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를 한참 들여다보게 된다. 흑백 사진. 단발 머리의 젊은 엄마와 어깨까지 닿는 금발머리의 사랑스러운 사내 아이는 코를 맞대고 웃고 있다. 가스 렌지의 손잡이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장소는 부엌. 행복하고 안온하고 뭉클해 보이는 장면.
아이는 열여덟 살에 이러한 엄마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입밖에 내어 말한다. 이십오년여 동안 이 지극히 엄마다워보이는 엄마는 정신이 병들어 아들에게 엄마다운 엄마로서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한다. 아들은 그러한 엄마가 죽어도 괜찮다,고까지 생각하지만. 엄마가 죽었다,는 전화 앞에서 전혀 괜찮지 않음을, 주먹으로 한 대 가격당한 듯한 아픔을 느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들은 건강할 때에 부엌에서 아이들에게 엄마표 돼지갈비와 딸기아이스크림을 만들어 주며 행복해했던 엄마의 모습을 찾아 직접 그 요리들을 재연한다.
아들은 이라크 침공현장, 예루살램 등의 그 살육의 현장에 직접 있었던 종군기자다. 그와 엄마와의 관계는 남들처럼 평범하지 못했다. 엄마는 술을 마셨고 환청을 들었고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엘리자베스 데이비드의 요리책을 교본으로 부지런히 주방에서 아이들을 위한 요리를 했던 그 건강하고 활기찬 엄마의 모습은 거짓말 같았다. 하지만 그 찰나 같았던 순간들 속에서 모자는 특별한 유대와 공고한 관계를 형성한다. 나머지의 그 파괴되어 가는 모습들이 엄마의 전체를 규정지을 수는 없었다. 애도의 길은 처음에는 곧고 평탄하다 이윽고 생의 가혹한 우연의 요철에 걸려 넘어진 엄마가 어떻게 가족에게서 멀어져 가는지를 더듬고 기억해 내야 하는 곳으로 닿아 있다.
군데군데 삽입되어 있는 사진이 너.무.나. 눈물겹도록 예쁘다. 일부러 포즈를 취한 듯한 작위성은 걸어나가고 그냥 그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해 내었다. 광고 사진작가였던 아버지가 뷰파인더에 담아 응고시킨 순간들은 그 자체로 이 슬픈 가족의 예쁜 일대기다.


아무리 해도 내일도 오늘과 같을 것 같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여전히 거기 있을 것 같다. 인위적인 구획으로 나이와 시간을 재단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느새 부모님은 늙어 있고 병들고 떠나고 나의 아이들은 어깨 높이만큼 자라 더이상 나의 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간에 당도한다. 더 나아가면 내 옆에는 눈물 흘리는 사람들, 모든 것은 꿈만 같은 시간들을 뒤로 하고 생에 작별을 고해야 하는 시간이 온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런 사실들을 무시하고 살 수 없다는 깨달음에 자꾸 우울해진다. 아들은 엄마의 행복하지 못했던, 그래서 그 자신도 괴롭고 아팠던 반생을 그 자체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아픔에서 조용히 걸어나간다.
오늘 엄마가 반찬을 바리바리 싸들고 지하철을 한 시간 가까이 타고 집에 왔다. 엄마가 이렇게 내 옆에 있어 주어 너무 좋다,는 말을 하지는 못하고 "친정 엄마가 반찬해 주니 좋다"고 표현했다. 엄마가 엄마다운 채로 그렇게 나도 엄마의 딸다운 대로 아주 아주 나중에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을까. 나도 나다운 대로 그렇게 내 딸과도 떠올려도 괜찮을 정도의 작별의 순간을 맞을 수 있을까. 그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