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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전도사 최윤희씨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행복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자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말과 완전히 상반된 자살을 선택했으니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건이다.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입장 또한 천차만별일 것이다. 나에게는 가장 먼저 안락사가 떠올랐다. 

1. 존엄사와 안락사

2004년 스페인 영화 <씨 인사이드>(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는 안락사를 다루고 있다. 26년 전 바다에서 다이빙을 하다 전신마비가 된 라몬 삼페드로가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안락사를 인정하지 않는 스페인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을 그리고 있다. 그는 입으로 펜을 잡고 글을 쓰면서 유명세를 타고, 그를 동정하는 두 여자와 사랑.우정의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가족들의 헌신도 새로 찾은 사랑도 그의 죽음에의 동경을 꺾진 못한다. 스스로 택한 죽음이란 절대 악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아름다운 선택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절대 죽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안락사에 대한 생각을 바꿔준 영화였다. 

최윤희씨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맨처음 든 생각은 왜였다. 그 왜에 대한 답은 그녀의 유언으로 어느 정도 밝혀졌다. '죽고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이라는 단어로는 절대 그 고통을 설명할 수 없다. 정말 끔찍할 정도의 고통을 몸으로 느껴본 사람만이 감히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 고통을 피할 수만 있다면 죽음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정신상태를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지만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고통을 치료할 수 없고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다면 더더욱 그렇다.  

누군가는 그 육체적 고통으로 인한 정신적 고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만 있었더라도 자살은 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행복을 말하던 사람이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각박한 사회현실을 탓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정신적 고충을 털어놓고 치유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끔찍한 육체적 고통을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없을 때, 끊임없는 병원신세로 망가져 가는 모습이 예측될때, 행복한 기억을 가지고 이성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할 수 있는 안락사를 인정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고민도 있어야 한다. 점차 존엄사를 인정해가고 있는 현실에서 이젠 안락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도 필요한 시점이지 않을까. 행복전도사는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나눈 것은 아닐까. 

존엄사와 안락사 - 두산백과사전 중 

존엄사란 최선의 의학적 치료를 다하였음에도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질병의 호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루어지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질병에 의한 자연적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면서 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안락사는 질병에 의한 자연적 죽음이 아니라 인위적 행위에 의한 죽음이라는 점이 다르다. 안락사 중에서도 환자의 요청에 따라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에게 약제 등을 투입하여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것을 '적극적 안락사', 환자나 가족의 요청에 따라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영양공급이나 약물투여 등을 중단함으로써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소극적 안락사'라고 한다. '소극적 안락사'를 존엄사와 동일시하는 견해도 있다.

 

2. 지행일치의 어려움

한편으론 최윤희씨가 말한 행복은 머리로 알았던 행복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봤다. 물론 자신의 경험치만큼 쌓인 행복에 대한 지식이었을 테다. 자신이 살아온 꼭 그만큼의 지식으로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도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어떤 고통과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행복을 떠올리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죽음에 이르기 직전까지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죽음으로 행복 전도사는 행복에 대한 자신의 정의를 새롭게 내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직접 몸으로 부딪혔든 책이나 강의, 대화를 통해 얻었든 간에 경험이 가져다 주는 지식은 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곤 한다. 하지만 때때로 자신이 쌓아온 지식과 선택의 상황에서 내린 결정이 어긋나는 경우도 간혹 있다. 그 지식이 가슴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머리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지식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있지만 실제 내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은 없다. 그에게 길은 가르쳐주지만 실제 발걸음을 옮기는 용기까지 주지는 못한다. 마음으로 가슴으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일 수 있다. 혹시 행복전도사의 전도는 머리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책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 책은 결코 읽은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은 가슴으로 쌓는 지식의 참된 힘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지행일치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또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진정한 용기를 지닐 수 있기를 바라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곳에서 진짜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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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10-10-11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에 대한 권리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세상이 와야겠죠.
 

'누군가 옳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위험할 때이다' 

어디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계속 맴도는 것을 보면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온 듯하다. 최근 미국 플로리다의 테리 존스라는 목사가 9.11 테러 추모일에 코란을 불태우겠다고 해서 지구가 들썩이고 있다. 한때 철회했다 다시 철회를 번복하는 등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과의 갈등을 더 키우고 있다. 아마 존스 목사는 자신이 코란을 불태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때가 가장 위험할 때이다. -우리의 과거 역사를 돌이켜 봐도 이와 비슷한 일이 떠오를 것이다. 군부 독재시절 독재자들이 난 사리사욕을 위해 이 자리에 섰다고 생각하진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만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삶 속에서도 이런 일들은 쉽게 벌어질 수 있다. 무엇인가 확신에 차 있을 땐 주위 상황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법이니까. 그래서 생각해본다. 내가 지금 옳다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행동하고자 하는 것, 진짜 옳은 것일까. 그런데 이런 번민이 자꾸 실행을 더디게 만든다. 그럼 이런 주저함은 옳은 일인가. 실소를 머금어 본다. (아무튼 자신의 행동이 주위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해보는 것은 꼭 필요한 일 아니겠는가. 그러기 위해선 열린 귀를 가져야 할 것이다. 반면 때론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순간도 닥쳐올지 모를 일이다.) 오락가락한 날씨 마냥 머리속도 오락가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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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남산에 들렀다. 태풍으로 쓰러진 나무들이 아직도 누워 있다. 아름드리 나무도 제 몸 하나 지탱하지 못했다. 그런데 나를 놀래킨 것은 쓰러진 나무들의 숫자가 아니였다. 그 큰 몸통에 비해 뿌리가 너무 짧다는 것이었다. 땅 속 깊이 뿌리를 박지 못하고 옆으로만 뿌리를 키우다 덜컥 이런 봉변을 당했다. 사람들이 뿌리 깊은 나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왔지만, 실제로 이렇게 뿌리 뽑힌 나무를 보고서야 그 말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우리 사람들에게 있어 뿌리는 무엇일까. 태풍보다 더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 인생살이 속에서 쓰러지지 않고 굳건히 버텨나갈 수 있는 깊은 뿌리란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해봤다. 이번 청문회에서 추풍낙엽처럼 스러져 간 사람들도 떠오르고, 정적들의 칼날 속에서도 살아남아 명성을 드높이는 사람들도 떠올랐다. 과연 뿌리를 깊이 내리기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이란 말인가. 

그 뿌리의 생김새나 뻗는 양식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나는 건강함을 뿌리뻗기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육체적 건강 뿐만 아니라 생각의 건강까지 모두 포함하는 전일적 건강함이다. 실은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한 나무들은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표이기에 뿌리깊음과 건강은 똑같은 뜻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겠다. 어쨋든 건강한 사람은 비바람 속에서도 굳건하게 생을 헤쳐나갈 것이라 믿는다. 

그렇다면 건강함이란 무엇인가. 나는 공생이 건강함이라고 본다. 세포 하나하나가 경쟁 관계에 놓여 있지 않고 공생할 때만이 내 몸이 제대로 돌아간다. 마찬가지로 개인과 개인 사이, 개인과 자연 사이, 개인과 국가 사이 등등 관계 맺어짐은 공생이 전제로 되었을 때 건강함을 갖을 것이다. (생존 경쟁이나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 속에서 어떻게 공생을 이야기 할 수 있겠느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럴 땐 동학의 한울님 이라는 뜻을 가져오면 좋겠다. 더 큰 생명을 위한 희생의 정신과 경쟁은 그 시선 자체가 판이하게 다르다) 나무가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있는 것도 나뭇잎이 썩고 그 썩은 나뭇잎을 먹고 미생물이 자라고, 지렁이가 꿈틀대고, 두더지가 땅을 파는 등등 생명체의 활동이 보장 된 살아있는 땅에서 가능한 것이 아닌가. 

비바람을 겁내지 않고 인생에 당당해지기 위해서 과연 나는 얼마나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한번쯤 고개 숙여 쳐다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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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10-09-07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100일이 넘었어요. 태어날때부터 지금까지 사진을 죽 훑어보니 이제야 사람 꼴을 갖췄더군요. ^^ 그 생각에 빠지다 보니 저도 사람꼴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했구요. 또한 아기가 진짜 사람꼴을 갖출 수 있도록 잘 키울지 걱정도 되요.^^;
 

스마트폰의 등장과 함께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소셜 네트워크가 그 세를 확장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변화를 예고한다. 그리고 많은 전문가들이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그런데 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그만큼 외로운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라고.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논쟁을 하거나 다투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또는 자신의 의견에 동조할 수 있는 사람들로 끈이 이어져 있다. 나의 말 한마디에 고개를 젓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안아주듯, 머리를 쓰다듬어주듯 이야기를 건네는 사람들 말이다. 바로 외로운 사람들이다. (물론 이 속에서 사업을 꿈꾸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마당발 개성을 더욱 잘 발휘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런 생각이 자꾸 드는건 어쩔 수 없다. 이 현상을 이렇게 바라보는 나의 기질상의 문제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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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 동영상을 올려 연 수입이 3억 7000만원에 달하는 청년에 대한 기사가 회자되고 있다. 동영상을 클릭한 숫자에 따라 유튜브와 5 대 5의 수익배분을 나눠갖음으로써 큰 수입을 얻게 됐다. 또 최근엔 유료 앱 콘텐츠를 개발해 단번에 8000만원의 수입을 올린 사람이 있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앱 하나 잘 만들거나 동영상 하나 잘 만들면 떼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 빠진다. 마치 10여년 전 로또 하나 잘 맞으면 벼락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처럼. 물론 로또야 순 운이지만-누군가는 복권을 20년 30년 꾸준히 샀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성실함이 행운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근면, 성실의 이데올로기가 확률의 게임에까지 개입된다- 앱이나 동영상은 창조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개개인의 노력이 밑바탕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다르긴 하다. 하지만 모두 다 큰 것 한방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한 방에 목말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이 한방의 기회가 점차 많아지고 있는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단순히 천운에 기대는 것 뿐만 아니라 아이디어 하나만 있으면 인생역전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산다. 그러나 유튜브 동영상이나 앱 콘텐츠나 주식이나 부동산이나 한 방은 결코 많은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여전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다. 그 기회가 넓어지고 있는 건 분명 사실이고, 어찌보면 자본주의의 발달은 이런 기회의 넓어짐으로 설명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역시 모두에게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오늘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행복하다면 한 방에 대한 목마름이 그토록 크진 않을 것이다. 생계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고 가정했을 때도 한 방의 유혹은 그 힘을 많이 잃을 것이다. 사는게 힘들고 일이 자아의 완성이 아니라 입에 풀칠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수단일 때 한 방은 크게 다가온다. 한 방이 보다 더 크고 보다 더 쉽다고 느껴질 수록 우리는 진리나 행복이라는 단어를 잊은 채 오직 한 방을 그리워한다. 그 한 방에 목메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가끔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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