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앎비앎 친구 이야기
강연 가서 맨 앞자리에 앉는 것을 꺼리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맨 앞에, 맨 먼저를 꺼리지 않는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강연 20분 전쯤이었는데 팟빵홀 강연장에 사람들이 많이 도착하기 전이어서 어디든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쟝쟝님이 맨 앞줄, 정 가운데 자리에 앉자고 했을 때 속으로는 좀 망설여졌다. 맨 앞줄, 가운데 자리여서가 아니고. 아니고. 둘째 줄에 앉아야 선생님과 눈높이가 딱! 맞을 텐데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선생님과의 직접적이고 과한 눈맞춤이 아니라면, 내가 이 시간, 여기에 왜 왔을 것인가. 하지만 그 부담스러운 자리에는 사람들이 앉지 않을 테고, 그 좋은 자리를 비워두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주최측’ 마인드로 우리 둘은 그 자리에 앉았다. 맨 앞줄, 정 가운데.
강연 중간에 선생님이 존경하던 소설가에 대해 말씀하셨다. 쉬는 시간에 그 소설가가 누구냐 물으셨던 그 분을 제외하고는(죄송합니다, 그분), 그곳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그 분이 누구신지 알았다. 선생님이 사모하는 소설가, 정찬. 『대단한 저자』. 이 책은 알라딘 창사 16주년을 맞아 알라딘 도서팀에서 만든 책이다. 없으신 분이 많으실 거라 예상되기에 조금 길게 인용해본다.
나는 이 마음을 이해한다. 누가 뭐라든 내 첫사랑은 짝사랑인데, (내가 가졌던 경험, 이런 류의 짝사랑을 ‘첫사랑’으로 카운트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내가 오래오래 좋아했던 그 사람에게 ‘좋아한다’는 말조차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 나의 온 몸은 나의 불타오르는 심정을 전했겠으나, 내 입술은, 내 말은 그에게 닿지 않았다. 나는 그랬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선생님의 사모하는 마음을 이해한다. ‘그가 몰라도 괜찮다’는 마음을 이해한다. 그리고 최근의 심경 변화 (강의 들으신 분만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역시 이해한다. 나도 선생님을 그렇게 사랑한다. 선생님이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상관없다. 선생님의 질문에 촌철살인의 답을 하고 싶다. 실패. 선생님에게 칭찬을 들을 만한 좋은 질문을 하고 싶다. 실패. 전부 다 실패다. 선생님을 사모하는, 선생님을 애정하는 뜨거운 공기 속의 나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한다. 나는 그냥, 선생님을 사모하고 존경한다. 정치적 입장이 분명히 드러나는 그의 글쓰기와 지식인이라는 자의식 없이 학문을 추구하는 그 열정을 사랑한다. 그의 문장을 사랑하고, 그의 새로운 문장을 더 사랑한다. 하지만, 월요일의 강연에서 느낀 건, 어쩌면 나는 그냥 선생님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물음이었는데.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제가 그분의 작품을 사랑하는 거지, 그분을 사랑하는 거는.... 아니잖아요! 여러분들도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들도 제 책을 좋아하는 거지. 사실, 저를 잘 모르시잖아요! 네, 잘 몰라요. 저는 선생님을 잘 모르는데, 그런데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선생님의 윤리적 삶을, 그 끈기를, 집념을, 순수하고 여린 마음을, 저는 사랑합니다. 저는 혼자 선생님을 스승으로 삼고, 저의 스승으로서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인용해주신 작가와 책들을 아직 다 찾아보지 못했고, 여러 번, 정말 여러 번 읽어도 이해 안 되는 글들이 아직도 수두룩하지만, 그래도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행간 속에 감춰진 선생님의 숨겨진 뜻을 알아채고 (<모든 연대는 정의인가 – 기억의 전쟁>) 식민 시대를 겪은, 어쩌면 아직도 그 도상에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생님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스승으로서 선생님을, 나의 스타로서 선생님을, 나는 사랑합니다.
하지만, 스승은 언제나 멀리 계시어 나의 발자국을 알지 못하시고, 배움의 과정에는 반드시 도반이 필요하니, 내게는 알라딘이, 알라딘 친구들이 좋은 도반(기독교인입니다)이며, 좋은 길동무이다.
너무 솔직해지려는 나를 붙잡아 세운다. 지금은 아침이고, 오전이라고 다그친다.
쟝님은 이 문장을 불러왔다.
앎의 범위를 아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인정하고, 내가 지금 어디에서 말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일상이 앎이요, 삶이어야 한다. (150쪽)
나는 아직도 앎의 범위를 ‘묻는다’는 말의 의미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내가 지금 어디에서 말하는지, 어디에 있는지를,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쟝님은, 페미니즘을 읽는 것이 내 삶의 대부분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던 내 말을 기억하고 있다. 사실이 그렇다. 가끔, 페미니즘은 나보다 더 용감한 여성, 나보다 더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 여성, 결혼하지 않은 여성, 아이가 없는 여성을 ‘위한 것’처럼 느껴진다. 거기에, 그 무리에 나는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페미니즘을 말하려면 직업이 있어야 한다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어쩌면 이건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런 모순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페미니즘을 읽는 건, 내 삶의 순간들, 그중의 많은 시간을 ‘페미니즘’ 이외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 나의 전부는 아니지만, 내 인생의 일부는 페미니즘의 언어로‘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페미니즘이 그런 언어를 주었다고 해서 페미니즘의 언어만으로 나를 설명할 수는 없다. 나는, 인간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다단한 존재다. 그 간극과 모순을 넘어서는 일이, 실패가 예상되는 그 일이 바로 나의 숙제다. 요청하지 않았으되 해야만 하는. 기한은 없으되 반드시 제출해야만 하는.
결혼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앞으로도 계속 ‘살림 초보’인 나는 이런 삶에 익숙해진 식구들과 그럭저럭 산다. 더 나아질 거라는 기대도 없거니와, 나아지겠다는 말을 너도나도 믿지 않는다.
쟝님의 ‘앎비앎’ 친구로 선정되면서 내 삶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감히 그렇게 생각한다. 너무 열심히 살았던 쟝님과 치열함이라고는 모르는 내가 만들어갈 ‘앎비앎’ 신세계에 대한 기대가 가득하다. 책을 읽고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바닐라라떼를 마시는. 부지런히 제 갈 길을 걸어가는 개미를 들여다보고, 곧게 뻗은 나무를 같이 바라보는, 그런 평범한 일상을 꿈꾼다. 그날 강연에서의 선생님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와 보면 ‘과정적 주체’로 존재하면서, ‘죄의식 없는 즐거움’을 맘껏 누리는 삶을 살며시 꿈꿔본다.
밥만 차리는, 진짜로 반찬 없이 밥만 차리는 내게 열리는 새 세상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벅차다. 나 같은 사람도 이 신세계에서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 나는 가능한, 최선을 다해서, 조금은 치열하게, 근사한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다. 자랑스러운 친구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