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에 대해 잘 모른다. 솔직히 그의 작품은 한 권 정도 읽은 게 다. 그마저도 온전히 몰입하기 힘들었다. 그를 작가로서 아주 좋아하지는 않는다.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고 나의 이해력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신작이 그 자신에 관련된 이야기라는 것에 주저하지 않고 다시 그를 만나기로 했다. 죽은 아내는 영국의 유명한 문학 에이전트였다고 한다. 뇌종양으로 거리에서 쓰러진 지 삼십 칠일 만에 운명하고 만 비극적인 최후의 주인공기도 하다. 그는 아내의 마지막을 함께 했지만 그것이 이야기로 떠돌기를 바라지 않은 듯 침묵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작품으로 이야기한다.
비상의 죄
아내 팻에게 바친다,는 제사. 그리고 비상의 죄라는 표제 아래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 보라. 그러면 세상은 변한다...."는 포문. 표지가 암시했듯 기구에 미친 사람들. 프레드 버나비, 투르나숑, 베르나르. "하늘을 나는 문제에 개입하는 건 신의 섭리를 거르스는 행위"이기 때문일까. 19세기 기구의 역사, 그리고 그 기구에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 나는 어리둥절했다. 분명 작가의 아내 팻과의 사별 이야기라고 했는데 웬 뜬금없는 기구 이야기일까.
고도는 '모든 것을 고유의 상대적인 비율로, 또는 진실에 가깝게 축소시킨다.' 근심, 후회, 환멸의 감정은 낯설어진다. '무관심과 경멸, 태만이 이리도 쉽게 떨어져 나가다니...... 그리고 용서가 내려오다니.'-p.26
평지에서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보라,는 이야기는 반복된다. 그리고 이제는 사랑이다. 땅의 자식인 우리가 신 못지 않게 멀리 가 닿을 수 있는 방법, 바로 사랑이란다. 그러나 여기에서 추락은 나쁜 예감처럼 덧붙여진다. 모든 사랑 이야기는 비탄의 이야기라는 첨언. 아, 줄리언 반스는 비로소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는구나. 비상의 죄를 저지른 버나비와 여배우 베르나르의 비탄으로 끝나는 짧은 사랑의 이야기.
깊이의 상실
젊은 시절, 세상은 노골적이게도 섹스를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나중에는 사랑을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그 후에도 여전히 마찬가지로-적어도 우리가 운이 좋다면(혹은 반대로 운이 나쁘다 해도)- 세상은 슬픔을 견뎌낸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 이런 분류는 절대적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가로지르는 회귀선이다.
-p.110
작가 박민규가 어느 지면에선가 이 세상 사람들 모두에 대한 연민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어릴 때는 사람들 간의 공통점보다는 눈이 부신 곳을 디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의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 가에 시선이 갈 때가 있다. 하지만 나이듦은 결국 모든 사람을 지면으로 더 나아가면 지하로 끌어내린다. 결국 화두는 견뎌내는가, 그렇지 못한가로 수렴한다. 그의 의견에 동조한다. 그리고 그는 아내 이야기를 드디어 시작한다.
우리는 30년을 함께했다.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서른두 살이었고 그녀가 죽었을 때는 쉰여섯 살이었다. 그녀는 내 삶의 심장이었다. 내 심장의 생명이었다.
-p.111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다. 사랑했던 아내와의 재회에의 막연한 희망이나 기대가 없는 그 황량한 그곳에서 아내와의 작별을 또렷하게 직시하는 모습은 이 섬세한 남자가 어떻게 삶의 비탄을 딛고 나아가는 지에 대한 하나의 처절한 탐사의 보고다. 차마 쉽게 읽어낼 수가 없어 멈추고 또 멈추게 된다. 그의 슬픔에 연민을 느끼기도 하지만 결국 나, 아니면 남편이 겪어야 할 일이라는 전조는 두렵고도 또 두렵다. 절대적인 분류. 슬픔을 견뎌낸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결국 대별되는 지점에 맞닥뜨려야만 한다는 그 가혹한 진실. 그것을 겪고 나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조리하게 느껴진다는 그의 이야기,는 쉽게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상실의 사막', '무심의 호수', '(말라서) 황무지가 된 강' '자기연민의 습지''기억의 (지하) 동굴' 등을 표시한 지도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자살을 이야기하지만 그 자신을 죽이는 것은 그녀에 대한 빛나는 기억들로 그녀를 두 번째로 죽게 하는 것이기에 마침내 그 유혹을 떨쳐낼 수 있었다.
'내'가 무언가를 하거나 좌지우지하는 것은 '내 삶'에서 아주 힘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며 나이들어가고 있다. 이것은 비겁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냥 누구나 이 정도 지점에서는 이 정도의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싶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독서는 유효하다. 이렇게 끝나니까.
우리 쪽에서 먼저 구름을 불러들인 것이 아니며, 우리에겐 구름을 흩어지게 할 힘도 없다. 그 모든 건 어디선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예기치 못한 산들바람이 갑자기 불면서 일어난 일일 뿐이고, 그렇게 우리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p.195
작가의 비탄의 이야기에 슬프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의 주어는 '우리'가 아니다.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결국 다 한곳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