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란 무엇인가 - 5단계로 이해하는 생물학
폴 너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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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란 무엇인지 정말 모르겠다. 생명을 무엇인가로 정의하면 꼭 그 정의에서 벗어나는 것들이 존재한다. '예외없는 법칙은 없다'처럼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생명을 정의하려 한다.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 '생명은 함부로 죽여서는 안되는 것'이라는 도덕적 명령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함부로 죽여서는 안되는, 존중해야 할 그 생명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아야지만 이 명령에 부합할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 생명의 정의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무엇인지를 알고싶은 것이다. 


이 책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노벨상을 수상한 생물학자 폴 너스가 생명을 정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마도 일반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최대한 간결하게 쓰였을 책이지만, 과학과 친하지 않은 이에겐 여전히 어려운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책의 페이지를 술술 넘길 수 있었던 것은 머리속에 남겨진 진화의 계통수 덕분일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공통된 조상에서 진화를 통해 갈라진 생명체라는 지식을 갖고 있기에 책을 접하는 것이 힘든 일만은 아니었다.


폴 너스가 말하는 생명이란 그가 말하는 외계 생명체에 대한 예측을 통해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다. 자연석택을 통한 진화가 만들어낸 정보를 담은 중합체를 중심으로 구축된 자족적인 화학적, 물리적 기계(218쪽)인 것이다. 그는 이 책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세포, 유전자,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 화학으로서의 생명, 정보로서의 생명이라는 5단계로 설명한다. 개인적으로 판단컨데 이 5단계 생명에 대한 설명 중 방점은 정보에 찍혀 있다. 생명은 홀로 독단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 환경, 즉 물리적, 생명적 개체와의 정보를 주고받으며 생존해 간다. 능력이 뛰어나거나 보다 적합해서가 아니라 최적의 방편인 정보를 통해 살아남은 것이다. 그래서 반대로 정보를 주고받을 대상이 없다는 것은 생존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을 말하는 셈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인간이 지구상에 생존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정보를 주고받아야만 하며, 그 정보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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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재난 국가
이철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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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자영업자들은 죽어나가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휘청거린다. 재난은 취약계층에게 더욱 잔인하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실업상태에 빠져 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영끌해서 코인과 주식에 투자해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이 늘어난다.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은 아직도 견고하고, 결혼과 출산 등으로 인한 경력 단절은 사다리를 부숴놓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아이를 낳는 일은 주저되고, 출산률은 최저를 경신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헬 조선'의 모습이다.


대한민국의 위태로움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베이비붐 세대와 청년세대, 남성과 여성 등등의 불평등의 격차가 커짐으로써 더욱 위험해졌고, 그 불평등은 불공정이라는 화두를 낳았다. 공정을 향한 열망이 불평등한 것으로부터의 탈출에 대한 열망과 맞닿아 있는지, 아니면 불평등함 속에서 최상위로 가는 길이 열려있기를 바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정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분노로 폭발하고 있다. 


도대체 왜(?), 어쩌다 대한민국은 이렇게 불공정과 불평등으로 인해 화가 잔뜩 쌓여 비틀거리고 있는 것일까. 저자인 이철승 교수는 그것의 원인으로 연공제를 들고 있다. 물론 연공제 단독범은 아니다. 세대와 인구구조와 맞물리면서 이 연공제가 대한민국을 위기로 몰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베이비붐 세대와 2차 베이비붐 세대는 연공제의 단 맛을 최상으로 즐기는 위치에 서 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 연공제의 단 맛 이면에는 청년실업과 비정규직의 증가가 도사리고 있다. 직무와 직능제로의 변화를 통해, 그리고 직무와 직능간 평가의 차이의 제한을 통해 불공정과 불평등을 해결할 단초가 있음에도 우리는 연공제에 묶여 한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토록 연공제에 목을 매달고 있는 것일까. 저자는 그 이유를 쌀 생산국가로서의 문화, 제도로 설명한다. 밀의 재배는 한 개인이나 가족이 거뜬하게 해낼 수 있지만, 쌀은 엄청난 규모의 물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수로 체계와 수자원의 확보를 위한 마을 전체를 넘어선 국가적 규모의 계획과 노동이 필요로 한다. 이는 자연스레 협력을 필요로 하며, 이 협력은 표준화와 평균화가 개입된다. 즉 내가 다른 이의 논에 딱 내가 받은만큼의 기술과 노동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쌀 농사에 있어서 기술이란 경험의 축적이 큰 영향을 미침으로써 나이를 먹은 농부들은 자연스레 대접을 받는 위치에 선다. 이 농부들은 또한 자신의 자식들에게 그 기술을 대물림하는 교육을 철저히 해야 한다. 한편 쌀 농사에 있어서 공동의 노동은 오히려 수확의 차이에서 개인의 노력 차를 반영함으로써 질시의 씨앗이 된다. 또한 이런 노동의 동원을 조정하는 권력에 얼마나 가깝게 있느냐에 따라 노동력의 조달이 손쉬워지면서 수확의 격차는 벌어지게 된다. 이런 문화적 전통은 아마도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벼 생산의 체계가 고스란히 공장으로 옮겨지면서 우리는 연공제라는 제도를 자연스레 이식했다. 이 연공제는 뛰어난 기술을 가진 이보다 오래 근무한 이에게 보다 많은 보상을 제공한다. 하지만 지금의 경제는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산업생태계를 바꿀 정도로 변모했다. 연공제는 베이비붐 세대들이 활약했던 전성기에 우리의 산업생산력을 이끌었던 제도였지만, 지금은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는 독이 되어버렸다. 


<쌀 재난 국가>라는 책을 통해 대한민국의 위기의 근원은 연공제에 있다고 주장하는 이철승 교수의 진단은 곱씹어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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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사피엔스를 위한 뇌과학 - 인간은 어떻게 미지의 세상을 탐색하고 방랑하는가
마이클 본드 지음, 홍경탁 옮김 / 어크로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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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가르쳐 준 사실 중의 하나는 인간이 꽤나 여행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집에 콕 박혀 사는 것만으로 우울증을 겪는 코로나 블루는 인간의 여행욕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기본 욕구라 할 수 있는 식욕, 성욕, 수면욕에 더해 여행욕구를 집어넣어야 할 판이다.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인류가 지구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여행욕구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인류의 조상이 아프리카에서 전 세계 곳곳으로 확장되어진 것은 길을 떠난 덕분이다. 


최근 아카데미에서 감독상과 작품상을 받은 영화 <노매드랜드>가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도 이런 길을 떠나고자 하는 욕구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물론 서브 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인한 미국의 경제적 충격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지 중 하나였던 노매드 족의 모습을 통해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고민을 끌어냈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근저에는 결국 길을 나서고야 마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있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이 개인적 생각이다. 


최근 종영된 드라마 <나빌레라>에서 할아버지 심덕출은 알츠하이머를 앓았다. 알츠하이머의 증상을 표현하는 기억력 상실 중 초기부터 나타나는 것은 바로 길을 잃는 것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집으로 가는 길은 무엇인지를 전혀 알 수 없는 공포감이 엄습한다. 길을 나서고 찾는 것은 인류 초기 생존과 직결된 사냥을 위한 기본적인 지식이었을 테며, 그런 과정을 통해 인간의 뇌는 발전을 거듭해 왔을 것이다. 반대로 알츠하이머와 같은 병에 걸리면 우리는 생존의 중요한 덕목인 길을 찾는 능력을 잃고 마는 것이다. 


한 번 생각해보라.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곳에 홀로 놓여져 있다고. 그것만큼 두려운 것은 없을 것이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불러온다. 반면 길을 찾고 나서는 것은 삶을 이어가고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 


이책 <길 잃은 사피엔스를 위한 뇌과학>은 인간의 길찾기 능력이 우리의 생존과 직결되는 것은 물론 성실함, 창의성, 우울증 등등 다양한 정신적 능력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뇌과학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아이들을 바깥 공간에서 모험을 즐기도록 키워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뇌의 발달을 위해 가끔은 낯선 곳에서 길을 찾아 나서야 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GPS를 끄고 오직 우리의 몸으로 주위를 관찰하며 한 발 나아가는 훈련도 필요하다. 


코로나19가 불러온 우울감. 우리 동네의 가보지 않은 낯선 곳으로 길을 나서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극복되어지지 않을까. 자, 이제 GPS는 꺼둔채 발걸음을 옮겨보자. 길은 결국 찾아지리라.  

도시 설계의 다섯가지 요소
이동경로, 경계, 구역(도시 내부에 있는 별개의 영역), 노드(사람들이 모이는 연결점이나 장소), 랜드마크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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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 윅을 1990년대 홍콩영화 식으로 만든다면 노바디가 되지 않을까. 볼거리★ 생각거리★ 마음거리


2. 건들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들였다. 그냥 놔두었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분노로 들끓은 주인공의 가공할만한 복수가 시작됐다.영화 <존 윅>을 떠올리는 통쾌한 액션과 이야기의 흐름. 하지만 액션의 결이 존 윅과는 사뭇 다르다. 


3. 존 윅은 과장된 듯 하지만 절대무적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며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드는 사실적 묘사가 뛰어난 반면, <노바디>의 허치는 존 윅과 닮은 듯 다르다. 맨 몸 액션은 비슷해 보이지만 총격씬은 마치 1990년대 홍콩영화를 보는 듯하다. 주인공은 총알이 알아서 피해가고, 상대방은 총을 쏘는 대신 총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다만 이런 모습이 통쾌함을 안겨주기에 눈에 거스르지 않는다. 


4. 감독은 러시아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인 일리야 나이슐러라고 한다. 이 감독이 오우삼 감독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하는 근거없는 추측도 해본다. 존 윅 식의 액션과 오우삼식 액션(영화 <첩혈쌍웅> 같은)을 좋아한다면 강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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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시황의 명을 받아 불로장생의 약을 찾기 위해 떠난 서복처럼 영화의 의도는 결국 오리무중이 되어버렸다. 볼거리★★ 생각거리★ 마음거리


2. 시한부 인생인 전직 요원 민기헌(공유 분)은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복제인간 서복(박보검 분)을 옮겨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기헌이 서복과 함께 이동 중 급습을 받고, 둘은 살아남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3. 영화<서복>은 얼핏 기헌과 서복의 로드무비처럼 보인다. 도망다니는 길목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이 신기한 서복과, 오직 자신의 임무만을 빨리 완수하려는 기헌의 갈등이 소소한 재미를 준다. 기헌과 서복의 대화는 마땅히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왜?라는 질문이 갖는 힘을 보여준다. 서복을 빼앗으려는 집단으로부터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기헌에게 "왜 당신을 따라가야하죠?" "당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죠?"라는 식의 질문은 우리가 마주하는 것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모든 것에 의문을 품고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엄청난 에너지 낭비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린 서복처럼 왜 그래야 하는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왜?라는 질문없이 살아가는 것은 프로그래밍된 로봇과 다르지 않아서다. 그 대답엔 과학적 이유가 아닌 가치가 숨겨져 있다. 


4. 사람이 영원한 삶을 꿈꾸는 것은 왜일까?(좀 전에 말했던 것처럼 왜?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 아마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즉 죽음을 알지 못하기에 두려운 것이다. 죽음 이후 우리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고 있다면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죽음을 알 수 있을까. 공자는 자로가 죽음에 대해 묻자 "삶도 알지 못하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답한다. 즉 알수 없는 죽음을 알기 위해 애쓰기 보다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현재에 충실하자는 의미일 터이다. 천상병 시인이 <귀천>에서 이 세상을 소풍왔다 가듯 생각하는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 그리고 욕망하는 것을 계속해서 이어가고자 하는 욕심의 발로가 불멸의 존재를 꿈꾸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욕망의 충족은 끝이 없고, 욕망의 크기는 더욱 커지며, 결국 욕망을 좇는 그림자로 영원히 살아갈 수도 있다. 물론 불멸의 삶을 살아보지 못했기에 불멸의 삶이 축복일지, 재앙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분 불멸의 삶을 다룬 소설, 드라마, 영화들은 작품 속 주인공들이 죽음을 꿈꾸는 것으로 묘사한다. 특히나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보내는 고통을 끝도 없이 반복해야 하는 것에 치를 떤다. 그렇다면 모두가 영원한 삶을 누기게 된다면 이런 고통도 없을테니 괜찮을까. 문득 친구의 어머니께서 돌아기시 전에 했던 말씀이 떠오른다. "사는게 지겹다"

영화 <서복>에서도 서복을 제거하려는 이유는 모두가 불멸의 삶을 살게된다면 재앙이라 여기기 때문인듯하다. 


5. 영화 <서복>은 영원한 삶이라는 소재와 함께, 인간의 목적을 위해 태어난 복제인간이나 유전자 조작 인간이 과연 인간일 것인지, 도구일 것인지 묻는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굉장히 많다. 그리고 대부분 답이 정해져 있다. 그들도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 그런데 우리는 장기 이식을 위해 유전자 조작으로 동물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 동물은 그저 인간이 아니기에, 마치 우리가 고기를 먹듯, 생명체라기 보다는 수단과 도구로 여기는 사고에 익숙해져 있다. 반려동물로 애정을 쏟는 대상과, 고기를 제공하는 대상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 의도와 목적이 기준이 되는 것이라면,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것도 의도와 목적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까. 영화 <서복>에서는 이런 질문을 넌지시 내뱉지만 깊게 파고들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를 수단으로 여길 때 그 존재의 분노가 우리를 집어삼킬 수 있음을 액션을 통해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영화 마지막 10여 분 간 서복의 분노가 터지는 액션은 공을 들인만큼의 특수효과가 빛을 발하지 못한다. 너무 낯익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낯익은 액션 만큼이나 우리 영화에 등장한 유전자 조작 및 복제 인간 '서복' 또한 신선하기 보다 낯익게 다가온다는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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