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에 대해 잘 모른다. 솔직히 그의 작품은 한 권 정도 읽은 게 다. 그마저도 온전히 몰입하기 힘들었다. 그를 작가로서 아주 좋아하지는 않는다.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고 나의 이해력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신작이 그 자신에 관련된 이야기라는 것에 주저하지 않고 다시 그를 만나기로 했다. 죽은 아내는 영국의 유명한 문학 에이전트였다고 한다. 뇌종양으로 거리에서 쓰러진 지 삼십 칠일 만에 운명하고 만 비극적인 최후의 주인공기도 하다. 그는 아내의 마지막을 함께 했지만 그것이 이야기로 떠돌기를 바라지 않은 듯 침묵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작품으로 이야기한다.

 

 

 

 

 

 

 

 

 

 

 

 

 

 

 

 

 

비상의 죄

 

아내 팻에게 바친다,는 제사. 그리고 비상의 죄라는 표제 아래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 보라. 그러면 세상은 변한다...."는 포문. 표지가 암시했듯 기구에 미친 사람들.  프레드 버나비, 투르나숑, 베르나르. "하늘을 나는 문제에 개입하는 건 신의 섭리를 거르스는 행위"이기 때문일까. 19세기 기구의 역사, 그리고 그 기구에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 나는 어리둥절했다. 분명 작가의 아내 팻과의 사별 이야기라고 했는데 웬 뜬금없는 기구 이야기일까.

 

고도는 '모든 것을 고유의 상대적인 비율로, 또는 진실에 가깝게 축소시킨다.' 근심, 후회, 환멸의 감정은 낯설어진다. '무관심과 경멸, 태만이 이리도 쉽게 떨어져 나가다니...... 그리고 용서가 내려오다니.'-p.26

 

 

평지에서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보라,는 이야기는 반복된다.  그리고 이제는 사랑이다. 땅의 자식인 우리가 신 못지 않게 멀리 가 닿을 수 있는 방법, 바로 사랑이란다. 그러나 여기에서 추락은 나쁜 예감처럼 덧붙여진다. 모든 사랑 이야기는 비탄의 이야기라는 첨언. 아, 줄리언 반스는 비로소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는구나. 비상의 죄를 저지른 버나비와 여배우 베르나르의 비탄으로 끝나는 짧은 사랑의 이야기.

 

 

깊이의 상실

 

젊은 시절, 세상은 노골적이게도 섹스를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나중에는 사랑을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그 후에도 여전히 마찬가지로-적어도 우리가 운이 좋다면(혹은 반대로 운이 나쁘다 해도)- 세상은 슬픔을 견뎌낸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 이런 분류는 절대적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가로지르는 회귀선이다.

-p.110

 

작가 박민규가 어느 지면에선가 이 세상 사람들 모두에 대한 연민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어릴 때는 사람들 간의 공통점보다는 눈이 부신 곳을 디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의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 가에 시선이 갈 때가 있다. 하지만 나이듦은 결국 모든 사람을 지면으로 더 나아가면 지하로 끌어내린다. 결국 화두는 견뎌내는가, 그렇지 못한가로 수렴한다. 그의 의견에 동조한다. 그리고 그는 아내 이야기를 드디어 시작한다.

 

우리는 30년을 함께했다.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서른두 살이었고 그녀가 죽었을 때는 쉰여섯 살이었다. 그녀는 내 삶의 심장이었다. 내 심장의 생명이었다.

-p.111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다. 사랑했던 아내와의 재회에의 막연한 희망이나 기대가 없는 그 황량한 그곳에서 아내와의 작별을 또렷하게 직시하는 모습은 이 섬세한 남자가 어떻게 삶의 비탄을 딛고 나아가는 지에 대한 하나의 처절한 탐사의 보고다. 차마 쉽게 읽어낼 수가 없어 멈추고 또 멈추게 된다. 그의 슬픔에 연민을 느끼기도 하지만 결국 나, 아니면 남편이 겪어야 할 일이라는 전조는 두렵고도 또 두렵다. 절대적인 분류. 슬픔을 견뎌낸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결국 대별되는 지점에 맞닥뜨려야만 한다는 그 가혹한 진실. 그것을 겪고 나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조리하게 느껴진다는 그의 이야기,는 쉽게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상실의 사막', '무심의 호수', '(말라서) 황무지가 된 강' '자기연민의 습지''기억의 (지하) 동굴' 등을 표시한 지도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자살을 이야기하지만 그 자신을 죽이는 것은 그녀에 대한 빛나는 기억들로 그녀를 두 번째로 죽게 하는 것이기에 마침내 그 유혹을 떨쳐낼 수 있었다.

 

'내'가 무언가를 하거나 좌지우지하는 것은 '내 삶'에서 아주 힘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며 나이들어가고 있다. 이것은 비겁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냥 누구나 이 정도 지점에서는 이 정도의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싶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독서는 유효하다. 이렇게 끝나니까.

 

우리 쪽에서 먼저 구름을 불러들인 것이 아니며, 우리에겐 구름을 흩어지게 할 힘도 없다. 그 모든 건 어디선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예기치 못한 산들바람이 갑자기 불면서 일어난 일일 뿐이고, 그렇게 우리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p.195

 

작가의 비탄의 이야기에 슬프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의 주어는 '우리'가 아니다.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결국 다 한곳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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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05-28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줄리언 반스의 책을 두 권 읽었는데요, 그 두 권 모두 그다지 '좋다'거나 '재미있다'거나 하는 느낌을 받지 않았어요. 블랑카님 처럼 '잘 모른다'고 해야겠지요. 잘 모르고 그다지 호감도 없었던 그런 작가였는데요, 이 책의 소개글을 읽어보니 저도 읽어보고 싶어지더라고요. 블랑카님은 벌써!! 읽으셨네요. 블랑카님의 이 조용한 글을 읽노라니 저도 이 책에서의 줄리언 반스를 만나봐야겠단 생각이 들어요. 저도 블랑카님처럼 쉬엄쉬엄 읽게 될까요? 내처 한번에 읽게 될까요?

요즘에는 모든 이야기들이 그저 슬퍼요, 블랑카님.

blanca 2014-05-28 11:38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랬어요. 그런데 이 책에서 줄리언 반스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제야 왜 이 작가가 칭송을 받는지 십분 이해가 가더라고요. 아주 섬세하고 예리한 문장, 진짜 작가란 이런 모호한 감정을 이렇게도 적확하게 집어내 표현할 수 있는 거구나, 싶은.

그냥 요새는 쉽사리 겁나 우울해지네요. 시원한 라떼 한잔 마시면 그 순간 기분이 확 좋아지긴 해요, 다락방님.
 

내처 다시 다 읽어버렸다. 2011년 1월 이 책에 대한 페이퍼를 썼다. 김연수가 서른다섯에 쓴 글, 우연찮게 그때 나도 서른다섯이었다. "이제 나는 서른다섯 살이 됐다."로 시작하는 책. 앞으로 살 인생은 이미 산 인생과 똑같은 것일까, 반문하는 책. 청춘의 언저리에 쓰여진 그러니까 이제는 청춘이라고 명명하기 좀 뭣한 나이가 되기 전 돌아본 스무 살 그 언저리의 이야기들. 밑줄 그은 문장들이 생소하다. 그때 그의 서른다섯을 읽었던 나를 둘러싼 기억이 흐릿하다. 그러고 보면 고작 삼년 전임에도 나는 퍽이나 미성숙하고 어렸던 듯하다. 돌아보면 꼭 그렇다. 난 다 컸다고, 아니 이제 늙었다고 생각했는데...

 

 

 

 

 

 

 

 

 

 

 

 

 

 

 

스물다섯이, 서른이, 서른다섯이 잘 기억나지 않는데 스무 살은 너무나 강렬해 마치 화인 같다. 만났던 사람도 들었던 이야기도 봤던 풍경도 "넌 고작 스무 살이라고!  넌 스무 살이나 됐다고!"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 지울 수가 없다. 지금의 깨달음과 시선을 가지고 다시 스무 살을 복기하고픈 생각 가끔은 한다. 나를 둘러쌌던 것들, 내가 서 있던 자리, 그 무모하고 어리석고 일방적이었던 치기들, 돌이켜 보면 부끄러워 그대로 땅 속으로 꺼지고프게 만들고 마는 장면들.

 

 

앞으로 겪을 모든 일들을 스무 살 무렵게 다 겪었다는 사실을, 그 모든 사람을 스무 살 무렵게 다 만났으며 그 모든 길을 스무 살 무렵에 다 걸었습니다. 그 모든 기쁨을, 그 모든 슬픔을, 그 모든 환희를, 그 모든 외로움을, 스무 살 무렵에.

-<청춘의 문장들+> 중

 

 

 

처음에는 그의 서른다섯, <청춘의 문장들>이 그저 새로운 옷을 입은 줄만 알았다. 알고보니 그로부터 십년 뒤의 그의 새로운 문장들이라는 것에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받은 것만 같았다. 서른 다섯에 이미 져버린 꽃을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던 그는 이제 떠나보낸 스무 살을 돌아오지 않는 게 좋다,고 이야기한다. 정릉의 자취방에서 매 시간마다 시를 쓰고 또 썼던, 넘치는 건 시간 뿐이었던 청춘은 이제 자전거 앞바구니에 태웠던 딸 연두가 훌쩍 크고 부모가 돌아가셔서 모두가 '나'에게 기대는 그 힘든 시기를 걸어가고 있다. 대체적으로 항상 짐작과는 달라 삶을 추측하는 일을 그만 둔 지점에서 그는 대통령보다 힘들다는 전업소설가로서의 길을 성실하게 걷고 있다.

 

서른다섯에 돌아보는 스무 살보다 어쩌면 마흔다섯에 돌아보는 스무 살은 더 절절하고 강렬해 보인다. 하지만 이미 떠나온 그 지점을 돌아보는 시선은 어쩌면 더 성숙하고 담담하다.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임을 그리고 그것은 겹겹이 생생하게 그 원형대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한데 어우러져 뭉근하게 나의 기억과 내 내면을 이루는 것임을, 아니 물질적으로 내 몸을 채우고 있음을, 이제 나도 그와 더불어 조금 알 것도 같다.

 

다시 그의 책머리로 돌아간다. 그가 인용한 페르시아 시인 '루미'의 시.

그는 시인이었기 때문에 아니 지금도 시인이기 때문에 그가 내미는 시는 표피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뚫고 들어온다. 그러고 보면 그의 전작 <청춘의 문장들>에 실린 그 많은 한시 들도 당시에는 그저 바깥으로 흘러 나갔었는데 이제 다시금 만나니 재회한 친구의 진가가 이제서야 밝혀지는 것처럼 속살거리며 걸어 들어온다.

 

 

인간이란 손님이 머무는 집,

날마다 손님은 바뀐다네.

기쁨이 다녀가면 우울과 비참함이, 때로는 짧은 깨달음이 찾아온다네.

모두 예기치 않은 손님들이니

그들이 편히 쉬고 가도록 환영하라!

때로 슬픔에 잠긴 자들이 몰려와

네 집의 물건을 모두 끌어내 부순다고 해도

손님들을 극진하게 대하라.

새로운 기쁨을 위해 빈자리를 마련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어두운 생각, 부끄러운 마음, 사악한 뜻이 찾아오면

문간까지 웃으며 달려가 집안으로 맞아들여라.

거기 누가 서 있든 감사하라.

그 모두는 저 너머의 땅으로 우리를 안내할 손님들이니.

 

-루미, <여인숙 전문>(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책머리에 중 발췌)

 

모두 예기치 않은 손님들이니/ 그들이 편히 쉬고 가도록 환영하라!  아직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을 읽지 않아 지금 두 권을 나란히 놓고 읽기 시작하려는 당신들에게 확 치미는 질투. 이미 읽어버려 아쉽고 애잔하다. 마치 내가 떠나 보낸 나의 스무 살과 서른 다섯처럼. 다시 돌아간다면 더 진지하고 더 열린 정말 인간의 마음으로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진부한 마음. 아직 나는 더 늙어야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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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4-05-19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오랜만이예요.
전 스무살 한 번, 서른살 한 번, 마흔살 한 번이면 충분해요.
더 잘할거 같지도 않구요. ^^. 과거에 대한 그리움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애잔한거 같아요. 늘, 그럴거 같아요.
제가 스무살 때에도 과거를 생각하면 애잔했고, 서른살 때에도 과거를 생각하면 애잔했고,

하긴, 며칠 전에 제 나이를 깨닫고 깜짝 놀라기는 했어요. 아하하.

blanca 2014-05-19 15:33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반가워용! 마녀고양이님처럼 열정적으로 열심히 살지 못해 저는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나봐요. 막 공부 시작하신다고 하신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 만큼 훌쩍 와계신 모습 보면 더욱 대단하시다,라는 말밖에 안 나옵니다.

저는 정말 저는 마흔이 안 될 것 같았는데 내일 모레입니다. 사실 서른도 남의 이야기긴 했어요 ㅋ

세실 2014-05-19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연수 작가랑 동갑이시군요^^ 블랑카님 더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ㅎ
전 그냥 지금의 나이가 좋아요. 그 시절로 돌아가면 지금 나이를 또 겪어야 하니깐요.
우리 그냥 앞으로 열심히 살아요. 지금 진지하고, 지금 열린 마음으로^^

blanca 2014-05-19 15:35   좋아요 0 | URL
아웅! 세실님 아녀요! 김연수 작가는 저보다 나이가 일곱 살이나 많다구요 ㅋ 아, 세실님의 이런 얘기 좋아요. 그럼 저도 세실님 나이를 기대해 봅니다. 물론 그러려면 저도 세실님처럼 열심히 살아야 겠지요. 예, 열심히 살겠습니다!

세실 2014-05-21 15:20   좋아요 0 | URL
김연수가 서른다섯에 쓴 글, 우연찮게 그때 나도 서른다섯이었다. 이 글로 짐작했더니...땡이네요^^
맞아! 훨씬 어리실줄 알았아요~~~
지금 이 순간!을 즐겨요^^

페크pek0501 2014-05-20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 님, 젊으셔서 좋겠어요. 부러워요. 진짜로요.
하지만 저도 그땐 그 나이가 꽤 많은 줄 알고 지금부터 새로운 걸 시작하긴 늦어 버린 게 아닐까 불안했어요.
그러면서 40세에 작가가 되신 박완서 작가 님을 떠올리며 용기를 냈지요.
지금 생각하면 새로운 걸 시작해도 충분히 되는 나이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래요.)

저는 때론 제 나이에서 10년을 깎고 싶기도 하지만 이 나이가 좋다고 느껴질 때가 있으니 다행이에요.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면 다 지나와서 다행이다 싶거든요. 또 겪어야 한다고 가정하면 싫었던 일들이 먼저 떠올라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게 꼭 좋지만은 않답니다. 젊은 시절은 불안의 시절이 아닌가요?
선배들이 늙어가는 것도 좋단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늙으면서 얻어지는 것들이 있어요.

님을 저의 젊은 친구로 선정하고 싶습니다. ^^

blanca 2014-05-20 19:41   좋아요 0 | URL
아...페크님, 댓글이 좋아 세 번 읽었어요. 젊은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고마운 일입니다. 저는 회한이 많은 시간들이 있어요. 불성실했던 시간,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던 시간, 그래서 본의아니게 주변에 상처나 피해를 준 것은 아닌지. 그게 다 덜 컸던 때문이겠지요. 저도 모옴을 좋아해서 페크님의 성실하고 깊이 있는 모옴 읽기 여정에 저도 동행중이랍니다.^^ 오늘은 너무 덥네요. 벌써 여름이 왔나 봐요...

후애(厚愛) 2014-05-22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안부가 늘 늦네요..^^;;

<청춘의 문장들> 선물 받았는데 저도 빨리 읽어봐야겠습니다.^^

blanca 2014-05-23 12:10   좋아요 0 | URL
후애님, 벌써 선물 받으셨군요! 즐겁게 몰입하며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요즘 대단히 혼란스럽다. 무엇보다 대체로 인간은 선의와 상식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했던 기반이 흔들린다. 맹자가 인간에게는 우물에 빠진 아이를 앞뒤 재보지 않고 무조건 달려가 구하는 측은지심이 있다,고 주장했던 성선설 자체가 성악설에 대항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국가와 사회를 만들어 개개인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받는다는 사회계약설도 어불성설처럼 들린다. 내가 딛고 있는 땅이 흔들리는 느낌이다.

 

거대한 시스템이 있고 그 시스템에 내가 들어가 있을 때 그리고 그 시스템이 나와 가족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을 때 과연 용기있게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나라는 인간이라고 뭐 별건가? 고작 그런 게 인간이고 그런 인간이 아귀다툼처럼 서로 짓밟고 올라서다 자기 죽는 날도 모르는 채 마침표를 찍고 마는 게 삶인가? 진실, 선의, 대의, 사랑 이런 것들은 하나의 허상인가? 그냥 소망의 언어이고 환상이고 착시인가? 질문들과 회의들로 가슴이 막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없을까.

 

레이먼드 카버는 살면서 미친듯이 짧은 이야기들을 썼다. 그는 비교적 환상이 없었던 사람인 것같다. 자신이 쓴 소설에도 그 소설이 아주 그럴듯한 힘이나 영향력을 가질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번번이 전율한다. 아주 공고했던 일상에서 여덟 살 아이의 갑작스런 죽음에 당면한 부부와 빵집주인의 교감.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정말 별것 아닌 이야기가 아니다. 예전에 아이가 죽을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무너졌을 때 카버의 이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분명 정말이지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이 덩치 큰 알코올 중독자였던 소설가와 만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이는 계속 아픈 잠에 빠져 있었는데 병원 밖 하늘에서는 너무 예쁜 눈발이 내리기 시작했고 직원들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었다. 이것은 극한의 부조리이자 불합리한 일이라고 되뇌어도 세상은 그런 것임을 이미 카버는 알고 있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도 내가 아무리 이 세상에서 극한의 고통을 겪어도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저만치 신나게 돌아간다. 그리고 타인의 고통 앞에서 나또한 그러한 배경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이동진의 낭독을 들으며 다시 한번 그 아팠던 기억이 떠올랐다. 읽는 것과 듣는 것은 또 달랐다. 무심코 지나쳤던 대목들이 또 지금의 이 비극들과 맞물려 더 절절하게 다가왔다. 정말 힘들면 잠들 수 없고 무엇보다 먹을 수 없다. 그렇다면 먹게 해 주는 것은 최고로 어렵고 가치 있는 위로인 셈이다. 하늘나라로 가 버린 스코티의 생일케잌을 준비했던 빵집 주인은 이 부부에게 자신이 막 구운 계피롤빵을 먹게 한다. 엄마는 아빠는 그 빵을 먹을 수 있게 된다. 먹을 수 있으면 그 다음이 있다. 먹기까지가 힘들다. 이러한 정확한 지점을 포착한 사람이 바로 레이먼드 카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타인과의 교감, 공감, 위로를 이야기한다. 무의미하지 않다고. 정말 있다고.

 

 

 

 

 

 

 

 

 

 

 

 

 

 

 

많이 살아 본 사람, 나보다도 훨씬 멀리 간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사랑이 있습니까? 희망이 있습니까? 대체 사람으로 태어나 산다는 게 뭐죠? 이다지도 추악하고 더러운 일들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그럼에도 내가 노인이 되면 천상병 시인처럼 이 세상을 즐거운 소풍지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이혼하고 군부 쿠데타로 망명하고 다 키운 딸을 희귀병으로 잃어야 했던 칠레의 소설가 이사벨 아옌데의 이야기를 찾아본다. 책귀퉁이는 벌써 노랗게 바래어 간다. 줄그은 부분들을 되짚는다. 그녀는 죽은 딸 파울라에게 이야기한다. 내게 인생의 경로를 결정짓는 본질적인 사건을 통제할 힘은 없었다고. 인생은 물건들이 잘 보이도록 제대로 세워 놓은 다음 후대에 남길 목적으로 찍는 사진이 아니라고. 지저분하고 무질서하다고. 그럼에도 운과 우리의 착한 마음을 믿고 일상이 삶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고.

 

십팔 년 넘게 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이미 그 점에 대한 의심은 극복했기 때문에 사랑에 대해서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고. 결국 무거운 짐들을 버리고 계산을 마치고 났을 때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 사랑뿐이었다고, 이사벨 아옌데는 이야기한다.

 

 

 

정말이지 나는 모르겠다. 더 살아봐야 할 것 같다. 더 배우고 더 찾아봐야겠다. 그러나 무기력감과 허무감에 침잠하지는 않으련다. 그것은 또 다른 비겁한 타협이다. 그래도 선의를, 사랑을, 위로의 힘을, 공감의 저력을 믿어보고 싶다.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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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7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8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8 0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8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14-05-08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쵸 힘내서 살아가야하는게 살아남은 자의 몫이죠

blanca 2014-05-09 09:38   좋아요 0 | URL
하루 하루 오늘보다는 더 나은 내일을 만들며 살아가고 싶은데 항상 배우고 노력하고 다잡아야 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꼬마요정 2014-05-09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거죠. 언제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극단적인 긍정은 독이 되지만, 실패를 인정하는 긍정은 부정보다는 마음이 편하다고 제멋대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blanca 2014-05-11 09:2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진정한 의미의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 자들이 또는 거기에 무심코 동조하거나 침묵하는 행위가 이 비극을 만들었는 지도 모르겠어요.
 

진짜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가 있다. 진지하고 심각한 르포르타주까진 아니더라도 그냥 한 사람의 오롯한 추억들, 사는 이야기들, 살아갈 이야기들을 조곤조곤 듣고 싶을 때 '수필'이라는 장르로 다가가게 된다.

 

중학교 국어 시간, 나는 생전 처음으로 '수필'이라는 장르를 진지하게 조금은 지루하게 배우고 한 문장, 한 문장, 줄을 긋고 이미 해석되고 분석되어 버린 한 메모광의 메모에 대한 천착과 한 의사가 쓴 아버지의 손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지금 그것을 둘러쌌던 그 분분하던 해석들은 날아가 버리고 그들의 소소한 이야깃거리들이 열네 살 독자의 생동하는 호기심과 함께 어우러져 남는다. 읽은 것들도 결국 추억이 된다.

 

나는 아이를 업는 데 서툴다. 요즘 나오는 아기띠들은 아이를 앞으로 안는 데에 더 편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첫애를 낳았을 때 친정 엄마가 동네에서 산 처네는 지금도 순전히 할머니용이다. 나도 흉내를 내어 보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게 허리도 못 펴겠고 시간이 지나면 점차 아이는 내 등을 줄줄 타고 내려온다. 신기하게도 할머니는 아이를 업고 국도 끓이고 설거지도 하고 재우기도 한다. 한마디로 거칠 것이 없다. 예전에는 다 그렇게 키웠다고들 한다. 육아와 가사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더 고달팠던 것이기도 하고 더 가능한 것들이 많기도 했던 시간. '처네'는 그런 면에서 어떤 그리움, 아련함을 불러일으킨다. 목성균이라는 작가를 알지 못했는데 우연히 그의 유고 수필집 제목 <누비처네>가 너무 좋아 그를 만나게 됐다. 그의 유년시절, 청년시절, 중년시절, 노년시절을 아우르는 이 방대한 수필집이 마치 한 인간의 생애를 역사적, 지리적 배경과 잘 섞어 뭉근하게 끓여낸 것 같아 이 사소하지 않은, 소소하지 않은 이야기에 오랜만에 감동을 받았다. 그의 그 단아한 문장들, 마치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는 듯한 묘사들, 귓전에 들리는 듯한 목소리들에 그저 아연하다.

 

 

 

 

 

 

 

 

 

 

 

 

 

 

 

추석을 쇠고 우리는 아버지의 명에 의해 근친을 갔다. 강원도 산골 귀래 장터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한가위를 지낸 달이 청산에 둥실 떴다. 그때부터 십리가 넘는 시골길을 걸어가야 한다. 아내는 애를 업고 나는 술병과 고기 둬 근을 들고 걷기 시작했다. 아내 옆에 서서 말없이 걸었다. 달빛에 젖어 혼곤하게 잠든 가을 들녘을 가르는 냇물을 따라서 우리도 냇물처럼 이심전심 걸어가는데 돌연 아내 등에 업힌 어린것이 펄쩍 펄쩍 뛰면서 키득키득 소리를 내고 웃었다. 어린것이 뭐가 그리 기쁠까. 달을 보고 웃는 것일까. 아비를 보고 웃는 것일까. 달빛을 담뿍 받고 방긋방긋 웃는 제 새끼를 업은 여자와의 동행.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그때 처음 구체적으로 알았다.- 누비처네 중

 

목성균은 이때 처지가 곤궁했다. 서울에 올라가 벌인 인쇄업은 어려웠고 차마 면이 서지 않아 첫애를 낳은 지 백일이나 지난 아내를 보러 고향집으로 내려가지도 못했다. 이러한 처지를 감안한 그의 아버지는 아이를 업고 근친을 갈 누비처네를 살 돈을 아들에게 소액환으로 보내 내려오기를 독려한다. 바로 그 누비처네에 아이를 업고 아내와 함께 처가에 가는 길의 이야기다. 그의 행복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았다,는 고백이 와닿는다.가난과 싸웠던 젊은 아빠는 마침내 아이 셋을 오롯이 키워내고 직장에서 퇴직 후에 이러한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그는 노년에 등단했다. 글만을 위한 삶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살아내고 그리고 썼다. 어린 시절 진외가의 개소주를 손주에게 먹이기 위해 친정길에 나섰던 할머니와의 추억들, 산림 공무원을 하며 오며가며 만났던 사람들과의 이야기, 중년이 훌쩍 넘어 아내와 여행 간 이야기, 손주들과의 아기자기한 한때. 그가 젊었을 때부터 글을 쓰는 것이 업이었다면 갖지 못했을 이야깃거리가 많다. 불현듯 동인도회사의 회계원으로 수십년 간 일했던 영국의 수필가 찰스 램이 떠올랐다. 그는 목성균과 달리 가정을 갖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생계를 위하여 매일 직장에 출퇴근해야 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그가 퇴직하던 날 그의 이야기는 초로의 사내가 썼다고 보기에 굉장히 발랄하고 사랑스럽다. 내게 아들이 있다면 이름을 '나싱투두'로 붙이고 아무 일도 하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 하지만 찰스램이 회계원으로 근무했던 수십 년이 없었다고 해도 찰스 램의 다감하고 아기자기한 에세이들이 가능했을까 하는 데에는 의문이 든다. 그러고 보면 레이먼드 카버가 돈을 벌며 막간을 이용하여 단편 소설을 써내고 목성균 작가가 문예창작가를 중퇴하고 나서 한참이나 지나 직장에서 퇴직하고나서야 등단하고 찰스 램이 퇴근 후에야 글을 쓸 수 있었던 상황들은 무조건 비관시 될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덕분에 우리는 비근한 일상사가 농밀하게 배어 있는 그들의 글을 곁에 둘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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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를 낳고 2008년 첫째를 키우면서 작성한 메모를 훑어본다. 낮잠 시간, 이유식량, 육아를 책을 보고 하려 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는 여덟 살의 자리에 엄마, 아빠가 세상 전부였던 낯가림이 심한 아가가 기어온다. 영원할 것 같았던 모습은 다이어리에 희미한 흔적처럼만 남아있다. 아쉽고도 또 아쉽다. 더 여유를 갖고 융통성 있게 순간을 즐기며 하지 못한 시간들에 대한 후회가 밀려온다. 그리고 더 많이 적어두지 못해 기억이 희미한 흔적으로만 남은 것도 아쉽다.

1851년 3주 동안 자신의 다섯 살 난 아들을 돌보며 썼던 이 일기는 자기 충족적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다른 작품에 기대지 않고 홀로 설 수 있는 작품으로 상당히 매력적이고, 무표정한 듯하지만 아주 재미있어서 호손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인상을 줄 정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손을 음울하고 괴로움을 많이 겪은 인물로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는 사랑이 많은 아버지이자 남편이었으며, 품질 높은 시가와 한두 잔의 위스키를 좋아하고, 장난기 있고 온화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 <작가란 무엇인가> 폴 오스터 편 중 

 

너새니얼 호손이 아내가 친정으로 떠난 근 3주 동안 다섯 살짜리 둘째 아들 줄리언을 돌보며 적은 육아 일기는 그를 사랑하고 존경했던 후 세대의 작가 폴 오스터를 통해 세상에 나온다. 폴 오스터의 파리 리뷰 인터뷰 내용 중 언급된 이 일기는 내 바람을 알기라도 한 듯이 뒤이어 번역되어 무척 기뻤다. 폴 오스터의 이야기처럼 무언가 좀 음울하고 기기묘묘한 인상을 풍기는 이 작가가 삼십 대 후반 늦은 결혼으로 얻은 사랑스러운 아들에 대하여 어떤 기록들을 남겼을까 무척 궁금했다. 1851년 마흔 일곱이나 된 아버지가 다섯 살 아들을 삼 주 동안이나 홀로 감당할 수 있었을까, 또 어떻게 놀아주고 먹이고 재웠을까, 하는. 사실 요새 같이 아버지의 역할이 강조되고 각종 정보도 많은 시기에도 아버지가 홀로 사내아이를 돌보기란 쉽지 않다.

 

 

 

 

 

아침 일곱 시, 아내가 줄리언과 나를 붉은 농장에 남겨두고 처형 엘리자베스와 첫째 우나, 막내 로즈버드와 함께 집을 떠났다. 이 모습을 보고 우리 애늙은이가 하는 말.

"아빠, 애기가 가니까 좋지 않아?"

 

자, 이렇게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위대한 작품을 남긴 작가는 개구진 다섯 살 사내 아이를 온전히 돌봐야 하는 과업을 수여받았다. 다행히 줄리언은 아홉 시가 되기 전에 잠들고 일곱 시 즈음에 일어나는 규칙적인 수면습관과 혼자서도 잘 놀고 가끔 함께 놀아주면 더없이 신나하는 아주 사랑스럽고 애교많은 아이다. 아이는 풀 위의 이슬을 '요정들이 작은 주전자를 기울여 풀과 꽃에 물을 부었다'고 묘사한다. 아이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따르는 <백경>의 허먼 멜빌 아저씨를 길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말을 타고 돌아온다. 아버지는 아이가 잠든 틈에 멜빌과 시간, 영원함, 이 세상과 그 다음 세상, 책, 출판업자, 가능한 문제, 불가능한 문제를 두고 밤이 깊도록 이야기하는 여유도 누린다.

 

아버지는 여름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아이의 재잘거림을 때로는 거추장스러워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아이를 있게 한 아내와 아이를 더없는 축복으로 여기며 함께 한 시간들을 하나 하나 눌러쓴다. 매일 아침 아이의 머리를 말고 우유를 가지러 가고 산책을 하고 방문객을 맞는 단조로운 생활들은 갈급하게 하루씩 줄어들고 아내를 오망불망 기다리며 아이를 온전히 맡기고 자유로운 시간을 기대하는 평범한 아버지의 모습은 할 수 만 있다면 아이가 말한 모든 것을 기록해 두고 싶어했던 바람과 맞물려 눈물겹게 아름답고 정겹다.

 

나의 육아일기. 아직은 내 손 안의 여덟 살 아이와 7개월의 아기. 결국 모든 것은 사라지고 비처럼 쏟아지던 그 수많은 자질구레함들과 아이의 은성한 언어들은 가뭇없어질 것이다.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고 시간이 빨리 갔으면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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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4-03-26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바로 그 책이었군요! 아하.

blanca 2014-03-27 10:49   좋아요 0 | URL
예, 저도 책 상세 설명 뜨기 전에 사실 무슨 책인가 했는데 제가 기다렸던 바로 그 책이었어요!

다락방 2014-03-27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볼래요!

2014-03-27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8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4-03-29 1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기를 엮은 책은 묘한 매력이 있어서 저도 좋아해요.
저도 시간에 대해서 님과 같은 생각을 했었는데... 이젠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는 쪽으로 기울어졌어요.
하루가 지나가는 것도 아쉬워요. 나 오늘 뭐 한 거지? 하면서... ^^

blanca 2014-03-31 10:04   좋아요 1 | URL
페크님, 부모님들과 어제 시간을 보냈는데 그냥 그 흘러가는 시간도 너무 아까운 거예요. 게다가 벚꽃. 이런 아름다운 꽃들을 나는 아무리 길게 봐도 이제 오십 번 이상 볼 수 있을까, 하니 또 슬프고... 이상해요. 봄을 타는 건지. 요새 자꾸 울컥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