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가끔 그들의 강박관념을 엿보게 된다. 내가 심심해서 보는 영화들이라는 선입관이 강한 탓일까? 재미있으면 됐지 또 뭘 바라나?라는 심리를 그대로 제작쪽으로 돌리면, 재미있게 만들면 됐지 무얼 집어넣으려 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든다.

리버티는 2002년 [폰 부스]라는 영화와 무척 닮아있다. 전화로 통화하면서 상대방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채, 목숨을 저당잡히고, 상대방이 시키는대로만 해야 하는 처지의 긴박감. 한정된 공간만을 비추는 속에서 지루함을 잃지 않은채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희미하게 기억나긴 하지만 <폰부스>에서는 저격수가 보이지 않았지만, <리버티>의 경우는 저격자도 대상자도 모두 다 드러낸 상태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따라서 이야기의 집중은 무엇이 이런 무자비한 상황에 직면하도록 저격자를 이끌었는가에 있다. 무슨 이유 때문에로 이야기가 집중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무척 잘 만들어진 것 같다.

자신의 딸이 학교 총기 사건으로 죽게 된 전직 CIA요원. 복수심에 불타 복수를 하면 그만일 터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단순한 복수로 끝내지 않고 보다 고귀한 무엇인가를 덧씌워야 한다. 물론 그것이 사건의 원인을 타당하게 밝혀내고 그러한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세상에 변화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가 이 곳에 메스를 들이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실은 그래서 <볼링 포 콜롬바인>같은 영화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곳에 덫이 있다라고 말하며 경고를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 덫이 어떤 경로로 어떻게 작용하며 얼마만한 위력을 발휘하는지는 보여주지 않는 방식. 그저 덫이 놓여있는 곴까지의 풍경을 그려대다 갑작스레 덫을 이야기하면서 이야기의 충격을 크게 만드는 것이 할리우드식 표현이다. 그래서 할리우드 영화가 어떤 이야기를 한대도 그것이 사회적 이슈가 되는 것은 힘들다. 그런데도 궂이 도덕적 포장을 하려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리버티의 주인공의 근본적 욕망은 복수심에 있었을 터이다. 직접적인 가해자를 대상으로 했어야 했겠지만 그들의 얼굴을 보고 복수를 행하기에는 왠지 쉽지않다. 개별적 존재자로서 마주쳤을때 복수의 칼날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은 마음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점차 그 이유에 대한 이유를 달기 시작하면 눈덩이처럼 불어나 전체 사회로 퍼져 나간다. 물론 실제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개인의 사건들도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그러나 눈덩이 자체에 대한 이야기 없이 느닷없이 발생한 눈사람만을 이야기하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 근거 없는 음모 정도로만 여겨진다. 그래서 정말로 진중하게 논의되어야 할 이야기가 재미로 희석되어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만다. 그러니 <볼링 포 콜롬바인>같은 영화가 사라지지 않고 꼭 계속해서 만들어지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다.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 방식이 재미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가 말하고 있는 것이 전부인양 생각하고 더이상의 논의를 하지 못하도록만 하지 않았으면 싶다. 단순히 이런 식의 음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만 부추기지 않았으면 싶다. 지극히 개인적으론 그냥 대놓고 복수를 행하는 타란티노처럼 스크린 속에서 신나게 놀았으면 좋겠다. 할리우드는 할리우드로, 마이클 무어는 마이클 무어식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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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11-02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버티는 안 봤지만... 볼링 포 콜럼바인, 폰 부스는 봤어요..
세 영화가 이런 방식으로 엮일 수 있군요~

하루살이 2005-11-02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갖다 붙히기 선수입니다...
 
도쿄 타워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영화로 보고나서 나름대로 괜찮군 생각했었다. 영화보다 책이 더 낫다는 소리를 주위에서 듣긴 했지만 일부러 책을 찾아보지는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같은 작가의 새책을 손에 쥐게 됐다. (물론 [도쿄 타워]라는 이 책도 영화로 만들어졌다. 아마 곧 개봉하지 않을까 싶다. ) 손에 꼭 들어가고 두껍지도 않아 주저없이 읽게 됐다. 하루에 다 읽지 못하고 중간 중간 쉬어가며 읽어갔는데 하루가 지나고 밤이 찾아오면 이들 주인공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궁금해하게 만드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책은 19세에서 20세로 넘어가는 두 청년과 30대 40대 여인의 사랑을 주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의 방식은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크게 나눠보면, 한사람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과 다양한 사랑 속에서 진짜 사랑을 찾아가는 방식 정도이지 않을까? 물론 이 사이에는 정말 다양한 방식의 사랑이 존재할터이지만 말이다.

토오루는 한사람만을 향해, 코우지는 마치 바람둥이마냥 사랑을 대한다. 그 사랑의 방식은 다르지만 사랑을 통해 느끼는 감성이나 심리변화는 비슷해보인다. 책에서 드러나는 사랑에 대한 감정은 연애편지를 쓸 때 꼭 써먹을 그런 밀어들이 아니라 일기장에 꼭꼭 눌러쓸 그런 표현들이라 생각된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빠져드는 거야 (54쪽)

자연스럽고 자유롭고 행복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은 시후미로 인하여 존재하고 있다. (58쪽)

시후미가 주는 불행이라면, 다른 행복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70쪽)

사랑을 하면 강아지도 시인이 된다 (84쪽)

기다리는 것은 힘들지만, 기다리지 않는 시간보다 훨씬 행복하다. (115쪽)

좋았겠다, 토오루는 그 시절의 코우지 곁에 있을 수 있어서 (147쪽)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때문 (298쪽)

미련, 그말에, 코우지는 흠칫 놀란다. 미련이 남은 듯 키미코에게 연락해버리는 일을, 지산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318쪽) 키미코와 자신이 그토록 서로를 갈망했던 이유는, 두 사람 모두 외톨이였기 때문이다. 남편이 있든 유리가 있든, 메우지지 않는 고독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319쪽)

누구든 상처 입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도 상처 입는 것에 저항하는 거야, 여자들은(327쪽)

사랑을 하면 기다려지고, 그 기다림이 오래되더라도 행복하고, 목소리가 듣고싶고, 항상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자기와 함께 하지 못한 이전의 시간들이 안타까워 사랑하는 사람의 친구들이 부럽기도 하고... 헤어지고 난 뒤에라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쌉싸름하기도 하지만 달콤한 사랑을 이 소설은 그려내고 있다. 그 대부분의 심리가 20살 청년들에게 맞춰져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30대 40대 주부인 시후미와 키미코의 심리를 읽어내는 것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정말 이 청년들을 순수하게 사랑했는지, 아니면 불륜의 쾌감을 즐긴건지. 하지만 이런 혼돈도 청년들의 사랑앞에 같이 녹아들어 분명 이들도 사랑이라는 똑같은 이름으로 이들을 만나왔으리라 의심하지 않는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이중성을 벗어던지고, 소설은 이들의 사랑이 불륜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사랑 앞에선 아무 것도 잃을게 없다. 오직 사랑 그 자체를 잃는 것만이 두려울 뿐이다. 그래서 일탈이라는 것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한다. 일탈에 선뜻 발을 내딛지 못하는 것은 일탈로 인해 발생하는 손실때문이리라. 내가 순수한 욕망에 사로잡혀 그것을 따르고자 해도, 그것이 금지된 것이라면 선뜻 행할 수가 없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고, 지금까지 쌓아온 돈이나 명예, 권력이 무너질까 두려운 것이다. 자신을 지탱해주던 관계의 망이 끊어질까 겁나는 것이다.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은 울타리 안에 거주하는 것과 다르다 그래서 경계를 벗어나도 무섭지가 않다. 그러나 일단 가지고 있는 자는 빼앗기는 것이 두려운 일이다. 사랑은 그 두려움을 없애준다. 용기를 일으킨다. 사랑 앞에선 일탈이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찌보면 젊은 이들이 이토록 사랑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도 아직 쌓아놓은 토대가 두텁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음~ 사랑에 대해 너무 많은 말을 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책을 읽고 무엇인가를 써야 한다면 먼저 사랑에 대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다.

다른 여러 사람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친해지지도 고립되지도 žb으면서 존재하는 기술을 습득해버렸다.(89쪽)라는 토오루의 심정. 코우지에게 유일하게 두려운 것이 있다면, 마음을 준다는 행위였다. 묘하게 연상의 여자한테는 마음을 허락해 버린다. 자기 사람이 될 수 없는 여자에게만, 자기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더욱.(302쪽)라는 코우지의 심리. 이 둘을 합쳐 놓으면 내 속에 감추어진 그림자가 얼핏 모습을 드러낸다. 난 너무 늙어버린건가? 아니면 아직도 어린 애인가?

고슴도치의 사랑 마냥, 가시에 찔릴 각오를 하고, 아름다운 장미를 꺾기 위해 가시에 찔릴 각오를 하고, 삶을 살아가기 위해 가슴을 찔릴 각오를 하고....

인간이란 모두 완벽하게 상처 없이 태어나지, 굉장하지 않아? 그런데, 그 다음은 말야, 상처뿐이라고 할까, 죽을때까지, 상처는 늘어날 뿐이잖아, 누구라도(327쪽)

코우지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내 마음엔 아직 커다란 생채기 하나 없다. 상처가 생기기 전 이미 항생제를 들이켜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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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02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05-11-03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이기에...

2005-11-16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05-11-18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께서 드린 걸로 생각할게요^^
 

어라! 오늘은 남산 길이 달라 보인다. 너무 예쁘다.

단풍나무의 잎들은 여전히 초록색이다. 간혹 단풍이 든 나무들도 초췌한 색이다. 은행나무가 그나마 예전같은 밝은 노란색을 뽐낸다. 나무 한그루 한그루 자체를 뜯어보면 전혀 예뻐보이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도 군계일학이란 말을 쓸 수 있으려나. 아름답고 투명한 선홍빛 나뭇잎을 지닌 정말 아름다운 나무 한 그루도 간혹 볼 수는 있다. 하지만 벚나무의 칙칙한 누르스름한 단풍잎, 언제 단풍이 드었는지도 모르게 땅을 뒹글고 있는 갈색의 잎들. 눈 앞의 나무들은 생명을 잃어가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잠깐 눈을 들면 세상이 달라보인다. 울긋불긋한 숲 전체가 너무 아름답다. 더불어 숲이란 말을 여기에다 인용해도 될까. 더불으니 아름답다. 자꾸 뒤를 돌아보고 하늘을 쳐다본다. 남산의 단풍이 점차 절정에 들어간듯하다. 

혼자서는 아름답지 못한 것들도 모여있으니 이렇게 마음을 빼앗을수가 있단 말인가. 숲을 빠져나와 멀리서 바라보니 산은 또 다른 색채를 띠고 있다. 시내 한 복판에 붉으스름한 언덕배기. 붓 한번 싹 스치고 지나간듯한 모습.

나무만을 보아도, 먼 거리서 숲만을 쳐다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 산 속에 들어가면 있다. 적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 그 절정의 맛을 선사하는 것. 그 거리두기가 어렵다.

부딪혀 아프지도 않고, 떨어져 외롭지도 않을 그 거리를 찾아헤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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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11-01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산 근처에 사시는거죠? 아니면 직장이?
암튼... 축복받으신 겁니다!

하루살이 2005-11-02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낙엽비를 맞으며 걸었죠. 부럽죠.
그러고보니 정말 축복받은것 같네요.
 



팔공산 갓바위 앞에서 난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2005. 10. 24(월)

팔공산 갓바위에 올랐다. 수능을 앞두고 많은 수험생 어머니들이 오르내리는 곳. 분명 효험이 있다고 하는 불상을 찾기 위한 길이 쉽지는 않을 거라고 짐작했건만, 고개는 계속해서 깔딱고개였다.

마침내 보게 된 갓바위. 난 아미타여래나 석가모니 상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피커에선 계속해서 약사여래불이라는 염불만이 반복된다. 그 염불에 맞춰 아주머니들의 절은 계속되고, 난 의아심을 가졌다. 분명 약사불이라면 호롱병(약병)을 들고 있어야 하는데... 안내판을 보니 약사불이 맞다. 왼손의 약병은 바람과 비에 마모되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설명도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 약사불에 대학합격 기원을 그다지도 바라는가? 원래 약사불은 건강을 기원하던 불상이지 않았을까? 물론 그 것 이외에도 여러가지 서원들을 들어주었겠지만, 그럼에도 이 약사불에 유독 대입합격을 기원한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의 어떤 소원이 되었든 아마도 이 불상은 그 소원을 들어줄듯이 세상을 지긋이 바라본다. 세월의 풍파를 견디어내는 것들이 어떤 형상을 지니고 있을때, 또 그것이 특정한 상징성을 간직한채 인고의 세월을 이겨냈다면 이미 그것은 신묘한 힘을 지니고 있게된다.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월이 그 속에 녹아들어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팔공산 갓바위에는 그런 세월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갓바위에 절을 하는 마음으로 타인을 대한다면 불국정토가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동화사 쪽으로 길을 향한다.

중간에 마주치는 암자들. 그리고 그 속에 들어차 있는 불상들. 그런데 이 불상들은 금박으로 화려하다. 동화사가 조계종사중 손에 꼽히는 부자인줄은 알지만 도대체 산 속 암자 불상을 금박을 입혀 놓은 것은 누구의 발상인지 참 안타깝다. 부처를 죽여야 부처가 될수 있다는 화두. 추위를 이기고자 불상을 태워버렸던 선종의 고승 등등. 불상이 우상이 되는 순간을 경계했던 정신은 사라지고, 오로지 크고 화려한, 돈으로 칠해놓은 불상을 통해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심어주려 하는 자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내가 곧 부처이거늘 왜 부처에게 금옷을 입힌단 말인가? 갓바위 오르는 길이 그렇게 험한 이유 또한 끊임없이 땀 흘리며 오르는 나를 바라바도록 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다지도 우상을 만들고 싶어하는가? 내가 스스로 하기 보다는 누군가의 힘으로 운명을 거슬러보겠다는 욕망의 끝이 무섭다.

그런 속세의 욕망은 동화사에서 마주치는 통일기원약사불에서 절정을 이룬다. 오,이런. 저 거대한 불상을 지워놓고 정말 통일을 기원했더란 말인가? 저 크기만큼 통일을 빨리 다가올 것이라 생각하며 보다 더 크게크게만을 생각했으려나?

팔공산은 인간의 욕망을 생각해보게 만드는 산이다. 갓바위와 통일약사불이 공존하는 곳. 과연 불토정국은 어디에 있는가?

 

 

 

 

 

 

 

이 거대한 약사불이 과연 통일의 염원을 다 담아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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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0-31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을 좋아하시는 분이군요.
저도 산에 오르기 너무 좋아하는 사람 입니다.
기회가 없어서 많은 산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산에 오르는 일이 무지 행복하답니다.

하루살이 2005-10-31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산을 특히 좋아한답니다. 올 겨울은 과연 얼마나 자주 눈꽃을 대할 수 있을지...
기대반 걱정반. 시간과 건강이 허락해줄지, 그리고 마음의 게으름을 이겨낼 수 있을지...

icaru 2005-11-01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속세의 욕망은 동화사에서 마주치는 통일기원약사불에서 절정을 이룬다. 오,이런. 저 거대한 불상을 지워놓고 정말 통일을 기원했더란 말인가? 저 크기만큼 통일을 빨리 다가올 것이라 생각하며 보다 더 크게크게만을 생각했으려나?

이 줄을 읽으면서...너무너무 하루살이 님 답다는 생각을 ^^;;; =3=3=3

그나저나..
와아~ 하루살이 님이시다!!!!

하루살이 2005-11-02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비(?)하게 남아있어야했는데...^^

icaru 2005-11-02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비함의 절반은 남아 있당게요~
아슴프레 하게 보여요...(의도하신 거 같당게...!)

하루살이 2005-11-02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gracina 2005-11-04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여주셔서 감사해요~
게다가 하루살이님을 드러내 주시니 반갑고도 반갑네요^^


하루살이 2005-11-06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갓바위의 세월의 흔적을 잘 보여주지 못해서 죄송해요.
그 속에서 영험함이 힘을 가질텐데...
 




가야산 정상 상왕봉을 앞두고

 

2005.10.25.(화)

경상도 합천에 있는 가야산에 올랐다. 가야산은 조선 8경 중의 하나라고 하는데, 도대체 조선 8경이 어디인지는 알수가 없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선정해서 어떻게 퍼져나갔는지를 모를 뿐더러 또 제각각이라 도무지 어느 곳이 8경에 속한지 나로서는 감도 잡을 수 없다. 다만 그만큼 감탄을 자아내는 비경을 간직하고 있으리라는 생각만 들었다.

가야산에는 해인사가 있다. 해인사는 우리나라 3보 사찰 중 법보 사찰이다. 물론 8만대장경이 이곳에 있으니 당연한 이유일터다. 해인사라는 절 자체는 그다지 크다는 느낌을 주고 있진 않으나 주변의 고목들이 이곳이 역사를 간직하고 있음을 말없이 가르쳐주고 있다. 더군다나 붉은 색을 자랑하는 굵직한 소나무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 왠지모를 청정한 느낌을 준다. 소나무 기둥 하나하나엔 모두 숫자가 쓰여진 조그만 팻말을 붙여놓았다. 아무래도 최근 소나무들에게 치명적인 병을 예방하자는 차원에서 관리를 철저히 하고자하는듯이 보여진다.

가야산은 돌산이다. 흙을 밟으면서 올라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계속해서 돌길을 걸어야만 한다. 마애불상이 놓여있는 산 중턱 900미터 정도까지 올랐을때 언뜻 보여지는 정상은 그야말로 이 산의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보여진다. 위의 사진은 그 정상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돌더미 위에서 찍은 것이다.  (산 위에 조그마한 점이 바로 나.)900미터 정상에서 다시 뚝 떨어져 600미터까지 내려섰을때 아, 지금부터 치닫고 올라가는 곳이구나 라는 생각에 정신이 아찔했다. 최고 1400미터에 가까운 상왕봉까지 죽을 힘을 다해 올라가보자 마음 먹고 가다 밑에서 바라보던 돌산과 다른 분위기에 순간 발걸음을 멈춘다. 하루종일 안개에 쌓여 먼 풍경은 그다지 잘 보이진 않았으나 산 자체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정상에서 칠불봉으로 가는 순간 합천에서 성주로 넘어서는 순간이다. 산은 하나인데 그것을 가르는 인간의 잣대는 산 위에 가상의 선을 그어놓았다. 산은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그 선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선은 산을 내려온 순간 힘을 발휘할 것이다. (성주쪽으로 넘어가서 다시 해인사를 가기 위해선 군이 바뀐다는 이유로 택시 값이 엄청 비싸다고 한다. 그 거리에 상관없이) 칠불봉에서 다시 해인사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백운동 쪽으로 떨어질 것인지 고민이 됐다. 백운동 쪽은 대중교통이 불편해 오늘 안으로 서울로 돌아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친구와 산에 오를땐 대부분 같은 길로 내려오지 않았기 떄문에 이번에도 과감히 백운동 쪽을 택했다. 해인사 쪽보다는 단풍이 많이 들어있고 색깔도 곱긴 했지만 올해 전반적으로 단풍은 그다지 예뻐 보이진 않는다.

백운동으로 내려오니 염려했던 것이 현실로 드러났다. 버스는 2시간 후에나 있다니 음, 어쩐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걸어보자. 걷다가 히치하이킹을 하면 되지 않을까? 물론 걱정은 많이 됐다. 대학생이었을땐 차 얻어타는 것이 어렵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그것이 쉽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시커먼 남자 2명이서 차를 얻어탄다는 것은 그닥 만만한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세상이 그것을 점차 어렵게 만들어버리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세상 탓에 나이탓에 얼굴 탓까지 해본다.

그런데 다행히도 국립공원관리공단  차가 해인사까지 갈 일이 있어서 그 차를 얻어탔다. 1주일에 한두번 간다고 하는데 마침 우리가 그걸 얻어탔으니 운도 좋다. 백운동 쪽에 지어지고 있는 야생화 화원이며, 단풍 이야기며, 성주 참외 이야기 등으로 얻어탄 고마움을 아저씨에게 건넨다. 해인사 가는 중간에 내려 고령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탄 후 고령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산을 오르면서 정상까지 어떻게 올라가나 겁을 먹은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아마 오늘은 어제 팔공산에 오른 이후 아직 피곤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오르다 보니 다소 다른 생각을 떠올렸나 보다. 자신의 처지에 따라 전혀 예상치 못한 심리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깨우친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지금까지 산의 정상은  나에게 언제나 그대로의 감성을 준다. 때가 낀 가슴과 마음을 시원한 바람으로 깨끗이 씻어준듯한 느낌. 이 느낌을 갖지 못한다면 아마 산에 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잠시나마 바람과 하나가 되는 순간, 난 행복하다. 산의 줄기줄기를 내려다보며 그 사이사이 사람들의 흔적을 바라보며 집착을 벗어던진다. 깍이고 깍여 이렇게 아름다운 절경을 만들어주는 산처럼 깍이고 깍여도 아파하지 않을 것임을 마음 속에 다지며...


                                      

 

 

 

 

            가야선 정상에 올라서기 전

            마주치게 되는 불상

            난 무슨 소원을 빌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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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10-31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후~ 가야산 이제보니 돌산이네요~
한번도 안 가봤다지요...
무슨 소원 비셨는지..이제 생각나셨는가요오?

하루살이 2005-10-31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억하지 못하는 소원이 더 애틋합니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계속 소원을 바라던 그 상황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얽매이지 않을 잠깐 동안의 소원. 그것으로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