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실험 10장면
로렌 슬레이터 지음, 조증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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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이라크 포로에 대한 미군의 가혹행위를 담은 사진이 공개되면서 세상이 벌컥 뒤집어졌던 일이 있었다. 언뜻 생각하기엔 학대자 개인의 잔인함에 혀를 내두르다, 이것은 미군이라는 엄청난 권력을 지닌 힘의 우월성을 가지고, 그것을 최대한 누려보고픈 욕망이었지 않았을까 생각해봤다. 그런데 어느 잡지에서 이런 잔혹함이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과 함께 스탠리 밀그램의 심리 실험을 예시로 들었다. 인간이란 불합리한 명령앞에서도 얼마나 복종을 하는지 보여주는 이 실험을 통해 미군의 잔혹성과 함께 나치의 비인간적 행위가 어떻게 가능했었을까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인간이란 자신의 의지보다는 상황의 논리에 의해 행동이 선택되어진다는 측면을 이해했다고 할까... 이런 상황의 논리는 이 책 3장의 달리와 라타네가 행한 실험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밀그램의 실험에서 권위에 복종한 사람은 대략 65% 정도였다. 사람들은 이 65%라는 숫자에 현혹되어, '나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아마 그랬을 수도 있을거야' 라고 넘겨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머지 35%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머지에 대한 설명은 어는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부분의 심리학 실험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기 위한 논거로 짤막한 예시를 통해 접해왔기 때문일까? 실험에서 드러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향 이외의 사람들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는 바로 이런 부분에 메스를 들이댄다. 그 이외의 사람들, 실험의 주류를 형성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설명을 차곡차곡 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실험이 끝나고 나서 피 실험자들에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추적하는 것은 그야말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심리 실험이 가져다준 압박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 경로가 뒤바뀌어 버린 사람, 그리고 주류를 형성했던 행동을 선택한 사람이, 실험이 끝난 후 비슷한 상황에서 비주류로 바뀌어버렸다는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심리실험을 행한 사람들에 대한 오해를 씻어내고자 그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부분 또한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이 책을 읽다보니 갑자기 영화<어퓨 굿맨>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어퓨 굿맨>은 탐 크루즈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인데 군대 내 폭력을 다룬 법정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군대 가기전에 한번 보고, 제대 하고 나서 다시 우연찮게 접하면서 순간 내가 얼마나 변해 있었는지 굉장히 놀랬던 적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은 용서할 수 없었다고 생각했던 학생이 개구리복(군복)을 입고 나서는 사선에서 자신의 동료들의 목숨을 위해 어쩔 수 없는 폭력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으니 말이다. 즉, 내가 겪은 상황이 어떤 사건의 당사자를 이해하는 밑거름이 되버렸다. 상황에 대한 이해, 실험의 당사자가 겪은 경험이 가져다준 변화를 나는 영화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쨋든 이 책은 20세기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심리실험 10가지를 이야기 형식으로 맛깔스럽게 써내려간다. 이 책의 흐름이 심리에서 뇌로 변해가듯, 심리를 바라보는 세상의 관점도 유심론적 측면에서 뇌생물학쪽으로 변해가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다만 이런 흐름이 환원주의를 넘어서 기계론적 환원주의로 흘러가지 않을까 못내 걱정이 되기도 한다. 즉, 우울증이나 경계성 장애 등등의 여러가지 정신병을(이 책에선 또한 정신병에 대한 진단이 얼마나 허구일 수 있는가도 보여준다) 뇌의 일정부분의 고장으로 발생한 것으로 치부하고, 이런 병에 뇌의 이런 부분을 제거하면 된다는 식의 치료방법이 횡행하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환원적 방법을 통한 치료가 어느 정도 성과를 가져온 것을 현실로 목격하고 있고, 그것이 당사자에겐 희망으로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 그런 이해와 치료가 어떤 부작용이나 오해를 가져오고 있는지에 대한 검증을 가질 충분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좀더 차분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실은 이런 환원적 사유가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황우석 박사의 사건이 가져다준 희망과 절망의 희비극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이유도 되지 않을까 싶다. 만병통치약에 대한 인간의 숙원, 그리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진리에 대한 염원. 정말 가능한 일일까?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를 읽으면서 아직도 오리무중인 인간 심리에 대해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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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박물학
다이앤 애커먼 지음, 백영미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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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이 공의 세계에서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사유작용 등 감각작용도 없고, 빛깔과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비감각적 대상인 원리 등 객관대상도 없으며, 시각의 영역도(청각의 영역, 후각의 영역, 미각의 영역도(청각의 영역, 후각의 영역, 미각의 영역, 촉각의 영역) 사유의 영역등 주관작용도 없느니라.

반야심경의 한 대목이다. 현상이 모두 공이라는 이 생각은 자칫 허무주의로 사람을 빠지게 만들련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개인적으로 이 대목을 인간의 한계점에 대한 고백으로 이해한다. 물론 오독의 소지가 다분하다.

감각의 박물학이라는 리뷰에 난데없이 반야심경이 왜 튀어나왔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것은 차츰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해결해가기로 하겠다.

책의 저자는 서문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쾌락에 대한 집착이 아닌 헬렌 켈러와 같은 감각에 대한 유희를 주장하는듯이 보여진다.

죽음과 강렬한 감각은 인간의 공포인 동시에 특권이다(11쪽)

저자는 감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책을 통해 보여주며, 세상을 한껏 즐기라고 말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책은 온통 감각에 대한 찬양으로 넘쳐난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공감각으로 나뉜 각각의 장은 그 감각들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지 여러가지 예를 들면서 보여준다. 그러나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의 감각이 갖고 있는 한계점 들이다. 52쪽에서 말하고 있는 매클린토크 효과라는 것도 인간의 감각이 얼마나 믿을 것이 못되는지에 대한 전적인 증거로 보여진다.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는 여학생들은 때때로 월경의 주기가 룸메이트를 따라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상대방의 몸에서 풍기는 체취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월경주기를 잃어버리고 상대방에 맞춰가기 때문에 발생하게 된다. 지금은 상식으로 알고 있지만 지구가 자전하면서 내는 소리의 크기가 너무 커서 우리는 듣지 못하고, 또는 너무 작아서 박쥐만이 듣는 소리도 있다. 눈에 보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자외선과 적외선의 영역이라는 것이 우리가 볼 수 있는 파장의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착시 현상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인간이 외부 환경을 받아들이는 여러가지 감각들이 실은 모순투성이에 잘못된 정보를 들여오기 일쑤다. 따라서 진리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감각은 어찌보면 믿을만한 것이 못될련지도 모른다. 감각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못할뿐더러, 실은 외부 대상 자체들 또한 절대적인 어떤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게다가 이것에 시간마저 개입하기 시작하면 대상은 계속 변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거짓이니, 아무 것도 받아들일 필요가 없을까?

잠시 모든 것을 중단하고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워보라. 흘려보냈던 모든 것에 감각을 집중해보자. 실내도 괜찮겠지만 숲 속이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먼저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해보자. 평소에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마치 꽃이 피어나는 소리마저도 들릴듯한 착각에 빠질련지도 모르겠다. 실내에 있다면 오디오를 틀어놓고 음악에 귀를 기울여도 좋다. 그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새삼 느낄수 있을 것이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촉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어디선가 풍겨오는 꽃냄새에 취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눈을 뜨면 파란 하늘에 두둥실 떠가는 구름에 취하기도 할 것이며, 나뭇잎의 색깔이 하루하루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의 모든 것이 다 기쁨으로 충만되는 그 무엇이 될 수 있음을 깨치는 순간, 감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절감한다. 그러나 이 감각이 주는 행복감을 벗어나, 쾌락을 쫓는 순간 향유하던 감각은 이내 덫이 된다. 보다 더 좋은 소리, 보다 더 좋은 색깔에 대한 집착이 사람의 인생을 피폐하게 만들련지도 모른다.

반야심경은 바로 이런 욕에 대한 경계심이라고 보여진다.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기쁨으로 충만시킬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는 상태. 비록 그것이 거짓된 것이라거나 비틀어져서 들어오는 정보일지라도, 그것이 그렇게 들어온 것임을 알고 있는 상태라면, 그것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진리 또한 내 몸 속에 있음을 깨우치게 되지는 않을까?

지금 이렇게 키보드를 치고 있는 손가락의 감각 하나하나에서 기쁨을 느낀다면 세상은 온통 기쁨 투성이지 않겠는가? 눈이 멀고 귀가 먼 헬렌켈러가 세상을 행복과 기쁨으로 받아들였듯 세상을 대한다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인 이 세상이 색즉시복福공즉시행幸이 되지 않을까  감히 상상해본다. 내 몸의 감각이 그렇게 소중하며, 그 감각의 대상들이 또한 소중한 것들이니, 어찌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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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손영기 지음 / 북라인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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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은 전반적으로 해석의 문제에 집중되어져 있다고 본다. 한의학이란 것이 고정불변의 진리를 담은 책이라기 보다는 그 시대 사람들의 건강에 관련된 문제들을 그 시대의 눈으로 바라본 것임을 전제로, 한의학은 자연과 인간등 세상만사의 진리를 담아내고 있다고 본다. 음양과 오행이라는 틀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그대로 인간에게 적용되어진 것이 어찌보면 한의학의 사유체계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임상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 분명 우리의 생활에 중요한 일부분일 터이다.

고대 중국의 4가지 의학의 발달은 그 지역적 특성으로 인한 것임을 밝히고, 또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병의 종류와 그 대처법도 변해왔음을 보여준 저자는 그것이 우(공간)와 주(시간)라는 시대와 공간이라는 제약때문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제약을 염두에 둔 해석적 자유를 펼치는데, 현대의 문제를 토의 울로 보는 관점에서, 저자는 새로운 마이너스 건강법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즉, 공해와 먹거리의 오염, 스트레스의 증가로 오행 중 토가 울되어져 있는 것이 먼저 해결되지 않는한 음양의 변화나 오행의 움직임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의 다른책 먹지마 건강법 등을 통해서 육식의 금지, 인스턴트 식품의 금지, 3백 식품의 금지 등을 주장한다. 이것은 모두 토의 정체를 가져다 주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렇기에 해토를 먼저 해주어야지만 비로소 우리가 흔히 접하는 녹용, 인삼과 같은 약성이 강한 약재들도 효력을 발휘할 수가 있다고 보는 것같다. 즉 과잉섭취된 영양과 독소로 말미암아 비위와 장이 상해 있는 상태에서 제아무리 좋은 보약을 먹는다 하더라도 결코 건강해진 몸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오행의 각 요소에 연결되어져 있는 오장과 육부중 토라는 것은 나머지 목화금수의 변화와 움직임을 조절해주는 작용을 하는데 이것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상태에서 순조로운 운행은 어불성설일 것이라는 뜻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현재 서울이라는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건강해지기 위해선 영양과잉과 독소로부터의 해방을 먼저 이뤄야만 하며, 그것은 바로 해토라는 방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한의학을 제대로 공부해보지 않은 독자로서 저자의 주장이 과연 정설인지, 또는 올바른 해설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시대와 지역적 흐름에 따라 우리의 몸과 마음도 변해가는 것이 옳다면 그의 한의학 이론에 대한 재해석도 분명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는듯하다. 그리고 또한 몸과 마음을 따로 보지 않았던 우리네 사유체계를 전제로 어떻게 먹을 것인가와 함께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두려움이나 슬픔 기쁨 등등이 장부와 연결되어져 있다고 본 선조의 생각이 꼭 그대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마음과 몸이 서로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그 진위에 대한 연구와 함께 마음에 대한 공부 또한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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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역사 - 켄 윌버 시리즈 2
켄 윌버 지음, 조효남 옮김 / 대원출판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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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쪽이 넘는 책. 솔직히 읽기가 겁난다. 잠깐 훑어보고 끝까지 읽을 것인지 말것인지를 결정해보기로 한다. 그리고 읽어본 40쪽 가량. 크게 어려운 부분은 없으면서도 상당히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래서 마음먹고 읽어보기로 했다.

한마디로 이 책은 진화적 관점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바라본다. 그 관점은 또한 초인격심리학(트랜스퍼스널심리학)이라는 독특한 입장이다. 초인격심리학은 얼핏보면 신비주의적 색채를 띤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격을 넘어서 혼과 영(sprit)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신비적이라거나 말도 안된다고 치부하기에는 그것이 기존의 종교를 모두 다 담아내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외시하기 힘들다.

먼저 저자인 윌버는 세상을 온수준(all level)과 온상한(all quadrant)으로 나눈다. (나중에 그의 사상적 발달로 온계통이 추가된다) 온수준이라함은 물질-실체-마음-혼-영의 진화를 말하며,  온상한은 세상을 네가지로 분류한다. 그 기준은 내면과 외면, 개체와 공동체의 짝으로 이루어진다. 내면은 해석을 필요로 하는 맥락지향적, 즉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접근을 필요로 하는 것이묘, 외면은 그것이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개체의 내면은 개인의 의지를 다루는 것으로 주관적 진실성을 담보로 해야한다. 개체의 외면은 객관적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뇌의 작용과 같은 것이 되겠다. 공동체적 내면은 문화 현상등이 속하는 것으로 상호주관적 상호이해를 바탕으로한 정당성이 갖추어져야 한다. 공동체적 외면은 사회조직, 시스템 등을 말하며 기능적 적합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네가지 분류는 다시 뭉뚱그려 나와 우리와 그것들(개체적 공동체적 외면)로 표현되어지는데, 이것은 미, 선, 진으로, 또는 미학 도덕 과학으로, 또는 불 승 법으로 표현되어질 수 있다. 이 각 분야는 그 분야별로 진화를 이뤄가는데 개체의 내면을 예로 들면 감각 지각 충동 감성 상징 개념 구체적 조작 형식적 조작 비전 논리 등으로 진화하고, 공동체적 외면은 은하계 행성계 가이아계 생태계 노동 분업사회 집단 부녹 촌락 초기 국가 국가 지구촌 등의 진화를 이룬다. 물론 이 네분야의 진화는 각각 진행되기보다는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이루어진다. 즉 사회적 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인간의 내적 성숙또한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관계성에 얽매여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관계를 떠나 홀로 발전되어진 것들은 잠시만의 경험으로 남을뿐 그것의 의미를 알 수 있다거나 새로운 시스템을 정립할 수 있는 것은 어렵다.

이들 진화의 기본요소는 홀론이라고 표현되어지는 기본 구조를 갖는데 홀론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전체이면서 동시에 다른 전체의 부분이 되는 것을 말한다. 즉 분자는 분자로서의 전체이면서 동시에 세포의 부분이며 원자는 원자로서 전체이면서 분자의 부분인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홀론적 구조는 계층을 형성하는데 이것을 홀라키적이라고 부른다. 이 홀라키는 역으로 발생할수는 없는데 이것은 분자가 파괴되면 그 윗부분인 세포는 없어지지만 원자는 그대로 존속하지만, 반대의 상황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 홀론은 4가지 인력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이것은 작인, 즉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특성, 그리고 공존적 교섭, 초월과 소멸로 나타난다. 여기서 초월은 홀라키적 창발이라고 해서 창조성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 창조성을 영이나 空으로 표현할 수 있다. 즉 물질에서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이나 영장류에서 인간이 탄생하는 과정등은 모두 이 창조성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신과학등에서 설명의 방식으로 도입했던 우연이라는 것을 피하고, 또 띠의 요동으로 인한 갈래치기로부터도 벗어난다. 그리고 이 공이나 영은 개체의 내면분야의 마지막 진화점임과 동시에 네 분야의 기저에서부터 진화의 끝까지 언제나 존재하는 근본으로서 작용하게 된다. (바로 이부분에서 직선사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홀론들은 각자의 단계에서 한계점에 부딪혔을 때 비로소 창조적 비약을 맞이할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데, 어떤 한 부분의 홀론이 위계를 찬탈하여 전체를 지배하고자 할때 병폐가 발생하게 된다. 현재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바로 이런 지배자적 계층구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자본주의가 막강한 권력과 돈 위주의 사고, 이익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문화 등등이 서로 얽혀 독재를 하고 있는 꼴인 것이다.

진화란 한마디로 자아중심에서 벗어나는 방식이라고 표현된다. 심리학에서 바라보는 인간 인지의 발달을 보더라도 마법적 신화적 합리적  등으로 발전하는데 이것은 나를 버리고 전체를 향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사顫湧?혼동하는 것은 전단계와 초단계를 구별하지 못하고 똑같이 바라본다는 것이다. 즉 아이가 맨 처음 태어나 생명과 물질을 구분못하다가 그것을 구분한 후 나와 세상의 움직임을 구분 못하게 된다. 즉 하늘에서 벼락이 치는 것은 내가 무엇인가를 잘못해 하늘이 화를 낸 것이라는 생각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이 점차 나와 세계를 구별하고 다시 나 중심으로 바라보다 가족이나 국가와 같은 공동체로 다시 지구촌 그리고 모든 생명과의 합일로 나아간다. 그런데 이런 합일이 인간이 맨 처음 태어났을때 생명과 물질을 구분못했던 상태와 동일시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홀라키가 역으로는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구분의 모호함이 현재의 생택학이 처하고 있는 문제점으로 바라보고 있다. 즉 생태학은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진화적 발달 상태로 치유하지 못하고 퇴행으로 치유하려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근원적 치료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결국 인간의 정신적 발달을 저해하는 작용을 할 것이라는 관점을 내비친다.

 존엄성이란 다름 아닌 차별화였지만 재앙은 바로 분열이었습니다(225쪽)

즉 나와 너를 구분할 수 있을때 존엄성을 획득할 수 있지만 그것을 포함하면서도 초월했을 때 비로소 진화의 과정을 이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구분이 차별적 처우로 진행된다면 그것은 재앙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 현재 우리의 삶이 나나 가족 국가 민족 중심의 사고로부터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데서 큰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생태적 접근과 함께 정신과 마음에 대한 접근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즉 우리나라에서 불고 있는 명상이나 요가 참선 등(서구사회에서는 이미 현실 속에 상당히 파고들어가 있다)이 단순히 개인적 평온을 뛰어넘어 참된 아름다움을 깨침으로써 진과 선, 즉 그 아름다움을 펼칠 수 있는 제도적 개선과 함께 문화적 도덕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명상 등의 방법적 측면들로 인한 空이나 靈에 대한 경험이 축적되어지고 상호 주관적으로 교류되어진다면 미래의 변화 가능성을 낙관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색즉시공 공즉시생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해 자아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진화는 물론 홀론의 창발적 진화가 그렇듯이 분명 한계상황과 고통을 수반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뛰어넘는 순간 새로운 홀론을 맞이할 것이라는 황홀한 상상이 우리를 이것으로 이끌 수 있는 자극이 되어줄련지도 모르겠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것들에 대한 인문학적 관점의 진화라는 측면으로 소화해낸 이 책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성만능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논리적 해법의 가능성을 엿보게 만든다. 세상은 제도만으로 또는 마음만으로 결코 바뀌어질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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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3-17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빌 브라이슨이 쓴 건 뭐였죠...모든 것의 역사...아하..거의 모든 것의 역사로구나...

하루살이 2005-03-18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책도 만만치 않은 두께라 주저주저. 읽고 싶은 목록에는 버젓이 올라있지만 말이죠. 정말 책 제목이 <거의>비슷하죠^^

개미 2005-06-14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가다가다... 이 책은 이 저자(켄 윌버)의 사상에 대한 거의 개론입니다. 좀 더 깊이 알려면 꼭  <Sex, Ecology, Spirituality> 이나 < A Theory of Everything>를 읽어보심이 ... 물론 번역도 안된 영어 원문 1000페이지 쯤 됩니다만, 이 책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이는 있습니다.
 

하루살이 2005-06-15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 새 시대를 열어간 사람들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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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는 것은 승자의 기록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배우는 교과서 속의 인물들이라는 것도 이 기록들을 바탕으로 탄생한다. 그러나 승자가 바뀌거나 세상의 가치관이 변한다면 그 인물의 성격 또한 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재탄생하는 인물들이 곧바로 교과서 속으로 나타나지는 못한다. 그래서 제도권 밖에서 활약하는 학자들이 펼쳐내는 역사서나, 제도권 내에 있더라도 독특한 관점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책을 읽는 것은 학교에서 배웠던 인물들에 대한 새로운 상을 접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 재미가 솔솔하다.

이덕일 씨의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은 정약용과 정조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가고, 후반부에선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에 그 이야기의 중심을 두고 있다. 특히 노론이라는 집권당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정조와 그를 보좌해 줄 역량있는 신하로서 남인 정약용과의 관계는 눈물겹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었던 해에 태어난 정약용은 그의 향후 행보 또한 사도세자와의 운명적 관계를 유지한다. 화성으로 가기 위한 한강위의 배다리나 화성 축조를 비롯, 처음으로 임금과 접하고서 나누었던 대화 또한 모두 사도세자와 관계가 있다. 사도세자와의 관계는 그것이 권력투쟁과 연계된다는 점에서 항상 피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노론에 대한 견제를 위해 남인 세력중 실력있는 자들을 궐내에 두려했으나 끝내 그 뜻을 펼치지 못했던 정조의 모습이 특히 애틋하다. 그의 죽음을 앞둔 장면에서 주위의 그 누구도 믿지 못한채 스스로 자신의 병을 고쳐야만 했던 모습에 안타까움을 금할수가 없다. 또한 이런 왕에게 힘을 실어주지 못하고, 항상 먼 곳으로 떠나야만 했던 정약용의 모습 또한 눈시울을 적시게 만든다. 정약용의 실력을 점검하기 위해 성균관에 있을때 논어 시험에서 전날 슬쩍 문제를 유출했다가 다른 문제를 내본 정조나, 특혜를 받지않고 진정한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시험범위 전체를 열심히 공부해 훌륭한 답안을 냈던 정약용의 모습은 따뜻한 웃음을 짓게 만든다.

또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될때 정약용을 감싸주기 위한 정조의 노력과 자신의 무고함을 알리려고만 하지 않고, 왕과 노론과의 권력관계를 파악해 나아가고 물러남을 조절했던 정약용의 외로운 싸움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피가 말리는 아슬아슬함의 연속이었다. 말년에 귀향지에서 약전형과 나눈 편지의 내용이나, 가족들 특히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의 외로움과 세상에 대한 초연함, 그리고 만인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 읽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게 만든다. 동생을 그리워하며 우이도에서 숨진 약전의 모습과 그를 만나지 못하고 그저 그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산 위에 서 있던 약용의 모습이 눈에 밟혀 섧다.

그러나 한편 책을 읽어가면서 궁금증이 커가는 부분이 있다. 세상에 절대악과 절대선이 있는 것이라면 모를까, 어찌 이 책속에선 노론은 절대악이며, 남인과 정조는 절대선으로만 보여지는가? 물론 이런 명확한 구분을 바탕으로 책을 써 나가는 것, 정약용의 입장에서 그를 위한 변명이나, 그의 자전마냥 써내려가는 것이, 독자들의 감성을 더욱 자극할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말로 노론은 그야말로 절대 악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커진다. 저자가 정약용을 대신해 변명한 많은 것들이 어찌보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천주교 박해때 끝내 비밀을 지키지않고 발설하는 장면, 지방관리로 있을때 권력서열을 무시하고 직접 왕의 비호를 이용한 정책들, 왕세자의 병환을 구해내지 못한 것 등등 노론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같은 사실에 대한 다른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책을 덮는 순간, 정약용과 정조의 거대한 1당 독재에 대항하지만 어찌해볼 수 없는 숙명에 슬퍼하면서도, 한편 노론은 왜 그다지도 폐쇄적인 모습으로 끝끝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만 들었는지에 대한 알고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그들이 진정 절대악은 아닐 것이라는 가정하에서...

 

사족: 최근 토지 소유자 상위 1%가 전체 국토의 47%를 가지고 있다는 기사를 접했다. 땅이라는 것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며, 스스로 주어진 자연이라는 것을 빌려 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이 소유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것 같다. 더더군다나 그것이 투기라는 바람을 일으켜 땅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돈이라는 화폐를 증식시킨다는 점에서 화가 난다. 그래서 차라리 이 시대에도 이익의 균전제나 정약용의 여전제와 같은 제도를 도입하면 어떨까하는 고리타분한 생각을 해본다. 땅은 땅을 가는 자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기본을 지킬 수 있는 사회. 공산사회를 꿈꾸는 것은 아니지만, 노자가 꿈꾸었던 유토피아가 불가능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헛된 꿈을 한번 꾸어보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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