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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2-3년 이내에 가장 좋아하는 저자라면 강신주이고, 1-2년 이내에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면 필립 로스다. 왜 필립 로스가 좋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의 문장을 빌려와 이렇게 답하겠다.
그녀 제 어떤 점에 그토록 끌리시는 거예요?
그 자네의 젊음과 아름다움, 우리가 소통에 들어선 속도, 자네가 말로 만들어내는 에로틱한 분위기
(『유령퇴장』, 178쪽)
소통에 들어서는 속도, 말을 이어가는 방식, 말을 통해 만들어내는 에로틱한 분위기, 이런 것들 때문에 나는 필립 로스를 좋아한다. 『죽어가는 짐승』은 필립 로스의 작품 중 열 번째로 만나는 책이다.
이 책은 읽기가 쉽지 않았다. 그 놈의 ‘섹스’ 때문이었다. 나는 이 책이 ‘섹스’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고 싶어하는 가장 중요한 테마는 ‘섹스’라고 생각한다.
‘나’는, 십오년 동안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는 확고한 규칙에 근거, 아이들이 기말시험을 다 치르고 성적이 나올 때까지는 어느 누구에게도 개인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명백한 유혹의 신호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기말시험이 끝나고 점수까지 매기고 난 후, 아이들을 집으로 초대한다. 평생에 걸쳐 읽은 책들, 아래층 거의 전체를 차지하며 늘어서 있는 양면 서가와 ‘내’가 연주하곤 하는 피아노를 보고, 아이들은, 여자 아이들은 ‘나’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 일부 여자 아이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이 쿠바 출신이라는 것, 할머니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 할아버지는 저런 사람이라는 것. 이건 모두 좋은 일이다. 서로 친밀해지는 과정이다. ‘내’가 피아노를 치고 카프카의 원고를 갖고 있다는 것도 좋은 일이다. 여자 아이들은 흥분하고 행복해한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우회로일 뿐이다.(28쪽) 목표에 가 닿기 위한 일부분일 뿐이다. 없으면 기분 좋을 그런 부분, 목표는 오직 섹스 뿐이다.
꼭 필요한 매혹은 섹스뿐이야. 섹스를 제하고도 남자가 여자를 그렇게 매혹적이라고 생각할까? 섹스라는 용건이 없다면 어떤 사람이 어떤 다른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매혹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런 용건 없이 누구에게 그렇게 매혹될까? 불가능하지. (28쪽)
정말 그러한가. 인간 사회에서, 생활에서 섹스가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시급한 문제인가. 인간이 인간에게 매혹되는 건 오직 ‘섹스’의 가능성 때문인가. 그 때에만 매력을 느낄 수 있는가. 정말 섹스가 전부인가.
매슬로우의 ‘인간의 욕구 5단계’에서는 ‘섹스’를 ‘식욕, 수면욕, 배설욕구’와 마찬가지로 인간 생활의 가장 기본이 되는 ‘생리적 욕구’로 분류한다. 인간적인 삶을 위한 전제라는 뜻이다. 자주 잊어버리는 기본 전제, 인간이 동물이라는 전제가 이렇게 확인된다. 동물로서의 인간을 생각할 때, ’섹스‘는 생존의 기본 조건이다. 이에 더해 작가는 섹스야말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 그 자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유한하고 죽음 앞에 무력한 인간의 삶 앞에서 구원의 힘은 오직 ‘섹스’에만 있는가. 인간 한계에 대한 저항은 ‘섹스’ 뿐인가.
오직 섹스를 할 때만 인생에서 싫어하는 모든 것과 인생에서 패배했던 모든 것에 순간적으로나마 순수하게 복수할 수 있기 때문이야. 오직 그때에만 가장 깨끗하게 살아 있고 가장 깨끗하게 자기 자신일 수 있기 때문이야. 부패한 건 섹스가 아니야 - 섹스 아닌 나머지가 부패한 거야. 섹스는 단순히 마찰과 얕은 재미가 아니야. 섹스는 죽음에 대한 복수이기도 해. 죽음을 잊지 마. 절대 그걸 잊지 마. 그래, 섹스도 그 힘에 한계가 있어. 나도 한계가 있다는 걸 아주 잘 알아. 하지만 말해봐, 섹스보다 큰 힘이 어디 있어? (88쪽)
죽음에 대한 복수로서의 섹스, 유한함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섹스에 대한 그의 견해는 물론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섹스만이 강력한 경험인가, 섹스의 경험만이 강력한가.
나는 ‘야한 비디오’를 즐겨보지 않는데(사실 그 자체), 가끔 보게 되는 야한 장면, 그 중에서도 밀도 높은 화면을 보게 되면 내가 아이를 둘 낳은 기혼여성임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성의 세계’가 있는 건 아닌가 의문이 생긴다. 물론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별세계’가 있을 수도 있고, 화면 속 영상이란 임의로 조작된 장면이기에 실제와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게 무엇인가. 섹스는 어디까지나 섹스다. 섹스 그 자체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섹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섹스 자체를 신성시하는 문화는 ‘처녀성’에 대한 강박을 여성에게 강요해 남성 우위의 문화를 강화한다. 섹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면, 아무하고나 섹스할 수 있을테다. 우리가 아무하고나 섹스하지 않는 이유가 섹스가 우리에게 특별한 경험인 이유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하고 싶은 이유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란, 필립 로스의 섹스론에 대한 나의 어설픈 대답이라면, 섹스의 향유란 삶의 중요한 한 가지 측면인 건 확실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읽기 어려운 몇 쪽이 있다. 내가 아무리 필립 로스를 좋아한다 해도 이 책을 집에 두어도 좋을지 고민하게 만드는 서너 쪽 말이다. 안 되겠다, 이 책을 알라딘 중고서점에 팔아야겠다, 결심 아닌 결심을 하고 나서 책을 살펴보니, 아름다운 여인의 나신을 감추기 위해 책의 띠지를 고정한 스카치테이프가 보인다. 아, 팔 수 있겠나. 섹스에 대한 예찬, 섹스에 대한 숭배로 가득찬 이 책을, 알라딘 중고서점에 팔 수 있겠나.
알라딘, 네가 받아주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