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의 서툴 정도로 솔직하고 자주 멈칫거리며 어떤 경계에서 머뭇거리던 젊은 배우 이성재를 기억한다. 이제 이성재는 내년에 대학교에 진학하는 딸을 둔 중년의 남자이다. 그는 루게릭병에 걸린 아버지의 볼에 뽀뽀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어린 시절에도 스킨쉽이 거의 없었던 부자는 이제서야 볼에 입을 맞추는 사이가 됐다. 그는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티비 앞에서 밤 열두 시가 넘어 나도 운다.

 

 

사회역사학자 로널드 블라이스는 말했다. '노인들에게는 접촉이 필요하다. 노인들은 키스와 포옹이 필요한 인생 단계에 다다랐다. 그러나 의사 외에는 누구도 그들을 만지지 않는다. <중략>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아버지를 만나고 헤어질 때 껴안으면서 인사를 하면, 아버지는 몸을 떨면서 울고 또 운다.

-데이비드 실즈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중

 

 

 

 

저자 데이비드 실즈의 아버지는 놀랍게도 97세다. 데이비드 실즈는 이성재보다 나이를 다섯 살 정도 더 먹었다. 그도 아버지를 안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거부하지 않는다. 이성재의 아버지처럼 아들의 뽀뽀를 얌전히 받는 대신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흐느껴 울기까지 한다. 아들은 에너자이저 토끼 같았던 아버지가 이제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히 깨닫는다. 나이듦을 이해하는 것이 죽음과 화해하는 것과 동의어는 아니다.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죽음'이라는 화제를 입에 올리는 것을 저도 모르게 저어한다. 타인의 고통 속에서 태어나 자신의 고통 속에서 죽어간다는 경구를 인용하며 삶의 단계는 의학적으로 통계적으로 경험적으로 설명되고 고백된다. 이 책은 저자의 인터뷰 내용처럼 '파괴적 논픽션'이자 통렬한 자서전이다. '나이듦'과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아프게 더듬는다. 우리는 누구나 늙고 죽어 사라진다. 이 당연한 명제를 이다지도 길게 이다지도 와닿게 듣다 보면 크리스마스 이브의 몽환적인 낭만성은 허무한 사기극처럼 다가온다. 인간의 삶의 몰락성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는 구태여 멀리 찾지 않아도 된다. 슬프게도 그것은 우리의 부모님에게서 뼈아프게 배워야 한다.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언제나 아들에게 이겼지만 결국은 질 것이고 데이비드도 그러하다,고 서글프게 고백한다. '죽음'과 '시간'은 언제나 우리 위에서 걸어간다. 백전백승이다. '지금' , '여기'를 공유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마도 백 년 이상의 시간차는 불가능하거나 어려울 것이다.

 

어머니에게서 벗어나 내 의지대로 살았다고 믿었는데 세월이 흘러 돌이켜보니 나는 결국 어머니 손바닥 위에 있었을 뿐이었다.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은 나이를 먹는가 보다.

-이근후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싶다>

 

 

 

 

이 책을 아버지 이름 앞으로 배달하고 선물 메모를 넣었다. 과거의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판하기도 하고 나의 다듬어지지 않은 감정들을 쏟아낸 적도 있다. 지금 막내 남동생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아이를 낳고 노모를 봉양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아버지의 손을 이제 잡아드리고 싶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아이를 낳고 부딪히게 되는 각종 한계 상황들 앞에서 어쩌다 한번씩 한 실수로 부모의 전체 역할을 폄하하고 심판하는 것은 지극히 유아적인 일이다. 누구나 상처는 있다. 그 상처 위로 시간이 지나간다. 그리고 그 시간의 끝은 작별이다. 마침내 '나'도 사라진다. 그 다음 우리는 서로 안을 수도 입을 맞출 수도 사과할 수도 고마워할 수도 용서를 받을 수도 없다.

 

더 많이 사랑하고 그보다는 더 많이 표현할 일이다. 데이비드 실즈가 알려 준 것. 고대 페르시아 사람들은 인생의 첫30년은 사는 데 쓰이고, 이후 40년은 삶을 이해하는 데 쓰여야 한다고 믿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크아이즈 2013-12-25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아버지를 만나고 헤어질 때 껴안으면서 인사를 하면, 아버지는 몸을 떨면서 울고 또 운다.
- 엄마한테 스킨십은커녕 전화도 잘 안 드렸는데, 이 문장보고 몸이 떨리네요. 누구나 늙는 것을...
글 잘쓰는 블랑카님, 메리크리스마스^^

blanca 2013-12-26 12:06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크리스마스 잘 보내셨어요? 저도 정작 아버지,어머지 손을 잡았던 기억도 잘 나지 않아요. 지금도 잡을 수 있을까, 안아드릴 수 있을까, 괜히 부끄럽게 느껴져요. 내년에는 부디 더욱 더 아쉬움이 남지 않는 표현하는 딸들이 되어 보아요^^

프레이야 2013-12-25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전 오늘 큰딸이랑 갈등을 빚으며 설왕설래 하다가 제가 그랬네요, 니가 뭘알겠냐고, 니가 무슨 내속 엄마속을 알겠냐고, 지적질 해댔던 옛날의 나를 돌이켜보며 어머니의 삶, 나아가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이렇게 더 살아가고 있나보다 끄덕이게 되네요. 즐거운 성탄 보내셨지요!

blanca 2013-12-26 12:08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는 제가 부모님한테 했던 언행들 생각하면 --;; 그런데 참 사람이라는 게 딱 나이에서 고만큼의 앎과 시야를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또 그런 실수들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은. 이제는 돌아보았을 때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은 삶을 살고 싶은데 잘 할 수 있을지...

저는 아직 산타를 믿는 딸의 선물을 택배 아저씨께서 딸과 함께 있을 때 배달해 주시는 기염을 토하셔서 ㅋㅋ 후다닥 숨기느라 쇼좀 했어요. ^6^ 크리스마스 낭만적으로 잘 보내셨죠!

마태우스 2013-12-25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지라는 단어, 저한테는 좀 더 의미가 크죠. 아버지를 끝내 용서하지 못한 채 보내야 했으니깐요. 엊그제가 아버지의 12주기 제사였답니다.... 암튼 그건 그거구요, 블랑카님 글은 언제나 감탄이 나오게 만드네요. 서재달인이란 타이틀이 정말 당연해 보이는 글솜씨.... 새해에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다

blanca 2013-12-26 12:10   좋아요 0 | URL
아....... 어떤 댓글을 달 수 있을런지....
마태우스님은 엊그저께도 티비에서 뵈서 너무 반가웠어요.
그런데 피부 및 외모가 계속 너무 일취월장이에요. 정말 카메라 마사지라는 게 있는 걸까요?^^;;
크리스마스는 잘 보내셨죠?

마태우스 2013-12-27 22:52   좋아요 0 | URL
크리스마스 솔직히 별루였어요 ㅠㅠ 그냥 뭐, 일했죠...ㅠㅠ 아내와도 사이좋게 못지냈어요 흑흑. 제 좁아터진 소견머리 땜시...

마녀고양이 2013-12-26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께서는 부모님께 손을 내미시는군요.
저는 부모님과 밥도 먹고, 김치도 얻어오고, 수다도 떨지만
여전히 제 감정을 활짝 열어보이기가 어렵답니다. 마지막 문구, 좀 더 많이 표현해야 한다는.... 징 울리네요.

blanca 2013-12-27 11:19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아직도 저는 멀었지만 그래도 퇴보하지 않고 나날이 조금 더 나아지려고 노력은 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자꾸 예전에 했던 실수들이 생각나서 곱씹을 때마다 너무 부끄러워서 나중에는 오늘을 생각할 때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