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카메라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멋진 풍경사진을 찍어 보려고 노력해봤을 것이다. 그러나 사진을 몇 번 찍다 보면 풍경사진을 찍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풍경 사진을 잘 찍을 수 있을까.

누리꾼들 사이에 ‘풍경사진의 달인’으로 널리 알려진 사진작가 박동철(38) 씨에게 그 비법을 들어봤다. 그동안 자신의 홈페이지(cheori.com)를 통해 작품을 발표해 온 박 씨는 최근 ‘여행이 즐거워지는 사진 찍기’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황금분할
1. 황금분할로 구성하라.

예부터 가장 아름답고 안정된 구도로 여겨지던 것이 바로 황금분할이다. 이는 한 개의 선을 a와 b로 분할(a>b)할 때 b : a = a : (a+b)가 되도록 분할하는 것을 뜻하는데, 대략 3 : 2 정도다. 조각이나 건축에는 이 황금비율이 자주 사용된다. 사진에서도 필름이나 인화지 등이 황금비를 따르고 있다.

황금비는 사진 찍을 때도 적용할 수 있다. 프레임 속의 화면 분포를 대략 1/3씩이 되도록 구성하는 것이다. 즉 가로로 3등분, 세로로 3등분이 되는 직선을 그어 그 선과 점이 있는 위치에 주 피사체, 부 피사체, 수평선 등을 배치해야 한다.

위 사진을 보면 황금분할이 된 사진과 그렇지 않은 사진의 차이점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황금분할이 된 사진이 훨씬 더 안정감이 있게 느껴진다.

구도와 위치
2. 좋은 각도를 잡은 뒤 최대한 접근하라.

사진을 찍기 전에 먼저 해야 하는 일은 피사체의 특징을 알아내는 것이다. 특징을 파악한 뒤에는 그 특징을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줄 수 있는 구도를 잡는다. 구도를 잡은 뒤에는 피사체를 적절한 각도와 위치로 이동시킨다.

적절한 각도로 피사체를 이동시킨 뒤에야 감상하는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을 만한 사진이 나온다. 피사체가 사물이라 움직일 수 없다면 촬영자가 움직여야 한다.

인상적인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좋은 위치를 잡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주제에 최대한 접근해 가까이서 찍는 것도 주제를 돋보이게 한다. 위가 좋은 예다. 위 사진은 평범한 위치에서 촬영한 것이지만 아래 사진은 구도를 잡은 뒤 최대한 접근해서 찍은 사진이다.
 
조연 찾기
3. 주연을 빛나게 할 조연을 찾아라.

주가 되는 피사체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나면 그 주인공을 보조해줄 조연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커다란 태양을 강조하고 싶어 초망원 렌즈를 가지고 태양을 찍었지만 태양의 크기를 가늠해줄 다른 보조 피사체가 없다면 보기에 심심한 사진이 될 수밖에 없다.

꽃 사진 역시 마찬가지다. 꽃만 접사로 크게 확대하여 찍는 것보다는 나비가 날아와서 앉았을 때 촬영하는 것이 더욱 눈길을 끈다. 위 사진을 봐도, 태양만 있는 사진보다 배가 등장하는 사진이 더욱 인상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경
4. 전경을 채워라.

아웃 포커싱(Out of Focusing)이란 앞쪽에 초점을 맞춘 피사체만 선명하게 하고 뒤쪽 배경을 흐리게 해서 원근감을 나타내는 기법이다. 반대로 앞쪽을 흐리게 하고 뒤쪽을 선명하게 하는 것을 인 포커싱(In Focusing)이라고 한다.

풍경을 찍을 때는 사진 전체가 선명하게(Pan Focusing) 나오도록 하는 것이 좋다. 원근감을 나타내려면 프레임 전체에 전경, 중경, 원경을 구별해서 피사체를 배치하는 것이 좋다.

특히 화면 앞쪽에 무언가를 채워서 멀고 가까움을 표시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위 사진을 보면 늪 사진을 찍었을 때 앞쪽에 배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앞쪽에 무언가를 배치하면 원근감과 입체감이 살아난다는 것을 명심하자.
 
역광
5. 역광으로 사물을 관찰하라.

사진의 ‘정석’은 피사체가 해를 바라보는 상태(순광)에서 찍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순광으로 사진을 찍으면 피사체의 형상이 깨끗하고 정확하게 나온다. 그러나 음영에 의한 질감이나 입체감이 없기 때문에 평면적인 사진이 나온다.

질감과 입체감을 잘 나타내려면 순광으로 형태를 잘 나타내고 후광(뒤에서 비추는 광선)을 비춰서 피사체의 윤곽이 살아나게 해야 한다. 또 사광(비껴 비추는 광선)으로 입체감을 살리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러나 태양에 의존해 사진을 찍어야 하는 상황에서 여러 각도의 빛을 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때문에 생각을 바꿔 역광으로 피사체를 찍어보면 예상치 않게 아름다운 사진을 얻을 수 있다. 다만 역광으로 찍을 때는 강렬한 태양빛으로 인한 플레어나 고스트(눈으로 봤을 때는 없었던 테두리가 나타나거나 도깨비불과 같은 동그란 모양의 빛이 촬영되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이 사진들은 거의 동일한 시간에 촬영한 것이지만 느낌이 상당히 다르다. 위 사진은 편광필터를 장착하고 순광으로, 아래 사진은 역광으로 촬영했다.

박 씨는 이 같은 방식들은 비싼 수동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작은 디지털카메라를 가지고도 위 방식들을 잘 적용한다면 충분히 아름다운 풍경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 씨는 이어 “사진을 찍으려고 피사체를 보다 보면 어색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도 인위적으로 풀을 뽑거나 돌을 치워 화면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며 “자연은 원래 모습 그대로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풍경사진을 잘 찍는 첫 걸음”이라고 덧붙였다.

내용출처 : [기타] http://blog.empas.com/wisdom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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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산

호우주의보가 내린 다음날 7일 명성산에 올랐다.  비온뒤 땅은 굳고, 하늘은 파랗다. 그리고 구름은 새하얗게 손짓한다. 딱 한가지 아쉬운 점은 밑으로 보이는 산정호수가 흙탕물이라는 것. 하지만 바로 저 물이 생명을 키워낼 터이니, 오히려 다정스럽다. 공기만큼 내 마음도 투명해질듯한 하루.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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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09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을 산대로 보존하고 물을 물대로 보존하는 지혜가 없으니 큰일입니다.

하루살이 2006-05-09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울린다는 뜻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가능하겠죠 ^^

파란여우 2006-05-09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적 진달래가 남아 있군요. 가는 봄이 아쉽지만 여름도 반기고 싶습니다.
산 위에 서면 대개 도를 깨우친 신선(??!!!)들이 되더군요.^^

하루살이 2006-05-10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달래가 이제 피기 시작하더군요. 저는 자꾸만 봄을 붙잡고 싶은데... ^^
시커먼 얼굴의 신선은 본 적이 없는데... 내려서면 다시 속인이니... 허허~
 
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흐르는 물에 손을 베이지 않고도 칼을 씻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화자>138쪽

개인적으론, 바로 이 문장이 단편을 모은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손대신 물로 씻는다는 뜻으로서가 아니라, 손을 베이지 않고 손으로 칼을 씻기 위해선 물의 힘을 빌려 적당한 힘 조절과 칼날과의 거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의미로서 말이다. 즉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상처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선 적당한 거리를 두고 관심을 적절하게 두어야 한다고 읽혀진다는 것이다. 마치 서로 다가가면 가시에 찔리기 때문에 거리를 두어야 하는 고슴도치의 사랑 마냥.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말이 없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그녀가 잠못드는 이유가 있다><사랑의 인사><노크하지 않는 집> 등등, 속으로 생각하되, 밖으로 내뱉는 말은 소설 속에서 찾기 힘들다. 상처를 줄까봐, 또는 상처를 받을까봐 겁내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을 주고 받음으로써 발생하는 타인과의 벽사이에 틈새가 생길까 부담스럽기도 하기 때문이다. 관계성에서 나를 찾기보다는 홀로 서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 쉬울듯 보여서일테다.

나를 규정짓는 것은 내가 편의점에서 소비하는 것들로 특징지어진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불특정다수의 사람들이 소비하는 패턴과 다를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거나.,원룸에 사는 여성이 다른 방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 문을 열어본 순간 자신의 방과 똑같은 모습을 발견한데서 오는 충격이 이 소설을 다 읽고도 굉장히 큰 여운으로 남는다.  내가 소비하는 것이 나를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결코 가당치 않음을 보여준다. 나만의 독특한 자아 정체성은 한번에 사라져버린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속에서 대량인간이 탄생된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 속 인물들은 왜 이리 태연한 것일까?

그것은 이미 베이지 않고 칼 씻는 법을 터득한 덕분이다. 나와 너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삶을 평온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타인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지만, 타인이 나와 그다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는 또 가까운 거리. 그래서 내게 이 소설은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가늘게 떨고 있다. 자신만의 껍데기에 갇혀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어떻게 서로 소통할 것인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실망하지 않을 것인지. 솔직히 책을 덮고 나서도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할 지 혼란스럽다. <노크하지 않는 집>의 주인공처럼 나와  똑같은 누군가를 마주치지 않을까 공포스러울 따름이다. (왠지 소설을 읽다 박민규를 떠올렸다. 근데 웃음의 색깔이  다소 차이가 난다. 그 차이가 바로 희망의 농도차이라고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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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5-09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쾌한 문체를 쓴 오렌지 맛 나는 젊은 작가죠?
전 포스트잇으로 방안 가득 붙여놓았던 장면이 인상 깊어요.
박민규는 읽지 않았으니 이래저래 비교는 무리군요,,

하루살이 2006-05-10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러고 보니 파닥파닥 거리는 포스트잇. 종이 물고기가 머리속에 그려지네요.
이 단편은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생각나기도 했는데...
 

영화보기가 아니라 읽기가 얼마나 가능한지를 알 수 있을듯 하여, <씨네 21> 기사 긁어왔습니다. 나의 무의식적 행동도 그 저변에 깔린 양식이 숨어져 있으며, 그것을 해석하는 능력이 바로 평론가와 같은 집단이라는 것, 그리고 그 해석이 행동의 변화, 또는 사고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면 그 소기의 목적을 다한 것이라고도 보여집니다. 인상비평에 그치지 않고, 그 속사정까지 파헤치는 작업이 갖는 재미를 이 글이 잘 보여주고 있는것 같아 재미있었습니다.

 

<씨네21> 549호 이종도 기자의 반론 덕분에 지면관계상 충분히 설명치 못한 내용을, 재반론의 기회를 통해 설명할 수 있게 된 데 감사한다. 아울러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의 이름을 신성시하는 지식인 남성의 반론으로 말미암아, <달콤, 살벌한 연인>과 나의 ‘읽기’가 얼마나 남성 중심주의와 지식인의 자의식을 건드리는지 저절로 입증된 듯하여 기쁘다.

1.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의 어린 그녀는 “남성 중심 성관계를 역이용하는 영리한 여자”가 아니다. 남자친구는 그녀를 놓고, “한번 하게 해주겠다”며, 가방모찌와 동생을 싸움 붙이고, 동생이 우세하자 “1학년한테도 지냐?”라 한다. 남자친구는 그녀의 포주 역할을 하면서, 남자들을 줄세우기한다. 그녀도 그것을 알면서 은근히 즐긴다. “네가 이겼다며?”란 말은, 슬쩍 상대의 우위를 승인해주며 ‘사실 난 너랑 하고 싶다’는 말을 건네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관계 속에서 꼬리를 치든 말든, 그건 ‘이미 분배된 뒤 교환되는’ 정도의 문제이다. 남자친구의 묵인하에 이루어지는 동침은 언제나 그의 권력의 장 안에서 훤하게 드러난다(“했냐?”). 영리한 여자는 그런 관계를 즐기지 않는다.

2. <달콤, 살벌한 연인>의 그녀는 연애에 바람직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어렵게 데이트를 청하는 소심남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흔쾌히 수락하고, 연락처를 주고받는다. 자신의 말에 집중하지 않는 것과 반말하는 것, 혼자서 즐거웠다 선언하는 것에 단호하게 “노”라 말한다. 남자가 자신을 무시하고 의심하는 것 같자, 과단성있게 철수한다. 그녀가 살인자로 도피하는 것이 ‘자기 긍정’이 아니라, 살인자로 도피 중임에도 적극적으로 행복해지고자 하며, 내숭과 집착이 없는 솔직담백한 연애의 태도를 지닌 것을 ‘자기 긍정’으로 보았다.

3. 이종도가 “본명도 사연도 다 숨기고 오로지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며, “책임감이 없다”고 평한 그녀를 영화와 황대우는 ‘용서’한다. 왜? 사랑하니까. 이 영화의 재밌는 점은 로맨틱코미디의 외피 속에 연애의 ‘살벌’함을 담아냈다는 것이다. 연애의 시작은 언제나 달콤하다. 그러나 상대를 알아갈수록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상처받는다. 감당할 수 없는 진실에 몸서리치기도 한다. 그 진실이 영화에선 강도 높게 살인이다(“사람만 안 죽였으면 돼”). 그러나 이는 정도의 문제일 뿐 투명한 연애는 없다. 하지만 사랑이 시험대에 오르는 고비들을 넘어 상대를 어렵게 이해하게 되면서, 기존의 잣대와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달콤…>은 소심한 지식인 남자가 살인자 여자를 만나 엄청나게 자아가 부서지는 영화이다. ‘혈액형 설’의 계보학을 읊던 그가 “A형이라서 그래”라 말할 때, 그는 이전의 그와 같다고 볼 수 없다. 사랑은 그의 인식체계와 가치관을 (부분적이나마) 바꾼다. 본명과 사연을 몰라도 그들이 사랑한 게 모두 거짓이었을까?

4. 살인자가 되는 전 과정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렸다’고 말할 수 없고, 대사로 처리되는 사연들은 영화적 사실이 아니며, <달콤…>에서 살인자 설정은 “미미한 맥거핀”에 불과하다는 이종도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그녀의 네번의 살인이 “짤막한 전언과 누가 현장에 있더라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 정당방위의 순간이 전부”라는 말로 요약되지 않는다. 왜 행간을 읽지 않는가? 첫 번째 ‘가정폭력에 의한 정당방위’도 적극적인 법정투쟁을 거쳐야만 인정될 수 있는 유의미한 ‘사건’이다(현재 수감 중인 133명의 남편살해범 중 82.9%가 가정폭력을 경험했지만 정당방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두 번째 노인의 죽음도 혐의점을 남기지 않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세 번째, 맥주캔을 던지는 옛 애인(옛 애인이 행패 부리는 장면들은 많다. <파란 대문> <너는 내 운명> 등. 여자는 불행을 내면화하며 항거하지 못하고, 자해를 하거나 도망친다)을 그녀는 죽여버린다. 이 역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누가 현장에 있더라도 똑같은 실수”에 비슷하게라도 맞는 사건은 네 번째인데, 그것도 “누구나”는 아니다. 어찌나 굉장했던지, 그녀를 질시하던 장미도 단번에 꼬리를 내려버린다(“말로 들을 땐 몰랐는데… 어쩜 그렇게 빨라?”). 네번의 살인 중 만만한 것은 한건도 없었다. 그녀가 운이 나빠서 “실수로” 살인을 하게 된 게 아니라, 그녀가 강하기 때문에 넷을 죽이고도 사법체계와 계동이, 장미, 변호사 등 앞길을 방해하는 이들을 제압하고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녀는 살인의 과정에서 점점 능력이 많아진다. 첫 번째는 우발적인 살인을 하고 사체유기도 하지 않은 채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두 번째는 살인을 위장하고 기소받지 않는다. 세 번째는 남의 차와 힘을 빌려 사체유기도 감행한다. 네 번째는 부하를 만들고,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사체를 유기한다. 그녀의 실력이 점점 느는 이유는 누구를 만나든 꼭 뭔가를 배우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말하는 그녀에게 책은 책만이 아니라, 사람도 포함된다. 계동에게선 땅파는 법을, ‘가방끈’에게선 <죄와 벌>을 배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주목하고픈 ‘자기 긍정’이다. 이종도가 그녀의 살인이 풍문이거나 정당방위 혹은 실수에 불과하다며 애써 그녀의 죄목을 축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가 넘어선 금기를 차마 인정할 수 없기 때문 아닌가?

5.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나 죄의식없는 살인은 트렌디한 장르적 실천으로 보는 게 온당하다”는 말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과연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나 죄의식없는 살인이 트렌드가 되느냐’에 주목해야 한다. 나는 마초이즘과 순결이데올로기가 아닌,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가 트렌드가 되는 것이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이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창작자와 관객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각성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이를 우리 시대의 트렌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성적 자기결정권이 잘 드러난 작품에 의미부여를 하는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죄의식없는 살인’이 아직 트렌드인지는 모르겠다. <친절한 금자씨> <오로라 공주> <6월의 일기> 모두 죄의식이 넘치는 살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장차 트렌드를 선도하는 영화가 되리란 예감은 든다.

6. <몬스터>가 “그녀를 하소연이나 늘어놓는 멍청하고 추한 몬스터로 그렸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에일린 워노스의 실제 사건을 다룬 이 영화는 공판기록만큼도 그녀를 변호하지 못한다. 김경욱의 지적처럼(<씨네21> 460호 ‘멜로드라마의 틀로 포획된 괴물’) 그녀는 현실적인 판단능력을 상실한 여자로 그려져 있다. 연쇄살인범을 옹호하려니 살인을 정당화해야 하는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멜로드라마로 도망친 결과 (착취-피착취의) 기괴한 레즈비언 커플만 남았다. 대사로는 그녀를 이해해달라 말하면서도, 화면으로는 그녀를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상태로 내모는 역설의 영화가 된 것이다. 성판매여성으로 7명의 남자를 죽이고, 남자들의 성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킨 정당방위였다는 주장을 펴는 그녀에게 법정은 ‘그녀가 창녀이기 때문에 성폭행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녀의 무죄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는 법적 논리는 ‘그녀가 성판매여성이기 때문에 오히려 성구매남성들의 폭력에 노출될 가능성이 많았다’가 되어야 한다. 성판매자의 영업행위와 성폭력을 구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가 영업행위를 빌미로 남자들을 유인해서 죽였다는 혐의를 씌우는 것의 부당함을 고발했어야 옳다. 그러나 영화는 쟁점을 놓치고, 신파와 멜로 사이를 헤맸다.

7. <망종>은 아주 훌륭한 영화라 생각한다. ‘너무 유별나다’는 말도 맞다. 몇년에 하나 나올까 한 걸작이기 때문이다. <복수의 립스틱> <성냥공장 소녀>는 과문한 탓에 보지 못했지만, 이종도의 식견으로 보건대 필적할 만한 걸작일 것이다(나도 걸작 여성살인자 영화 한편을 추천한다면, <시리얼 맘>을 꼽고 싶다). 그러나 언급한 영화들이 ‘주류’ 상업영화는 아닐 것이다. 내가 여성살인자를 그리는 방식을 유형화한 것은 “트렌디한 장르적 실천”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대중 상업영화에 한한 것이다.

8. “그녀가 살인을 하게 되는 배경도 라스콜리니코프적 상황과 전혀 연관이 없다”는 말이 왜 중요한지 모를 일이다. 영화 속 <죄와 벌>의 인용이 적확하다는 나의 말은, 그녀의 상황이 라스콜라니프적 상황에 합치된다는 뜻이 아니라, ‘관념과 실천의 차이’를 절묘하게 보여준다는 뜻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이 굉장히 위험한 도덕관념을 지녔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대단할 것도 위험할 것도 없는 인물이다. 19세기엔 그것이 신의 율법에 도전하는 금기의 상상이었지만, 20세기엔 실제로 떡 벌어진 역사이다. 생각이 무서운 게 아니라, 힘, 의지, 조직이 무서운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 뒤후 신열에 시달리다가 죄의식에 자수한다. 그러나 그녀는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무가치한 자’의 ‘유가치한 유산’을 잘 쓸 생각이다. 누가 그 관념을 끝까지 실천(체현)했는가? 그녀는 <죄와 벌>을 읽은 사람보다 <죄와 벌>이 제기한 문제의식에 더 가깝다.

9. “그녀가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어지럽히기 위해 다 알고서 저지른 일처럼 과도한 사후 해석”을 하다니,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다. 그녀는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의 해체’라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다 알고서 저지른 일”이 당연히 아니다. 그녀에게 앎은 사후적이다(반면 황대우에겐 행동이 사후적이다. 데이트 뒤에 “아까… 라 말하려 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통해 행동할 뿐이고,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관객(평론가)의 몫이다. <죄와 벌>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니체 역시 알지 못하지만, 니체 책도 꽤나 읽었을 법한 황대우보다 니체적인 정신과 태도에 훨씬 근접해 있다.

10. <달콤…>에서 “신경질적이고 괴팍하고 고고하며 허약한 남자에 주목”해야 한다는 이종도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이른바 ‘정상적인’ 독법이요, 특히 지식인 남성관객이라면 자연스럽게 그에게 눈이 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유일한 영화읽기의 정답은 아니다. 누군가는 장미나 계동이 캐릭터에 열광할 수도 있다. ‘소수적 읽기’가 가능한 것이다.

언제나 대중 상업영화들 속에서 사회적인 의미를 발견하고 발언하려는 나의 노력이 어쩌면 “줄없는 줄넘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줄이 있어도 보고자 하지 않는 이에겐 안 보이는 법이요, 설사 줄없는 줄넘기라 할지라도 운동의 효과는 거의 같다(그리고 “니코틴 없는 담배” 등 지젝의 비유는 ‘위험성을 제거한 수용’의 의미로, 그 용법이 틀렸다).

글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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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의바람꽃

 

꿩의바람꽃이라...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그냥 바람도 아니고 꿩의바람이라니. 꿩이 사람소리에 놀라 후다닥 도망친 자리, 그곳을 쳐다보니 알처럼 하얀 꽃이 바람결에 놀라 뒤척이고 있었을까? 꿩의날갯짓바람에 태어난 꽃이었던 것일까? 눈 부신 새하얀 자태가 바람결에 날라가 버리려나. 하얗게 겁먹지 말거라, 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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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5-05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꿩 알꽃...^^

하루살이 2006-05-05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해에 또 태어날 터이니 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