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파업 프로그램 중엔 자원봉사 활동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대학교때 농촌봉사활동을 제외하곤 사회에 나와서 자원봉사를 경험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가 봉사활동을 간 곳은 고덕에 있는 우성원이라는 곳으로, 장애인 철인 3종 선수등으로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나는 그곳에서 주로 중증 자폐증세가 있는 사람들이 거처하고 있는 요양원 방과 화장실을 청소하고, 오후엔 식당을 깨끗이 하는 일을 했다. 물론 내가 지금 거처하고 있는 자취방보다 훨씬 깨끗한 곳을 쓸고 닦다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청소를 끝내고 잠깐 짬을 내 아저씨 한분과 공 주고받기를 했는데, 난처하게도 그 놀이를 언제 어떻게 끝내야할지 몰라 당황스럽기도 했다. 다행히 점심시간이 다가와 한숨 놓긴 했다.^^

자원봉사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남다른 것 같진 않은데, 자원봉사를 하기전 원장님께서 하신 일장연설의 한 대목이 가슴 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원장님께서는 이 곳에 기거하고 있는 사람들이 정신연령이 잘해야 5살 정도라면서 그들을 대하는 어려움을 토로하시기도 했는데, 화재의 위험성이나, 집을 잃고 헤매는 통에 찾아 다녀야 하는 일 등을 늘어놓으셨다. 그리고 그 중 가슴 속에 남은 에피소드 하나. 운동회를 열어 100미터 달리기 경주를 하는데, 이게 좀처럼 끝을 맺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원생들이 50미터 쯤 달리다, 먼저 간 사람이 갑자기 자리에 우뚝 서서 뒤에오는 원생을 기다려 같이 걸어들어온다는 것이다. 이래가지고서는 좀처럼 운동회가 흥겨울 수가 없다는 말씀에 나는 오히려 내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사람사는 꼴이 이런 모양도 갖춰야지 하면서 말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모양새는 너도 나도 그 100미터를 빨리 가겠다고 아우성이다. 때로는 뒤에서 잡아채기도 하고, 앞에서 발을 걸기도 하고, 또는 남은 아무 상관없이 그저 앞만 보며 뛰어가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다. 먼저 가겠다는 아수라. 앞에 가던 사람들이 멈추어서 함께 가겠다고 손을 내민다면, 그 모습은 어떨까? 물론, 100미터 신기록을 향해 뛰어가는 사람들도 있어야 제 맛일것이다. 누군가는 그 신기록을 향해 몇천 킬로미터를 훈련하고, 멋진 달리기의 표본을 보여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1등을 할 수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신기록을 달성할 수도 없다. 그러나 자신만의 기록을 갈아치울수 있을련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게 신기록을 향해 가는 사람들을 통해 달기기의 자세와 주법 등을 새로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달릴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모두들 달리라고 강요하는 듯 하다. 그래서 왠지, 달리기를 멈추고서 뒤어 오는 사람들과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었다는 원생들을 통해 경쟁이 아닌 다른 삶의 모습을 배울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때로는 고독하게 자신의 100미터를 향해 뛰어가면서도, 때로는 잠시 멈추어서서 손을 맞잡고 걸어도 가는 세상이 될 수 있었으면... 그리고, 그런 세상을 향해 과감히 멈추어설 필요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의 이 파업이 바로 그 멈추어섬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파업 19일째 잠이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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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파업 선포식을 가졌다. 대학교 때 배운 자본과 노동의 관계가 피부로 직접 다가오는 순간이다. 정리해고라는 칼날에 저항해서 노동자가 기껏 가지고 있는 무기는 파업밖에 없다는 것이 서글프다.

왜 정리해고를 해야하는지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도 없이, 그저 회사가 어렵다는 핑계와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 아닌 변명만을 계속 할뿐 경영상의 어려움을 증명할 자료도, 시기적으로 왜 이렇게 서두를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설명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구조조정 이후 회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아무런 청사진도 없이 그저 칼날에 목을 내 놓으라고 한다.

구조조정에 대한 무조건적 반대가 아니다. 회사가 외부 환경의 변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또는 사회 변동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서 기업체가 할수없이 몸무게를 줄이거나, 다른 사업으로 변경해야지만 살아남는 경우 모두가 눈물을 흘리면서 도마뱀의 꼬리를 자를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은 단순히 도마뱀의 꼬리를 자르는 것이 아니라 도마뱀의 머리를 잘라내는 격이다. 머리를 자르고서도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경영자였다라고 생각하니 어찌보면 지금과 같은 어려움이 닥쳐온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노조원들이 파업을 결정했을때 조금은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 90%에 육박하는 파업찬성에 먼저 놀라기도 했지만, (이것은 분명 부도덕한 경영자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후배들의 목을 쳐낸 것을 지켜본 선배들의 애정이 함께 녹아있었기에 가능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 과연 평상시 모래알처럼 보이던 동료들이 한마음이 되어 뭉칠수 있을것인가 내심 불안했다. 하지만 오늘 선포식을 지켜보니 조금은 안심이 된다. 파업이 장기회되고, 사측이 어떤 비열한 방법을 동원할지 모르지만, 오늘과 같이 한마음이 된다면 아무 걱정없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됐다.

개인적으로는 지금 당장이라도 회사를 떠난다고 해서 먹을 것 걱정을 할 처지도 아니고,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의 성격과는 판이하게 다른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기에 이것을 향해 전진할 수 있는 길도 놓여져 있다.(물론 그 길도 쉽지 않다. 몇년의 피땀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파업을 결정하기 전 희망퇴직이라는 불순한 의도의 회사 방침에 순응해 떠날수는 없었다. 이대로 회사를 떠난다면 난 지금 이후의 내 삶에서 얼마나 떳떳하게 살 수 있을까 자문해보고 또 자문해봤다.

자기들끼리만 살아보겠다고 노동자들의 목을 아무 거리낌없이 치고 있는 그들의 강심장에 비수를 꽂지 아니하고서는 내가 진정 꿈꾸는 세상살이를 해낼 수 있는 명분을 지닐 수 없을 것 같았다. 분명 힘들고 외롭고  포기하고픈 길을 선택했다는 것을 안다. 솔직히 이 파업이 어떻게 진행될지 두려움도 크다. 하지만 내가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기 위한 내 인생의 다시 오지 못할 투쟁이라 생각하니 자뭇 격양되기도 하다. 이 싸움이 승리로 끝날지 패하게 될지 모르겠으나, 마지막까지 나에게 정정당당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닐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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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사람은 없지만 그 결말이 비극인 경우가 있다. 그래서 도덕을 얘기하는 것이 세상을 모르는 순진한 이야기로 비쳐지기도 한다.

캘리포니아의 한 바닷가. 캐시는 아버지가 물려준 집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다소 무기력한듯 보이지만 그래도 출발할 둥지는 있다. 그러나 사소한 법적인 잘못으로 집은 경매에 넘겨지고, 설상가상으로 몇일 후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가 집을 찾아오겠다고 한다. 보아하니 마땅한 직업도 없어 수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남편과도 이혼한 처지이니, 집을 되찾을수는 있을련지 모르겠다.

이란에서 정치적 소용돌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 온 베라니 대령. 하루 온 종일 일을 하며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진다. 낮에는 도로포장의 인부로, 저멱에는 가판대 판매상으로 쉴 틈이 없다. 가족들은 가장이 무슨 일로 자신들을 풍족하게 먹여살리는지 알지 못한다. 대령의 마음 속엔 과거 카스피해에서 머물렀던 별장만이 가득하다. 그래서 삶의 재기를 위해 경매에 나온 캐시의 집을 싸게 사게되고, 어느 정도 손을 본 후 비싸게 되팔 생각이다.

즉  이 영화는 집을 둘러싼 이야기다. 삶의 기쁨, 슬픔, 무력함, 우울함, 도전정신, 의지, 두려움, 공포 등이 모두 녹아 있다. 캐시는 어머니가 오기 전 집을 되찾으려 하지만 베라니 또한 투자의 결실을 거두지 못한다면 고단한 삶의 여정을 끝낼 수가 없다. 정말 누군가의 잘못도 아니지만 그들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캐시는 점차 무력감에 빠져들고, 자살을 시도한다. 베라니는 그녀의 자살을 막고, 상처입은 새라 생각하며,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집을 돌려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의 삭풍은 선한 의지만으로 막을 순 없는가보다. 캐시를 도우려했던 레스터라는 경찰(아이가 둘이나 있지만 친구같은 아내로 인해 권태감에 빠져있다. 아내를 버리고 캐시를 사랑하고자 도망을 선택한다)이 끼여들면서 사건을 뒤엉키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해결책을 찾아내고, 원래의 집값을 경매인에게 받아서 돈은 캐시가 받고, 집은 대령이 차지하기로 한다. 그리고 자신의 꿈인 아들과 함께 돈을 찾으러 나서는 길,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한다.(사고의 내용을 밝히는 것은 스포일러가 될 듯. 영화 중 가장 안타까운 장면이다) 눈물만이 가득찬 집. 세상은 온통 고요하다. 대령의 가족은 아마도 카스피해안으로 찾아갔을련가?

삶에 대한 의지만으로도, 선에 대한 믿음으로도 세상의 비극을 바꾸어내지 못했다. 그들의 마음 속에 아름다운 석양과 바다를 내다볼 수 있었던 집은 모래와 안개로 가득차 희미하다. 세상은 맨 몸으로 부닥쳐 살아가기에는 턱없이 힘들고 벅찬 곳이라, 꿈을 꾸어야만 한 숨의 숨을 겨우 쉴 수 있다. 그 꿈이 거창하진 않더라도 지금의 현실을 벗어나게 할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다. 그래서 그들의 집에 대한 집착은 쉽사리 포기하지 못할 그 무엇이었을게다. 포기할 수 없는 것, 하지만 포기해야만 해결될 수 있는 것들. 그러나 포기하는 순간 닥쳐올 역경에 대한 두려움. 비극은 바로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미래에서 비롯됐다. 모래처럼 푹 빠뜨리고, 안개에 갖혀 한치 앞도 보여주지 않는 저 망막하고 두려운 인생의 길 앞에, 이제 캐시는 그곳이 자신의 집이 아님을 비로소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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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박물학
다이앤 애커먼 지음, 백영미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이 공의 세계에서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사유작용 등 감각작용도 없고, 빛깔과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비감각적 대상인 원리 등 객관대상도 없으며, 시각의 영역도(청각의 영역, 후각의 영역, 미각의 영역도(청각의 영역, 후각의 영역, 미각의 영역, 촉각의 영역) 사유의 영역등 주관작용도 없느니라.

반야심경의 한 대목이다. 현상이 모두 공이라는 이 생각은 자칫 허무주의로 사람을 빠지게 만들련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개인적으로 이 대목을 인간의 한계점에 대한 고백으로 이해한다. 물론 오독의 소지가 다분하다.

감각의 박물학이라는 리뷰에 난데없이 반야심경이 왜 튀어나왔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것은 차츰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해결해가기로 하겠다.

책의 저자는 서문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쾌락에 대한 집착이 아닌 헬렌 켈러와 같은 감각에 대한 유희를 주장하는듯이 보여진다.

죽음과 강렬한 감각은 인간의 공포인 동시에 특권이다(11쪽)

저자는 감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책을 통해 보여주며, 세상을 한껏 즐기라고 말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책은 온통 감각에 대한 찬양으로 넘쳐난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공감각으로 나뉜 각각의 장은 그 감각들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지 여러가지 예를 들면서 보여준다. 그러나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의 감각이 갖고 있는 한계점 들이다. 52쪽에서 말하고 있는 매클린토크 효과라는 것도 인간의 감각이 얼마나 믿을 것이 못되는지에 대한 전적인 증거로 보여진다.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는 여학생들은 때때로 월경의 주기가 룸메이트를 따라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상대방의 몸에서 풍기는 체취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월경주기를 잃어버리고 상대방에 맞춰가기 때문에 발생하게 된다. 지금은 상식으로 알고 있지만 지구가 자전하면서 내는 소리의 크기가 너무 커서 우리는 듣지 못하고, 또는 너무 작아서 박쥐만이 듣는 소리도 있다. 눈에 보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자외선과 적외선의 영역이라는 것이 우리가 볼 수 있는 파장의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착시 현상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인간이 외부 환경을 받아들이는 여러가지 감각들이 실은 모순투성이에 잘못된 정보를 들여오기 일쑤다. 따라서 진리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감각은 어찌보면 믿을만한 것이 못될련지도 모른다. 감각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못할뿐더러, 실은 외부 대상 자체들 또한 절대적인 어떤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게다가 이것에 시간마저 개입하기 시작하면 대상은 계속 변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거짓이니, 아무 것도 받아들일 필요가 없을까?

잠시 모든 것을 중단하고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워보라. 흘려보냈던 모든 것에 감각을 집중해보자. 실내도 괜찮겠지만 숲 속이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먼저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해보자. 평소에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마치 꽃이 피어나는 소리마저도 들릴듯한 착각에 빠질련지도 모르겠다. 실내에 있다면 오디오를 틀어놓고 음악에 귀를 기울여도 좋다. 그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새삼 느낄수 있을 것이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촉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어디선가 풍겨오는 꽃냄새에 취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눈을 뜨면 파란 하늘에 두둥실 떠가는 구름에 취하기도 할 것이며, 나뭇잎의 색깔이 하루하루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의 모든 것이 다 기쁨으로 충만되는 그 무엇이 될 수 있음을 깨치는 순간, 감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절감한다. 그러나 이 감각이 주는 행복감을 벗어나, 쾌락을 쫓는 순간 향유하던 감각은 이내 덫이 된다. 보다 더 좋은 소리, 보다 더 좋은 색깔에 대한 집착이 사람의 인생을 피폐하게 만들련지도 모른다.

반야심경은 바로 이런 욕에 대한 경계심이라고 보여진다.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기쁨으로 충만시킬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는 상태. 비록 그것이 거짓된 것이라거나 비틀어져서 들어오는 정보일지라도, 그것이 그렇게 들어온 것임을 알고 있는 상태라면, 그것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진리 또한 내 몸 속에 있음을 깨우치게 되지는 않을까?

지금 이렇게 키보드를 치고 있는 손가락의 감각 하나하나에서 기쁨을 느낀다면 세상은 온통 기쁨 투성이지 않겠는가? 눈이 멀고 귀가 먼 헬렌켈러가 세상을 행복과 기쁨으로 받아들였듯 세상을 대한다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인 이 세상이 색즉시복福공즉시행幸이 되지 않을까  감히 상상해본다. 내 몸의 감각이 그렇게 소중하며, 그 감각의 대상들이 또한 소중한 것들이니, 어찌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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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년마다 도봉산이나 북한산에선 추락사고가 일어난다. 얼핏 듣기론 일주일인가 한달에 두명 이상은 사망으로 이어진다고 한 것 같다. 이런 사고의 대부분은 위험지대라거나 접근금지라고 표시된 지역에서 최소한의 안전장비도 없이 오르는 경우다. 아마도 이렇게 오르는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설마 하는 생각에 올랐을 것이다. 죽을 줄 알면서도 라는 것은 오를 때 느끼는 짜릿함의 강도를 극점에까지 끌어다준다. 하지만 이런 극도의 긴장은 아주 짧았을 때만이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 계속되는 긴장은 오히려 죽음에 대한 생각을 무디게 하고, 신경쇠약을 가져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아무도 가보지 못한 남극의 도달불능점을 향해 가고 있다. 그것이 죽음을 건 도박임을 알지만, 이들은 갈수밖에 없다. 극중 송강호가 이야기하듯 그네들은 바로 그런 곳에 갔을 때만이 삶의 희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왜 그런 곳만을 찾아 떠나가냐고 물어보았자, 멋진 대답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것은 마치 마약과 같아, 도저히 멈출 수 없는 흥분을 주기 때문에 점점 더 그 자극의 강도를 높여가야만 한다.

영화는 점점 도달불능점을 향해가는 6명의 남자들을 보여준다. 이것은 죽음에의 항해다. 그래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짜릿함이 주는 기쁨과, 그런 역경을 함께 해쳐가고 있다는 동질감의 극치를 기대했을련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은 다가오지 않고, 죽음에의 두려움만 나날이 커져간다. 그래서 어느 순간 죽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쾌락의 칼날은 무뎌지고, 오히려 그것은 광기로 드러난다. 그러나 영화는 송강호의 광기를 그저 살풀이로 설명하려고 든다. 그런데 또 문제는 살풀이라고 설명하려 들면서 한쪽에다 다른 이유를 덧붙여놓고, 과연 이걸까 저걸까 혼돈시키려 한다는 데 있다. 85년전 영국 탐험대의 일기장, 그리고 아직까지 떠돌고 있는 그들의 영혼이 있음을 암시하면서, 점차 하나둘씩 죽어가는 탐험대들의 죽음에 대해 물음표를 남겨놓는다. 이들의 죽음이 무모한 인간의 도전때문인지, 죽은 자들의 원한인지 영화는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러면 마치, 관객들이 스스로 생각하며, 그 원인에 대해 각자 나름대로 해석해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불친절함은 불친절을 당하는 대상이 기대했던 친절에 배신당한 충격에 왜? 라는 의문을 품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잘못된 불친절은 그 대상에게 오직 분노만을 낳게 만든다. 영화는 오직 분노만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그 분노는 해외 로케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세트를 보는 것마냥 관람시간 내내 눈구경만 해야 함으로써 찾아오는 눈의 피로감이며, 인간이 어떻게 광기를 드러낼 수 있도록 변해가는지 지켜보는 즐거움보다는 느닷없는 광기와 갈등상황의 무미건조함으로 말미암은 지루함으로 인해서이다. 남극일기 첫 장에 쓰여진 인간의 탐욕이 가져다주는 지옥이라는 글자는 인간의 어떤 탐욕을 말하는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겠다. 이미 지옥임이 뻔한 도달불능점에서 그것이 지옥인 것은 인간의 탐욕이라고 말함으로써 또 한번 관객을 우롱하고 있다. 송강호의 목표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씻김굿인것처럼 그려놓고 그것이 탐욕이었기에 그곳이 지옥으로 변했다는 설명은 얼토당토않다.

이것저것 마구마구 뒤죽박죽으로 놓여진 그물코들은 벼리가 없기에 재미라는 월척을 잡아채지 못했다. 지루한 영화, 하마터면 잠들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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