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
이윤기 외 대담 / 민음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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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으로 하루를 보내는 경우가 있다. 혼자 산다는 것은 말없이 산다는 것과 일맥상통할련지도 모르겠다. 역으로 함께 산다는 것은 어쩌면 남들과 이야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 수 많은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와 딸이 선배와 후배가, 또는 동년배의 학자로서 등등 때론 어울린 듯, 어울리지 않는 듯 짝을 지어 대담을 나눈다.

깃털처럼 가볍게 인생을 이야기하다 바위처럼 무겁게 현실을 이야기한다. 이윤기씨 부녀간의 신화와 인생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최장집씨의 이성에 대한 믿음으로 끝나는 이 책의 구성은 그야말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윤기씨가 집착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정재서씨가 주목하는 산해경을 비롯한 동양 고전속의 환타지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고대사람들의 상상의 세계속에서 한쪽은 인간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꿈틀대는 본성의 탐구를 행하며, 또 다른 한쪽은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감성의 확장을 바란다.

신화와 판타지의 맞은편에선 세상을 향한 이성의 외침이 있다. 여성의 평등권을 가져올, 좀 더 나은 사회를 이룰 마지막 저격수, 탈이성의 시대라 불리며 이성이 찬밥신세가 되었다 할지라도 결국 진흙속의 연꽃을 피우는 건 이성임을 다시 한번 자각하게끔 만든다.
그러고 보면 책의 마지막에 이성에 대해 언급한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신화를 해석하는 것도 디지털의 논리도 문학이라는 것도 결국 세상을 향해 외치는 함성이라면 뜨거운 가슴을 전제로 차가운 이성의 숨결이 존재하지 않는 한 그저 메아리에 그칠 뿐일지도 모른다. 직접 대담자들과 얼굴을 맞대고 그들의 음성을 듣지는 못하지만 글이로나마 그들의 생각과 인생의 한켠을 조금 훔쳐볼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경험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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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감추는 사람, 실패를 살리는 사람
하타무라 요타로 지음, 정택상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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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16강은 정말 꿈으로 끝나고 말까? 히딩크 감독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은 최근의 평가전에서 보여준 대표팀의 나약한 모습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감독을 바꿔야 하지 않는냐는 극단적 의견을 포함해 그가 한국축구를 잘 모른다는 비아냥까지 그에 대한 신뢰의 축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원래 우리 축구의 현주소가 이것뿐이었다고 자조하며 16강 보다는 국가 대사인 월드컵 자체를 잘 치루어내야 한다는 타협적 의견도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실패를 감추는 사람 실패를 살리는 사람> 이라는 이 책을 읽으면서 히딩크가 실패학을 전공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다시금 마음 속에 희망의 씨앗을 뿌리게 됐다.

실패학에선 실패란 결코 감추거나 비난받아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그 속에서 지식과 지혜를 얻어내 새로움을 창조해 낼 밑거름으로 쓰라고 한다. 또 품질관리 향상에 맞춘 조직원들의 전문화 이외에 전 부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진짜 베테랑을 육성해야 한다고 한다. 실패를 예방하고 사고가 발생했을 때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는 상황연습과 전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했을 때에야 가능하다.

히딩크 감독이 토털축구를 지향하고 전선수들의 만능 플레이어화에 애를 쓰는 건 그가 항상 말했던 창조적 축구와 일맥상통한다. 즉 아무리 다양한 전략을 짜고 그것을 피나게 연습해 습득하더라도 실제 경기장에선 그 훈련때와 똑같은 상황은 천에 하나 주어질까 말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수들은 훈련을 바탕으로 상황이 변했을 때 임기응변의 묘를 터득해야 하는데 이는 모든 선수들이 만능플레이어가 되었을 때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수있다. 즉 무턱대고 작전대로만 이행하려는 우둔한 소에서 상황상황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는 여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최근의 계속된 실패는 우리의 고질적 약점을 보완할 수있는 약이 될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다만 그 실패를 거울삼아 지식과 지혜로 다듬을 시간이 충분한가에 대한 의문만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런 실패에 대한 자세의 변화는 꼭 이번 월드컵에서 성과를 드러내지 못할지라도 언젠가는 그 달콤한 열매를 맺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성공은 99%의 실패와 1%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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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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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 홀로 서있는 상상을 해본다. 내리쬐는 햇볕, 주위엔 물웅덩이 하나 없다. 모래바람은 예고도 없이 찾아와 또 다른 길을 만든다. 사막을 벗어나는 길은 오직 걷는 길밖에 없다. 사막이 끝나는 지점 또 다른 사막을 만날지라도 난 꾸준히 걸어야만 한다. 그 속에서 난 또 다른 나를 수없이 만난다. 눈물이 난다. 나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책을 읽으며 느낀 소설가의 길을 나름대로 생각해보았다. 피가 끓어오르는 감동을 주어야 하는 소설가의 숙명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에세이는 오직 소설 한길만을 걷고 있는 마루야마 겐지의 무너지지 않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인생 최대의 감동은 자신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미지의 존재이며, 앞으로도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순간, 인생은 빛을 발하고 충만해지는 것이며, 또한 영원해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펼쳐나가는 강인함이 필요하다. 마음의 명령 따위에 일일이 따를 수가 없다. (P208)

삶이 주는 평온함에 안주하고 있는 나를 반성하게 만든다. '느림'의 미학을 제멋대로 해석해 얼토당토 않은 게으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굼벵이에게 갑자기 내려치는 청천벽력이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형이상의 문제라기 보다는 일상의 자세를 어떻게 다져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실천의 문제다.

결코 문학의 거창함이나 소설가의 위대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학권력, 예술권력에 대한 경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소설가가 아니라도 자신의 삶에 얼마나 부단한 채찍질을 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엄격성에 있다 하겠다. 그런 삶이 비록 고단할 지라도 그것이 바로 인생이지 않을까 노소설가는 조용히 자신의 삶으로써 웅변하고 있다. 사막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누구나 건널 수 있는 것이 아닐터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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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문학앨범 - 진창 속의 낙원 웅진문학앨범 8
황지우 외 / 웅진지식하우스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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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이 지배하는 모더니티의 사회가 아니라 파쇼가 지배하는 끔찍한 모더니티 속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시로써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일것이다. 기표와 기의가 불일치하고 동일한 기의를 다른 기표로 표현해야만 하는 사회,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하나로 밀어붙여도 모든 것이 용서 아니 묵인되어지는 사회 그 속에서 시인은 침묵하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소통이 비록 메아리에 그칠 수도 있다는 공포심마저도 사람들과 통(通)하는 과정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의 행위를 막을 수는 없다. 통한다는 것은 주관을 떨쳐내고 간주관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이는 객관의 확보로 이어진다. 황지우는 비록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이야기하더라도 개인적 인상을 그리더라도 그것이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통정(通情)을 획득함으로써 객관성을 얻는다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시를 발표했고 사람들은 그 시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시가 비록 몽상을 이야기하고 있다하여도 그 역시 잠든 사이 꿈꾸는 일장춘몽이 아니라 깨어있음으로 해서 획득하는 몽상이기에 우리의 의지가 살아있는 곳이다. 그 의지를 바탕으로 삶은 앞으로 걸어나갈 수 있으며 그 한걸음 한걸음이 뒤에 길을 남긴 것이렸다.
인문학이 쇠퇴하는 시기, 순수문학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그 발길 닿는 곳에 길이 생기니 사람들은 그 길을 따라 쉼없이 따라올 것임을 기약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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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 3
장정일 지음 / 하늘연못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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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편에서 소설이란 그 주인공들의 변이를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작가는 이번엔 소설가란 악을 다루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문학이 의사소통이라면 진정한 의사소통은 악과의 대화를 포기해서 안 된다. 진정한 작가는 문학에게만 유일하게 허여된 그 능력과 특권을 자랑스럽고 고통스레 받아들인다. 악과 의사소통하는 문학, 그것은 이미 유죄이다. 사드나 보들레르가 그랬듯이 문학의 유죄성을 벗겨 줄 것은 시간밖에 없다. (P234)

아마도 <내게 거짓말을 해봐>라는 책이 가져다 준 고통이 그에게 계속해서 작가의 변을 늘어놓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상황적 요인에 따라 그는 지금 자신이 다루고 있는 것은 금기에 대한 도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금기에 대한 도전은 이 시대의 악일 수밖에 없지만 시대적 악이란 것은 그 시대가 변하면 오히려 선이 될 수도 있다는 뜻에서 절대 악이랄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어찌보면 선구자적 자세를 지니고 있어야지만 진정한 소설가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하나, 소설이 가지는 의사소통의 힘은 그 내용에 있지만은 않음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즉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은 그것의 내용을 어떻게 표현하는냐 하는 형식의 문제도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택한 포르노라는 형식은 이 시대가 그것을 용납치 않기에 선택한 하나의 방편일 수 있는 것이다.

실상 지금까지 소설이나 그 밖의 책을 읽어오면서 그 내용에 온갖 나의 주파수를 맞춰왔지만 형식은 항상 뒷전이었던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읽으면서 내용은 결코 형식과 동떨어져 이야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실감케됐다. 포장이 중요해져버린 시대에 가감히 그 포장을 포기하고자 했던 나의 책읽기 습관이 도리어 독이 되어버린 것임을 실감하며 뒤늦게나마 장르라는 것에 대해 곱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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