. 찜해놨다가 꼭 챙겨서 가봐야겠어요. 이런 멋진 집을 두고 월북을.. 음.. 아니 어쩜 훨씬 더 빨리 월북했을텐데, 이런 멋진 집 때문에 월북이 늦어진 것일지도.. 어찌됐든, 월북하셨어도 이 집은 많이 그리워하셨것 같아요. 저도.. 한 오백년 살고싶어요. ^^;;;

blanca 2013-08-04 07:28   좋아요 0 | URL
메리포핀스님, 여기 참 고즈넉하니 좋더라고요. 이런 데에서 한달 정도만 살아보고 싶어요. 새도 지저귀고. 꽃도 피고. 손수 건축에 관여하고 그랬던 것 같은데 참 아까워요. 그래도 이렇게 남아 보고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순오기 2013-08-04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서울에 있는가 봐요?
다음에 서울가면 가보고 싶네요.
좋은 소식 알려줘서 고마워요!!

blanca 2013-08-04 13:29   좋아요 0 | URL
예, 순오기님, 성북동에 있어요. 가을에 가면 더욱 좋을 것 같아요. 어떨 때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예약을 해야 할 정도라네요. 화장실 뒤켠도 너무 좋고. 구석 구석 구경하고 기웃대도 민망하지 않은 분위기로 참 일종의 전통찻집이에요.

프레이야 2013-08-04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집이라면 정말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 노래라도 부르고 싶을 것 같아요. 무서록을 한번 펼쳐보게 하는 페이퍼, 더위도 잠시 잊게 만드네요.^^

blanca 2013-08-06 17:36   좋아요 0 | URL
아, 프레이야님, 여긴 진짜 너무 너무 더워요.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이 끈적끈적. 고문이 따로 없네요. 저런 집에 한달 만 요양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transient-guest 2013-08-09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심속에 아직도 이렇게 고즈넉한 장소가 남아있다니요. 관리가 좀 힘들겠지만, 하루 종일 사색하고 책 읽기에 더없이 좋은 집 같습니다.

blanca 2013-08-09 10:14   좋아요 0 | URL
여기 너무 너무 탐났어요. 이런 데에서 글쓰고 책 읽으며 산 작가가 참 부러웠고요. 우선 더위도 콘크리트 건물보다 덜해서 선풍기를 안 틀어도 바람이 살랑살랑. 작은 마당은 내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고즈넉해지고요.
 

아이가 길가의 퀼트공방을 자꾸 기웃거리다 급기야 저기에 들어가서 바느질을 하겠다고 했다. 물론 어린이도 가능한 분위기였지만 아직 취학전 아이는 없는 것같다. 몇 번 망설이다 데리고 들어가니 강사가 조금 난감하다는 표정이지만 한번 해보자고 한다. 처음에는 헤어핀부터 시작해서 아이는 매일 바느질을 한다.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치듯 아이는 매일 그 공방으로 쏙 들어가 서툰 홈질을 해서 이것저것 만든다. 공방에는 초로의 아주머니도 젊은 아이 엄마도 초등학생 들도 온다. 다들 고개를 숙이고 가방을, 지갑을, 인형을 만들면서 적당히 함께 있다는 느낌 속에서 안온하다. 그네들이 유일하게 부담없이 참견할 수 있는 대상이 아이다. 단지 조그만한 아이가 함께 바느질을 한다는 이유로 쏟아지는 관심. 엄마는 어디에 있냐는 질문. 엄마는 몇 걸음 떨어져 엉덩이가 터질듯한 딱딱한 의자 위에서 책도 읽고 이리저리 기웃대기도 한다.

 

11월 하순의 어떤 아침을 상상해보시기를. 벌써 20년도 전, 겨울이 다가오는 조짐이 보이는 아침을. 한 시골 마을, 옆으로 널따란 낡은 집의 부엌도 머릿속으로 그려보라. <중략>

백발을 짧게 자른 여인이 부엌 창가에 서 있다. 여인은 테니스 신발을 신고 여름옷처럼 가벼운 무명 원피스 위에 모양없는 회색 스웨터를 입고 있다. 체구가 작고 당닭처럼 씩씩하지만, 젊었을 때 오랫동안 병을 앓아 여인의 어깨는 가련하리만큼 구부정하다. 남다른 얼굴은 링컨의 얼굴과 별로 다르지 않을 만큼 볼이 울퉁불퉁 홀쪽하고 햇볕과 바람에 찌들어 바랬다. 하지만 생김새가 섬세하고 뼈대가 고우며 황갈색 포도주 빛깔의 눈은 소심해 보이기도 한다. "어머나!" 여인이 외치자 입김이 되어 창문에 어린다. "과일 케이크를 만들기에 좋은 날씨네!"

- 트루먼 커포티 <크리스마스의 추억>

 

이 끈적끈적한 여름, 트루먼 커포티는 자신이 곱 살때 이미 예순 살이 넘었던 사촌 숙이 크리스마스 케잌을 굽던 그 정경을 영롱한 구슬을 내밀듯 쓰윽 가지고 온다. 너무 아름답다. 아이가 바느질에 집중하는 시간, 나는 내처 그 정경 속으로 또르르 굴러들어간다. 어머니, 아버지를 떠나 친척 집에 맡겨진 외로운 아이는 오랜 독신의 조금 모자란 듯한 사촌 할머니와 마음 깊이 교감한다. 그들이 수레를 끌고 바람에 떨어진 피칸을 줍고 크리스마스에 쓸 과일케이크를 만들 기금을 모아 마침내 그 케잌을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풍경. 그리고 선물로 서로 연을 주고받고 그 연을 날리는 대목. 소년이 할머니가 아니라 '친구'라고 불렀던 사촌 숙은 "세상을 떠날 때 오늘의 광경을 내 눈에 담아 가고 싶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눈물겨운 마지막. 소년은 성장하고 '친구'는 노쇠해진다.

 

이게 우리가 함께 보낸 마지막 크리스마스다.

 삶의 행로가 우리를 갈라놓는다.

-p.325

 

이 단편집에는 트루먼 커포티의 자전적인 기록이 군데군데 별처럼 박혀 있다. <추수감사절에 온 손님>은 '리'에게 헌정되었고 가장 비열한 소년으로 그려진 오드 헨더슨의 이야기가 왜 유년 시절 이웃 친구이자 <앵무새 죽이기>의 작가 '리'에게 헌정되었는지 고개가 좀 갸웃거려지기도 하지만 그의 유년 전반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던 사촌 숙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도 나온다. <어떤 크리스마스>에서도 자신을 버리다시피 한 아버지와의 어색한 재회를 뒤로 하고 사촌의 따뜻한 품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년의 소망이 나온다. 면 "첫 별을 보고 또 다른 별을 보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작가의 토양은 이러한 너그러운 유년의 사랑에 기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꼭 부모가 아니어도 소년의 엉뚱함, 치기 들을 온전히 받아주었던 그러한 완충지대가 오늘날 아직도 그 소년의 글을 많은 사람들이 읽고 감동받게 되는 유인이 된 것같다.

 

아이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없다면 그런 것들을 찾아주고 싶다. 트루먼 커포티의 이야기. "살아 있다는 것은 물고기가 뛰노는 갈색 강과 한 여자의 머리카락에 내려앉은 햇빛을 기억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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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3-07-31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어린 따님이 꼬물꼬물 퀼트하는 모습 상상만으로도 사랑스러워요~~~~
나이 차는 고정관념인데 자꾸 의식하게 되네요. 일곱살과 예순살의 교감...도 참 멋진 일이죠.
어제 천안 호두과자 한개만 사니까 아들내미가 할머니꺼는? 하는데 부끄럽더라구요. ㅎ

blanca 2013-07-31 18:35   좋아요 0 | URL
세실님, 저는 바느질에 취미가 없어 솔직히 학창시절 친구들 덕을 많이 봤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이제 막 시작하고 싶은데 너무 못해서 솔직히 면이 안 서 시작을 못하겠어요. 이것도 못하냐,고 강사가 놀랄까봐요--;; 책을 넣어 다니는 가방을 하나 시도해 보고 싶긴 한데... 자수도 배우고 싶고요. 저도 할머니와 교감을 많이 나눈 편이라 마지막에 소년이 숙과 헤어지는 장면이 절절하게 다가오더라고요. 삶의 행로가 우리를 갈라놓는다, 이 표현. 너무 슬퍼요. 할머니 잘 챙기는 아드님 저는 그러지 못했기에 상대적으로 너무 부럽고 부끄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