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편의점 (벚꽃 에디션) 불편한 편의점 1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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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입구 비어있던 상가에 편의점이 들어오고 밤길이 환해졌다. 맞은편 약국도 정육점도 일찍 문을 닫아서 딸들 귀가가 늦어지면 어두운 골목어귀가 항상 신경 쓰였었다. 편의점 이용할 일이 없던 나는 24시간 골목 입구가 환해진 것과 택배 서비스 말고는 반가울 일이 없었다. 택배 부치려고 들렀다가, 그냥 나오기 멋쩍어서 2+1 제품을 몇 번 산 후로 가끔 이용한다. 필요한 물건을 집어서 계산대로 가져가고, 할인받고 적립하고 카드로 계산하는 동안, 직원의 몇 마디 말과 바코드 찍는 소리만 울린다. 그것도 요즘은 매장 내 설치된 단말기에서 바코드 찍고 계산까지 혼자 하고 나올 수 있어서, 작업하고 있는 직원을 기다리거나 부르지 않아도 된다. 어느새 나도 이런 시스템이 편하다.

 

편의점과 관련된 책으로 첫 번째 읽었던 소설은 김애란의 단편 나는 편의점에 간다였다. 자본주의 도시에서 독거 여성이 느끼는 편의점에 대한 감상이 인상적이었다. 무엇을 구매함으로 소비도시의 일원이 되었음을 경험하고 존재감을 느낀다. 그런 목적으로는 편의점이 가난한 자취생에게 적합할 것이다. 그곳에서도 타자는 존재하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건들은 일어난다.


내가 편의점에 갈 때마다 어떤 안심이 드는 건, 편의점에 감으로써 물건이 아니라 일상을 구매하게 된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비닐봉지를 흔들며 귀가할 때 나는 궁핍한 자취생도, 적적한 독거녀도 무엇도 아닌 평범한 소비자이자 서울시민이 된다. 그곳에서 나는 깨끗한 나라 화장지를 이오요구르트를, 동대문구청에서 발매한 10리터용 쓰레기봉투를, 좋은 느낌 생리대를, 도브 비누를 산다.

……

한 번도 휴일이 없었던 그곳에서 나는-나의 필요를 아는 척해주는 그곳에서 나는-그러므로 누구도 만나지 않았고, 누구도 껴안지 않았다. 내가 편의점에 갔던 그사이, 나는 이별을 했고, 찾아갔고, 내가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거대한 관대가 하도 낯설어 나는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 서성이고 있다.”

(41p,57p, 나는 편의점에 간다」 『달려라 아비김애란)

 

또 다른 소설은 편의점 인간이다. 2017년 당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이 소설의 작가 무라타 사카야(당시, 38)19년째 일주일에 사흘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글을 썼다고 했다. 주인공 게이코는 정확한 시간과 매뉴얼대로 일할 수 있는 편의점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 사회적 관계에 있어 장애를 갖고 있는 듯한 그녀에게 이 편의점과 같은 곳이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사회에서 그 모호한 경계에 위치하고 자칫 타자로서 내몰리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했던 작품이다.

 

지문이 묻어 있지 않도록 깨끗이 닦은 유리창 밖으로 바쁘게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하루의 시작. 세계가 눈을 뜨고 세상의 모든 톱니바퀴가 회전하기 시작하는 시간. 그 톱니바퀴의 하나가 되어 돌고 있는 나. 나는 세계의 부품이 되어 이 아침이라는 시간 속에서 계속 회전하고 있다.” (9p, 편의점인간)

 

누군가는 편안함을 느끼고, 누군가는 점원과 자신 둘만 있는 공간이 불편하다. 김애란은 거대한 관대라 했고, 무라타 사카야는 편안함이라 했던 익명성과 무관심으로 대표되는 편의점을 김호연 작가는 불편한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불편한 편의점은 개인주의를 즐기는 도시의 상징인 편의점과 어울리지 않는 친절, 배려, 관심, 격려, 개입 등에 관한 이야기다.

 

자신의 지갑을 찾아준 노숙자 독고씨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급기야는 야간직원으로 채용하는, 염 여사는, 아량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 등, 편의점 사장으로서는 잃어버리기 쉬운, 아니 버려야 할 것들을 갖고 있다. 직원들에 대한 복지도 좋다. 당연히 편의점 경영 상태는 그저 그렇다. 그래도 이 편의점을 운영하는 이유는 직원들의 생계를 위한 일자리를 유지시켜 주기 위해서다. 편의점에 채용된 독고씨는 첫날부터 다른 직원들과 손님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그는 알코올 중독으로 기억을 잃어버렸다. 머리가 텅 비었다고 표현한다. 과거를 잊고 텅비어버린 머리이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거르지 않고 이야기한다. 사회적 지위나 학습된 관념 같은 것이 없어서 오히려 관찰과 조언이 정곡을 찌른다. 매일 들러 술을 마시는 경만에게 옥수수수염차를 권하고, 술을 끊으라고 충고하는 독고씨가 있는 편의점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편의점이다. 그의 존재와 조언들, 말없는 친절함에 불편함을 느끼던 사람들은 어느새 그에게서 영향을 받고 삶의 변화를 경험한다. 독고씨가 기억을 찾고 자신이 누구였고 왜 노숙자가 되었으며, 풀어야할 숙제가 있음을 깨닫는 부분은 사실 이 소설의 부록처럼 느껴진다.


현대 사회, 삶의 문제를 편의점이란 공간을 배경으로 풀어가는, 빌런도 없고, 풀 수 없는 갈등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소설은 빨려 들 듯 읽힌다. 가독성도 좋다. 신난다. 왜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시원하다. 읽고 난 후 감상을 쓰기가 어렵다는 게 이상했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럴까? 이런 소설이 많이 팔리고 있다는 것은 사람들의 목마름이 향하고 있는 지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사실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삶의 문제들은 그렇게 쉽게 풀어질 수 없는 것들이다. 노숙자들의 마음도, 편의점에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는 십대들의 마음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편의점 알바생의 고단한 마음도, 매일 무력감을 느끼며 편의점에서 술을 마시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하는 직장인의 마음도, 골방에 들어앉아 게임만 하고 있는 패배감에 휩싸인 젊은 아들의 마음도, 알기 힘들고, 쉽게 해결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귀 기울이는 것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독고씨와 같은 누군가를 기대하는 걸까?

 

나도 파고들며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과의 대화는 피하고 싶다. 아마도 대부분은 그들의 관심이 사랑보다는 호기심과 판단 근거의 필요에 의함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질문이 없다. 무심한 질문으로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인지상정으로 알아지는 것들이기도 하고, 나에게 그만큼의 여유가 없어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익숙해져 있는 내가 부끄럽기도 하다. 무심함과 무정함을 지나치면 무자비함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 아닐까?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당신이 만약 편의점에 간다면 주위를 잘 살펴라. 당신 옆의 한 여자가 편의점에서 물을 살 때, 그것은 약을 먹기 위함이며, 당신 뒤의 남자가 편의점에서 면도날을 살 때, 그것은 손을 긋기 위함이며, 당신 앞의 소년이 휴지를 살 때 그것은 병든 노모의 밑을 닦기 위함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57p,나는 편의점에 간다김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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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07-19 16: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편의점은 개인주의를 즐기는 도시의 상징이 맞네요. 거기에 배려,관심,격려, 개입이 어울리지 않는 것도요.
그럼에도 도시인들은 그런 것들을 갈망한다는 아이러니...그걸 잘 드러낸 작품^^*

그레이스 2022-07-19 16:46   좋아요 3 | URL
그렇죠!
저는 개인적으로 편의점인간이나 김애란 작가의 단편이 임팩트 있었어요.
지금 별4개 후회하고 있는 중입니다^^;;
김호연작가의 ‘망원동브라더스‘ 읽어보고 싶네요^^

레삭매냐 2022-07-19 17: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즐겨 보는 너튜브가 하나
있는데, 편세권에 살고 싶다고
하시더라구요.

일상 속으로 파고든 편의점이
또 누군가에게는 다가 서기
쉽지 않다는 걸 새롭게 알게
되었네요.

제가 예전에는 꼬치꼬치 캐묻는
닝겡이었었는데 지금은 다 귀찮
아져서 그냥 그런답니다.
아마 빨리 친해지고 싶다는 조바
심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레이스 2022-07-19 17:05   좋아요 4 | URL
ㅎㅎ
빨리 친해지시는 분이셨군요.
마음 따뜻하신 분이신것 같아요.

서울은 편세권이라고 말할수 없을 정도로 골목마다 있는데,,, 그렇지 않은 지역도 있겠네요.
비슷한듯 하면서도 다른 삶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바람돌이 2022-07-19 17: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너무 베스트셀러라서 안읽는 책이군요.
20년 전에 일본에 여행 갔을 때 편의점이 너무 많아서 깜짝 놀랐었어요. 그 때 우리나라는 편의점이 한두군데 생기기 시작했지만 비싼 가격으로 인하여 외면받고 있던 때, 그런데 지금은 우리나라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편의점 천국이네요. 이런 편의점이 만들어내는 문화가 소설이나 여타 글로 나오는게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고, 그레이스님 리뷰를 보니 읽어줘야 할듯한 느낌도 들고 말입니다.

그레이스 2022-07-19 17:31   좋아요 4 | URL
읽는데 한 시간 정도 걸렸어요.
저도 도서관책 빌려봐야지 했다가, 딸이 사달라고 해서 사줬어요.
가족들이 다 봤으니 사길 잘했다는 생각입니다.
메시지도 좋구요^^

Yeagene 2022-07-19 17:3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손이 가질 않았거든요..몇 달전 우연히 공짜로 얻게 되었는데도 읽지 않고 있었는데,
그레이스님 글 보니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레이스 2022-07-19 17:57   좋아요 5 | URL
예!~
즐겁운 시간 되실듯요.
서재님들 생각이 다 비슷한가봐요
저도 사놓고 가족들만 읽고, 정작 저는 읽기까지 오래 걸렸거든요ㅎㅎ
알라딘에서 리커버밖에 검색이 안되는것 보니 ... 오래 걸렸네요.^^;;

새파랑 2022-07-19 18:2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1일 1편의점 합니다 ㅋ 저도 아직 이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위로가 되는 책인거 같아요~!! 펀의점을 소재로 한 책이 저렇게 많군요 ^^

그레이스 2022-07-19 18:31   좋아요 6 | URL
위로가 되는 책! 맞아요.
이제는 우리 삶을 말해주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네요.
편의점은 미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네요!

mini74 2022-07-19 19:0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전 편의점 가는 기분 ? 이란 책 읽었어요. 가난한 이들과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를 품는 … 예전 동네아이들을 봐주고 아줌마들의 수다방같던 땡땡점방을 편의점에서 만나는 기분이었어요. 어린시절 사탕 많이 먹음 이 썩어! 하던 무서운 동네점방 아저씨 떠오르네요. ~

그레이스 2022-07-19 19:14   좋아요 5 | URL
아!
동네 점방을 대신하고 있네요.
저희 동네 편의점은 건물에 있는 태권도장, 학원, 스터디카페 이용하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북적대요 ㅎㅎ

서니데이 2022-07-19 21:1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불편한 편의점, 저는 전자책으로 읽었는데, 드라마나 영화로 나와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편의점이라는 공간, 그리고 단편과도 같은 인물 중심의 이야기도 그렇고요.
이 책은 평범한 동네의 평범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는데,
코로나19로 세상의 따뜻함이 더욱 필요한 시기에 나온 책이라는 점이
읽는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 것 같다고도 생각했어요.
잘읽었습니다. 그레이스님, 시원하고 좋은 밤 되세요.^^

그레이스 2022-07-19 21:27   좋아요 3 | URL
예~
저랑 같이 읽고 토론하신 분들이 드라마 한 편 본것 같다고 하셨어요.
따뜻한 이야기가 좋죠~♡
서니데이님도 평안하세요~

책읽는나무 2022-07-19 22:1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딸이 자꾸 사달래서 사다 주곤...안 읽길래 제가 먼저 읽어 보았었죠.
작가가 궁금해서요.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달달한 사탕을 입에 넣은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런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한??ㅋㅋㅋ
김애란 작가의 <달려라 아비> 저도 초판책 가지고 있는데 반갑네요^^
예전에 김애란 작가님 울동네 왔을 때, 저 책 들고 가서 싸인 받았었는데 엄청 놀라고, 감격스러워 하시더라는..^^
근데 소설에 <나는 편의점에 간다> 단편이 있는 줄은 기억이 영~~?????
재독해야겠어요ㅋㅋㅋ

그레이스 2022-07-19 22:29   좋아요 4 | URL
ㅎㅎ
각자 기억이 될만한 이야기는 따로 있을테죠^^
전 김애란작가 좋아해서 책 나오면 꼭 사요.

사탕을 입에 넣은 듯한 느낌! 비유 공감입니다~~

겨울호랑이 2022-07-19 22: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90년대 초반 편의점이 도입된 초기 슬러쉬, 컵라면 등을 먹을 수 있는 도심 속의 휴게소 같은 느낌을 주었다면, 30여년이 지난 요즘은 점원이 없는 무인 편의점도 확산되면서 자판기처럼 되버린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 면에서 <불편한 편의점>의 노숙자였던 독고씨가 찾은 자신의 모습은 편의점 도입 이전 동네 사랑방 같은 시골가게 아저씨와 같네요. 어쩌면 <불편한 편의점>은 정서적으로 타임슬립 장르에 속하는 작품은 아닐까를 그레이스님 글을 통해 잠시 생각하며 지나갑니다.^^:)

그레이스 2022-07-20 18:08   좋아요 3 | URL
우리나라에 처음 생긴 편의점이 신당동 약수시장 앞에 열었던 ‘롯데 세븐‘ 1호점이라고 하네요.(명동으로 잘못알고 있었네요)
기억을 더듬어봤습니다. 그랬구나 하고!
동네 슈퍼에서 물건 사서 계산대에 올려놓으면 뒷줄에 선 사람들이 다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난처한 상황 생각하면 무인계산대가 편한것도 같아요, ㅎ
아주 단편적인 이유죠
전체적인 전망으로는 조금 우울합니다.^^

scott 2022-07-20 00: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편의점에서 산 복권
당첨 되는 저 🖐

별다방 보다 아메리카노 맛이 훌륭한 ^^

은행 창구는 사라져도 편의점은 절대 사라질 것 같지 않습니다 ^ㅎ^

그레이스 2022-07-20 08:45   좋아요 2 | URL
어느 편믜점에서 커피머신을 바꾸고 커피 맛이 좋아졌다는 기사 봤어요.
혹시 그 커피 드시나요? 아이들도 이야기 하더라구요. 언제 한번 마셔봐야겠어요.^^

희선 2022-07-20 03:3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전히 편의점에는 거의 안 가는군요 편의점은 편해야 하는데, 사람들한테 이런저런 말을 하는 불편한 편의점... 그래도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 따듯함을 느끼기도 하네요 정말 저런 곳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는군요


희선

그레이스 2022-07-20 06:27   좋아요 4 | URL
사람들의 벽을 허물기가 쉽지 않겠죠? 단기간에 될 수 있는 일은 아닐거예요 ~!

서니데이 2022-07-20 18: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오늘도 더운 하루 시원하게 보내셨나요.
저녁 맛있게 드시고 시원하고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그레이스 2022-07-20 19:20   좋아요 4 | URL
예~
서니데이님도 맛있는 저녁식사 하시고 건강한 하루 마무리하세요~

얄라알라 2022-07-21 00: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벚꽃 에디션 표지가 화사하네요.
저도 첫 문단 읽다가 <편의점 인간> 생각했는데 역시~~ 그레이스님 두 ˝편의점˝ 소설을 엮어 쓰시면서도, 다 읽고 감상 쓰기 어려웠다는 겸손을 보이시다니! ˝일상을 산다˝ ˝거대한 관대˝ 소설속 표현이지만 또 그걸 포착해내신 그레이스님의 감각에 !!!엄지척!

그레이스 2022-07-21 01:38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
얄라알라님도 같은 생각하셨다니 반가워요~!

서니데이 2022-07-21 22: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오늘도 더운 하루였는데, 시원하게 보내셨나요.
지난밤 비가 와서 오전에는 많이 덥지 않았지만, 오후는 더웠어요.
더운 날씨 건강 조심하시고, 시원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7-21 22:47   좋아요 3 | URL
방금 서니데이님 글 읽고 왔는데^^
서니데이님도~~~!

서니데이 2022-07-23 19: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주말 잘 보내고 계신가요.
요즘 편의점에 자주 가는 편인데, 새로운 과자나 신상 음료 있으면 한번씩 사게 되는 것 같아요.
가끔 성공하고, 자주 실패합니다.^^
여긴 비가 오는데, 많이 덥진 않아서 좋은 저녁입니다.
즐거운 주말과 편안한 저녁시간 되세요.^^
 
행성어 서점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초엽 지음, 최인호 그림 / 마음산책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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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생명의 가능성이고, 모든 생명이 소통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 책 소설들의 방향성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SF의 이질감을 낯설지 않은 현재의 정서로, 행성간의 먼 거리는 소통으로 좁히고 있다. 

 

「선인장 끌어안기」

수술 후유증으로 접촉 통증을 앓고 있는 파히라를 돕기 위해 보내진 AI로봇 는 이전에 보내진 보조 로봇들이 회복불가능 상태로 파괴되어 돌아왔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의 임무는 파히라를 돕되 파괴되지 않는 것. 모든 동선이 접촉으로부터 차단하기 위해 미로처럼 설계된 이 집에서 가 할 일은 선인장을 돌보는 것이다. 접촉통증을 앓고 있는 휠체어 장애인 파히라가 가시가 돋힌 선인장을 키우는 것은 상징적이다. 통증 때문에 날이 서있는 파히라를 가리키는 것일까?

파히라가 휘두르는 폭력을 피하는 를 향해 그는 불만스럽게 말한다. 주인을 그렇게 피해도 되는 거냐고, 어차피 너는 닿아도 안 아프고 부서져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지 않느냐고. 여기에 대한 의 대답이 인상적이다.

아프지는 않죠. 하지만 부서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느껴요.”(20p)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것도 일종의 고통인가? 내가 겪는 것과 비슷해?”라고 파히라는 묻는다. 파히라가 타자, 보조로봇의 고통을 인식하는 소통의 순간이다.

결심한 듯 선인장을 껴안고 쓰러지는 파히라의 고통이 곧 사랑이라는 깨달음은 안타깝다. 마음의 상처로 가시가 돋혀 서로를 찔러대는 사랑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타인을 끌어안는 것은 선인장을 끌어안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다.

 

「#cybog_positive」

사고로 눈을 잃고 기계 눈 아이보그를 장착한 리지의 이야기는 작가의 전작 사이보그가 되다를 떠올리게 한다. 리지 눈이 조명에 따라 다양하게 색이 바뀌고 빨려들 것 같은 아름다운 눈을 보며 사람들은 찬사를 보낸다. 아이보그 사는 자사의 모델이 되어줄 것을 제안하고 리지는 고민에 빠진다. 사람들은 오히려 인공 눈이 더 아름답다고까지 말하지만, 사실 그 눈에 자신의 생체에 적응하기까지 힘든 기간이 걸렸다. 더 좋은 제품이 나올 때마다 진물이 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녀는 모든 사이보그는 아름답다는 말이 정말로 사이보그들을 더 행복하게 말들 것인지”(40p) 확신이 없었다.

사이보그들에게 생체와 잘 조화를 이루는 기계보다는 아름다움에 더 치중하고 있는 개발사들과 사람들을 보며,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본다.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에 의해 결정되고 있나? 그 기준과 가치는 불변의 것인가? 이런 질문들을 떠올리게 된다.

 

「행성어 서점」

사어가 되어가고 있는 언어로 기록된 책을 파는 어느 행성의 서점, 범 우주 통역 모듈이 인류의 뇌에 설치되어서 소통이 가능한 시대에도, 행성어 서점의 책들에 쓰인 행성 고유의 언어는 해석되지 않는미세 패턴이 새겨진 글자로 인쇄되어 있다. 여기의 책들은 읽히기 위해서가 아닌 관광 상품으로 팔리고 있다. 그곳에 나타난 여교수는 전뇌 통역 모듈 부적응자다. 이 행성어가 모국어인 화자와 교수는 모듈을 통해서가 아닌 자신이 습득한 언어로 소통을 한다. 데이지와 이상한 가계에서처럼 기계를 통해서 또 다른 결의 타자를 만나는 것이 아닌 직접 보고 듣는 타자와의 소통을 경험한다. 화자인 는 춤을 추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데이지와 이상한 가계에서처럼 기계를 통해서 또 다른 결의 타자를 만나는 것이 아닌 직접 보고 듣는 타자와의 소통을 경험한다. ‘는 춤을 추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소통은 그런 것이리라.

는 생각한다.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하더라도, 나는 그를 만나서 기뻤다.”(73p)

언어는 그런 것이리라. 언어는 생각을 만들고 말이 되어 나가고 타자의 말이 들어오는 길을 만들며 전율하게 한다. 니컬러스 에번스의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가 생각난다. 지구상에서 사라진 언어에 대한 이야기.

 

소망 채집가의 내용은 상징적이다. 과거의 인류가 꿈꾸어 온 미래의 의 모습은 데이터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모습은 빠른 속도로 변모했고, 그들이 소망하고 지금까지 만들어 온 것이 바로 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는 그 속에 있는 오래 전 사람들의 소망을 발견하고 그들과 소통한다.


애절한 노래는 그만에서 미래의 수지와 현희는 주기적으로 유행한 발라드를 통해 과거 사람들이 정서를 공감해 보려고 한다.

로맨스는 시대의 발명품. 모든 사랑이 애절한 건 아니지만, 함께 공유할 애절한 사랑의 기억이 사람들에게는 필요한 모양이다.”(91p)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이해한 듯하다. “근데 …… 잘 부르긴 하네.”(91p)

 

포착되지 않는 풍경에서 리키는 행성 뮬리온-849N을 사진에 담기 위해 며칠 동안 온갖 시도를 해보지만 실패한다. 그 행성의 신비로운 안개를 고스란히 담을 방법을 강구해보지만 방법을 찾지 못한다. 행성의 생태보존 담당자는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리키에게 경고한다. 더 이상 행성 환경을 교란시키지 말라고. 여기서 이 안개는 단지 물질이 아닌 생태계를 이루는 생명 현상임을 추측하게 된다. 리키는 촬영을 중지하라는 경고에 항의한다. “그건 미학적 낭비”(103p)라고.

오늘 읽은 신문기사가 떠올랐다. [작품 사진으로 보이십니까?조류 학대현장입니다]라는 기사였다.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새 둥지의 은폐물을 제거하고 둥지 입구를 넓히고 심지어 둥지를 옮기는 등 조류사진작가들의 횡포를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http://naver.me/xbL11mSC

자연과 소통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모습이다.

 

도망나온 클론 소년이 늪지의 균사체와 특별한 방식의 대화로 생존하는 이야기(늪지의 소년), 위험등급 구역으로 파견된 과학자가 그 지역의 사람들의 삶에 공감함으로 파괴될 위험으로부터 그 구역을 구하는 이야기(오염구역), 어느날 우연히 들어간 음식점에서 만난 지구에 정착한 외계인 사장과의 대화(지구의 다른 거주자들) 등은 서로 다른 존재들의 만남과 소통 기억을 소설의 소재로 삼고 있다. 불편하다거나 위험하다고 생각된 존재와 존재 방식이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래도 어느 순간 다현은 인생의 쓴맛이라는 비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어디선가 그런 맛이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 때면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 사장과 나누었던 기묘한 점심을 떠올리곤 한다.”(206p)


시몬 사람들의 얼굴은 감염으로 인해 가면을 쓴 것처럼 되어 버렸다. 그들의 얼굴은 표정을 알 수가 없다. 이것 때문에 불편하거나 불행할 것이라는 짐작을 깨고 그들은 치료를 거부한다. 오히려 표정을 감출 수 있어 그 얼굴을 선택한다. 어차피 우리는 본래의 얼굴로도 가면을 쓴 것처럼 가장된 웃음과 표정을 갖기 때문이다. 가면 뒤에 진짜 얼굴이란 없다그들의 선택이 이해되면서도 여전히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마음을 숨기기 위해 가면을 선택하는 이들을 이끌어낸 작가의 생각이 짐작이 되어서. (「시몬을 떠나며」)


우리는 당황스러운 표정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는 상황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가면 쓴 듯 속을 모르겠는 타인의 얼굴을 보면 벽을 느끼고 무섭기까지 하다

마스크 벗은 맨얼굴이 당황스러운 순간이 잠시 걱정된다.


곧 파괴될지도 모르는 구역의 버섯으로 뒤덮인 아이들에게 공용어를 가르쳐야한다고 말하는 청년의 말이 라트나에게 기이하게 느껴지지만(173p) 그 언어는 외부와 소통하기 위한 생존수단이다. 잠시동안의 마주침과 짧은 대화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다른 존재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확장의 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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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6-22 08: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선인장 끌어안기 넘 좋았어요. ~ 인공적인 것에 적응하는 건 소머즈나 육백만불사나이처럼 쉬운게 아니란걸 전 이 분 통해 처음 생각하게 됐어요. ㅠㅠ 행성어서점에 대해 쓰신 글 좋아요 ~ 그리고보면 에스키모의 눈을 지칭하는 많은 언어들이 다 사라졌다고 ㅠㅠ

그레이스 2022-06-22 08:27   좋아요 3 | URL
저도 육백만불의 사나이, 소머즈 생각했어요.^^
김애란님 언어의 멸종에 대한 단편도 생각났어요^^

레삭매냐 2022-06-22 11: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냥 문득 로봇이 있어서
가사 생활에 도우미로 활
동한다면 나의 삶의 질이
과연 나아질 것인가 생각
해 봤습니다.

귀차니즘은 좀 덜어지겠
지만, 그 시간에 무언가
생산적이거나 창조적인
그것도 아니라면 독서 대
신 너튜브를 더 보게 되
는 건 아닐까요? ㅋㅋㅋ

그레이스 2022-06-22 11:47   좋아요 2 | URL
ㅎㅎ
시간이 많다고 잘 선용하는 것도 아닌듯요 ㅋㅋ

새파랑 2022-06-22 13: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단편중에 <행성어 서점>이 젤 인상적이네요. ‘언어‘를 ‘책‘으로 바꿔도 왠지 뜻이 통할거 같아요~!!

그레이스 2022-06-22 13:53   좋아요 4 | URL
그러네요^^
언어가 소통의 매개라는면에서 제목으로 할만했다는 생각입니다.
인상적인 단편이 많았죠.
저는 <시몬을 떠나며>도 좋았어요^^

바람돌이 2022-06-22 18: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 행성어 서점에 나오는 얘기 다 좋았어요. 김초엽작가 열심히 응원하면서 읽고 있는 작가입니다.
다른 것을 다른 것으로 볼 수 있게 끊임없이 노력하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레이스 2022-06-22 19:02   좋아요 2 | URL
예 맞아요
제 딸들도 좋아하는 작가예요
요새 너무 자주 출판되서 혹시나 하고 걱정했는데, 제 걱정이 쓸데없었네요^^

scott 2022-06-23 00: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그레이스님이 별 🖐을 주셨네요! ㅎㅎ

전 그레이스님이 추천하신 니컬러스 에번스의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찜! 👆^^

그레이스 2022-06-23 00:15   좋아요 2 | URL
김애란님 책에서 소개받고 사서 읽었어요. 그때 기억이 나네요. 좋았던 ...!

서니데이 2022-06-23 0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반년이 더 지났네요.
작년엔 김초엽작가와 정세랑 작가의 책이 많이 나왔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레이스님, 요즘 날씨가 많이 덥고 습도가 높은 시기예요.
건강 조심하시고, 편안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6-23 09:17   좋아요 3 | URL
예~
그러네요
이 책 말고도 두권이 더 있죠?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건강하세요~

희선 2022-06-25 02: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읽었어요 이런 말부터 하다니... 우연히 알고 봤군요 지금도 어딘가에서 사라지는 말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말은 괜찮을지... 사람이 줄어드니 조금 걱정도 됩니다 남과 관계를 맺는 데는 아픔이 따르기도 할 텐데... 적당한 거리도 중요하고 어떤 때는 그 거리를 좁히기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희선

그레이스 2022-06-25 08:51   좋아요 3 | URL
문자만 남은 사어들을 생각해보면,,,상상할 수 있을듯요. 한동안 세계공용어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있었죠 아마! 이런것들을 생각해보면 앞으로도 가능한 일일것 같아요;;;
예 맞아요, 적당한 거리!
감사합니다 희선님~♡

2022-06-25 04: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25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25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25 1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25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25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환경관련 책을 찾다가 작가를 알게 되었다. (지구는 괜찮아 우리가 문제지』). 서재에도 신간 소개가 올라왔다. 다른 많은 작품들과 동영상들을 검색했다. 작가가 출연했던 방송 프로그램 ‘*퀴즈를 통해 그의 경력을 본 감상은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과학에, 글쓰기에 진심이다. 카이스트 조기졸업 공학박사 경력을 소유한 그가 SF소설을 쓰면서 무명작가가 되었다. 전망 없어 보이는 그는 절필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의 책 중 글쓰기에 관한 책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 삶에 지칠 때 작가가 버티는 법등은 그런 경험과 관련 있는 것 같다. 슬며시 소설을 안 쓰고 살아보려고 했던 그가 다시 글을 쓰게 된 것이 이 소설이다. 뭐든 써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 이 소설, 이미영 사장과 김양식 이사라는 사람이 우주를 돌아다니며 이런 저런 돈 되는 일을 하는 이야기다. 그렇게 10년 동안 썼던 연재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우주 은하시대 동업자 미영과 양식이 하는 사업은 은하계 대행사라고 해야 할까? 인간의 개입으로 지적 능력을 소유하게 된 청우와 같은 생명체가 있고, 어떤 것을 보존할 것인가와 관련된 우주의 지적 생명체 보호법시행령과 시행규칙도 있다. 테라포밍 로봇을 이용해서 우주의 행성에 씨앗을 뿌려 식물을 자라게 하고,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부동산을 소유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의 소유욕은 그 드넓은 우주에서도 끝을 모른다. 현재 인간의 삶의 틀로 미래를 내다보는 것에 문제제기를 할 수 있으나, 그 상상에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문제가 개입되어 있으므로 부인할 수 없다.

 

변호사 마금희는 우주의 지적 생명체 보호법의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다듬어서 보존의 범위를 좁히려 하고, 청우 노앵설 보호협회장은 마금희와 법정다툼을 한다. 우리의 동물보호법의 모방이다. 이렇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분쟁과 사회적인 이슈를 우주시대의 미영과 양식이 의뢰받은 사건들로 재창조해서 서사를 만들어 간다.

 

우주개척 시대에 우수한 세포 수정란을 저장 보존 처리해서 행성에 보내고 적합한 환경의 행성에 도착하게 되면 태아로 키우고 성장하게 하는 것이나, 온 우주에 퍼뜨린 후손들 사이에 열리는 우주미인대회에서 수상하기 위해 유전자 조작을 하는 일들은 황당하기도 하지만 현재 사람들의 욕망을 들여다보건대 그럴 듯하기도 하다. 은하의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홀로 고독하게 살아가는 우주갑부의 존재도 인간의 이기심이 빚어낸 고독을 보여준다. 우주로 도망친 강아지 로봇을 잡으러 다니는 모습은 유기견 구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들에는 작가의 유머가 스며 있는데 방송에서 본 모습으로 미루어 그의 유머 코드를 짐작하게 했다.

어 이건 너무 심하네요. 심하네, 심하네!”

……

그 말 들으니까 일본 시마네 현에 가서 우동 먹고 싶네(78p)

 

아재 개그에 헛웃음이 난다.

 

안녕하세요! 저는 로봇 변호사 KW820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로봇 변호사의 목소리가 맛집 소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아니, 이게 정말 전부 19천 원?” 같은 내레이션을 하는 성우 목소리였다. 양식이 약간 당황하는데, 미영은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91p)

 

미래 우주를 꿈꾸고 상상하는 공학자의 SF소설에서 21세기 한국을 사는 아저씨의 문화와 언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웃긴 이중성에 묘하게 빨려 들어가서 당황스러웠다.

 

작가는 두 사람이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세웠던 목적은 아직까지 공개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은하와 은하를 여행하는 원리에 대해서도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어설픈 설명이나 어렵고 디테일한 묘사가 있는 것보다는 이들의 활약에 집중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드넓은 우주에서 허황된 짓을 하고 다니며 귀한 삶을 낭비하는 사람을 찾기란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다로 시작하는 마지막 수록 작품은 우주공간을 이동해 다니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래서 주인공의 허황된 짓과 삶의 낭비에 주목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돌아다는 범위가 지구, 대한민국, 한 도시인 듯 느껴진다. 언제쯤 인류가 그렇게 우주를 누비게 될까?

 

그의 작품을 더 볼 생각이다. 방송에서 봤던 작가의 아재 같은 말솜씨며, 이과 출신다운 시각들, 한국의 전통 괴물을 찾아 연구하는 태도에서 본 열정과 순수함 때문에 끌리는 듯하다. 작품들 제목들도 재미있다. 얼핏 살펴본 바로는 소설 쪽 보다는 과학 관련 책들이 더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다. 어린이날 기념으로 휴가갈땐 주기율표』.고래 233마리 두권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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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4-30 17:0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과학하고 앉아있네에선 마치 스타워즈의 시작 장면같은 그의 넓디넓은 잡학을 들으실수 있습니다 ㅎㅎ 묘한데 빠져드는 개그코드지요 *^^*

그레이스 2022-04-30 17:51   좋아요 4 | URL
맞아요
처음에는 뭐지 이거? 하다가 빠져들어요 ㅋ
과학하고 앉아있네도 재미있을듯요

새파랑 2022-04-30 18: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 빵 책 쓴 작가님의 다른 작품이군요 ㅋ ㅁㅇㅇㅅ 는 미영 과 양식 이겠네요~ 전 뭘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그레이스 2022-04-30 18:33   좋아요 4 | URL
예~
맞아요^^

얄라알라 2022-04-30 21: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심하네, 시마네 ㅋㅋ
저는 일본 지명을 잘 몰라서, 처음에 개그인 줄도 모를 뻔^^

요새 북플의 핫 뉴페이스가 되신 곽재식 작가님, 그레이스 님의 페이퍼가 또 힘을 실어 드렸네요~

그레이스 2022-04-30 21:12   좋아요 3 | URL
일년쯤 전에 유퀴즈 나온 영상 찾아왔는데 굉장히 재밌어요.
그래서 그런지 이 분 책소개 밑에는 직접 인터뷰한 영상이 있네요^^
핫 뉴 페이스 맞는듯요

singri 2022-04-30 23: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알고싶자나요 궁금하자나요 했던 그 작가님이로군요 ㅋ 재밌겠습니다

그레이스 2022-05-01 09:55   좋아요 2 | URL
예~
맞아요
그분! ㅋㅋ
보셨군요^^
재미있습니다~

희선 2022-05-01 01: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지구는 괜찮아 우리가 문제지, 이 말 맞는 듯합니다 지구가 아닌 사람이 문제죠 사람이 지구를 망치니... 우주를 다니는 이야기도 지금과 아주 동떨어진 이야기는 아니군요 지금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네요


희선

그레이스 2022-05-01 10:01   좋아요 3 | URL
제목을 참 잘 지은것 같아요
환경 주제 책 검색하다가 알게 된 책이예요. 한 책 읽기 선정 위원회에 추천해야 해서요^^
이런 책은 재밌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선택했어요.
곧 읽어야 해요

scott 2022-05-01 12: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휴가갈때 주기율표
찜🙌

그레이스 2022-05-01 13:03   좋아요 2 | URL
제가 잠시 봤는데, 재미있어요^^

페크pek0501 2022-05-02 1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SF소설에 관심이 갑니다.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 때문인지...

그레이스 2022-05-02 13:13   좋아요 3 | URL
저도 그 책 읽어야 하는데...
꾸준한 작가들 덕에 이런 소설들이 가까와졌어요^^

하나의책장 2022-05-03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학과 글쓰기에 진심이신 분인 것 같아 더 보고 싶어지는걸요^^!

그레이스 2022-05-04 08:20   좋아요 0 | URL
예~
직장얘기 할때는 영혼 1도 없다가, 과학에는 흥분하는 모습이 넘 재미있었어요 ㅋㅋ
궁금하잖아요? 안 궁금해요? 궁금하잖아요?
이 말이 맴돌죠...!
 
기나긴 하루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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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글을 읽는 것이 힘들 때가 있다. 전쟁을 겪은 세대는 그렇지 않은 세대와 다를 수밖에 없다. 마음과 육체에 남긴 상흔은 생각과 언어로 나타난다. 작가가 여러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쓴 자전적 이야기나, 창조한 인물들에 투사한 생각과 언어는 나의 결과 맞지 않았다. 작가가 지나온 세월도 그렇지만 타고난 기질 때문에 그가 쓰는 언어와 마음에서 퍼내는 솔직한 감정들이 불편했다.

 

이 단편집 역시 그런 지점들이 많았다. 다수의 작품에서 보았던 유년기, 전쟁의 기억, 상실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지만, 부정적 감정을 여과 없이 표현하고 있어 마치 가시덤불 사이를 긁히며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는 다른 여러 작품에서 읽었던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기억에 없는 아버지의 부재를 느낄 수조차 없었지만 아버지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이 청승을 떠는 것처럼 보일까봐 그래서 식구들이 불쌍해할 것 같아서 보지 않았던 최초의 자의식에 대한 기억은 작가의 성품을 엿보게 해준다. 남편과 아들을 연이어 잃는 두 번의 상실, 특별히 아들을 잃은 후, 그녀를 힘들게 했던 감정은 수치심이었다고 한다. 스스로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형벌을 받는가라는 질문이 만들어낸 감정이었다. 그 수치심은 자연스럽게 분노로 바뀌었다. 그녀는 부재하는 집에서 헛되게 울릴 전화벨 소리, 쌓여 있는 우편물 생각을 하면 누구에게랄 것 없이 고소한 생각이 드는 것 정도가 즐거움”(36p)인 여행을 떠나고 그 후로도 무감한 상태의 여행은 계속되었다. 이탈리아 여행 중 몸살을 앓으며 버스 안에서 파바로티의 노래를 듣다가 격정에 휩싸인다. 인턴이던 아들의 첫 번째 비행기 여행이 생명유지 장치를 단 임종직전의 환자를 제주의 집까지 데려다주는 임무였다는 기억을 떠올린다. 목 놓아 울고 싶은 감정의 폭발과, 고열로 앓았다. 돌아 온 그녀는 설렘과 볼일도 없는 여행은 다신 안 할 것이라고 결심한다.

 

상실 후 인간이 받아들이는 단계는 비슷할 듯하다. 나도 그런 상황라면 같은 감정에 휩싸일 것 같다. 카프리섬을 향하는 버스에서 행복감일지 슬픔일지 정체 모를 황홀경과 함께 찾아온 누르기 힘든 감정은 내 안에도 파토스를 만들어냈다. 언제 어느 곳에서 무엇에 의해 촉발될지 모르지만, 마음의 둑이 무너지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비상한 상태를 맞게 되는 순간이 있다.

 


수록된 단편 중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빨갱이 바이러스. 친정 부모님께 물려받은 고향집에 가끔 내려오는 주인공 가 폭우 때문에 길이 막힌 날, 버스 정류장에 서있는 세 여자를 만나는 장면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가 세 여자들을 소아마비’ ‘’ ‘보살님이라고 마음속으로 이름을 붙이는데서 나는 불쾌감을 느꼈다. 소설이지만 주인공 '나'의 오만함이 미웠다. 그녀들을 자신의 집에 묵게 하고 식사를 대접한다. ‘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아마비하고 부르는 장면에서 경악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호칭에 아무 불쾌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여자의 태도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은 소아마비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장애를 입게 된 사연과 이 곳에 오게 된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이어서 다른 여자들도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상상할 수 없는 삶이었다. 자신에게도 비밀을 털어놓으라는 재촉을 뿌리친 는 생각한다.

 “당신들은 왜 나에게 그런 무섭고 천박한 비밀을 털어놓은 거죠? 날 언제 봤다고, 날더러 어쩌라고?”(80p)

사실 는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안고 있다. 어릴 적 인민군이었던 삼촌을 아버지가 삽으로 치는 광경을 보았고, 그 삼촌을 삽으로 마당에 묻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친정집을 물려받으면서 그 비밀까지 떠안았다. 그래서 집을 헐고 새집을 짓지도 못한다. 혹시 유골이 나올까봐. 삼촌이 그날 밤 죽지 않고 북쪽에 살아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더 큰데도 어린 나이에 받은 충격은 그 사건을 깊이 묻어두었다. 어른들에게 물어 볼만도 한데, 단단하게 양회를 바른 마당처럼 그녀도 입도 막아버렸다. 마당과 그녀의 입은 둘 다 폭력을 삼켰다.”(90p)

 

어떤 비밀과 상처는 낯선 이를 만나 떠들고 헤어지면 그만이다. ‘의 것은 꺼낼 수 없는 곳에 있다. “어떤 상처하고 만나도 하나가 될 수 없는 상처를 가진 내 몸이 나는 대책 없이 불쌍하다.”(91p) 고 한 마지막 문장은 작가가 가진 정서의 주조(主調)일까? 누군가의 단단한 마음 안에는 오래된 백골과 같은 숨겨져 있는 무시무시한 상처가 있을 테다. 무서운 시절과 아픈 역사가 바르고 다져놓은 시멘트 안에!

 

왜 나는 박완서의 작품을 편하게 보지 못할까를 다시 생각한다. 가끔 읽다가 덮고 싶을 정도로 작가가 표현하는 증오, 분노, 오만, 비루함, 천박함이 공격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이게 문학이야? 하고 날이 선다. 고백하자면 그 추한 감정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작가의 글을 읽는 것은 냄비에 눌러 붙어 있는 찌든 때를 수세미로 벗겨내는 것 같다


여러 개의 단편에는 후배 작가들의 편지 글이나 소감이 붙여있다.

책장을 열면, 당신의 인물들이 기우뚱한 욕망을 안고 내 쪽으로 절름거리며 다가온다. 나는 이들을 잘 알아본다. 허영이 혀영을 알아보듯, 타락이 타락을 알아채듯 제법 간단히. 어떤 악은 하도 반가워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알은체할 뻔하기도 한다.”(257p)

김애란 작가가 덧붙인 글을 읽다가, 나야말로 반가워 큰 소리로 알은체할 뻔했다. 책장을 덮지 않고 끝까지 읽기를 잘했다.

 

요즘, 독서를 하는 나와 현실의 나 사이에 분열된 자아를 종종 보게 된다. 박완서의 소설 속 인물들이 깊은 아픔을 겪었음에도 여전히 성품은 살아서 불쑥불쑥 드러나는 것에 눈물이 날 정도로 깊은 절망감을 느낀다. 절름거리며 다가오는 그들에게서 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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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03-10 18:3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이 리뷰 너무 좋아요! 무엇이 발췌문이고 무엇이 그레이스님의 글인지 헷갈릴 정도로 온통 마음을 뒤흔드네요.🥲

그레이스 2022-03-10 18:37   좋아요 4 | URL
감사합니다^^ ~♡

mini74 2022-03-10 20:0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냄비에 찌든 때를 수세미로 벗겨내는 거 같다는, 절름거리며 다가오는 그들에게서 나를 본다는 그레이스님 글들 너무 와닿아요. 박완서 글을 읽으며 묘한 감정이 그 속에서 나를 봤기 때문인가봐요. 그레이스님 글 👍 두고 두고 읽고 싶습니다 ~

그레이스 2022-03-10 20:04   좋아요 4 | URL
감사합니다.
오늘은 무지하게 감상적이 되네요^^

2022-03-10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3-11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2-03-11 00: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누군가한테 말하고 버려도 괜찮을 비밀이 있는가 하면 말하지 못할 것도 있는 것 같아요 비슷한 곳에 있다 해도 저마다 느끼는 것도 다르고... 이건 병원에서 느꼈던 거기도 한데... 동병상련이라 해도 조금 다르기도 하죠


희선

그레이스 2022-03-11 05:16   좋아요 3 | URL
병원!^^
맞아요
거기서도 같은 병실 사람들끼리 온갖 얘기하죠^^
퇴원하면 다신 안보니까^^

2022-03-11 04: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3-11 0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22-03-12 01: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박완서 선생님의 책에서는 80-90년대의 서울 중산층이라는 것도 있지만, 과거 전쟁을 겪고, 일제 식민지 시대를 겪었던 사람이 쓸 수 있을 내용도 있었고, 그 기억이 사라지거나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이야기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벌써 10년이 더 지났지만, 한번도 뵙지 못해서인지, 늘 장년기의 흑백사진이 익숙합니다. 잘읽었습니다. 그레이스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3-12 07:40   좋아요 3 | URL
그렇죠?!
서니데이님도 즐거온 주말 보내세요~^^
 
영초언니
서명숙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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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청원의 대상이 된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드라마 여주인공의 이름이 원래 영초였는데 영로로 바뀌게 된 이야기까지. 집에 꽂혀있던 영초언니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몰입되었으나 피하고 싶었던 이야기다. 부채의식 같은 감정이 삐죽삐죽 살아나서 불편하고 괴롭기 때문이다.

 

고려대 교육학과 76학번 서명숙은 제주도 출신이다. 4·3을 겪은 변방의 섬에서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한 이듬해에 서울의 대학에 합격했다. 학교 신문사에 입사한 당시 휴교령이 내려지고 학교 안에는 그들을 감시하는 사복경찰들이 상주하는 상황이었다. 기사는 검열을 거쳐 수정되고, 대체를 반복하며 스스로 자기검열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홍보관 건물에서 자주 마주치곤 했던 낯익은 중년 남자의 정체를. 그 남자는 중앙정보부에서 업무 협조차 신문사로 파견 나온 요원이었다. 그 말고도 자주 눈에 띄었던 또다른 중년 남자는 우리 대학 관할인 성북경찰서 정보과 형사였다. 일개 대학신문사 주변이 이럴진대 방송사나 신문사의 검열은 오죽할까 싶었다. 우리에게 전달되는 뉴스들은 과연 얼마나 진실된 것일까?”

(44p)


첫 여성편집국장을 꿈꾸던 그녀는 끊임없는 자기검열을 경험하면서 대학 내의 기득권이자 귀족 집단으로 스스로 타협하고 안주하는 건 아닌지 자문하며야학과 편집국장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던 시점에 천영초라는 선배를 만난다. 그녀로부터 본 회퍼의 옥중서신과 시몬 베유의 평전 불꽃의 여자와 전태일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받는다. 서명숙은 야학에 투신한다. 영초선배와 함께 살면서 그녀의 따뜻함과 역사의식과 정의감에 젖어갔다. 여자들의 모임이 형성되고 박경리의 토지를 읽고 우리 민족이 걸어온 길을 되짚기도 하고, 시몬 드 보부아르의 2의 성을 읽으면서 한국의 여성이 맞닥뜨린 현실을 통탄하기도 하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읽으면서 유신체제를 깨뜨리지 못하는 자신들을 되돌아보기도 했다.”(58p)

 

그들 모두 투사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경찰간부의 딸, 의사의 딸,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딸, 고단한 삶을 사는 반공주의자 어머니의 딸이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모른척 외면하고 살고 싶은 캠퍼스의 사랑을 꿈꾸던 학생들이었다. 그때를 돌이키며 저자는 <오래된 정원>에서 주인공이 딸에게 말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그때는 자기만 행복하면 왠지 나쁜 놈이 되는 시대였거든, 그래, 바보 같았던 거지……

(73p)

그 시절의 그들이 그랬다. 아니, 혼자만 행복해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유인물을 팔이 아프도록 인쇄해서 교정에서 뿌리며 독재타도를 외치던 그들은 잡혀가서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나고 다시 잡혀가기를 반복했다. 그들이 풀려나와 들려주는 고문이야기는 너무 두렵기만 하다. 영초가 체포되고, 교생실습을 위해 제주에 내려와 있던 서명숙은 서울의 안가로 끌려가 육체적 정신적 고문을 당한다. 그리고 1년의 수감생활을 한다. 유신이 막을 내리고 잠깐의 서울의 봄은 끝이 나고, 광주에서의 비극적인 뉴스를 접하는 영초는 다시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유인물을 찍어내고 도피와 체포, 수감 생활을 거듭한다. 결혼을 한 후에도 여전히 불행한 삶을 살던 영초는 기자로서 바쁜 삶을 살고 있는 서명숙과는 달리 한국에 적응하지 못하고 캐나다 이민을 가지만, 행복은 잠깐이고 육체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운동권 출신 소수 인사들의 뒤에 가려진 천영초, 그녀의 남편 정문화와 같은 많은 사람들은 불행한 역사를 끌어안고 함께 불행한 삶을 살았다. 모진 고문을 받고 출소 후에 서명숙이 회복되기까지의 시간 동안 그녀의 어머니가 겪은 아픔 역시 그들의 가족들의 겪었을 고통을 말해주고 있다.

 

감옥 간 것보다 돌아온 뒤가 더 힘들었저. 감옥은 겅해도 언젠간 나오겠지 하는 희망이라도 있어신디, 정작 돌아와보난 몸도 마음도 다 망가져부난. 창도 어멍한티 큰소리는 쳤지만 네가 장차 사람 구실 제대로 헐 건가 걱정했주.” (228p)

 

풀각시 같던 영초언니에게 하는 헌사로 글을 마무리 하며 고대에 글 잘 쓰는 4대 문장가 중의 하나라고 자화자찬하며 웃던 얼굴을 떠올리는 장면에서 마음이 아팠다. 그들이 선택했고 갔던 그 길에 대한 긍지마저 앗아가지 않기를. 그저 잠시라도 행복했던 시간들만 남기를.

 

드라마와 관련된 논쟁들을 읽으며, 강경하게 방영중단을 외치는 쪽도, 그들을 비난하는 쪽도 아픈 역사를 품은 우리의 비극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논쟁이 있는 것 자체가 아직 치유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지닌 역사의식, 세계관을 드러내게 되어있다. 그저 소설일 뿐이야, 영화일 뿐이야, 드라마일 뿐이야 라고 한다면 위선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읽을 것이고, 볼 것이기 때문에 의식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작가가 책임질 일이다.

 

제주에 가면 서명숙이 만들었다는 올레 길을 걷고 싶다. 그녀가 고향에 내려가 치유를 경험한 자연이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을 것 같다.

 

그 시절 내게 가장 큰 위안을 가져다준 건 고생했다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아니라 말없는 자연이었다. 지금은 올레 7코스로 유명한 외돌개 주변의 솔숲은 가장 사랑했던 공간, 오래 머물던 곳이었다.”

(22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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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2-20 20:43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모진 고문끝에 영양실조로 돌아가셨죠 남편분이. 동참하진 못했지만 그 시대룰 살진 않았지만 그래도 감사한 마음 가집니다.

그레이스 2021-12-20 20:45   좋아요 5 | URL

맞아요!

얄라알라 2021-12-20 23:03   좋아요 2 | URL
저는 그레이스님께서 올려주신 리뷰 읽고 바로 ‘서명숙 이사장‘ 검색했습니다. 예전부터 이분의 기사는 접할 기회가 많았고 읽었지만 이런 역사는 알지도 상상도 못했네요,

감사한 마음 가지겠습니다.

그레이스 2021-12-20 23:08   좋아요 2 | URL
저도 집에 있었어도 안 읽고 있다 우연히 듣고 몇시간만에 읽었어요
서명숙님도 당시 모든 분들도 고초가 대단했다는 생각입니다.
그 위에 현재의 시간이 있구요

scott 2021-12-20 20:5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 그 올레길 걸어 봤는데
이런 사연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ㅠ.ㅠ

그레이스 2021-12-20 20:54   좋아요 5 | URL
그러게요
저도...!

청아 2021-12-20 21:3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어제 kbs에서 오래된 영상을 잠시 봤는데요 전두환씨가 방송국에가서 담배피우며 이야기하고 국장?은 옆에서 쭈그리가되어 굽신굽신하더라구요. 말없는 자연이 위안이 되었다는 말에 올레길이 슬프게 떠오릅니다.

그레이스 2021-12-20 21:35   좋아요 4 | URL
저도 올레길을 서명숙씨가 만들었다는 사실을 보고 새롭게 다가왔어요. 슬프기도 했구요
많은 사람들의 치유의 길이 되는데는 누군가의 경험이 있기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새파랑 2021-12-20 22:2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안타까운 이야기네요 ㅠㅠ 올레길의 명칭 유례도 저런 사연이 있군요. 드라마 관련 논쟁이 있는지도 처음 알았네요. 관심을 가지고 지켜 봐야 겠습니다~!

그레이스 2021-12-20 22:52   좋아요 5 | URL
미리 시놉시스가 나왔는데 안기부 미화와 운동권 폄훼 내용이 있다고 하네요

희선 2021-12-22 0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드라마 이야기 조금 봤는데, 그 드라마인지... 그 글 대충 보기만 했군요 역사왜곡이 있다는 말이 있다는 말과 꼭 그렇지 않다는 말도 있었어요 자신만 잘 살기 어려운 시대였다니, 지금은 정치는 아니지만 코로나19로 그런 시대가 됐네요 예전에 싸운 사람이 있어서 지금 같은 세상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희선

그레이스 2021-12-22 06:32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드라마 역사왜곡 논쟁을 보며, 여전히 건드리면 성이 나는 상처를 확인했습니다

han22598 2021-12-29 04: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마..유시민이 추천해서.. 저 이거..몇 년전에 읽었던 것 같은데, 우리나라 70-80년의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제대로 평가 받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요..드라마로 나왔나 보네요..

그레이스 2021-12-29 07:19   좋아요 0 | URL
이 소설이 드라마로 나온게 아니라 민주화 운동을 했던 학생들중 간첩이 있었다는 메시지를 전달받을 수 있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나봐요
그 주인공 이름이 영초였다가 영로로 바뀌었다고...