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은 나의 삶을 다시 사는 일이 아니다. 나의 아쉬움을 좌절을, 못 다이룬 소망을 이루는 매개체가 아니다. 아이라는 존재는. 생은 단 한번 뿐인 삶을 가지고 비록 그것이 새로운 생명을 낳을지라도 새로운 삶을 선물 받는 것과 동의어는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환기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정말이지 쉽지 않다. 아이의 결핍은, 못남은 나의 어린 시절 상처를 들쑤시고 아이가 거부받거나 좌절하는 일은 나의 그것들을 다른 형태와 색채로 그러나 비슷한 때로는 더한 강도로 돌아오게 한다. '극성엄마'는 그러한 것들을 극복하지 못하는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들었다. 아이의 성취를 자신의 성취로 오해하고 아이의 성장을 자신의 성과로 곡해하는 모습이 그리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 주변의 수많은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뒤에는 동양적인 극성 엄마의 아우라가 있다. 심지어 로맹가리도 과목마다 과외 교사가 있었다.

 

 

 

 

 

 

 

 

 

 

 

 

 

 

솔직히 잘 알지 못하면서 이 책의 제목이 싫었다. 그냥 초극성 엄마의 자화자찬, 교조적인 조언남발일 줄 알았다. 저자 에이미 추아 자신조차 소위 엄친아다. 부부가 나란히 미국 명문대의 교수이자 유명한 책의 저자다. 중국인 이민자 2세대, 유대인 학자와의 만남. 딸 둘. 강아지 두 마리. 흔들리기 쉬운 나를 포함한 수많은 약한 엄마들을 깃발 하나 들고 현혹시키는 내용이 아닐까, 했다.

 

그런데 이 책은 타이거맘(저자의 띠에서 비롯된 호칭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돌적이고 극성인 엄마가 떠오르기는 하다)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뼈아픈 자기 반성의 고백이다. 학자인 부모 밑에서 큰 성공한 이민 2세대의 여인의 여행지에서조차 딸의 피아노 연습장을 찾아 헤맨 그녀의 열성의 정당화나 달콤한 결말을 전제한 책이 아니었다. 그녀의 성공한 딸 소피아가 이 책의 주인공이 아니라 끊임없이 중국식 교육관에 반항하는 둘째 딸 룰루에 관한 눈물어린 역사이자 함께 그려나가는 하나의 비정형화된 자녀 양육의 지도다. 카네기홀에서 피아노 독주를 훌륭히 해 낸 언니와 더불어 바이올린을 시작한 룰루는 때로는 강압적이고 비민주적인 엄마의 양육에 온순하게 순응하지 않고 반항하고 튀어오르고 거부하며 엄마를 밀어내고 엄마의 허영심과 자만을 잔인하게 난도질한다. 함께 간 가족여행의 식당에서 컵을 깨뜨리고 엄마를 저주하는 말을 내뱉는 딸아이의 반항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장면은 이것이 논픽션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나도 이런 딸의 사춘기를 맞이한다면. 나는 견딜 수 있을까.

 

저자는 너무나 위험할 정도로 솔직하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솔직하게 쓴 책은 잘 못 본 것 같다. 이끄는 대로 교과서적으로 잘 따라와주고 목표점을 상회해서 저 높은 곳으로 뛰어가는 큰딸에 도취된 부분도 그녀의 솔직한 자만이 귀엽게 느껴질 정도다. 왜냐하면 그녀는 둘째 딸이 끝내 자신이 그려놓은 청사진 바깥으로 튀어 나갔던 그 순간까지도 가감없이 너무나 솔직하게 자신의 패배와 자신의 실망감과 상실감을 펼쳐 놓았으므로. 그녀는 기대치가 높고 절제와 억압이 묘하게 어우러진 우리와는 공통점이 많은 그 자식을 틀 안에 가두어 조련하는 교육관에 대하여 찬사를 늘어놓고 지나친 방종과 자유와 반항이 난무하는 미국식 교육관을 비판, 비난하며 자신만만해하던 자신의 과거를 온전히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이 부분도 사실 지극히 현실적이다. 둘째 딸이 뜻대로 안 풀렸다고 해서 그녀가 타이거맘을 포기하지 않는 대목, 바이올린 대신 테니스를 택한 딸의 뒤를 몰래 따라다니며 좋은 코치와 훈련 과정을 알아보는 모습의 고백은 사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이기도 하다. 내가 생각했던 바로 그 가치관 자체가 흔들린다고 해서 그 가치관 전체를 송두리째 폐기 처분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좀 더 솔직해 지기로 한다, 면 우리는 그 누구보다 솔직한 아주 영특하고 열성적인 한 여인의 자식교육 과정에 대한 흥미로운 고백을 듣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은 사실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한 책이라기보다는 중국인 여성이 미국 사회에서 노력하여 상류층에 진입하고 자식들에게도 그 성공의 울타리를 든든하게 둘러쳐 주고 싶어하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어느 정도는 속물적인 욕망에 대한 가감없는 고백, 그리고 그 욕망의 지도에서 삶의 더 큰 지도는 어떻게 휘어지는지, 어긋나는 지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섬세한 감정의 결을 파헤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첫장은 마지막을 이해하고 그녀의 삶을 이해하는 절대적인 단서이자 복선이다.

 

이것은 한 어머니와 두 딸, 그리고 두 마리 개에 관한 이야기이다. 또한 모차르트와 멘델스존,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관한 이야기이자 우리의 카네기홀 입성기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 속에서 중국인 부모의  교육 방식이 서양인 부모에 비해 더 나은 면이 부각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문화 충돌로 인한 고통이 얼마나 쓰라린지, 승리의 달콤함은 얼마나 덧없이 흘러가는지, 그리고 열세살짜리 아이 앞에서 어떻게 겸허히 고개를 숙였는지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타이거 마더 중 인용>

 

그러니 나는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같다. 왜 나의 엄마가 넉넉하지도 않은 형편에서 그렇게 나에게 피아노 가르치기를 고집했는지. 그것은 에이미 추아가 둘째 딸에게 들려주었던 바이올린에서 자신이 떠나온 고향의 장유유서의 가르침, 절제, 통제, 문화 향유에 대한 하나의 커다란 은유를 보았듯이 아름다움, 여유, 꿈을 의미했기 때문일 것이다. 맥없이 내가 피아노를 그만두었을 때 강압적으로 그것을 저지하지 않았던 그곳에는 그러한 것들이 흩어지고 스러지는 아픔이 있었을 것이다. 권위와 자율은 양립하기 힘든 구석이 있다. 하지만 부모라면, 아이 앞에서라면 그것의 균형추를 찾으려는 그 기약없는 노력이 그것만으로도 아름다움과 가치를 얻을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극성인 엄마와 자식이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커다란 여유와 공간을 만들어 주는 엄마가 만날 여지는 언제나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이야기는 처음으로 돌아온다. 사랑은 그 사람의 삶을 소유하고 재단하는 것과는 멀다. 항상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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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07-31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이 책에 대해 블랑카님처럼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읽을 생각조차 하질 않았는데 이젠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부모와 아이에 대한 책을 읽고 쓰는 블랑카님의 글은 언제나 고민과 갈등이 보여요. 그래서 무게가 느껴지고, 그 무게가 전 좋습니다. 같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싶어져요.

blanca 2014-08-01 07:52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책이 사람과도 같은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이 경우가 그랬어요. 첫인상이 억세고 별로 안 좋아 가까이 안 하고 싶은 사람이 정작 친해지면 진국인 경우가 있는데 비슷하더라고요. 사실 진부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저의 어린 시절 내면의 아이를 치료하는 일도 결국 이 과정인 것 같아서 저는 부모 교육 관련 책에 관심이 가요.

프레이야 2014-07-31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런 고민 그다지 하지않고 소위 극성엄마도 못되고 쉽게 아이를 키운 것 같아요. 투철한 교육관이 있어서라기보다 그저 제가 편안하기 위해서였던 거죠. 미국 내 중국인들의 열성과 능력이 자녀교육 면에서도 드러나나 봅니다. 아이를 키우며 고민하고 사랑을 모색하는 블랑카님의 리뷰 역시 잘 읽었어요.

blanca 2014-08-01 07:53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아이 키우는데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와 많은 계획과 의도를 가지는 것, 저도 에너지가 부족하고 그런 쪽으로는 재능이 없는 것 같아요. 프레이야님은 이미 따님들을 잘 키우셨잖아요. 저는 항상 의문이 들어요. 내가 제대로 애들을 키우고는 있는건가, 하는. 이 고민은 아마도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될 것 같아요.
 

사놓고 읽지 못했던 책을 하필 책상 오른쪽 귀퉁이에 올려 놓으니 마치 하지 않은 숙제처럼 꺼림칙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정말 재미있어서 책장이 휙휙 넘어가는 책이 아닌 것은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루하고 어렵기만 하다면 이 책이 이렇게 시공간을 넘어 회자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분명 아주 묘한 마력과 무게를 지닌 책이다. 솔직히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하긴 힘든데도 불구하고 3권을 또 찾게 된 것을 보면 언젠가는 읽게 되리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그런데 사춘기에 접어든 주인공의 첫사랑에 대한 오직 내면에서 일어나는(실제가 아니다) 밀고 당기기의 향연은 초반에 아버지가 아들의 입신양명을 위해 일부러 초대한 귀한 손님 노르푸아 씨에 대한 장황한 설명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저지당하기 일수였다. 도저히 중간까지 독파하기가 힘들어 관두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노르푸아 씨가 가고 나니 사랑하는 소녀 질베르트를 만나기 위하여 드나드는 스완 씨 댁에 이야기로부터 누구나 경험하는 첫사랑의 그 처절한 실패에 대한 그 섬세한 묘사와 해부에 중독되고 만다.

 

이를테면. 상대는 나한테 크게 관심이 없는데 계속 얼굴을 봐야 하는(얼굴을 볼 수 있는 경우)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내가 스스로 그를 만날 기회를 박탈하여 고고하게 나의 애면글면한 마음을 다스리는 그 무용한 노력의 지도에 대한 탐사. 그러니까 나는 너를 이제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너를 일부러 보지 않을 거라는, 너를 향하지만 결국 나에게서 발화하여 나에게로 돌아오는 그 거짓말들, 에서 자유로웠던 첫사랑은 드물 것이다. 프루스트는 이러한 심리의 결마다 펜을 들이밀어 하나 하나 언어로 길어올린다. 놀랍다. 하지만 어렵다. 만연체의 문장은 수시로 출발점을 이탈한다.

 

그의 첫사랑은 그의 집안에서 더이상 교류를 거부하게 된 귀족 스완이 화류계 여자 오데트와 결혼하여 낳은 딸이다. 그의 사랑과 그의 시선은 질베르트에게 가 닿은 듯 하지만 묘하게도 그녀의 어머니 오데트에 대한 밀착된 경의, 경멸이 혼재된 애정어린 관찰과 묘파로 이어진다. 그러니 정작 이 소년이 첫사랑의 추억을 바친 자는 그녀의 딸이 아니라 딸의 어머니인 그녀인 듯하다,는 느낌은 오판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야기보다는 그 이야기가 파고드는 속살, 내면에 천착하는 프루스트의 이야기는 소설이라기보다는 누구나 통과한 한 시절에 갇혀 있던 우리의 지난 날에 대한 정밀한 탐사다.

 

결국 다 읽긴 했지만, 제대로 읽어낸 것같지 않다. 프루스트는 살면서 읽어내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같다. 내가 나의 사춘기를 아직도 제대로 이해해 내지 못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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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4-07-21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사랑은 실패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하겠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 <스완네 집 쪽으로> 청소년 만화로 읽은 기억만 가물가물...

blanca 2014-07-22 14:47   좋아요 0 | URL
아, 만화로 나와 있군요! 성공해도 실패해도 결국 성장의 하나의 과장인 것 같아요. 저는 얼마 전에 읽었어도 줄거리가 연결이 안 된답니다.--;;

transient-guest 2014-07-23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문으로 3000페이지가 넘는다는, 읽은 이들의 반은 끝까지, 나머지 반은 중간에 내려놓는다는, 프루스트가 쓴 유일의 완성본 소설이라는 이 책을 읽고 계시는군요.ㅎㅎ 저도 영문으로 셋트 갖다놓고 딱 한 페이지 이후로는 못 보고 있습니다. 너무 길어서 다 못 읽을까봐요. 그런데도,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는 맘은 늘 한결같구요.ㅎㅎ 책이란게 재미있는게, 그렇게 쌓아두면서, 나중에 은퇴하면 다 읽어야지 하게 만드는 그 무엇인가가 있어요.ㅎㅎ

blanca 2014-07-23 17:44   좋아요 0 | URL
프루스트가 쓴 유일한 완성본의 소설인지 몰랐어요. 저도 사실 3권은 애저녁에 사 놓고 최근에 읽을 책이 없는 상태에서 읽게 된 거예요. 4권도 읽으려고요. 촐판사에서 알아서 천천히 출간해 주니 그 속도에 맞추면 될 듯 합니다.^^;;
 

에밀 졸라는 글을 쓰는 일의 무게를 실감하고 작가의 사회적 책무에 용기있게 반응했던 사람이다. 그런 면면을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작품들은 대단히 재미있다. '고전'의 반열에서 그 만큼의 가독성을 자랑하는 작품들도 드물지 않을까. 발자크의 '인간극'처럼 그도 '루공마카르'총서를 기획해 한 가문과 그 배경이 된 시대의 거대한 그림을 그리려 했다. 하나 하나의 작품들은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지만 사실 더 큰 이야기의 조각으로도 자리매김한다. <목로주점>의 알코올 중독자 부부의 말 안듣던 딸 나나는 그의 <나나>에서 성장한 팜므파탈로 남성들의 욕망의 대상이자 파멸의 매개체로 독립하여 등장한다.

 

 

 

 

에밀졸라는 역경을 딛고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쓰는 그 숱한 이야기의 주인공들과는 애저녁에 결별하였다. 대신 그는 환경의 절대적인 영향 속에서 자신의 의지, 희망, 노력 등을 유린당하며 함돌되어가는 지극히 약하고 평범한 인간군상에 밀착하였다.이것을 현실적이라고 혹은 지나치게 냉소적이고 허무주의적이라고 이야기하여야 할 지 그의 노련한 내러티브 실력 앞에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연기력도 가창력도 없이 그저 육감적인 외적 매력으로 어필하며 무대에 서는 여배우 나나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찬사, 애정, 물질 들을 제대로 관리하거나 제어하지 못하고 방탕하고 난잡하게 살다 시간과 육체적 쇠락 앞에서 파멸하는 모습에 대한 속도감 있는 이야기는 통속적이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고 슬프고 허무하기도 하다.

 

위에서 아래까지 모든 남자는 나나 앞에서 타락한다. 그녀 앞에서 세상은 유치하고 쉽고 더럽다. 에밀졸라는 모든 겉치레의 휘장을 벗겨 버리고 인간 내면의 가장 추악한 욕망, 내밀한 속살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그는 '짐승'을 그린다. '나나'는 이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다. 졸라는 '나나'를 밟고 건너가며 이야기한다. 세탁부로 어떻게든 가족과 함께 열심히 먹고 살아가려 했지만 결국 술에, 돈에 삶을 저당잡히고 말았던 제르베즈의 딸은 자신의 몸을 팔아 물질적 결핍은 해소했을 지 모르지만 또다른 방식으로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아픈 결론을 맞고 만다. 에밀 졸라가 그려낸 사회의 하류층의 삶의 파멸은 영원히 돌고 도는 그 궤도 밖으로 탈출하지 못한다. 거기에는 그러한 그들의 결핍과 물질적 욕망을 유린하고 이용하는 상류층의 위선도 덧붙여 있다.

 

'나나'는 에밀졸라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고발'의 한 방편이 된 감이 있다. 그래서 나나가 그렇게 되어가는, 그럴 수밖에 없는 과정에 대한 공감을 자아낼 수 있는 설득력이 부족하게 느껴져 아쉬웠다. 그래도 이 더운 여름, 에밀 졸라의 '나나'를 만나는 것은 물질만능 자본주의 사회의 무서운 일면이 '나나'의 시대와 얼마 만큼 떨어져 있는 것인가,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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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는 아니었지만 거의 대부분이 장님에 귀머거리, 벙어리였다. 잔혹한 짐승들의 핵 주위에 있는 '불구'의 무리였다. 거의 모두가 비겁했다.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p.46

 

 

 

 

"...나의 섬뜩한 이야기가 말해질 때까지/내 안의 심장은 불타리라."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늙은 뱃사람의 노래> 중 인용된 싯구는 이 책의 '제사'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이것은 지옥이다."라고 절규했던 프리모 레비는 40년이 지난 뒤 젊은이들에게 이 악의 현현이 점점 멀고 희미하게 물러나는 것에, 아니 이 악령이 다른 형태로 부활을 꽤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물러나는 기억들을 다시 고찰하기로 한다. 그는 자신의 먼 기억 앞에서 엄정하다. 심지어 그것을 '의심스런 출처'라고까지 이야기한다. 그럼으로써 그의 고찰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지평으로까지 확대된다.

 

파시스트 민병대에 체포되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 10개월간 생활한 그의 처절한 체험은 <이것이 인간인가>에 절절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저서 중 한 장의 제목인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는 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와 절멸한 자에 대한 레비 나름의 관찰과 분석을 기반으로 한 탐사의 보고였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이것이 인간인가>가 스스로 살아낸 세월이다. 살아남은 자가 언제나 최고는 아니였다,는 그의 이야기는 씁쓸한 진실이다. 심지어 그는 최악의 사람들이 생존했다,고까지 절규했다. 완전한 증인들은 가라앉았다,는 그의 냉소적인 목소리는 자신의 생환 그 자체마저 다시금 어떤 부책감과 죄책감에 기댄 체로 거르려는 엄중한 도덕적 결벽을 보인다. 그의 자살은 어쩌면 이러한 그의 내면 속에서 이루어진 자신에 대한 단죄일런지도 모른다. 아니, 비록 그가 도저히 이해할 수도 감히 용서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기도 어려웠던 가해자들에게서 인간에 대한 신뢰 그 자체를 말살당하고 나서 그가 삶의 소멸까지 온전히 자연의 힘에 맡기기는 힘들어서였을 지도 모른다. 인간 자체에 대한 신뢰를 잃고 그 인간들이 뿜어내는 숨결로 덮인 삶을 긍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경험했던 수용소를 하나의 복잡하게 얽히고 계층화된 소우주로 보고 '권력'과 그것을 둘러싼 인간의 탐욕, 이기심, 자만을 가해자 뿐만 아니라 희생자, 그 둘 사이의 회색지대에 이르기까지 객관화된 시선으로 엄정하게 고찰해 간다. 권력은 마모되지 않고, 부패된다는 그의 경고는 울림이 크다. 수용소의 SS들 뿐만 아니라, 좌절한 사람들도, 억압받는 사람들도 자발적으로 권력을 원했고 거기에 기생하여 자신의 존엄을 저버리고 생존해 나가기를 바랐다는 그의 이야기는 인간 세계에서 권력층과 거기에 기생하는 특권층에 대한 투쟁이 얼마나 지난한 것인지에 대한, 그리고 그럼에도 그 투쟁이 영원한 지향이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빅터 프랑클처럼 그는 차마 희망과 인간이 역경을 딛고 올라서는 저력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었다. 화학자이자 작가로서 성공한 그의 여생도 그가 1년도 채 안 있었던 그 지옥 같던 수용소에서 듣고 보고 당한 것들에 대한 상처와 가치관의 혼란과 인간성에 대한 실망을 상쇄키시지는 못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열어 증언자로서 살아남기 위해 그가 자신에게 기록했던 이 참상은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엄중하게 경고한다. 그의 경고는 섬뜩하고도 현실에 발을 딛고 있다. 극한 상황에 처해 보지 않고는 우리 자신조차 스스로를 알지 못한다,는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유효하다.

 

룸코프스키처럼, 우리 역시 권력과 위신에 현혹되어 우리의 본질적인 나약함을 잊어버린다. 우리 모두 게토 안에 있다는 것을, 게토 주위에 담벼락이 둘려 있고 그 밖에는 죽음의 주인들이 있으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기차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자발적이든 아니든 간에 권력과 타협하게 되는 것이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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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6-20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림을 주는 책이군요.
인간의 역사가 아무리 오래되어도 앞으로 시간이 많이 흘러도
반성하고 성찰하는 일을 게을리하면 안 되겠습니다.
저절로 올바른 자리를 찾아가길 기대할 수 없고 공식적으로 거론해야 하는
엄숙한 시간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 같아요.
늘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blanca 2014-06-23 10:35   좋아요 0 | URL
페크님, 수용소 관련 책을 모아 읽었는데 절로 기분도 음울해 지고 인간과 세계의 진보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게 되더라고요. 안 그래도 나이 들어가는 게 이런 것을 알며 어느 정도 냉소적이 되고 체념도 하게 되고 그런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생각해 보면 예전에 참 많이도 걸어다녔던 것같다.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다 집 근처 학교를 두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배정되거나 해서 혼자서 혹은 친구들과 타박 타박 때로는 비도 맞고 때로는 눈도 맞으면서 잘도 걸어다녔다.

 

딸아이를 업고 안고도 사방팔방 잘도 걸어다녔다. 아기띠 밖으로 비어져 나온 손과 발을 무심코 만져보거나 그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거나 하는 낯선 이들을 만나면서.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걷기'가 뚝 끊겼다. 운전을 하기 시작하면서, 아이를 업으면 이제 허리가 아파서 등등의 변명을 대면서. 며칠 전 무심코 이 책을 기대없이 펴 들었다. 와, 신기했다. 어떤 책인지 모르는 와중에 만난 책, 마치 아주 친절한 철학 선생님의 찬찬한 수업을 듣는 것 같은 기분. '걷기'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라고까지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그냥 랭보도 루소도 소로도 칸트도 이렇게 '걷기'라는 단순하고도 평범한 주제로 교차시키며 이렇게 길게 늘이지 않고도 전 생애를 보여주듯이 이야기해 줄 수 있다니. 난 이제야 랭보가 걸핏하면 집을 나오던 가출 청소년이었다는 이야기를, 위선적이었다는 평도 들었던 루소가 마흔 이후로 자신의 지난 날 마차 위에서 보낸 화려한 삶을 정리하고 잘 늙어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는 것을, 니체가 미쳐가고 있을 때 어떻게 돌아온 아들을 어머니가 헌신적으로 보살폈는 지를 알게 되었다.

 

 

 

저자는 프레데리크 그로. 파리의 철학교사. 미셀 푸코 연구가란다.

 

걷다 보면 어떤 사람이 되어 하나의 이름과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싶다는 유혹을, 하나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게 된다-p.17

 

콩코드의 연필 공장을 하는 사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소로의 이야기는 저자의 '걷기예찬'의 가장 대표적인 예증이 될 것이다. 경제적 계산 대신 더 많은 돈을 벌려고 애쓸 때 내가 순수한 삶에서 잃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계산하자는 소로의 이야기는 저자의 그것이기도 하다. 물론 아주 당연하고 아주 진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가 삶의 의미까지 희생하며 이 세계의 부속품이 되려고 자원하겠는가. 어쩔 수 없는 시스템 속에 들어가며 이러한 자각은 때로 괴로운 소외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럼에도 당연한 불가피한 한계 속에서 뛰어넘고자 하는 저 지향을 보여주는 이러한 책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그냥 꼭 걷기가 아니더라도 그가 이야기하는 니체는 카프카는 간디는 다시 한 번 감동적이다. 수업 시간에 그렇게나 외워댔던 이 사람들의 그 업적의 편린들은 이 저자의 시선 끝에서 저마다 꿈틀거리며 다시 한 번 산다. 진짜 철학의 아주 작은 부분이나마 제대로 맛본 기분. '걷기'는 단지 하나의 연결고리이자 은유인가 보다.

 

 

 

 

생 자체를 순례에 비교한 것은 사실 이미 진부해져버린 장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진부하다'는 것은 검증되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이 단단한 곳에 결박당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는 힘들다.

 

에드워드. 이 도자기 토끼 인형은 소위 차도남이었다. 소녀 품에서 사랑받다 여러 사람, 각종 상황에서 방황하다 장난감 가게로 돌아오게 된 그가 마침내 맞닦뜨린 이는.

 

여기까지는 그래서? 였다.

장난감 가게 안에 들어와 이 인형 앞에서 서 있던 여자아이의 엄마. 에드워드의 원주인. 커버린 애빌린. 사랑을 믿지 않던 도자기 인형 앞에 돌아온 사랑.

 

반전도 아니건만 눈물이 핑 돌았다. 나에게도 에드워드 같은 인형이 있었다. 비록 비주얼은 훨씬 못 미치는 사람과 원숭이를 섞은 묘한 인형이었지만 나의 뽀송이.

 

엄마는 어느 날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져 버린 뽀송이를 처치하셨다. 울고 불고 했던 기억. 엄마에 대한 원망. 나는 고맘 때 내가 이름을 붙이고 재워주는 뽀송이에게 에드워드 같은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엄마는 나의 그런 마음을 읽어주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뽀송이는 어디로 갔을까. 에드워드처럼 온갖 역경, 온갖 사람 다 만나고 다시 나에게 돌아올 수는 없을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이 책의 결말이 질투났다. 모든 잊혀졌던 것들은 돌아온다고 하는 그 은유에서 나도 자유로울 수 없나 보다. 자꾸만 돌아오는 기억들. 사랑을 믿지 않고 오만했던 도자기 인형 에드워드 툴레인의 긴 순례가 남긴 교훈 대신 그 인형을 잊고 지내며 늙어갔던 소녀에게 결국 돌아온 유년시절의 기억을 환기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일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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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4-06-10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저도 걷기 참 안 하는 편이에요. 주로 차로 이동하고 게을러지네요.
볕도 바람도 좋은 시간대에 아기 유모차 태워서 조금씩 걸어보세요^^ 분홍공주도 유모차에 손 얻고.
첫번째 책이 끌립니다. 담아가요^^
건강한 날들 보내요 우리^^

blanca 2014-06-11 10:32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요즘 아침은 좀 걷기가 선선한데 오후는 더워 힘들더라고요. 공주님은 벌써 잠깐 유모차 놓아 두고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가면 그거 밀고 멀리 도망가버린답니다.^^;; 아, 정말 좋은 덕담이네요! 건강한 날들! 명심할게요, 프레이야님.

페크pek0501 2014-06-13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칸트가 산책을 하면 동네 사람들이 칸트를 보고 시계를 맞추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매일 규칙적으로 걸었다는 거죠.
저도 걷기를 좋하해서 밥 예약해 놓고 해 질 무렵에 걸어요. 소화불량으로 시작되었는데 이젠 습관이 되어 버려
걷고 싶어지기도 한답니다. 물론 걷는 게 귀찮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요.
하지만 일단 걸으면 기분이 바뀌어 버려서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의사의 말이, 걷기만 해도 머릿속 스트레스가 밖으로 빠져 나온다고 해요.
그러니 걷기는 몸 건강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좋다는 거죠.
걸으면서 길거리 풍경을 보는 재미를 이젠 즐길 줄 안답니다. 저는 걷기 예찬론자예요.
우리 많이 걸어서 몸도 정신도 건강합시다. ^^

blanca 2014-06-17 10:08   좋아요 0 | URL
페크님, 댓글이 늦었어요. 저도 그러고 보니 걷기를 통해서 위염도 낫고 더 건강해진 것 같아요. 점점 더워져 그러지 못한다는 게 아쉬워요. 요 며칠 그래도 아침, 저녁으로 선선하니 좋았어요.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운동화 신고 더 멀리 더 많이 걸으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