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박물학
다이앤 애커먼 지음, 백영미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이 공의 세계에서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사유작용 등 감각작용도 없고, 빛깔과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비감각적 대상인 원리 등 객관대상도 없으며, 시각의 영역도(청각의 영역, 후각의 영역, 미각의 영역도(청각의 영역, 후각의 영역, 미각의 영역, 촉각의 영역) 사유의 영역등 주관작용도 없느니라.

반야심경의 한 대목이다. 현상이 모두 공이라는 이 생각은 자칫 허무주의로 사람을 빠지게 만들련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개인적으로 이 대목을 인간의 한계점에 대한 고백으로 이해한다. 물론 오독의 소지가 다분하다.

감각의 박물학이라는 리뷰에 난데없이 반야심경이 왜 튀어나왔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것은 차츰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해결해가기로 하겠다.

책의 저자는 서문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쾌락에 대한 집착이 아닌 헬렌 켈러와 같은 감각에 대한 유희를 주장하는듯이 보여진다.

죽음과 강렬한 감각은 인간의 공포인 동시에 특권이다(11쪽)

저자는 감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책을 통해 보여주며, 세상을 한껏 즐기라고 말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책은 온통 감각에 대한 찬양으로 넘쳐난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공감각으로 나뉜 각각의 장은 그 감각들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지 여러가지 예를 들면서 보여준다. 그러나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의 감각이 갖고 있는 한계점 들이다. 52쪽에서 말하고 있는 매클린토크 효과라는 것도 인간의 감각이 얼마나 믿을 것이 못되는지에 대한 전적인 증거로 보여진다.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는 여학생들은 때때로 월경의 주기가 룸메이트를 따라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상대방의 몸에서 풍기는 체취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월경주기를 잃어버리고 상대방에 맞춰가기 때문에 발생하게 된다. 지금은 상식으로 알고 있지만 지구가 자전하면서 내는 소리의 크기가 너무 커서 우리는 듣지 못하고, 또는 너무 작아서 박쥐만이 듣는 소리도 있다. 눈에 보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자외선과 적외선의 영역이라는 것이 우리가 볼 수 있는 파장의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착시 현상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인간이 외부 환경을 받아들이는 여러가지 감각들이 실은 모순투성이에 잘못된 정보를 들여오기 일쑤다. 따라서 진리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감각은 어찌보면 믿을만한 것이 못될련지도 모른다. 감각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못할뿐더러, 실은 외부 대상 자체들 또한 절대적인 어떤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게다가 이것에 시간마저 개입하기 시작하면 대상은 계속 변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거짓이니, 아무 것도 받아들일 필요가 없을까?

잠시 모든 것을 중단하고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워보라. 흘려보냈던 모든 것에 감각을 집중해보자. 실내도 괜찮겠지만 숲 속이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먼저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해보자. 평소에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마치 꽃이 피어나는 소리마저도 들릴듯한 착각에 빠질련지도 모르겠다. 실내에 있다면 오디오를 틀어놓고 음악에 귀를 기울여도 좋다. 그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새삼 느낄수 있을 것이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촉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어디선가 풍겨오는 꽃냄새에 취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눈을 뜨면 파란 하늘에 두둥실 떠가는 구름에 취하기도 할 것이며, 나뭇잎의 색깔이 하루하루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의 모든 것이 다 기쁨으로 충만되는 그 무엇이 될 수 있음을 깨치는 순간, 감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절감한다. 그러나 이 감각이 주는 행복감을 벗어나, 쾌락을 쫓는 순간 향유하던 감각은 이내 덫이 된다. 보다 더 좋은 소리, 보다 더 좋은 색깔에 대한 집착이 사람의 인생을 피폐하게 만들련지도 모른다.

반야심경은 바로 이런 욕에 대한 경계심이라고 보여진다.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기쁨으로 충만시킬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는 상태. 비록 그것이 거짓된 것이라거나 비틀어져서 들어오는 정보일지라도, 그것이 그렇게 들어온 것임을 알고 있는 상태라면, 그것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진리 또한 내 몸 속에 있음을 깨우치게 되지는 않을까?

지금 이렇게 키보드를 치고 있는 손가락의 감각 하나하나에서 기쁨을 느낀다면 세상은 온통 기쁨 투성이지 않겠는가? 눈이 멀고 귀가 먼 헬렌켈러가 세상을 행복과 기쁨으로 받아들였듯 세상을 대한다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인 이 세상이 색즉시복福공즉시행幸이 되지 않을까  감히 상상해본다. 내 몸의 감각이 그렇게 소중하며, 그 감각의 대상들이 또한 소중한 것들이니, 어찌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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