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 새 시대를 열어간 사람들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라는 것은 승자의 기록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배우는 교과서 속의 인물들이라는 것도 이 기록들을 바탕으로 탄생한다. 그러나 승자가 바뀌거나 세상의 가치관이 변한다면 그 인물의 성격 또한 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재탄생하는 인물들이 곧바로 교과서 속으로 나타나지는 못한다. 그래서 제도권 밖에서 활약하는 학자들이 펼쳐내는 역사서나, 제도권 내에 있더라도 독특한 관점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책을 읽는 것은 학교에서 배웠던 인물들에 대한 새로운 상을 접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 재미가 솔솔하다.

이덕일 씨의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은 정약용과 정조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가고, 후반부에선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에 그 이야기의 중심을 두고 있다. 특히 노론이라는 집권당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정조와 그를 보좌해 줄 역량있는 신하로서 남인 정약용과의 관계는 눈물겹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었던 해에 태어난 정약용은 그의 향후 행보 또한 사도세자와의 운명적 관계를 유지한다. 화성으로 가기 위한 한강위의 배다리나 화성 축조를 비롯, 처음으로 임금과 접하고서 나누었던 대화 또한 모두 사도세자와 관계가 있다. 사도세자와의 관계는 그것이 권력투쟁과 연계된다는 점에서 항상 피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노론에 대한 견제를 위해 남인 세력중 실력있는 자들을 궐내에 두려했으나 끝내 그 뜻을 펼치지 못했던 정조의 모습이 특히 애틋하다. 그의 죽음을 앞둔 장면에서 주위의 그 누구도 믿지 못한채 스스로 자신의 병을 고쳐야만 했던 모습에 안타까움을 금할수가 없다. 또한 이런 왕에게 힘을 실어주지 못하고, 항상 먼 곳으로 떠나야만 했던 정약용의 모습 또한 눈시울을 적시게 만든다. 정약용의 실력을 점검하기 위해 성균관에 있을때 논어 시험에서 전날 슬쩍 문제를 유출했다가 다른 문제를 내본 정조나, 특혜를 받지않고 진정한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시험범위 전체를 열심히 공부해 훌륭한 답안을 냈던 정약용의 모습은 따뜻한 웃음을 짓게 만든다.

또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될때 정약용을 감싸주기 위한 정조의 노력과 자신의 무고함을 알리려고만 하지 않고, 왕과 노론과의 권력관계를 파악해 나아가고 물러남을 조절했던 정약용의 외로운 싸움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피가 말리는 아슬아슬함의 연속이었다. 말년에 귀향지에서 약전형과 나눈 편지의 내용이나, 가족들 특히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의 외로움과 세상에 대한 초연함, 그리고 만인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 읽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게 만든다. 동생을 그리워하며 우이도에서 숨진 약전의 모습과 그를 만나지 못하고 그저 그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산 위에 서 있던 약용의 모습이 눈에 밟혀 섧다.

그러나 한편 책을 읽어가면서 궁금증이 커가는 부분이 있다. 세상에 절대악과 절대선이 있는 것이라면 모를까, 어찌 이 책속에선 노론은 절대악이며, 남인과 정조는 절대선으로만 보여지는가? 물론 이런 명확한 구분을 바탕으로 책을 써 나가는 것, 정약용의 입장에서 그를 위한 변명이나, 그의 자전마냥 써내려가는 것이, 독자들의 감성을 더욱 자극할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말로 노론은 그야말로 절대 악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커진다. 저자가 정약용을 대신해 변명한 많은 것들이 어찌보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천주교 박해때 끝내 비밀을 지키지않고 발설하는 장면, 지방관리로 있을때 권력서열을 무시하고 직접 왕의 비호를 이용한 정책들, 왕세자의 병환을 구해내지 못한 것 등등 노론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같은 사실에 대한 다른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책을 덮는 순간, 정약용과 정조의 거대한 1당 독재에 대항하지만 어찌해볼 수 없는 숙명에 슬퍼하면서도, 한편 노론은 왜 그다지도 폐쇄적인 모습으로 끝끝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만 들었는지에 대한 알고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그들이 진정 절대악은 아닐 것이라는 가정하에서...

 

사족: 최근 토지 소유자 상위 1%가 전체 국토의 47%를 가지고 있다는 기사를 접했다. 땅이라는 것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며, 스스로 주어진 자연이라는 것을 빌려 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이 소유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것 같다. 더더군다나 그것이 투기라는 바람을 일으켜 땅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돈이라는 화폐를 증식시킨다는 점에서 화가 난다. 그래서 차라리 이 시대에도 이익의 균전제나 정약용의 여전제와 같은 제도를 도입하면 어떨까하는 고리타분한 생각을 해본다. 땅은 땅을 가는 자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기본을 지킬 수 있는 사회. 공산사회를 꿈꾸는 것은 아니지만, 노자가 꿈꾸었던 유토피아가 불가능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헛된 꿈을 한번 꾸어보는 것은 왜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