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자산은 1779년 우리나라에 천주교를 본격적으로 소개했던 소장파들이 관리의 눈을 피해 강학회를 열었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700미터도 되지 않는 조그마한 산이지만 그곳까지 들어가기 위한 길은 생각보다 깊었다. 더군다나 계획없이 갑자기 오르게 된 산이다 보니 목적지를 찾아가는 과정조차 쉽지 않았다. 승용차를 타고 갔다면 길을 헤매더라도 결국 목적지에 도달할수 있었을테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자칫 목적지를 지나치거나 엉뚱한 곳으로 가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이번 앵자산행은 전자의 경우인지 후자의 경우인지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첫 출발부터 뒤죽박죽이었다.
광주시외버스를 타고 천진암으로 향하던 길, 얼핏 앵자산행 표지를 봤다고 생각했는데, 버스는 지나쳐버리고, 운전기사 아저씨에게 물어보았지만 전혀 알지 못했다. 어쨌든 천진암이라는 곳이 목표지라 생각하고 종점에 내리니, 마침 성지라는 곳을 보여주는 듯 거대한 십자가가 보였다. 그곳은 한창 새로운 성지개발을 위해 새단장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틀리지 않았다고 안도하고 겨우 산길을 찾아 올라서는데, 아무래도 걱정스럽기는 하다. 30분쯤 올랐을까? 중년부부가 산중에서 도토리를 줍는라 바쁜 모습이다. 이 산중엔 정말 도토리 천지라 다람쥐 먹이 걱정할 필요는 없을듯하다. 부부는 마을 사람들 같이 보여 얼른 앵자산을 물어봤다. 그랬더니 지금 오르고 있는 산은 무갑산이며 앵자산은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라 했다.
그래도 아직 시간은 남아있고해서 걸어가다보면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실망하지 않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중간에 갈림길이 왜 이리 많은 건지. 더군다나 이정표 하나 없으니 이건 정말 눈감고 오르는 것과 별반 다를게 없다. 계속되는 선택의 순간순간마다 시계를 쳐다보며 아직 여유가 있으니 가볼데까지 가보자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2시간을 오르다 이제 서서히 내려서는 순간, 지금 내가 오르고 있는 곳이 앵자산인지 무갑산인지 전혀 알지 못한채 하행을 준비했다. 내려가보면 어떤 산을 올랐는지 그리고 산행의 경로가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있을것이라 생각하며 내려서다 우뚝 발걸음을 멈출수밖에 없었다. 앞이 온통 덤불에 가시나무 투성이었다. 길은 사라지고, 다시 돌아서자니 한참을 가야하고, 이제 별 수 없었다. 밀림을 통과하듯 무조건 돌파하는 수밖에. 일단 큰 산이 아니니 계곡 쪽으로만 가면 분명 마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내려섰다. 아, 팔은 가시에 긁히고, 다리를 묶는 덩굴들, 그리고 얼굴엔 거미줄과 뒤엉킨 가지들. 계속 내려설 수 있을까 점점 자신감이 없어지고, 다리에 힘도 빠지기 시작했다. 팔은 가시에 긁힌 자국으로 부어 오르고, 신발은 완전히 젖어버렸다.
길은 보이지 않는데, 마냥 헤쳐가야만 하는 기분. 그렇다고 절대 포기하고 주저앉을수도 없는 상황.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는 순간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은 과연 누가 이 산중에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찾으러 올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때문이었다. 그런 막막함도 잠시 조금 더 내려가다 갑자기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큼직한 동물이 지축을 울리며 도망간다. 이런! 멧돼지다. 막막함은 온데간데 없고 두려움이 앞서기 시작한다. 저 놈이 뛴 쪽에서 최대한 멀어지는 방향으로 길을 잡아야만 한다는 생각에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지만 결국 막혔다. 할 수 없다. 놈과 가까이 가더라도 그쪽이 그나마 길을 낼 수 있는 곳이니 죽음(?)도 각오하는 수밖에. 두려움에 발걸음을 떼어놓기가 쉽지 않았지만 어찌하랴. 제발 맞닥뜨리는 일만 없기를 바라며 다시 길을 뚫으며 내려가길 20분 정도 드디어 사람이 다니는 길이 보인다. 그리고 비닐하우스. 아~ 살았다. (오! 나의 이 프런티어 정신이여. 전국의 산악회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낸 나에게 상이라도...)
3시간의 산행이 이토록 짜릿한 적은 없었다. 최근 산에만 올랐다 하면 왜 길을 잃는지 곰곰히 생각해본다. 시간이 아직 남아있다는 핑계로 예상루트보다 더 먼 길을 택하다 결국 고생을 자초했다는 생각이 든다. 욕심이 언제나 문제다. 그러나 살고자 하는 욕심은 욕심이라기 보다는 의지로 표현해야 하겠지. 그 의지가 없었다면 멧돼지와 막다른 길에서 오도가도 못했을터이니 말이다. 막혔다고 생각한 순간 터진 곳을 찾을 수 있음을 배운다. 막혔다고 생각하며 주저앉아버리는 순간 모든게 끝이다. 그렇기에 살아간다는 것은 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끝이라고 생각한 바로 순간 모든게 끝이나 버린다. 살아가는 것은 그래서 항상 진행중이다. 삶은 무한하다. 아니 무한한 것이 삶이다. 멈추섬에 이미 진행중이 아니기때문이다. 삶이 진행중이라면 그래서 무한한 것이리라. 그 무한을 살아가는 방법은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다. 생각도 마음도 흐르도록 두자. 때론 격렬하게 때론 잔잔하게. 아~ 살아간다는 것이, 살아 있다는 것이 이렇게 기쁠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