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에 가면 특별한 식단이 있다
정세채 지음 / 모색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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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가면 특별한 식단이 있다.

무슨 특별한 식단이 있을까? 그리고 왜 산사라는 곳을 택했는가?

아마도 우리는 산사속의 고승을 떠올리며 그들이 건강하게 장수를 누린 사람들, 마치 신선들마냥 여기고 그들이 뭘 먹었기에 그렇게 산속을 나는듯이 걷고 맑은 정신을 갖게 됐는지 궁금해서 이 책을 펼치고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분명 이 책은 고승들의 이야기를 전설마냥 신화마냥 신비스럽게 풀어헤치고 있어 그런 이미지에 어느정도 부합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의 식단이 어떤 특별함을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그저 주변의 살아숨쉬는 생명력을 이용한 단순한 먹거리일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좋은 먹거리들을 찾아서 많이 먹는다기 보다는 일일일식과 같이 소식한다는 사실이다. 즉 좋은 것을 찾아 기어코 많이 먹어치우겠다는 생각은 그 생각자체만으로 이미 특별함을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다만 헬렌 니어링과 같은 소박한 밥상인듯 보이지만 산사의 최고식으로 여긴 죽이라는 것이 엄청난 시간의 공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소박하지 않은 소박함으로 여겨진다. 즉 특별한 음식이란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의 정성을 기본 재료로 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책 속에 나왔던 몸에 좋은 음식을 찾는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런 나의 모습에 조금 참담해진다. 소식의 삶을 살았던 고승들의 참뜻을 저버리고 건강이라는 또 하나의 욕에 휘말려 앞뒤 가리지 않고 먹을 것을 찾다니... 특별함은 결코 특별하지 않음을 그리고 그 특별함은 오로지 이 세상이 너무 뒤틀려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특별함임을 깨우치며 공기속의 밥을 한숟갈 덜어낸다. 내 마음의 욕도 한숟갈 같이 덜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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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불편 - 소비사회를 넘어서기 위한 한 인간의 자발적 실천기록
후쿠오카 켄세이 지음, 김경인 옮김 / 달팽이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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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아름다운 가르침을 전해준 성인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말씀을 모아둔 경전 또한 지금까지 잘 전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변하지 않은걸까? 왜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것을 포기하고, 성인이 될 것을 마다하는가? 그것은 그 가르침대로 행하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리라.

최근의 환경오염에 대한 경고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무엇이 우리의 환경을 망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런 결단이 가져올 불편때문이다. 당장의 불편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이 미래의 파멸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만함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틱낫한 스님은 수행과정이 즐거워야 한다고 말한다. 과정의 즐거움은 깨우침 뿐만 아니라 다른 이상적 사회를 지향하는 대부분의 행동에도 깃들어야 한다. 이 책 <즐거운 불편>을 쓴 일본의 기자는 당장 현실에서 몇가지 불편을 감수하기로 한다. 통근은 자전거로, 세제를 쓰지 않고, 채소나 과일, 쌀을 직접 재배해서 먹는 등등. 당장은 불편한듯 보이지만 막상 그 일을 실제로 행했을때는 생각지 못한 기쁜 일이 생기는 것에 놀아워한다. 말 자체로는 이상한 듯 보이지만 불편이 즐거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즐거운 불편을 통해서 세상은 조금씩 변할 수 있다.

오리농법을 통해 쌀을 재배하는 과정에서 살아난 물속의 생명들, 그리고 아이들의 자연에 대한 이해가 마치 동화책마냥 순수하고 아름답다. 그렇다고 이 책이 모든 불편이 다 아름답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때론 그런 불편들로 인해 가족과 충돌도 일어나고 자신 또한 교통사고라는 것을 당하기도 한다. 이런 불편한 일들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 오히려 더 우리의 마음에 불편한 생활을 즐겁게 감수하도록 자극한다. 거창하게 환경운동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조금만 불편을 즐겁게 행하자는 것이다.

아이들이 논에서 오리를 쫓아 뛰노는 모습만 상상해봐도 즐겁지 않은가? 먹거리에 대한 걱정이나 의심없이 담백한 자연의 열매를 먹는 모습 또한 즐겁지 않은가? 이런 즐거움이 비록 불편을 감수해서 생기는 것일지 몰라도 그 불편 속에서 참다운 인간관계 또한 새롭게 생겨나는 것을 보면서 즐거움은 결코 외롭지 않음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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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밥을 먹다 한가지 생각이 퍼뜩 떠오른다. 어떻게 보면 아무 맛도 못 느끼는-그러나 막 지은 밥은 또 얼마나 달콤한가?- 쌀을 왜 사람들은 예전부터 주식으로 삼은 걸까? 물론 맵거나 시다거나 쓴 맛은 매일 먹기 거북할테니 주식으로 쓰일 수 없다지만 단맛이 나는 것을 주식으로 삼을수도 있지 않은가? 곡류가 아닌 사탕수수와 같은 것을 말이다.

그러나 잠시만 생각해보면 아무 맛이 안난 듯 맛을 내는 곡류가 주식이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을것도 같다. 자신은 맛을 내지않지만 그 중용의 맛으로 인해 다른 반찬류의 맛들을 더 돋보이게 해주는 것.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도 이와 같지 않을까싶다. 날마다 좋은 일이라든가, 날마다 나쁜 일이 발생하지 않을뿐더러 설령 어떤 일이 발생했을때 희노애락의 감정이 그 일에 따라 급물결을 친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삶도 특정한 맛을 내지 않지만 그렇게 차분하게 가라앉은 마음의 맛으로 다른 자극적인 희노애락의 반찬을 보다 잘 느끼며 찬찬히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상에 기쁜 일이 없다고 너무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마음에 평화와 얼굴에 미소가 머금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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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rk829 2004-09-13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춰볼까요? 당신은 나보다 한살많은-나보다 많은것을 알기때문에 제가 읽은책은 당신보다 적긴적습니다. 왜냐면 난 당신이 읽은 책들을 하나도 모르거든요- 언니 입니다. 제가 맞습니까?
제발 힌트라도 하나 주시지요. 이건 너무 범위가 넓어서 제게 절대적으로 불리합니다.

yrk829 2004-09-13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리를하면 평화가 온다. 맞습니다. 저도 요즘 그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평안한 마음이되고 정성을 다한 요린 못생겨도 맛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해주는 요리는 사랑이란 조미료가 있어 더 맛납니다. 비록 소금을 한통넣었어도.

yrk829 2004-09-13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 남성의 여부만 알려준다면 제가 100날을 1살부터 늘려가며 맞추지요 ㅋ

yrk829 2004-09-13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은 쌀(우리나라의 짧은 쌀 종류)이 길러지기 좋은 기후입니다. 문화는 기후에 의해 생성됩니다.

icaru 2004-09-30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은 맛을 내지않지만 그 중용의 맛으로 인해 다른 반찬류의 맛들을 더 돋보이게 해주는 것.
음...!!

하루살이 2004-10-01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 사람 모두가 밥이 될 순 없겠죠. 누군가는 입맛을 자극하는 반찬이 되야 할테고.
아마 반찬은 예술가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밥은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싶네요. 정말 맛있는 밥이 필요한 세상에 죽도 밥도 아닌게 밥상에 올라오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며 어떻게 하면 눈과 입과 혀와 코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밥을 지을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한바를 위해 쌀을 씻어야 겠습니다.
 
생태적 경제기적 - 프란츠 알트의
프란츠 알트 지음, 박진희 옮김 / 양문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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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그의 전작 [생태주의자 예수]와 닮아 있다. 아니 닮아 있기보다는 개정판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성경의 인용구가 빠진 대신 최근의 자료들이 첨가된 형태라고 보면 맞다. 그래서 최근 환경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자꾸 혼동이 되던 것이 반복적으로 책을 읽은 것과 같은 효과로 인해 점차 가닥이 잡혀가는 것 같다.

지금과 같은 화석원료를 바탕으로 한 경제개발은 한계에 다달렀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라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는데 이 부분이 굉장히 햇갈리게 만든다. 크게 두 줄기로 나눠보면 100여년전 러다이트 운동과 같이 현대 문명을 거부하고 자급자족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현대의 기술적 진보를 이용해 합리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러다이스트로 살아가는 것은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이란 책에서 나오는 아미쉬 집단을 보면 된다. 극단적인 모습만 아니라면 어느 정도 문명을 거부하는 것도 그렇게 썩 나쁘진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책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라디오와 텔레비젼, 컴퓨터 없는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물론 이들처럼 훌륭히 해내는 사람들이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어느정도의 불편을 감수해야만 하고, 그 불편을 기꺼이 수용할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

반면 현대의 기술을 활용하는 것은 태양열 전기나 풍력 발전, 바이오 매스 같은 대체 에너지의 개발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대중교통, 특히 철도 중심의 교통체계 등을 바탕으로 현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둘의 방법은 마치 양 극단에 있어 절대 그 접점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중심개념이 시간에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닮아있다. 자급자족의 삶은 생산에서 소비까지 온전히 자신의 시간으로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프란츠 알트가 주장하는 생태적 경제라는 것도 노동의 시간을 줄여 가정의 시간 또는 개인 자아의 시간으로 활용할 것을 주장한다. 즉 노동의 여성화를 통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노동의 시간이 줄고 소득이 줄지라도 소비사회를 지양함으로써 보다 근원적인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계를 알고 그 대안도 어느정도 제시되어 있지만 이것은 현실을 모두 과감히 부정하거나 너무 거시적인 것이라 아직 피부에 와닿진 않는다. 다만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소비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볼 필요를 느낀다. 그리고 정말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기 위해 또 다시 <즐거운 불편>이라는 책을 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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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가 인간에게 어떤 재앙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그야말로 가능한 재앙은 모두 가져온 듯하다. 주먹만한 우박, 갑작스런 빙하기, 엄청난 위력의 토네이도 등등. 실제와 같은 완벽한 CG로 된 화면에 숨이 멈출 듯하다. 그리고 뭉뚱그려진 도덕적 교훈, 지금이라도 늦지않았다.

그러나 실상을 보라. 우리는 영화가 말하는 온난화의 주범인 차가운 에어컨 바람속에서 영화를 지켜본다. 더군다나 이 영화를 보기위해 복사된 필름은 수많은 화석연료를 낭비해가며 공수되어 온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는 순간 밖으로 나오면서 '아 너무 덥다' 하고 하늘을 쏘아볼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는 아마도 프랑스나 칠레산 포도주라도 한잔 마신다면. 또는 열대 우림을 없애고 들어선 플랜테이션 농업에서 생산된 바나나나 커피 한잔을 마실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에어컨을 빵빵히 틀어논 자가용을 타고서다.

그러니 영화속에서 보여진 재앙은 그저 영화속의 재앙일뿐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말은 전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빈 메아리로만 남는다. 그리고 설령 우리가 지금이라도 무엇인가 행동해야 한다며 일회용 제품을 줄이고, 재활용을 생활화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밑빠진 독에 물 붓는 일밖엔 안된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화석연료를 대신할 대체 에너지의 생활화다. 그러나 이것은 석유 메이저 회사와 자동차 산업, 군수산업 등 현재의 자본주의를 굴리고 있는 막강한 경제적 파워로 인해 불가능하다. 아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정부가 비전을 가지고 행한다면 못할 것도 없다. [투모로우]가 상상력이 빈곤한 것은 바로 이부분이다.

미국 부통령이 말한 경제라는 문제 뒤에 감추어진 실체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늦지 않았다는 교훈은 그저 공허할 뿐이다. 실은 당장이라도 디지털화된 이 영화를 필름말고 디지털로 받고, 극장이라는 것은 자신의 집 근처에서, 그리고 움직이는 것은 대중교통을, 먹는 것은 원거리를 이동한 것보다는 지역에서 생산된 것을 먹는 것 만으로도 한발짝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의 각성과 함께 사회적 조직적 변화도 함께 이뤄져야지만 가능하다. 물론 희망이 보이기는 한다. 개인적 건강이 화두가 되어 웰빙 바람이 불고 있는데 이 웰빙이라는 것이 진정한 의미를 찾아간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영화속 의미와는 다른 진짜로 늦지않은 변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불인(不仁)이라는 도덕경의 글귀를 새겨들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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