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사랑한다
다시, 정희진.
잠자냥 님 글을 가져와 엮인 글을 쓴다. 잠자냥한테 대차게 차여서 슬픈 이야기(!)는 아니다. 감사하게도 잠자냥님이 쭉 정리해오신 희진 샘의 강연 맥락을 읽어보니 어제의 강연과 오늘의 오디오 매거진이란 내가 읽어온 정희진이 내던지는 일종의 출사표(?)처럼 느껴지는 바(매문이 아니라 매거진!!이라니🫢), 사실 나는 어제 정희진 선생님의 강연을 처음 들어보았고 그 느낌은… 뭐랄까… 충격이었다.
선생님은… 너무… 사랑스러운 사람이셨어🥹 게다가 선생님은 대(민)머리셨어 (으하하하하하!!!) 내 마음에 이미 들어와 있었던 첫 번째 대머리… 그 이름 정희진. (공쟝쟝 인생에서 소화할 대머리 3명/정희진,푸코,닉혼비/은 이제 끝났습니다. 대머리 사랑 용량 초과 초과입니다!)
암튼, 요청을 받은 건 아니지만 잠냥님 글을 읽어보니 어제 내가 읽고 들은 내용을 소화시켜 나만의 맥락으로 정리하고 다짐하는 글을 써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잠자냥님의 강연 정리 글 👉🏻 https://blog.aladin.co.kr/socker/14257707
그리고 2017년의 강연 ~ 2023년의 강연 사이에는 팬데믹이 있었다.
어제의 강연에서 정희진 선생님이 생각하기에 인류사에서 중요한 전환의 지점이 1. 동서양의 만남 2. 자본주의의 대두 3. 플랫폼 자본주의 라고 하셨다. 다른 건 잘 모르겠고 중요한 건 3번이다. 선생님은 스마트폰을 하지 않으시고, 인터넷도 오직 이메일만 사용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내겐 그것이 선생님을 존경하면서도 멀게 느끼는 지점으로 작용했었다. (요즘 시대에 스마트폰을 쓰지 않고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은 능력이다. 나의 경우 없으면 먹고살 수 없다. 스마트폰은 서양남이 만든 기술 문명과 자본주의의 총체라고 생각해서 환멸을 느끼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 몸이라는 걸 넘나 잘 알고 있어서ㅋㅋ 잘 조절하고 다루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런데 샘이 놀랍게도 “만들어진 기술은 없어지지 않고 무조건 반대나 외면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문명(강연의 부제는 매체와 몸이었다), 즉 매체(미디어, 몸의 확장)를 어떻게 잘 활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셨기 때문에 좀 안심하게 되었달까. 팬데믹 시대를 맞이하여 강연이 줄었던 희진샘이 줌도 하시고 오디오 매거진도 하시고 ㅋㅋㅋㅋ 암튼 몸의 확장을 활용하시기로(?) 맘을 먹으셨나 보다. 무리는 하지 않으셨음 좋겠는 데 또 오디오로 만나니까 나는 넘 좋고 그래요. 쌤.
어쨌든 나 역시 선생님의 강의 내용에 동의한다. 세상은 나빠질 것이다. 더 나빠질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빠지기 싫다. 그러니까 공부를 할 것이다. 내가 하고 싶어하는 공부가 선생님이 하자고 하는 공부인 것 같아서 난 좀 뿌듯하기도 하다. 내 공부는 그건. 난 나에게 질문을 할 것이다. 내 질문을 없애지 않을 거다. 뭐 이런 걸 다 묻나 싶은 것을 계속해서 나한테 더 물을 거다. 읽을 거다. 쓸 거다. 좋은 독자가 되고 싶다. 내가 더 나빠지지 않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남들이랑 같이하면 좋겠지만 같이 못해도 상관없다. 그냥 나는 한다. 할 수 있는 걸 할 수 있는 만큼. 못하겠으면? 안 하면 된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이게 공부가 업인 사람과 공부가 취미인 사람의 차이인 것 같아서 난 좀 좋은데… 그런데 취미라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난 꽤 많이 진지하다. 흠. 난 좀 그래.
그러니까 앎비앎. 앎을 비워내는 앎.을 하자고 이웃 ㄷ님과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작년 여름이었다. 누가 더 정희진 선생님을 좋아하는지 겨뤄보자고 몇 마디 나누다 말고 나는 ㄷ님께 졌다. ㄷ님은 희진샘이 사랑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하고 계시더라고🤪 나는 그러하지 못했다 ㅋㅋㅋㅋ 정희진 샘 글 나만 읽고 싶은 욕망을 사실 아직도 버리지 못했다(근데 이건 선생님도 그랬다고 하셨닼ㅋㅋㅋㅋ ).
하지만 이번엔 진짜로 희진샘한테 배운 사람답게(?) 나의 공부를 공유하도록 하겠다. 바로 이 문장이다.
“(148) 세상에는 진실도 객관도 사실도 없다. 그것으로 작품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보이는 세계에 대한 확신과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만이 위험하다.*(...) 본 것이 지식으로 자리 잡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 *앎은 기존의 앎을 비워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150) 앎이 내가 본 것과 안 본 것 사이에서 정해지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 서로 자신이 본 것만이 진실이라고 싸우기 쉽다. 전체도 부분도 없다. *앎의 범위를 아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인정*하고, 내가 지금 어디에서 말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일상이 앎이요, 삶이어야 한다.”
“(24) 주체의 말이 상대화되고 부분화 될 때 대상도 여러 모습으로 달리 보일 것이다. 이렇게 부분적 관점은 대상에 관한 이야기를 더 개방할 수 있고 더 다양하게 말할 수 있다 물론 이건 상대주의가 아니다. 상대주의와 반대다. *상대주의는 인식자의 위치, 부분성에 관한 인식이 전혀 없다*. 부분적 관점은 모두들 똑같이 ‘여럿 중의 하나’라고 보는 탈정치가 아니다. 자기 입장의 사회성과 정치학을 분명히 하면서, 인식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실천이다. 인식 대상에 대해 말하기 전에, 말하는 자신에 대한 사회적 신원, 위치, 체현을 밝혀야 한다. 다시 강조하면, 본디 말하기, 글쓰기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 쓰는 것이다.”
멀리 해러웨이까지 다녀올 필요는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글들은 페미니즘을 우리가 함께 읽고 쓰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와닿아하며 읽지는 못했을 문장이다.
GDP에는 포함되지도 않는 무급 가사노동, 부불 재생산 노동을 하는 전업주부인 ㄷ언니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계산되지 않는 노동*을 하는 사람이다. 언니는 페미니즘을 읽는 것이 자신의 삶의 대부분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낀 적이 많았지만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가부장제 자본주의는 여성의 재생산 노동을 폭력적으로 ‘자연화’했다. 자연화된 노동에 ‘돌봄 노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한쪽 성별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하는 방향으로 동시에 그 가치를 재편성하자는 움직임은 페미니즘이 없었다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강남역 페미사이드보다는 미투 운동에 훨씬 충격을 받았고, 내가 당해왔던 잊어버리고 살려고 했던 많은 일들을 다시 떠올리면서 일상 생활이 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말하지 않는다고 없는 일이 아니게 된다는 것을 아프게 알게 되었다. 이후에 N번 방을 거치면서는 내가 *‘안 본 것’도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스마트폰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경우 내게 보이지 않는 다고 없는 일이 아니며 내가 본 것이 다도 아니라는 사실을 좀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억압되거나 해방(?)되거나와 상관없이 남성중심 사회에서 대상화되고 거래된다. 그건 사회적 일탈이 아니라 규범이었다. 안다는 건 확실히 상처받는 일이다.
우리는 알라딘 서재에서 서로 다른 책을 읽다가 만났고 어쩌다 보니 페미니즘 책을 5년째 함께 읽고 있다. 나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뇌피셜 리뷰를 주렁주렁 쓴다. (언제나 시간 빈곤에 시달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탈자도 체크 안 하고 그냥 막 주렁주렁 쓴다) 그러면 ㄷ님은 조용히 먼 댓글(트랙백이라는 기능을 ㄷ님을 통해 알게 되었다)을 달아서 자신의 경험에서 해석된 다른 이야기를 단정하게 정리해서 써주신다. (알라딘에는 자기가 쓴 글 자기가 공유하기라는 훌륭한 문화ㅋ가 있는 데… ㄷ님도 그런 문화에 한 몫하고 계신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나는 “아, 몰랐구나” 하는 걸 알게 될 때가 좀 많았다. 이런 날들이 쌓여서 나는 그와 친구가 되었다. 실제로 만나서 가끔 일상을 공유하는 친구. 좀 쑥스러운 말이지만 나는… 앞으로의 내가 겪을 수 없을(?) 경험을 공유해주면서 나의 앎을 풍부하게 만드는 이 우정에 매우 만족한다.
“(16) 영화를 보고 인상적인 장면이나 생각하는 주제가 모두 똑같다면? 그런 인생, 그런 세상을 원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아니, 같은 감상은 불가능하다. 감상이 비슷하다면 우리는 획일화된 ‘OO주의’나 지배적인 통념에 갇힌 사회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사회 구성원에게 환원주의나 전체주의가 강요되거나 우리 스스로 그것을 선택한다면, 그런 상황만큼 두려운 세계도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의 몸이 똑같은 방식으로 텍스트와 접속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몸의 개별성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다행스러움이 실현되려면, 각자 다르게 접속한 방식을 드러내야 한다.”
정희진 샘의 이 책을 읽다가 “앎은 기존의 앎을 비워내는 작업”이라는 문장이 그동안 우리가 알라딘에서 쓰고 주고 받은 글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텍스트를 읽고 다른 감상을 내놓고 다른 앎에 도달하고 기존의 앎을 비운다. 그것은 같아지기 위함이나 반박, 경쟁이 아니라 다른 몸이 겪어낸 다른 세상과 지식을 알고 배우는 ‘기쁨’이었다.
책을 다 읽고 이 책을 가장 좋아한다는 ㄷ님께 정중하게 부탁했었다. ㄷ님, 우리 그거 해요. 앎비앎 친구. 나 ㄷ님이랑 하는 게 앎비앎인 것 같거든요. 우리가 진짜 공부하는 사람들은 아니니까(걍 알라딘 서재하는 사람들ㅋㅋㅋ) 솔직히 아는 거 비우기 너무 쉽고 안 아까운 건 사실이자나요. 우린 앎비앎 하기 제일 쉬운 위치성을 가지고 있음!!! 게다가 지적 열망은 또 너무 거대하고요??!! (결여는 갈망, 욕망을 낳는다 ㅋㅋㅋㅋ) 당연한 결론이지만 ㄷ님은 흔쾌히 승낙하셨다. 말이 앎비앎 친구지 사실 걍 희진샘 팬클럽(?) 같은 거라서 ㅋㅋㅋㅋㅋ 어제는 자연스럽게 정희진 샘의 강연을 함께 들으러 갔는 데…
그대, 잠자냥을 알아봐 놓고 나한테 말 안해준 건 너무 했네요. 정말. 단.발.머.리님!!!!😔
그렇다. 알라딘 서재의 단발머리님은 나의 앎비앎 친구다. 우리의 목표(사실 이건 나의 목표)는 너무 치열하지 않게 알라딘에서 읽고 쓰는 것인데ㅋㅋㅋ 치열해지면 앎을 비워내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ㅋㅋㅋㅋㅋ 뭐 근데 스스로 생각했을 때는 아무리 치열해도 ㅜㅜ 내 앎은 일주일이 지나면 다 휘발됨 ㅋㅋㅋㅋ 이미 비워져 있는 앎ㅋㅋㅋㅋ 앎비앎 아님 이비앎임 ㅋㅋㅋ 아무튼 단발님과 나는 오래오래 여기서 읽고 쓰는 친구가 되기로 했다. 너무 치열해지면 반칙이어서 중간에 아.아도 마시고 바닐라 라테도 마시고 쉬엄쉬엄 개미도 보고 나무도 보고… 가긴 가는데 어디로 가는지 알 수는 없다. 나는 NFT책을 읽으면 단발머리님은 인간 의식의 기원을 찾는 책을 읽는 뭐 그런 식ㅋㅋㅋ 그런데 어제 강연을 듣고 나니… 이런 우리들이야 말로 이러한 시대…에 ‘죄의식 없는 즐거움’을 누리는 넘나 훌.륭.한. 존재들 아닌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그런데, 친구란 얼마나 내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지. 오늘 서재에 가보니 단발님은 <전체주의의 기원>을 읽고 계신다. 나는 그러면 또 막 자부심이 돋아나. 나 정말. 친구의 지적 성장은 나의 성장. 친구의 개 멋져버림은 나의 멋져버림. 그렇다. 아직 자아가 굳건하지 못한 나(라고 쓰고 철면피를 깔지 못한이라고 읽는닼ㅋㅋㅋ)는 다락방님처럼 *나뽕*이 차오르는 게 아니라 *우정 뽕*이 차오르는 ㅋㅋㅋㅋ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참 우정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요?ㅋㅋㅋ
말 나온 김에 친구 자랑 한번 더 하자면… 내 생각엔 독서의 넓이로 치자면 알라딘에서 최고의 넓이를 자랑하는 (깊이는 잘 모르겠닼ㅋㅋㅋㅋㅋ) 내 앎비앎 친구는 책장 한편에는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를 갖춰놓고, 영어로 <섹스할 권리>를 읽으시며, 최근 ‘식인종’ 연구에 착수 하셨다고 한ㄷ… 님… 어디로 갈지 아무리 모른다고 하지만 대체 어디까지 가실건가요? 너무 멀리 가시는 거 아닙니까?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