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심판한다 - 마이크 해머 시리즈 1 밀리언셀러 클럽 30
미키 스필레인 지음, 박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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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도 분명 유행을 탄다. 하수도 문화의 대표격으로 불리던 B급 무비가, 쿠엔틴 타란티노라는 걸출한 감독의 등장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런 조류는 어느덧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더 이상 B급 무비가 B급 무비로 취급받지 않게 됐다. 감각적이면서 자극적인, 본능에 보다 더 가까운 소재와 이야기들이, 고급스럽다거나 교양이라는 말로 감추었던 세상 속에서 환히 드러나면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보다 더 진실하다는 의미에서 재탄생된 이 B급이라는 용어는 어느새 문화 곳곳에 쓰여졌다. 이젠 자신을 B급으로 평가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이것은 아마도 A가 주는 엘리트적 취향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는 뜻으로도 읽혀질 수 있겠다.

<내가 심판한다>라는  이 추리 소설은 하드보일드다. 소위 B급이다. 이 소설이 1940년대에 쓰여진 것을 생각해보면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충격은 이미 1990년대 초 <원초적 본능>이라는 영화가 영상으로 이미 다 보여준 것이다. 마초적인 남자 주인공, 금발의 팜므파탈, 잔혹한 시체... 신선한 충격이었던 B는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한다. 오락이 넘쳐나는 세상에 B만으로는 부족하다. B보다 더 강렬한 B플러스의 탄생을 기대하든가, 아니면 B 모양새를 갖춘 A의 진중함이 필요할듯 싶다. 그래서 <내가 심판한다>는 시대를 초월한 힘을 얻지 못하고, 기억 속으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누군가는 이 B급 소설 속에서 황금을 발견해낼지는 알 수 없다. 10년전 <원초적 본능>의 충격처럼, 또 다시 새로운 <원초적...>무엇인가를 캐낼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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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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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모더니즘이 팽배하던 대학시절, 오히려 동양 고전을 읽은 덕분에, 친구들에게 도사의 이미지를 얻게됐다. 지금이야 논어, 노자를 공중파 방송에서 강의할 정도로 어느 정도 대중화 되었지만, 10년 전만 해도- 내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묵자가 처음으로 번역되어 나올 정도였으니, 그런 선입관이나 편견을 가질만도 했을 것이다. 당시 번역된 붉은 표지의 묵자는 물론이고, 한비자 등 닥치는 대로 읽었던 기억이 있지만, 아직까지 뇌리에 깊숙히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노자와 장자에 빠져 소요유하는 삶을 꿈꾸었다는 정도가 동양 고전을 읽으면서 나에게 남긴 흔적이라면 흔적일 터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과거 그 시절 내가 고전을 읽었던 방식은, 그 고전 속에서 지향하는 유토피아를 먼저 찾아내고, 그것으로의 접근 방법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공부였던 것인듯 싶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대부분의 고전이 제왕학의 수단이었다는 것이고, 그 방법으로서 제도적 변혁 보다는 개인적 수양에 중심을 두었다는 것이었다. 즉 고전이 쓰여졌던 당시 시대적 상황에 대한 깊은 고찰 없이 막연한 추측만으로, 오직 텍스트 그 자체만에 치중했던것 같다. 그래서 신영복 교수가 쓴 강의는 당시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시대 상황을 설명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고전의 의미를 재 복원한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무척 교훈적으로 다가온다.

일단 과거 내가 읽었던 유토피아적 관점에서 이 책을 살펴보면, 유가 묵가 도가의 경우는 농본적 질서를 모델로 삼는다는 점에서 복고적 경향을 띤다. 즉 이상향이 요임금이나 순임금 시절과 같은 과거에 놓여져 있다는 것이다. 반면 진시황으로부터 비롯된 제국이라는 개념의 등장이나, 철로된 쟁기 등으로 인한 생산력의 증가 등의 정치 경제적 급변과 맞물려, 법가의 경우 변화를 인정하고, 과거보다는 미래를 지향하는 미래사관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고전의 사상이 어떤 뛰어난 한 천재적 개인에 의해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밑바탕에서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런 깨달음은 지금 우리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사상적 기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만들며, 그것이 과연 정당한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는데서 이 책의 큰 장점이 있다하겠다.

위에 말한 것은 과거 내가 읽었던 방식 자체에서 무엇이 빠져 있었는가에 대한 반성이라고 볼 수 있다. <강의>를 꿰뚫는 시점은 물론 이것 이외에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관계론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관계론은 단순히 인간이라고 말할때의 間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간이란 사이 존재며 사이 존재라는 것 또한 존재 중심의 개념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존재 그 자체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중심으로 사회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사회란 것 또한 이런 관계,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에 대한 극한점이 바로 불교의 화엄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화엄은 무정부주의로까지 나아간다는 점에서 양면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런 관계론으로 바라본 고전을 여기서 하나하나 언급할 수는 없겠다. (그것이 궁금하다면 직접 책을 읽어보셔야) 다만 이렇게 재해석된 고전이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만 잠깐 이야기해보겠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삶과 정서가 분리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관계론이란 단순히 사람과 사람만의 관계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느끼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과 나와의 관계도, 또한 내 몸과 감성과 감정, 이상 등과의 관계도 모두 포함되어져야 할 부분일 것이다. -상품 미학의 발달로, 가상 세계의 등장으로, 교환 가치가 최우선의 가치가 됨으로써 내가 느끼는 감정들과 나의 삶은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따로 돈다. 그것이 바로 소외이며, 행복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부족한 허전함을 가져온다. 따라서 허구적 관계로 말미암아 삶의 진정성을 잊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소비하는 인간이 행복한 인간이 된 세상, 나혼자 즐거우면 행복한 獨樂의 세상. 과연 이곳이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 진정 행복한 삶이란, 공감을 통해, 與民樂으로 흥겨운 세상이어야 하지 않을까? 고전에 대한 이 <강의>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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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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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나서 개운함을 느껴본게 얼마만인가? 마치 스시를 먹고난 후의 깔끔한 느낌처럼 마음이 가볍다. 소설의 주제가 사형제도이고, 살인이 그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쾌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군더더기 없는 문체, 스피드한 사건 전개, 바로 깊숙히 밀고 들어가는 등장인물들의 심리,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관점이 잘 어울러진 덕분이라고 본다.

소설은 사형을 선고받은 감옥의 풍경에서부터 시작된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저승사자를 기다려야 하는 사형수들의 심리에서부터 독자의 시선을 꽉 사로잡는다. 소설 속의 사형수는 사카키바라 료. 그는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오토바이 사고로 사건 당시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즉, 살인에 대한 기억이 없는채 잡혀들어갔고, 따라서 자신이 저질렀는지 알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 반성할 수도 없기에 개전의 정이라는 감형의 여지 또한 받을 수도 없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어느 순간 사카키바라는 살인이 일어났던 시간, 계단을 오르는 장면이 언뜻 기억남으로써 자신의 무죄를 밝힐 기회를 만들어간다.

소설은 사형이라는 제도가 얼마나 불합리한가를 큰 목소리를 내지 않고도 설득력있게 말하고 있다. 먼저 사형에 대한 기본적인 나의 생각을 밝히자면, 한마디로 반대다. 무슨 거창한 이론이나,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으나, 그 첫번째 이유론 재판이 잘못될 수 있다는,  인간의 실수를 인정한다는 전제 때문이다. 잘못된 증거나 증인으로 인한, 또는 거짓 강요 등으로 인한 고백 등등 판결은 언제든 잘못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형은 그러한 과정을 알고나서도 돌이킬 수 없는 결론을 내린다는 점에서 반대한다. 그리고 두번째는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에게 과연 새 인생을 살아갈 기회를 박탈해도 될 것인가에 대한 의문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번째 이유는, 피살자와 관련된 사람들의 복수심을 어떻게 달랠 수 있는가, 그리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등 논란의 여지가 많을 것 같다.

아무튼 이런 기본적인 생각을 가지고 이 소설을 접했는데, 의외로 사형이라는 제도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고, 쉽게 생각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하기야, 몇 십명씩 연쇄 살인을 저지르는 희대의 살인범을 매스컴을 통해 바라보게 될때, 사람들은 쉽게 저런 놈은 죽여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니, 단순히 사형제도를 없애자고 말하기에는 이들을 설득하기엔 어려울듯 싶다.

소설은 상해치사로 2년을 감옥에서 보낸 미카미 준이치가, 가석방으로 풀려난 후 퇴직을 생각하고 있는 난고라는 교도관과  함께 사카키바라 료가 원통하게 죄를 뒤집어쓴 것을 밝히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원죄가 풀리는 결말의 물고 물리는 반전은 정말 흥미진진하다. 소설은 사형이라는 판결과 그것이 진행되는 과정을 실제처럼 보여주는데, 이 과정이 법제도를 무시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을 더 많이 죽일수록 그것에 대한 확인작업과 행정절차의 복잡성 때문에 사형이 집행되는 것이 늦어지고,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한 사람일수록 오히려 사형이 빨리 집행되는 아이러니는 제도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또한 나카모리 검사가 10년전 내린 자신의 첫 사형구형이 잘못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때문에 난고와 준이치를 도와주는 장면에선, 사람은 자신의 의지나 생각과는 달리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마음과 다른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에 서글퍼진다. 검사였기 때문에 사형을 구형했지만, 그가 다른 위치에 있었다면, 아마도 깃발을 들고 사형제도 반대를 외쳤을지도 모른다는 준이치의 생각은 개인과 제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이 위치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행동들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항상 돌이켜보아야만 할 것 같다.

또, 이 소설의 장점 중의 하나는 피해자의 입장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가혹한 이중의 폭력을 그들에게 행사하는지를 알려준다. 즉, 피살자의 가족들에게 들이대는 카메라가 얼마나 잔혹한 일인지를 우리는 알지 못한채 그들을 바라보며, 분노하고, 슬퍼한다. 또한 살해자 쪽에서도 그들의 가족이 밝혀지는 것으로 인하여 그들이 일상생활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새로운 불행을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알고싶은 욕구, 대중이 알아야 하는 권리 이전에 그것이 어떻게 폭력적으로 행사될 수 있는가를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소설은 사형제도를 그 근간으로 하고 있지만, 근원적으론 구치, 교도라는 제도 자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끔 만든다. 실제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격리된채 소히 말하는 죄값을 치른 후 사회에 복귀했을 때, 얼마나 많은 재범이 이루어지는 가를 생각해보면 과연 교도소라는 제도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것인지 회의하게 만든다. 범죄에 대한 사회적 격리를 응보형으로 바라볼 것인가, 목적형으로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로 접근할 수 있겠는데, 응보형으로 바라본다면 그 죄값을 격리를 겪음으로써 받은 것이니, 충분히 제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목적형으로 바라본다면, 즉 교정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재범률이 말해주듯 별 역할을 해내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순된 법제도와 집행과정, 효율성 없는 교도소 때문에 이들을 모두 없애자고 한다면 이것 또한 문제의 여지가 많다. 바로 복수의 연쇄성이 큰 문제로 다가올 수 있다. 응보의 문제에서, 개인적으로 복수를 감행해야 한다면, 그 끝은 어디일 것인가? 그리고 복수를 통해 과연 과거를 잊을 수 있을 것인가?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될 수 있을까? 복수는 어디까지 행해져야 한단 말인가? 등등.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처한 각자의 상황에서 여러 각도로 보여줌으로써 사형제도의 문제점과, 교도소의 역할 등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이 과장되지도 한쪽으로 치우쳐지지도 않음으로써, 그리고 한 가지 사건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영향력을 끼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혀준다. 이토로 재미있으면서도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줌과 동시에 자신의 주장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소설도 드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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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개 2006-01-11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가 확 땡기는 걸요.
보관함으로~~

하루살이 2006-01-11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 잡으면 순식간에 끝장을 보게 될거예요 ^^

푸른신기루 2006-03-09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늦게 리뷰 읽어놓고 딴지거는 것은 아닙니다만.. 스시라는 일본어보다는 초밥이라고 써주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네요

하루살이 2006-03-09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참 판단하기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한국의 비빔밥이 외국에 나가서 비빔밥으로 불리는게 나을지 각국의 언어로 토착화되는게 나을지 혼동되는 것 처럼 말입니다. 스파게티나 피자 등의 음식 등은 그대로 외래어를 쓰면서 유독 일본어에 대해서는 지독한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어쨋든, 초밥이라는 우리말이 어느 정도 일상화되어 있으니 초밥이라고 쓰는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충고 고맙습니다.

푸른신기루 2006-03-24 0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명 그런 외래어들이 그대로 쓰이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스시의 경우 초밥이라고 쓰자고 주장하는 이유는 우리가 예전부터 써오던 '초밥'이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이죠. 피자나 스파게티 등은 이미 너무도 익숙해져버려서 이제와서 '서양빈대떡'이나 '서양비빔국수'라고 부르자고 하면 우습기만 할 뿐 전혀 와닿지 않지 않겠어요? 이미 익숙해진 외래어를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이 있는데도 외래어를 쓰지 말자는 것이지요 - 썼던 댓글들을 보다가 들러서 몇마디 남기고 갑니다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3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3
키류 미사오 지음, 이정환 옮김 / 서울문화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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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세 딱지가 붙어 있는 동화책이라는게 도대체 뭘까?  궁금했다. 혹시 굉장히 야한 책일지도 모른다 (^^ )는 흥분된 속내를 감추고 책을 폈다. 그런데 이 책의 19세 딱지는 아무래도 잔인함에서 비롯된 것 같다. 동화책이라고 하기에는 섬뜩한 폭력과 핏내가 진하게 풍겨 나온다. 물론 이 장치는 동화책이 보여주는 파라다이스의 뒷면에 감추어진, 또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기존의 가치관을 전복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3권에는 빨간 모자, 빨간 구두, 돼지 죽이기 놀이, 성냥팔이 소녀, 살인의 성 이렇게 5편이 나와 있다. 빨간 모자의 경우에는 늑대가 바람둥이로 그려져 있고, 빨간 모자는 사생아로, 할머니는 고려장과 같은 내팽겨쳐진 노인으로 나타난다. 성냥팔이 소녀의 경우엔 원래의 캐릭터 그대로 순진하게 그려져 있으나, 그 반대의 악덕한 캐릭터 사드 후작을 만난다는 설정이 다르다. 이 책에선 통쾌한 여자들의 복수가 그려져 있는가 하면, 또한 여성들의 참을수 없는 호기심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장면도 그려져 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인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는, 실상 전복적인 사고보다는 굉장히 보수적 사고체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3권 속에 있는 5편의 동화 주인공들의 공통점을 생각해보니, 이들 모두가 결손가정이었다. 물론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일지도 모르고, 또는 오히려 자신의 무의식을 은연중에 드러낸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읽어가면서 계속 나를 괴롭히게 만든 생각은 이들이 행하는 행동들이 마치 어렸을적 행복하지 못했던 시절에 대한 복수심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마치 대부분의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여지는 연쇄살인범들의 가정 마냥, 불행했던 아동기로 폭력적 행위의 근원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말이다.

그래서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는,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가족이야기로 들리고,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맹목적 복종에서 한 발 벗어날 수 있는 깨달음 보다는, 행복한 가족을 그 해법으로 찾아야만 할지도 모른다는, 알고보지 않아도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았나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나의 오독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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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쳐라 - 세상을 치는 경허 스님의 죽비소리!
경허 스님 지음, 한용운 엮음, 석성우 옮김, 김홍희 사진 / 노마드북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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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비아냥 거리는 투로 '선문답' 이라는 것은 동문서답의 다른 이름일 터이다. 물론 불교에서 선문답은 깨우침을 일으키는 대화일 터이지만 그것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지극히 어렵다는 점이 일상용어에서 조금 다른 의미로 쓰여지는 이유일 것이다.

<나를 쳐라>는 경허 스님(한 세기 전 고승으로 한용운 스님의 스승이기도 함) 의 게송과 일종의 선문답을 실은 책이다. 그래서 상당히 이해하기가 힘들다. 모든 걸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스스럼없이 읽어본다. 책의 말미에는 경허스님의 일대기가 수록되어져 있다. 중간 중간 <나는 사진이다>라는 책을 쓴 김홍희 씨의 사진이 실려있기도 하다.

먼저 사진부터 이야기 하자면 정결함을 드러냈다고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다. 고즈넉함과 깨끗함이 묻어나는 사진들은 경허스님의 말씀과 잘 어울러진듯 하다. 무엇보다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책의 중간, 다음 페이지 간격으로 놓아둔 절의 기둥을 찍은 사진이다. 몽타쥬 효과라고 할까? 첫 사진은 뼈대만 남은 기둥 사이로 바다가 펼쳐져 보이지만 책장을 넘기면 그와 똑같은(아주 흡사한) 배열의 기둥 사이로 산이 우뚝 서 있다. 이 두 사진이 주는 감흥은 글로 표현하기에는 좀 무리인듯 싶다. 삶의 무상함이 배어나오는 듯한 인상은 독립된 사진을 통해서는 결코 찾을 수 없으리라 여겨진다.

이 책은 경허 스님이 남겨놓은 대부분의 글들을 모아놓은 것인데, 이별에 대한 싯구가 상당히 많이 눈에 띤다. 이별이라는 것의 대상이 삶인지, 속세인지, 연인인지, 가족인지, 국가인지, 욕에 사로잡힌 나인지는 독자가 판단해야 하겠지만 그 쓸쓸함만은 글 사이 사이 가득하다. 이별 이외에도 특별히 마음이 쓰이는 부분은 건강에 대한 이야기다. 마음 공부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건 건강이라는 스님의 말씀은 특별한 선문답이라거나, 게송이라기 보다는 나이드신 어르신께서 젊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삶의 충고로 들린다. 건강을 전제로 마음 공부에 전념하라. 마음 공부는 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요, 제일 먼저 행해야 할 것은 화를 내지 않는 일로 여겨진다. 화를 내지 않는 것의 어려움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쉽게 알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화를 내지 않는 방법은 틱낫한 스님으로부터 한 수 배워도 될 것이다. 왜 내가 이토록 화를 내는지, 그 이유에 대해 곰곰히 들여다봄으로써, 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경지. 그것은 어찌보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지 가능한 일이기도 할 터이니와,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를 쳐라>는 나에게 새로운 화두를 하나 던졌다. 내가 받아들인 화두는 '일없이 산다는 것'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일에 치여 사는지를 한번 둘러보라. 사랑하는 사람을 자주 만날 수 없는 것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것도 모두 무엇 때문인가 돌이켜보자. 또 내가 괴로워하는 것은 무엇때문인지 생각해볼때 일없이 산다는 것은 수많은 의미를 쏟아낸다. 그냥 문자 그대로 일없이 산다는 것의 축복은 물론이려니와 스님이 말씀하신 일없이 산다는 것의 의미를 좇아 천천히 나의 마음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보자.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일없이 살 수 있겠는가? 내가 나일 수 있기 전에 우리는 이미 일의 포로가 되어있지는 않았는가 반성해볼 일이다. 가끔은 일없이 살아보자. 일없는 가운데 나의 참모습을 들여다보자. 시계 쳇바퀴 돌아가는 모양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과연 가능한 일일지는 모르겠으나 깊은 숲 속에 홀로 놓여진 나를 상상해보자. 아마 견딜 수 없을지도. 그렇게 놓여진 나를 견딜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나를 쳐라. 내 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하늘과 닮을때까지 나를 쳐라. 그래서 고독도 무상함도 모르는, 푸른 하늘에 점점히 흐르는, 가뭇없이 사라지는 구름이 되라. 일없이 나를 쳐라. 배고픔도 이상도 꿈도 모두 잊고 나를 한번 쳐라. 그 몸뚱아리에 무엇이 남아있는가?

삶의 무상함은 슬픔이 아니다. 항상 그러하지 않으니, 항상 그러한 것에 집착할 필요도 없음이요, 그러니 내가 변해가는 것을 막으려 할 필요도 없음일 터이다. 그러니 무엇인가를 애써 지키려하지 말고, 내가 찬찬히 둘러본 마음이 저절로 흘러가는대로 맡겨둘법도 하다. 나를 치니 마음이 흐른다. 아무 것도 머무르지 않음에 기뻐할 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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